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매일 아침 루쉰鲁迅의 작품, 그의 소설을 읽는 유익이 크다. 구시대의 모순과 잘못된 관행에 물들지 않고, 날카로운 지성과 선구자적인 양심으로 중국 인민을 깨우고자 했던 열정, 자국민을 향한 애정과 긍휼을 절절히 느낀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를 추앙하게 된다.
중국어 원서로 매일 한 장 정도씩 읽어간다. 《아큐정전阿Q正传》, 《광인일기逛人日记》, 《풍파风波》, 《고향故乡》, 《콩이지孔乙己》 등을 읽었고, 오늘은 《축복祝福》을 완독했다. 책을 덮으면서 가슴이 아렸다. 주인공 샹린사오祥林嫂에 대한 연민, 그리고 그녀를 그렇게 만든 당시의 관례적 전통과 사람들, 결정적으로 샹린사오祥林嫂를 죽음으로 몰았던 인물, 료우마柳妈에 대한 질책이 일었다. 착잡했다. 무엇보다 답답했던 것은 종이 속에 실존하는 인물들이 지금도 여전히 편재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도 얼마든지 그런 인물들 중에 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내 양심이 증거 하기 때문이다.
《祝福》은 루쩐鲁镇이라는 마을에서 사는 샹린사오라는 기구한 여인의 운명을 다룬다. 샹린사오는 루쩐의 한 양반가에 일꾼이 된다. 그녀는 힘이 세고 법도를 알고, 매사 일 머리가 있어 장정 몇 명이 할 일을 혼자서 해치우는 그야말로 일꾼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인재다. 한창 주인과 동료들의 인정을 받으며 그곳에서의 생활에 안정을 찾아갈 무렵, 낯선 남자들이 마을을 찾아와 그녀를 납치한다. 그녀의 전 남편의 본가에서 시킨 일이다. 그녀는 과부였고 아마도 시댁에서 도망쳤던가 보다. 억지로 시댁으로 끌려온 그녀는 다시 시모의 거래에 의해 재가再嫁를 한다. 과부가 된 며느리를 산골로 다시 시집을 보낸 것이다. 시집을 보냈다 함은 돈을 받고 팔았다 함이다. 그것도 여자가 귀한 산골로 보내 평균 이상의 돈을 챙긴다. 당시의 여자란 그저 재화일 뿐이었다. 일하는 재화. 과부가 된 며느리를 팔아 둘째 아들의 여자를 들인다. 시모는 둘째 며느리를 사오고도 과부, 큰 며느리를 판 돈이 남았다고 좋아한다.
감사하게도 새로 시집 간 곳에서 샹린사오는 잘 적응한다. 워낙 일손이 야무지고 부지런한 여인이다.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건장하던 남편이 갑자기 전염병으로 죽는다. 그렇더라도 아들 하나를 의지하며 열심히 살아간다. 아들은 그녀의 삶의 끈이었건만 아들마저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먹힌다. 이 모든 일이 이삼 년 새 일어난다. 아들이 죽었으니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한다며, 두 번째 시댁에서 집을 팔아버린다. 오갈 데 없는 그녀는 다시 전에 일하던 곳으로 돌아와 일자리를 구걸한다. 그녀의 일솜씨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다시 고용하기에는 꺼림직 하다.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긴 하지만, 샹린사오 어느 새 부정 탄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총명하고 부지런한, 재화가치가 높은 일꾼이 아니다. 불행이 육신이 되어 온 존재다. 저주의 화신이라는 뜻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이미 살 힘을 읽은 그녀는 더욱 고립되어 정신을 잃은 채 살아간다.
