| 논어집주(論語集注) - 8 - 태백(泰伯) - ① |
1 | 子曰 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 三以天下讓 民無得而稱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태백은 아마도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3번이나 천하를 양보하였으되, 백성들이 칭송할 수조차 없게 하였다.”고 하셨다.
泰伯周大王之長子 至德謂德之至極無以復加者也 三讓謂固遜也 無得而稱 其遜隱微 無迹可見也 蓋大王三子 長泰伯 次仲雍 次季歷 大王之時 商道浸衰 而周日强大 季歷又生子昌有聖德 大王因有翦商之志 而泰伯不從 大王遂欲傳位季歷以及昌 泰伯知之 卽與仲雍 逃之荊蠻 於是大王 乃立季歷 傳國至昌 而三分天下有其二 是爲文王 文王崩 子發立 遂克商而有天下 是爲武王夫以泰伯之德 當商周之際 固足以朝諸侯有天下矣 乃棄不取 而又泯其迹焉 則其德之至極 爲如何哉 蓋其心 卽夷齊扣馬之心 而事之難處有甚焉者 宜夫子之歎息而贊美之也 泰伯不從 事見春秋傳 태백은 주나라 태왕의 큰아들이다. 지극한 덕이란 덕이 지극하여 다시 그 위에 더할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세 번 양보했다는 것은 진실로 겸손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칭송할 수조차 없게 하였다는 것은 그 겸손함이 은미하여 그것을 알아볼 자취도 없다는 것이다. 대개 태왕 세 아들 중 큰아들이 태백이고, 그 다음이 중옹이며, 그 다음이 계력이다. 태왕 때 상나라의 도가 점차 쇠미해져갔고, 주나라는 날로 강대해졌다. 계력은 또한 아들 창을 낳았는데, 성덕이 있었다. 태왕은 이로 인해 상나라를 깎아낼 뜻을 갖게 되었지만, 태백은 이에 따르지 않았다. 태왕은 마침내 계력에게 자리를 전하여 창에게 이르게 하고자 하였다. 태백은 이 사실을 알고 곧 중옹과 더불어 형만의 땅으로 피하여 갔다. 이에 태왕은 마침내 계력을 후계자로 세워 나라를 창에게 전하도록 하였고, 천하의 3분의 2을 갖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문왕이다. 문왕이 죽고 아들 발이 즉위하였는데, 마침내 상나라를 이기고 천하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무왕이다. 무릇 태백의 덕으로써 상나라와 주나라 즈음에 당하였다면 본디 제후에게 조회를 받으면서 천하를 차지하기에 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천하를 버리고 취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자취마저 감추었으니 그렇다면 그 덕의 지극함이 어떠하였겠는가? 아마도 그 마음은 곧 백이숙제가 말고삐를 붙들었던 마음이었을 것이고, 일에 대처하기 어려웠던 것은 그보다 더욱 심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탄식하면서도 그를 찬미하신 것이 마땅하신 것이다. 태백이 따르지 않았다는 일은 춘추전에 드러나 보인다.
朱子曰 古人辭讓以三爲節 一辭爲禮辭 再辭爲固辭 三辭爲終辭 주자가 말하길, “옛사람은 사양함에 있어 세 번을 절도로 삼았는데, 첫 번째 사양을 禮辭라고 하였고, 두 번째 사양을 固辭라고 하였으며, 세 번째 사양을 終辭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問詩云至于大王實始翦商 恐是推本得天下之由如此 朱子曰 若推本說 不應下實始翦商 翦商自是周人說 若無此事 他豈有自誣其祖 左氏分明說 泰伯不從 不知是不從甚事 누군가 묻기를, “시경에 이르길, 태왕에 이르러 실제로 상나라를 치려는 것이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천하를 얻은 사유에 관하여 그 근본을 미루는 것이 이와 같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만약 근본을 미루어서 말한다면, 실제로 상나라를 치려는 것이 시작되었다는 말을 응당 적지 않았어야 한다. 상나라를 친다는 것은 당연히 주나라 사람들이 말한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이 없었다면, 그가 어찌 자기 조상을 무고함이 있겠는가? 좌씨가 분명하게 말하길, 태백이 따르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이게 무슨 일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인지 몰랐겠는가?”라고 하였다. |
2 | 洪氏曰 仲雍之讓一也 何以獨稱泰伯 泰伯當立者也 홍씨가 말하길, “중옹의 사양도 한가지인데, 어째서 유독 태백만을 칭송한 것인가? 태백은 마땅히 즉위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周商之際謂二代交會之間 주상지제란 두 왕조가 서로 모여있는 사이를 말한다.
