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0
12월15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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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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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JnH8Ow3jbvg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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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주변이 어두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을 손에 잡힐 듯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견디기 힘든 일, 가장 가슴 미어지고 슬픈 일 한 가지는 그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돌릴 때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하느님도 그런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활활 타오르는 뜨거운 마음과 사랑을 지니신 분. 그래서 우리가 당신이 아니라 다른 대상을 향해 눈길을 돌릴 때면 불타는 질투심으로 분노하시는 분.
우리가 당신을 외면할 때, 우리가 당신에게서 등을 돌릴 때, 우리가 당신을 두고 멀리멀리 떠나갈 때, 너무 괴로운 나머지 식음조차 전폐하시는 분, 배신감에 온몸을 부들부들 떠시는 분.
그러나 이내 우리를 향한 분노와 적개심을 푸시고, 다시 한번 간절히 우리의 돌아섬을 기다리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바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이사야서 54장 7~8절)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의 가련함과 나약함, 우리의 허전함과 쓸쓸함을 못견뎌 하시는 분입니다. 어떻게서든 우리의 기를 살려주시고, 우리 얼굴에 미소를 짓게 만드시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어쩌면 성탄은 우리 인간을 향한 그런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한 은혜로운 사건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분들이 마치 길고 긴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는 듯한 느낌이랍니다. 성탄이 가까이 다가오지만, 많은 사람들이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습니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우리는 더 강렬한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짙은 암흑 속을 걷는 오늘 우리에게 순교자 에디트 슈타인 수녀님의 성탄 메시지는 큰 위로와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 주변이 어두워지면 질수록 우리는 위로부터의 빛에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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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sdTNZ8L1_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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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세례란? 나를 향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성령 세례 이전에 이미 요한의 세례에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요한 7,29-30)
이 말씀에 따르면 요한의 세례는 곧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뜻’이라고 번역한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리스어로 ‘불레’라는 이 단어는 “계획, 의도, 목적”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바라시는 뜻이 아닌 ‘이전에’ 세상을 향한, 혹은 나를 향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이 곧 세례자 요한의 세례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오면 첫 피정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를 생각나는 것부터 쭉 써보라고 합니다. 저는 왜 그런 것을 쓰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첫 기억부터 쭉 쓰면서 깨달은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처음부터 부르고 계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사제가 되기로 한 가장 중요한 책이 하.사.시.였다고는 하지만, 사실 저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부러웠습니다. 그 부러움에 사제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심하게 된 이유는 저의 모든 판단의 기준은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도 밖이 더 행복하게 보이면 바로 나가자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하면서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란 선택의 기준은 바로 저의 첫 기억인 할머니의 돌아가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처음부터 행복을 찾게 하시고 그 행복을 통해 제가 사제가 되도록 섭리하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예정설’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따르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라고 나옵니다. 하느님의 계획을 인간이 물리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면 나의 뜻보다는 하느님의 계획이 더 행복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만들어진 이, 곧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의로우신 분이심을, 항상 옳은 분이심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이승복 박사는 미국으로 유학 가서 체조선수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지만 척추 손상으로 올림픽 금메달의 꿈은 물론 손가락도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도 다 하느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당신을 좋은 일에 쓰시려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는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는 그 말을 믿었고 최고의 재활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체조선수의 꿈은 딸이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창조자는 항상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듭니다. 이 의도가 ‘불레’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그 안에도 하느님의 의도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하늘과 땅은 두 상반되는 극과 극을 상징하는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이시라면 인간은 땅입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9)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의 벌입니다. 만약 죄를 짓지 않았다면 먼지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땅이 어떻게 하늘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에 순종하면 됩니다.
인간의 몸 안에 산소가 없으면 인간은 죽습니다. 그 산소는 하늘의 것입니다. 인간은 공기를 마시며 그 공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땅이 하늘의 것을 받아들이고 하늘 안에 머물면 땅도 하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된 여자의 몸에서는 난자가 만들어집니다. 그 난자는 여자의 몸 밖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짧은 한 달의 주기를 끝으로 죽고 맙니다. 난자가 더 오래 사는 법은 밖에서 자신을 초대하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자입니다. 정자를 받아들인 난자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여자의 몸 밖에서 살게 됩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살게 됩니다. 땅과 하늘이 하나가 되는 방식은 다 이렇습니다.
