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71]우리 국민은 얼마나 위대하던가?
지난 토요일 오전, 부여 신동엽문학관을 관람한 후 아산으로 향했다. 지인선배 부부가 신정호 부근 맛집(5월의 꽃수레)에서 깔끔한 한정식을 대접하겠다며 반색을 했다. 곡교천 은행나무길을 처음 걸어보는데, 장관이다. 내년 단풍철에는 아내와 손잡고 꼭 걸어보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을 했다. 이윽고, 아산 하면 현충사, 현충사 하면 충무공 이순신. 어찌 둘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낡은 앨범을 들춰보니, 1969년 전주 동국민핵교 6학년 수학여행 때 온 후 처음이다. 무슨 기억이 나랴?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유일한 알리바이. ‘민족의 성웅聖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지聖地이거늘, 해도 너무 했다. 내가 국민의 ‘자격’이 있기나 한 것인가.
전시된 자료들을 보고 ‘경악驚愕’했다. 지금껏 충무공을 내세우고 선양宣揚을 하며 유독 ‘충忠’을 강조한 것이 박정희 18년 군사독재의 산물로써 통치수단의 하나라고 생각한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1931년 5월 13일자 ‘민족지民族紙’ 동아일보에 실린 <2천원에 경매당한 이충무공의 묘소 위토>라는 기사와 다음날 당시 논설위원이었던 위당 정인보가 쓴 <민족적 수치>라는 사설에 분격한 우리 민중民衆이 너나없이 들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내용인즉슨, 종손이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位土(제사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토지)를 저당잡혀 1300원을 빌렸는데, 그 이자가 쌓여 2372원을 갚을 길이 없자 은행이 경매에 부쳤다는 것이다.
기사와 사설이 나간 이후 다음해인 1932년 3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2만여명과 40여개의 단체에서 성금 모금에 동참했다. 놀라지 마시라! 무려 1만6천21원 30전이 모였다. 전시관에는 그때 동아일보 사장 앞으로 쓴 많은 편지들을 영인影印해 걸어놓았다. 기생을 비롯하여 식당 종업원, 소학교 학생 등이 묘소와 위토가 날라가기 일보 직전인데 "그럴 수는 없다"며 한 푼 한 푼 사연이 깊은, 눈물 젖은 성금들을 보내왔다. 불과 열흘만인 5월 23일, 그 빚을 갚아버리고, 7월 26일 남은 성금으로 정인보, 한용운 등이 <이충무공유적보전회>를 설립하여 현충사顯忠祠(대원군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돼 있었다) 중건에 나섰다. 그 결과, 다음해 6월 5일 3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충사 낙성식과 충무공 영정봉안식을 개최했다는 것이다.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왜 이제껏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일까? 더구나 나는 그 신문에서 20년간 일을 한 명색이 기자가 아니었던가. ‘고사리손이 보내온 4원 30전’ 등 편지 사연 사연마다 차마 눈물없이는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부끄러운 한편으로 자랑스럽기도 했다. 1974년말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해 벌어진 ‘백지광고白紙廣告’에 수없이 쏟아진 격려광고사건(넉 달간 9223건 1억6백만원 해당)과 1998년 외환위기로 닥친 IMF사태때 ‘금모으기 운동’이 떠올랐다(석 달간 351만명이 참여, 227t의 금이 모였다). 멀리는 1907년 일제에 진 빚(1300만원. 대한제국의 1년 예산에 해당)을 갚자고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이 좋은 예일 터, 그 기록물 2472건이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충무공에 진 엄청난 ‘역사적 빚’을,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결코 그 은혜를 잊지 않은 우리 민중들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구해 낸 것이다.
아아-, 그런 큰 국민운동을 벌였던 동아일보가 오늘날 왜 이러는 것일까? '기레기(기자쓰레기)'들의 집합소? 속상하다못해 너무나 화가 난다. 이제 ‘조중동’이라는 고유명사로 일컬어지는 유력 일간신문들의 저 ‘행태’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 D일보 기자 출신이라는 말을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현실이 슬프다. 그래도 한때 청춘을 불살랐던 곳인데. 흑흑.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오는 말은 맞는가? 맞지 않은가? 누군가 응답해주면 좋겠다.
뒤늦게나마 현충사 와보기를 정말 잘했다. 일곱 살 손자가 ‘이순신 위인전’을 읽고 거북선 속에 들어가보고 싶다며 제 아빠에게 통영을 가자고 졸랐다고 한다. 하여, 통영은 내년 여름방학때 가고, 그보다 아산 현충사를 먼저 가보라 했는데, 지난주 다녀갔다고 한다. 이제 손자를 만나면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있게 돼 더욱 좋았다.
얘야, 충무공이 쓰던 칼은 보았니? 거기에 무어라고 써있는지 아니? 묘소는 지금은 참배를 못한다고 하니 내년 봄날에 이 하래비랑 같이 절하자, 7년 동안 전쟁을 하며 일기를 쓴 게 난중일기란다, 이순신장군은 영국의 넬슨 해군제독보다 몇 배 더 훌륭하고 뛰어난 장군이었단다, 넬슨은 전세계 바다를 제패한 영웅이란다. 죽는 순간에도‘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며 살신성인殺身成仁한 충무공 할아버지에게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겠니? 손자에게 충무공에 댓해 들려주고 싶은 말이 벌써부터 입에서 맴돈다.
먼저, 거북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말해 주리라. 조선 임금중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못지 않게 애민정신에 투철한 정조대왕이 규장각 각신 윤행임에게 『이충무공 전서』를 편찬하라는 지시를 남겼단다. 으뜸 호학군주好學君主였던 정조(이산이 아닌 이성)가 가장 존경한 선조가 충무공 이순신과 충민공 임경업장군이었다. 정조는 실제로 충무공의 신도문을 직접 짓기도 했다. 그 책에 처음으로 거북선 그림(도설圖說)이 두 장 있어 오늘날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은 거북선을 복원할 수 있었고, 광화문광장 동상 앞에 만들어 놓은 거다. 7년간의 일기를 처음으로 <난중일기>라는 이름으로 한 책에 묶었단다. 일기에는 당시의 전쟁 상황과 심정 변화 등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물론 모두 어려운 한문이어서 번역본이 아니면 우리는 도저히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단다. 한자 흘림체인 초서로 썼고 13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이다. 유네스코에서는 2013년 이 일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난중일기와 충무공의 서간첩 그리고 임진장초를 묶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단다. 현충사관리소에서 6년간 근무하며 이순신을 공부한 김대현이 쓴 『이충무공전서이야기』(2015년 한국고전번역원 발행)라는 책을 언젠가 읽을 때가 있겠지만, 저자는 윤행임의 빙의憑依가 되어 쉽게 풀어 쓴 아주 유익한 책이란다. 오늘은 이순신 장군이 지은 시 한 수 들려주마.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한산섬은 알겠지? 한산대첩을 한 한산도 바다이고, 수루戍樓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려 만든 전망대같은 정자, 일성호가는 한 곡조의 피리소리, 애는 창자라는 뜻이다. 한번 큰 소리로 낭송해 보며 엊그제 다녀온 현충사를 떠올려 보지 않겠니?
첫댓글 역사를 알면 알수록 점점 참담한 심정입니다.
지금 이대로라면우리의 후손들은 참역사를 알지 못하고 죽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역사바로찾기는 일반백성이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온 국민이 다 역사광복군으로 나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