朱子曰 夷齊諫武王不信便休 泰伯不從大王翦商却是一家內事 與諫武王不同 所以謂之難處 주자가 말하길, “백이숙제가 무왕에게 간언하다 믿어주지 않으면 곧 그치고 마는데, 태백이 태왕을 따라서 상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도리어 한 집안 내의 일이라서, 무왕에게 간언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처신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夷齊處君臣間道不合則去 泰伯處父子之際 不可露形迹 只得不分不明且去 某書謂大王有疾 泰伯採藥不返 疑此時去也 백이숙제는 군신지간에 처해 있었으니 도가 합치하지 않으면 곧 떠나는 것이지만, 태백은 부자지간에 처해 있었으므로 모습과 자취를 드러낼 수가 없었고, 그저 분명하지 않게 장차 떠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떤 책에서 ‘태왕이 병이 생기자 태백은 약초를 캐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였는데, 이때 떠난 것으로 의심된다.
吳越春秋 古公三子(古公周大王之本號 後乃尊爲大王名亶父) 長曰泰伯 次曰仲雍 一名虞仲 少曰季歷 季歷聚大任 生子昌 古公知昌聖 欲傳國以及昌 曰興王業者 其在昌乎 泰伯仲雍望風知指 古公病二人托名採藥于衡山遂之荊蠻(荊者楚舊號 以州言曰 荊 蠻者南夷之名 正義曰 泰伯奔吳所居城在蘇州北常州無錫縣界 梅里村 其城及冢見存而云亡 荊蠻者 楚滅越 其地屬楚 秦滅楚其地屬秦 秦諱楚 故通號吳越之地爲荊 及北人書史加云蠻 勢之然也) 斷髮文身 因其俗爲夷狄之服 示不可用 古公卒 泰伯仲雍歸赴喪畢還荊蠻 國民君事之自號爲句吳(吳言句者夷之發聲 猶言於越耳 吳名始於泰伯明 以前未有吳號) 古公病將卒 令季歷讓國於泰伯而三讓不受 故云泰伯三以天下讓 오월춘추에, 고공의 세 아들(고공은 주태왕의 본래 호칭인데, 나중에 태왕으로 추존되었고, 이름은 단보다) 중 장자는 태백이라 말했고, 그 다음은 중옹이라 말했는데, 일명 우중이라고도 하였으며, 제일 어린 아들은 계력이었다고 한다. 계력은 대임을 아내로 취하여 아들 창을 낳았다. 고공은 창이 성인의 기질이 있음을 알고서, 나라를 전하여 창에게 미치게 하고자 하여 말하길, 왕업을 흥성시키는 것은 창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태백과 중옹은 분위기를 멀리서 보고도 그 취지를 알아차렸다. 고공이 병이 나자, 두 사람은 형산에서 약을 캔다는 명목에 의탁하여 마침내 형만으로 갔다(荊이란 것은 초나라의 옛 호칭인데, 州로 말하자면 荊이라 불렀다. 蠻이란 것은 남쪽 오랑캐의 이름이다. 정의에 이르길, 태백이 오나라로 도망쳐 살았던 성은 소주 북쪽 상주무석현 경계의 매리촌에 있는데, 그 성과 무덤은 보존되었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荊蠻이란 것은 초나라가 월나라를 멸하자 그 땅은 초나라에 속하였고,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하자 그 땅은 진나라에 속하였는데, 진나라가 초나라를 감추고자 하였기 때문에 오월의 땅 통칭하여 荊이라 불렀고, 북쪽 사람들이 역사를 씀에 이르자 다시 蠻이라는 글자를 추가한 것이니, 형세가 그러하였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자르고 몸에 문신을 새겼으며, 그 풍속에 따라 오랑캐의 복식을 하였으니, 이로써 자신을 기용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고공이 죽자, 태백과 중옹은 돌아와 상을 치르고, 마친 후 형만으로 돌아갔다. 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임금으로 섬기자, 스스로 구오(오나라 말로 句라는 것은 오랑캐의 발성인데, 於越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을 뿐이었다. 吳라는 명칭은 태백에게서 시작되었음이 명확하니, 그 이전에는 오라는 호칭이 없었다)라고 호칭하였다. 고공이 병이 나서 장차 죽으려 할 적에, 계력에게 명하여 태백에게 나라를 양보하도록 하였는데, 태백은 세 번 양보하고 받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길, 태백은 세 번이나 천하를 양보하였다고 한 것이다. |