성자께서는 하늘에 속한 분이시지만 직접 땅의 인간이 되셔서 어떻게 하늘의 인간이 될 수 있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보여 주어야 인간이 따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말씀을 당신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39; 마르 14,36; 루카 22,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도 하늘에 아드님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심으로써 땅의 육체를 지닌 인간도 하늘에 살 수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원리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하늘에 사시고 인간은 땅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하늘은 남자로 땅은 여자로 봅니다. 신약성경에 와서는 그리스도가 신랑으로, 교회가 신부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신 분으로서 하늘로 들어갈 수 있는 하늘의 말씀을 지니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요한 1,12)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은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어린양과 혼인하게 됩니다(묵시 21,1: 9-10 참조). 교회는 진정 “흠 없는 어린양의 흠 없는 신부”(796항)입니다.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신랑이라 부르고 몸으로서 자신을 신부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796항 참조)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의 혼인이 완성되고 그때가 창조의 마지막 시간이 될 것입니다.(묵시 21장 참조)
‘하늘과 땅’의 창조로 시작된 역사는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의 결합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이 주님 창조의 계획입니다. 다만 하늘에서 오는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만이 ‘하늘에 속한 땅’이 됩니다.
하느님은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부터 흙으로 된 모든 인간을 하늘에 속하게 하시기 위해 계획하셨습니다. 그 계획은 분명 하늘의 씨,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순종하는 일로 성취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인간의 구원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주님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기들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행동으로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가치를 두는 일이 하느님을 의롭지 않은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드신 분은 만든 것에 책임을 지십니다. 자녀가 되는 것이 자녀의 행위에 달리지 않았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의 계획에 따름이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이고 생명을 지속하는 길임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요한의 세례를 받음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인식하고 창조자의 계획이 있음을 믿고 매 순간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물으며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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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학교에 다니면서 늘 부담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주시는 숙제도 있지만 가장 큰 부담은 ‘시험’입니다. 시험은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습니다. 사제가 강론만 없으면 지낼 만 하다는 농담이 있듯이, 시험이 없으면 학교에 다닐 만 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이 없으면 기강이 해이해지고, 전투에서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학생에게 시험은 군인에게 훈련과 같습니다. 시험은 그동안 배운 것들을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확인하는 방법입니다. 물론 강론은 사제에게 주어진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사제는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좋은 강론은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을 보여 줍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줍니다. 나약해진 이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분노한 이들에게 평화를 줍니다. 죄를 지은 이들은 용서를 청할 수 있도록 회개의 기회를 줍니다.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는 자비의 마음을 줍니다.
오늘은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에 대해서 중간 점검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탄생을 준비하는지, 대림시기 주일의 전례는 어떤 의미를 지지고 있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주님의 탄생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합당한 방법으로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대림은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 제1주일은 ‘깨어 있음’을 전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10처녀의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깨어 있는 것입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별을 보고 예수님께 경배드리러 왔던 동방박사들은 깨어 있었습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축복했던 시메온과 한나도 깨어 있었습니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듯이 깨어 있는 사람이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습니다.
