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45호. 둘레 1,684m. 지정 면적 18만 9764㎡. 모양성 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고창지역이 백제 때 모량부리로 불렸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동쪽으로 진산인 반등산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세 문과 치(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 여섯 군데, 수구문 두 군데, 옹성(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읍성이 언제 축조되었는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고, ≪고창읍지≫나 ≪동국여지승람≫에 단순히 둘레가 3,008척, 높이가 12척이고 성안에 삼지사천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고, 1453년(단종 1)에 축조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의 제주시·화순시·나주시·계유소축송지정’이라는 각명으로 미루어 볼 때, 계유년에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서 축성을 위하여 역부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유년이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성벽의 축성법으로 보아 1573년(선조 6)으로 추측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홍예문과 초루( 성 위에 세운 누각)를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팬 누문이 있는데 이것은 서울의 돈화문·홍화문 또는 평양의 고구려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는 것으로,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76년의 발굴 결과 서문지와 동문지가 확인되었으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재현시켜 놓았다. 성벽을 쌓은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굄돌을 넣는 방식으로 쌓았으나, 그 가운데는 초석·당간지주 같은 것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그러나 미석(성의 맨 아래에 성벽 바깥으로 내밀게 깐 얇은 돌) 이하의 성가퀴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읍성의 존재는 중국·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형태로서 행정적·군사적 목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시설이었다.
특히, 이 성은 여자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이는 한 해의 재앙·질병을 가시게 하는 기양의식(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이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역광의 사진들
세상과의 눈 맞춤 죽순~~
누구에게나 살아 보고 싶은 곳이 있지요.
내가 한동안 살아보고 싶은 곳...
고창읍성 둘레길엔 영산홍이 절정~~
지난 토요일 여름 같은 더운 날씨
땀을 흘리며 걸은 고창읍성의 둘레길 매력에 흠뻑 빠지다.
-절벽에서 사철 푸른 송악-
송악은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늘푸른 덩굴식물로 줄기에서 뿌리가 나와 암석
또는 다른 나무 위에 붙어 자라고 잎은 광택이 있는 진한 녹색이고 꽃은 10월에 녹색으로 피며,
열매는 다음해 5월에 둥글고 검게 익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남해안 및 섬지방의 숲속에서 주로 자란다고 하네요
고창 삼인리 송악은 선운사 입구 개울 건너편 절벽 아래쪽에 뿌리를 박고 절벽을 온통 뒤덮고 올라가면서
자라고 있으며,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크기로 보아 적어도 수 백년은 되었으리라고 하네요.
고창 삼인리 송악은 그 크기가 보기 드물 정도로 크고, 고창 삼인리는 송악이 내륙에서 자랄 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