3 | 問泰伯逃必至荊蠻斷髮文身者 蓋不示以不可立則王季之心不安 其位未定 終無以仁天下遂父志而成其遠者大者 泰伯之讓 上以繼大王之志 下以成王季之業 無非爲天下之公而不爲一身之私 其事深遠 民莫能測識而稱之 曰 此意甚好 非惟說得泰伯之心 亦說得王季之心 泰伯之讓 權而不失其正 所以爲時中也 逃父非正 但事須如此必用權然後得中 雖變而不失其正也 누군가 묻기를, “태백이 도망가서 반드시 형만에 이르러 단발을 하고 문신을 한 것은, 아마도 이로써 자기를 왕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왕계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그 지위가 안정되지 않아서, 결국은 천하를 인애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그 원대한 것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백이 사양한 것은 위로는 태왕의 뜻을 잇고, 아래로는 왕계의 대업을 이루는 것으로서, 천하의 公을 위하지 않음이 없었고, 일신의 사사로움을 위하지 않았으니, 그 일이 깊고도 멀어서, 백성 중에 누구도 이를 헤아려서 알고 그를 칭송할 수 있는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 뜻이 대단히 좋다. 단지 태백의 마음을 말할 뿐 아니라, 또한 왕계의 마음까지 말하였다. 태백이 사양한 것은 저울질하면서도 그 올바름을 잃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時中이 된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도망친 것은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일이 반드시 이와 같이 權度를 사용한 연후에 時中을 얻을 수 있었기에, 비록 權變하였지만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王見商政日衰 是以有翦商之志 泰伯惟知君臣之義截然不可犯 是以不從 二者各行其心之所安 聖人未嘗說一邊不是 泰伯之心卽夷齊扣馬之心 天地之商經也 大王之心卽武王孟津之心 古今之通義也 於二者中 須見得道並行而不相悖 乃善 태왕은 상나라의 정치가 날로 쇠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러한 까닭으로 상나라를 치려는 뜻을 품게 되었고, 태백은 오직 군신의 의로움은 절대로 범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았으니, 이런 까닭으로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은 각자 그 마음이 편안한 바를 행하였으니, 성인께서 일찍이 어느 한쪽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태백의 마음은 곧 백이숙제가 말고삐를 잡은 마음이었으니, 천지의 떳떳한 법이었다. 태왕의 마음은 곧 무왕이 孟津을 건넜던 마음이었으니, 고금에 통하는 의로움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서 반드시 道가 병행하되 서로 어긋나지 않아야만 마침내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論語兩稱至德 一爲文王發 是對武王誓師而言 一爲泰伯而發 則是對太王翦商而言 若論其志 則文王固高於武王而泰伯所處又高於文王 若論其事 則泰伯王季文王武王皆處聖人之不得已 而泰伯爲獨全其心表裏無憾也 논어에서 지극한 덕을 두 번 칭송하였는데, 하나는 문왕을 위하여 발언한 것이니, 무왕이 군사들에게 맹세한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또 하나는 泰伯을 위하여 발언한 것이니, 곧 태왕이 상나라를 치고자 한 것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만약 그 뜻을 논한다면, 문왕이 본래 무왕보다 높지만, 泰伯이 처했던 바는 문왕보더 더 높았던 것이다. 만약 그 일을 논한다면, 태백과 왕계, 문왕과 무왕 모두 성인의 부득이한 처지에 처해 있었지만, 태백만이 유독 그 마음을 온전하게 하여 겉과 속이 모두 한스러움이 없었던 것이다.