대림 제2주일은 ‘회개’를 이야기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러 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세리에게, 군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였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도 중요하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도 더 좋아한다고 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회개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대림 제3 주일은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언제가 감사하십시오.’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의 웃음은 웃음이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나의 분노도 분노가 되어 나에게 돌아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른다. 사막에 꽃이 핀다. 사자가 어린이와 함께 뛰논다.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걷는다.” 신앙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기쁨이 아닙니다. 그런 기쁨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기쁨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노아의 물이 다시는 땅에 범람하지 않으리라고 내가 맹세하였듯이 너에게 분노를 터뜨리지도 너를 꾸짖지도 않겠다고 내가 맹세한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고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가엾이 여기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탄생을 정성껏 준비한다면,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심을 깨어서 기다린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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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24-30: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신 다음에 요한을 칭찬하신다. 사람들은 요한을 보고 그의 말을 들으려 광야로 몰려갔다.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4절) 물으신다. 그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광야에 나간 것은 아니었다. 주님은 세상을 불모지 광야로 비유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이 보러 간 사람은 바로 심지가 굳은 요한 세례자였다. 이 요한을 예수께서는 칭찬하신다. “예언자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26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28절) 하신다. 어떻게 요한은 모든 예언자보다 큰 인물일 수 있을까? 예수님도 예언자이심을 우리가 알고 있다.
주님은 모세가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신명 18, 15.18)이라 말하고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사도 3,23)이라고 한 그 예언자보다 위대하신 분이시다. 여기서 주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셨고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시다. 요한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하여간 그들이 보러 나간 것은 예언자이며 성인이다.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분이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요한 1,29)라고 한 분이다. 그분은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해 그분에 앞서 올 분이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28절) 어째서 그런가? 어떤 점에서 그런가? 세례자 요한은 그에 앞서 태어난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여자에게서 태어났지만,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더는 여인의 자식으로 불리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라 불리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녀와 여인의 자식의 차이이다. 지금 내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나의 위치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얼마나 나의 삶 속에 실천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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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집니다.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라는 시간의 표현은 어제 복음과 직접 연결됨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의 중심 내용은 당신을 의심하였던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마태 11,2-11도 참조)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이면서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세례자 요한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방법으로 평가하십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말라키 예언서 3장 1절을 인용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을 주님의 길을 준비하고자 파견된 사자이자 다시 돌아온 엘리야로 소개하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세례자 요한의 인간적 탁월함을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엇갈렸습니다.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까지도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의 의로움을 인정하였던 반면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 차지하는 세례자 요한의 위치와 구원 목적의 완성을 위한 그의 역할을 설명하시며 그의 가르침에 따라 회개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관점에서 회개하지 않는, 곧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살아가는 이들은 ‘독사의 자손’입니다.(루카 3,7 참조)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면 어떨까요? 그의 가르침을 듣고 회개의 열매를 맺을 때 ‘오실 분’께서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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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12월 15일의 복음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안 되고,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묵상해야 할 말씀입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높이 평가하는 말씀을 하신 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의심한 것은 아니라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말씀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이지만, 사실은 당신 자신의 신원과 사명을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오늘날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낸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증언한 사람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4)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되고, 각자 한 사람의 사도가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온 삶’으로.
5)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 또 인생 전부를 걸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인생 전체가 신앙인답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루카 7,24-25)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라는 말씀은,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잘 먹고 잘사는 것만 바라느냐?”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그런 것이라면, 종교도 신앙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만 바라면서 사는 것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사는 것이고, ‘좁은 문’을 향해 나 있는 길을 버리고 넓고 편한 길과 ‘넓은 문’을 선택해서 그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 문은 ‘멸망으로 이끄는 문’입니다.(마태 7,13)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라는 말씀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얻어 누리기를 바라느냐?”라는 뜻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보면,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만을 바라면서 정말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면 “내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자랑하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임종 때가 되면 예외 없이 “인생은 허무하다.”