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에 건네받은 나라의 운명, 3년간의 대리청정, 그리고 급작스러운 죽음.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 효명!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 이곳 지하 수장고에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한 청년의 유품이 보관되어있다.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
한국전쟁 중 어진의 절반이 불타버려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할아버지 정조를 닮아 이마가 반듯하고 눈은 용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4살 되던 해 왕세자로 책봉된 효명세자는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3년간 대리청정을 했던 실질적인 국왕, 하지만 그는 스물 두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는 대리청정과 함께 춤에 빠져들었다.
그에게 춤은 세도 정치를 견제하면서도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다.
춤을 통해 정치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
이 이야기는 그의 대리청정 3년간의 기록이다.
효명은 조선의 문화를 꽃피우다
19살 어린 나이로 아버지 순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효명은 국왕에 준하는 엄청난 정무를 맡고 있었지만 춤에 대한 관심을 놓지를 않았다.
무엇이 그를 춤의 세계에 빠져들게 했을까?
그의 춤에 대한 사랑은 의궤에 잘 담겨져 있다.
효명은 다음해에 있을 순조 30년과 보령 40세를 맞아 잔치를 계획하고 순조에게 허락을 구한다.
조선 왕조에 재위 30년을 채운 임금은 세종과 선조, 숙종, 영조, 순조 등 다섯명에 불과할 정도로 드문 경사였지만,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순조에게는 당황스런 제안이었다.
효명은 길일을 잡아 잔치날을 정하고 대신들의 업무 분장을 챙기는 등 잔치의 전 과정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잔치때 무슨 춤을 출 것인지 무용의 종류와 순서 역시 직접 결정했는데여기엔 자신이 직접 창착한 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연의 기획에서 무대 연출까지 효명은 진찬의 총감독이었다.
춤이 결정되었으니 춤꾼을 모아야 했다.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은 6개월에 한 번꼴로 잔치를 벌인다.
그리고 그때마다 자신이 직접 챙겼다.
유교 국가에서 예악을 바르게 하는 것은 국가의 기강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세종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서, 예법을 정리하고, 우리 음악인 아악을 집대성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효명에게는 세종 못지 않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외척들의 세도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한양의 안동 김씨 세도가에는 연일 벼슬을 청탁하려 오는 이들로 북적였다.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 시인이 이를 비꼬아 시를 지었다.
순조가 효명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것은
당시 순조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세도 정치에 상당히 포위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을 뚫어보고자
상당히 능력을 갖추고 과감성이 있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정국 돌파를 하게 하고
또 그것이 왕이 되어서는 훨씬 강한 왕권을 구축하게 하는 그런 의도와 메세지로써 대리청정을 하게 했다고 판단이 된다.
쇠잔해가는 조선의 국운이 19살 청년의 어깨위에 얹어있었다.
대리청정 한 달째, 효명은 장악원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효명은 외척의 세도 정치를 향해 칼을 들이댄다.
창덕궁 후원에는 효명세자와 관계된 건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한 건물이 어린 효명이 순조에게 청해 지었다는 공부방 기오헌(寄傲軒)이다.
환재(桓齋) 박규수, 그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근대 개화 사상의 선구자가 되는 인물이다.
두 살 차이인 두 사람은 독서와 토론을 즐겼는데, 이 과정에서 효명은 박규수의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날,
유성이 남방의 하늘가로 떨어졌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날밤 효명은 한 달전부터 앓던 호흡기 질환 끝에 한사발이나 되는 피를 쏟았다.
어느날 갑자기, 불과 몇 일이나, 불과 한 달 사이, 이런 식으로 건강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정치적 갈등이 해소되면서
노론의 집권이 계속 되기 때문에 '독살설'의혹이 생긴다.
대개 독살은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물증이 안 남는 경우가 많다.
정조나 효명세자 같은 경우는 의약 처방을 할 때 자기 자신이 직접 개입을 함으로써 독살을 막고자 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정조도 그렇고, 효명세자도 그렇고, 의혹속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춤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정치가이자 예술가였던 효명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효명이 살다간 19세기초는 전 세계가 산업혁명의 격랑에 휩쓸리기 시작한 때였다.
이웃나라 일본은 이런 세계사적인 흐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기 조선은 무력화된 왕권과 부패한 관료 사회를 바로잡고 새로운 사회를 꿈꿨던 왕세자 효명이 있었다.
3여 년의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력과 예술적 상상력으로 국정을 장악했던 효명세자였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효명이 급서하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