어느 날 료우마는 기력을 잃은 샹린사오를 보다 못해 충고를 한다. “再一强,或者索性撞一个死,就好了。现在呢,你和你的第二个男人过活不到两年,倒落了一件大罪名。你想,你将来到阴司去,那两个死鬼的男人还要争,你给了谁好呢?阎罗大王只好把你锔开来,分给他们。”(다시 힘을 강해지던지, 차라리 죽음과 맞닥뜨리는 것이 좋겠다. 지금, 너는 두 번째 남편과 보낸 생활이 채 2년이 되지 않았지만 도리어 큰 죄를 얻고 말았다.생각해 봐라, 네가 나중에 저 세상에 갔을 때, 죽은 두 남편 귀신이 서로 싸울 건데, 너는 누구에게 가는 것이 좋겠냐? 염라대왕이 너를 톱질해서 그들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다)
샹린사오는 기겁을 한다. 충고대로 절에 가서 죄를 씻을 방법을 강구하고 종살이로 번 돈을 모두 시주하여 절의 문지방 하나를 구입한다. 문지방은 자신을 대신한 죄값이다. 문지방이 사람들에게 밟힐 때마다 그것은 샹린사오가 밟혀야 할 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나마 그녀는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다시 일할 곳으로 돌아오지만 그녀를 향한 냉랭함은 여전하다. 축복을 얻는다는 제사 준비에 다시는 참여할 수 없다. 그녀는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다. 결국 거지로 구걸하다 생을 마감한다. 끝까지 죄를 씻지 못한 마음을 안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소설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旧历的年底毕竟最像年底,村镇上不必说,就在天空中也显出将到新年的气象来。灰白色的沉重的晚云中间时时发出闪光,接着一声钝响,是送灶的爆竹;近处燃放的可就更强烈了,震耳的大音还没有息,空气里已经散漫了幽微的火药香。(음력 연말이 결국은 가장 연말 같다.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하늘에는 연말의 기운이 가득하다. 회백색의 무거운 저녁 구름 사이로 시시각각 섬광이 반짝거리고, 이어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는 복을 비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다 ; 근처에서 터지는 불꽃은 더욱 강렬하고, 귓전을 울리는 큰 소리는 쉼이 없다. 공기는 이미 화약 향으로 가득 찼다.)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다. 중국에서 세 번의 새해를 맞이하면서 매번 어김없이 하늘을 장식하는 불꽃과 밤을 지나고 새벽까지 끊이지 않는 둔탁한 폭죽의 소리를 들었다. 중국인들에게 이 행사는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 줄 의미심장한 제사의식 같은 것이다. 이른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터지는 폭죽들, 그것의 불꽃들이 하늘을 알알이 수놓으며 가득 찰 때, 중국 인민들의 복에 대한 염원을 실사판으로 시청하는 듯하다. 그들의 복에 대한 열망과 소망이 얼마나 강렬한지 말이다.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이렇듯 복을 비는 극치의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의미심장하다. 공교롭게도 이 장면은 소설의 마지막에도 똑같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기구한 운명의 고통의 전후에 축복의 향연이 벌어진다는 말이다. 집단적 제사 의식의 프레임 안에서 샹린사오의 고통이 얼마나 철저히 소외되었는지 그대로 실감 한다. 그들의 축복을 비는 의식이 얼마나 끔찍스럽게 탐욕적인지를.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소환된다. “그녀는 아히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후에, 그의 죄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의 부재와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의 결여였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녀의 견해를 단순화 해보면 의인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며, 죄인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112p)”
몇 년 전이다. 목에 종양이 생겨서 수술 차 입원했다가 사지 마비 상태로 3년을 투병하다 돌아가신 이웃이 있다. 가벼운 양성인 줄 알았다가 이미 한참이 진행된 급성 악성 종양이었던 것이다. 고인의 아내와 이웃으로 가깝게 지냈기에 나도 충격이 컸다. 같이 울고 기도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고통의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며, 나는 하나님께 묻고 물었다. 왜 이렇게 두십니까, 왜 이런 극심한 고통을 허락하십니까. 그 고통에 대하여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럴싸한 답이 있다 하더라도 당장 내 몸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고통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함부로 말할 수 없었고 현명한 답이라고 내놓을 것도 없었다. 다만 그 절대절명의 시기에 의지할 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면서 매 순간을 견디던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주위에 암환자는 어찌 그리 많던지, 남편이 암으로 고생하면서 함께 고통을 감내하던 아내는 암환자를 만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들의 고통이 그대로 자신의 고통으로 투영되었기 때문일 게다. 알아버린 것이다. 고통의 쓰라림을.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아픈 것임을. 고통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고통에 반응하는 공감은 한없이 커졌다. 공감은 사랑이 퍼져가는 일이다.