라고 말합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라는 말씀은, 당시의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말씀일 수도 있고, 헤로데 왕족을 가리키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모두 여기서는 하느님의 반대쪽에서 사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반대쪽은 사탄 쪽이고, 멸망하는 쪽입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 7,26-28)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인 것은, 메시아의 길을 미리 닦아 놓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언자들도 메시아를 예언하고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일을 했지만, 요한은 메시아의 바로 앞에 와서 사람들과 메시아를 ‘직접’ 연결하려고 애쓴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인 세례자 요한보다 더 중요한 분”입니다. 요한이 증언하고 준비한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주인공은 세례자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구원은 요한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이라는 말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라는 말씀은, “요한은 구약시대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구약시대가 마감되었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준 예언자이기 때문에, 또 신약시대를 직접 준비한 예언자이기 때문에, 구약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약시대의 주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라는 말씀은, 신약시대의 위대함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하느님 나라에서 세례자 요한이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약시대는 ‘메시아 시대’로서 인류 구원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시대보다 더 위대한 시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라는 말씀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면, “너희는 무엇을 기다리면서 대림 시기를 지내느냐?”, 또는 “너희는 무엇을 바라면서 성탄절을 준비하느냐?”로 바꿔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간절하게 빌고 있는 소원이 있을 텐데, ‘간절함’ 자체는 아무도 탓할 수 없고, 비웃어도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정말로 주님께 빌기에 합당한 소원인지는 각자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을 달라고 청하고 있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원하고 청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만족하고 멈춘다면, 그것도 역시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구원’이 완전히 완성될 때까지 멈추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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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염두에 두시고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광야란 어디를 뜻합니까? 성경에 따르면 광야는 풀조차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을 뜻합니다. 생명이 싹트기 힘든 곳입니다. 그런 광야에서는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광야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몸 담은 사회가 바로 광야입니다. 혼란과 분열, 앞날에 대한 불안, 폭력과 증오, 환경 파괴, 이런 현상을 볼 때 우리는 마치 광야 한복판에 서 있는 것만 같아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마음마저 광야가 되어 버리지 않습니까?
하느님을 모시면서도 막상 “하느님은 나와 함께 계신가?” 하는 회의가 들기 때문이지요. 본의 아니게 한눈마저 팔곤 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염두에 두고 군중에게 재차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요한은 어떤 모습을 군중에게 보여 주었습니까?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며 예언자로서 활동하다 헤로데에 의해 목숨마저 잃었지요.
이처럼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충실히 완수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광야와도 같은 이 현실에서 요한을 대신하여 예언자의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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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헌철 펠릭스 신부님]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추운 날씨와 더불어 연말이 다가오다 보니 많은 분이 한해에 대해 반성도 하면서 내년에는 올해와는 다르게 살아야지 하는 결심을 벌써 가지곤 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올해 내가 부족했던 부분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이웃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면서 주변의 분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도 많은 듯합니다.
그러한 우리들의 마음 덕분에 ‘아직도 살만한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들도 내년을 위한 새로운 결심을, 우리를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준비를 통해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본당의 한 자매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타로점 한 번만 보면 안될까요?” “왜 그러시는데요?” “그냥 재미삼아서요” 자매님을 바라보며 웃으며 이야기했습니다.
“혹시나 좋은 일 있기를 바라는 것 아닌가요? 맞지요?” 자매님이 슬쩍 웃고 마시더군요.
마음속으로는 이해가 되더군요. 사는게 힘들고 아들은 취직도 안되고, 주머니에 여유도 없고, 성전 건립 봉헌금에 대한 부담도 있고…. 그래서 혹시나 내년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하는 심정이라는 것을 저 또한 공감해 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미리 알고 싶은 마음이셨겠지요.
앞일을 미리 안다는 것. 우리의 생활 속에서 가끔은 필요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미래를 알기 위해 이런저런 기회와 행운을 찾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정말 우리에게 정확한 미래에 대해서 알려만 준다면 아마도 그 사람을 찾아 온갖 일을 다 하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라는 말라기 예언서 3장 1절에서 말하는 사람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예언자는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 메신저이며, 사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자였으며, 회개하며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라고 외친 예언자였습니다.
그러한 세례자 요한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지목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외치며 당시의 많은 이들에게 “혹시나 메시아가 아닐까?”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 스스로 “나는 메시아가 아니오”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면서 구세주 오실 길을 준비하는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에게 보내는 예수님의 찬사는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놀랍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한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며, 요한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 세례자 요한은 훌륭한 인물임은 틀림없으나 그보다 더 고귀한 품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 준 예언자라면 우리는 그 희망의 열매를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복된 존재들임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백성과 세리들은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받아들였고, 세례를 받지 않은 이들,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라고 전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레자 요한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 예언자였습니다. 그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복된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이며 새로운 삶으로의 전환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대림 3주간, 우리들의 제대 앞에는 3개의 촛불이 밝혀져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음을 알려줍니다.