或問其爲至德 何也 曰 讓之爲德 美矣 至於三 則其讓 誠矣 以天下讓 則其讓 大矣 而又隱晦其迹使民無得而稱焉 則其讓非有爲名之累矣 此其德所以至德而不可加也 曰 大王有立少之意 非禮也 泰伯又探其邪志而成之 至於父死 不赴傷毁髮膚 皆非賢者之事 不合於中庸之德矣 曰 大王之欲立賢子聖孫 爲其道足以濟天下 非有愛憎利欲之私也 是以泰伯去之 不爲狷 王季受之 不爲貪 不赴傷毁 不爲不孝 蓋處君臣父子之變而不失乎中庸 所以爲至德也 누군가 묻기를, “그것이 지극한 덕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사양함이 덕이 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세 번에 이르렀다면 그 사양함이 정성스러운 것이다. 천하를 양보하였다면 그 사양함이 큰 것인데, 다시 그 자취를 숨기고 감추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를 칭송할 수 없도록 하였다면, 그 사양함은 명성을 구하기 위한 얽매임이 있지 아니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덕이 지극한 덕이어서 더 보탤 수가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태왕은 어린 아들을 세우려는 뜻을 가졌으니, 예가 아닙니다. 태백은 또한 그 바르지 못한 뜻을 탐지하였음에도 이를 이루어주었고,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러도 초상에 가지 않았으며 머리카락과 피부를 손상시켰으니, 이 모두 현자의 일이 아니고, 중용의 덕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태왕이 현명한 아들과 성스런 손자를 세우고자 한 것은 그 도가 족히 천하를 구제할만하였기 때문이었지, 애증과 利欲의 사사로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런 까닭으로 태백이 떠난 것은 狷이 되지 않고, 왕계가 받은 것도 탐욕이 되지 않으며, 문상 가지 않고 髮膚를 훼손한 것도 불효가 되지 않는 것이다. 대체로 군신과 부자의 변화에 처하여 중용을 잃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지극한 덕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陳氏曰 泰伯讓國 人得見其迹 其讓天下 人莫知其心 所以聖人表而出之 蓋其處父子兄弟之變而欲全天性之恩 處商周興亡之際而欲全君臣之義 其事類夷齊而又泯其迹也 진씨가 말하길, “태백이 나라를 사양한 것은 사람들이 그 자취를 볼 수 있었지만, 그가 천하를 사양한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께서 그것을 표출한 것이다. 대체로 부자형제의 변에 처하여 천성의 은혜를 온전하게 하고자 하였고, 상나라와 주나라가 흥망하는 즈음에 처하여 군신의 義를 온전히 하고자 하였으니, 그 일은 백이숙제와 비슷하지만 다시 또 그 자취까지 없애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泰伯逃以成父之志 所以上順天命於幾微 而下爲他日開拯民水火之地 非特遜國而實以天下遜也 쌍봉요씨가 말하길, “태백이 도망감으로써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으니, 이 때문에 위로는 기미가 보일 적에 천명을 따랐고, 아래로는 다른 날에 백성을 물과 불에서 구제할 터전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단지 나라를 양보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천하를 양보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泰伯旣不從大王翦商之志 苟不倂與仲弟逃之 則大王無由傳之季歷 不得遂其志矣 今自泰伯與仲雍俱逃 遂傳季歷以及武王而有天下 是周有天下由於泰伯之逃 人但見泰伯之逃而不知其實以天下讓 其讓隱微無迹可見 更涉三世 事旣漫滅 人安得而稱之 必待夫子推原周得天下之由發其潛德之幽光而後 人始知之歟 신안진씨가 말하길, “태백은 이미 상나라를 치겠다는 태왕의 뜻을 따르지 않고자 하였는데, 만약 가운데 동생인 중옹과 함께 도망가지 않았다면, 태왕은 나라를 계력에게 전할 방법이 없어서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태백과 중옹이 함께 도망침으로부터 마침내 계력에게 전하고 다시 무왕에 이르러 천하를 갖게 되었는데, 이는 주나라가 천하를 소유하게 된 것은 태백이 도망침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태백이 도망친 것만 보고서 사실은 천하를 양보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 양보함이 은미하여 알아볼 만한 자취가 없었고, 다시 三世를 건너뛰어 일은 이미 흩어져 사라졌으니, 사람들이 어찌 그를 칭송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공자께서 주나라가 천하를 얻게 된 이유를 근원까지 미루어 그 숨겨진 덕의 가려진 빛을 드러내기를 기다린 연후에 사람들은 비로소 그것을 알았을 것이리라!”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