기독교 신학자 몰트만의 견해다. “하나님이 기꺼이 고난을 선택한 이유는 고난 받는 인간의 운명에 참여하려는 사랑의 본성 때문이며, 고난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할 능력도 없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의 의미에 대해 훈계하는 대신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는 분이며, 자신이 당한 고통으로 인해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가장 강력하게 공감할 능력을 지닌 분이라는 뜻이다.(<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113p 발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잘 설명되어 있는 글귀다. 나는 실제로 내 삶이 고통스러웠을 때, 하나님이 그 고통에 동참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큰 위로를 받았다. 실패로 인한 여러 번의 고통이 있었지만, 가장 최근에 경험한 것은 갱년기로 인한 우울증이다. 썰물처럼 밀려오는 허무감이 내 인생을 흔들었다. 깊은 밤에 홀로 꺼이 꺼이 울부짖었다. 마치 미친 것처럼 악다구를 썼다.“어쩌라는 것입니까. 내가 나를 어찌하지 못하겠습니다”방 안의 모든 공기가 나의 울부짖음에 짓눌렸다. 고통으로 가득 찼다. 고통의 압력이 내 가슴을 찢어버릴 것 같은 밤이었다. 그 밤에 어떤 변화는 없었다. 극적인 주님의 음성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동 이후로 알게 되었다. 내 속에서 나와 함께 울부짖는 주님의 마음을. 주님이 가장 멀리 있다고 느꼈던 그 때에 그분께서 가장 가까이 계심을 깨달았다. 주님의 부재는 가장 가까운 그분의 현존이었다.
때마침 오늘 큐티 말씀도 《祝福》과 일맥상통한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23:23)”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은 어찌하여 그토록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철저히 드리는 데는 열심이고 철저했을까?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그들의 열심이 오늘 루쉰의 소설, 축복에 등장하는 그 기복의 성찬盛餐과 오버랩 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지켰던 법은 도리어 그들의 눈을 가리는 안대가 되었다. 그들은 이웃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생명이 되지 못했다. 료마의 충고가 샹린사오를 죽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처럼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데 일조할 뿐이다. 물론 료마의 충고는 샹린사오를 위한답시고 한 충고일 게다. 너는 죄를 지었으니, 절에 시주를 하여 너를 대신하여 죄를 갚아줄 대체물을 찾으라고. 그렇게 저 세상의 저주를 피하라 한다. 료마의 충고대로 하고도 샹린사오는 마을 사람들의 소외를 벗어나지 못했다. 저주의 화신이라는 주홍글씨는 여전했다. 그녀는 저 세상의 죄를 씻을 것이 아니라, 현세상의 왜곡된 시선에 맞서야 했다. 샹린사오가 겪었던 고통은 과연 그녀의 죄 때문인가. 고통은 우리의 의지대로 피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도리어 고통은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음이다.
어쩌면 가장 영적인 것은 이웃의 고통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 함께 울어줄 수 있는 마음, 함께 있어주고자 하는 마음, 누구도 자의로 피할 수 없는 고해苦海라는 인생의 운명에서 고통은 서로를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연대의 끈이 될 수 있음이다. 가장 확실한 축복의 제사인 것이다.
첫댓글 주제가 조금 무겁게 느껴집니다. 저번 주에도 루쉰의 고통에 대한 정의에 대한 글을 쓰셨는데, 그 의미를 이번 글의 '축복'을 통해 또 한 번 상기합니다. 이웃의 부재가 때로는 모든이에게 고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감정에 민감할수록 왜 그런가하며 개인적으로 다소 공감에 둔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그렇게 행동한 것이 모두 무색해지는 순간입니다. 이어진 연대라는 것이 고통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 또한 축복으로 해석될 수 있겠네요. 선영님께서 겪으신 고통에 배움을 두고자 화답합니다. 축복으로 이어진 연대라면, 모두가 되어 이어나가야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