초의 색깔이 점점 옅어져 가듯이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도 회개를 통해 예수님 맞이하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희망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변화가 그 희망을 현실로 이끄는 힘임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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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있음으로>
루카 7,24-30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말씀하시다)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자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
<나 있음으로>
나를 보내신 분과
그분을 맞고픈 벗들
그 사이에 나 있으니
나 있음으로
그분께서 벗들에게
한걸음에 편히 오시기를
나 있음으로
벗들이 그분을
오롯이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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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길을 닦는 사람>
예수님과 젊은이 3명이 달리기 시합을 하였습니다. 예수님보다 한발 앞선 사람이 있고, 동시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고, 한발 늦게 들어온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칭찬받을 사람일까요? 모두가 다 칭찬받아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주님의 앞길을 닦는 사람이 있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있으며, 예수님을 뒤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두가, 각기 역할이 다양합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또 인정받고 산다는 것은 즐겁고 뿌듯한 일입니다. 더더욱 사랑받고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다른 이를 위로해 줄 수 있고, 인정해 주며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없이 큰 행복입니다. 사랑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예언자로 보았고(마태21,26),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기 될 것이라고 예언한바 있습니다(루카1,76-78). 그리고 실제로 그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오신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어, 알곡은 당신의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루카3,16-17).하며 다가올 구원을 말하면서 마음의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7,28).고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얼마나 헌신했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 바쳐진 사람이요, 선택된 사람이었으니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을 몽땅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루카7,28).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아진다 해도 그는 결국 오실 ‘가장 작은 이’, 예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요한은 그저 오실 주님의 길을 닦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천국의 시민(필리3,20)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 천국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하게 오셨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1,14-15)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 이전에 주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를 위로해 주고 사랑함으로써 행복하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눈에 드는 삶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해야지 겉도는 종교생활에 머물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많이 사랑받기보다 많이 사랑하는 오늘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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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한 아이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이는 밥 먹을 때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겨우 반이고 나머지는 다 바닥에 흘려요.” 이 어머니의 입장에 서서 아이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드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사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음식을 낭비하고 있잖아. 엄마 화났어.”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안 먹고 싶은 것을 버리다니. 왜 멋대로 행동하는 거야?” “널 위해 힘들게 식사 준비했는데 함부로 흘리다니, 엄마의 가사노동을 무시하는 거야?”
이런 부정적 생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먹고 싶을 때는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때는 먹지 않고, 우리 아이는 주관이 확실해.” “얼마나 맛이 없으면 먹으면서 버릴까? 그래도 참고 먹느라 고생했어.” “밥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렸구나. 아이는 밥도 장난감이 될 수 있다니까.”
밥을 먹는 행위로도 다양한 해석과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석하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기분이 달라집니다. 앞서 부정적 생각을 했을 때는 화와 분노가 나오고, 긍정적 생각을 했을 때는 사랑의 마음이 나옵니다. 화, 분노가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긍정적 생각으로 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도록 한 번 더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로, 주님의 앞길을 잘 닦아 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나가 사람들이 회개의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는 세례자 요한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세례받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는 부정적 생각으로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활동도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사회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미치광이처럼 판단합니다. 전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하느님의 뜻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백성은 세리들까지 포함해서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특히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더 가까이에 계심을 발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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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우리가 물리쳐야 할 것들>
오늘 복음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는 주님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위한 당신 뜻도 가지고 계셨다는 뜻이고 주님도 이들을 당신 구원에서 배제하지 않으셨고 사랑에서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고, 그래서 결국은 주님의 구원과 사랑에서 배제되고 맙니다.
이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오늘 우리는 ‘물리칠 것을 물리쳐야지!’ 하는 생각이 들 겁니다.
우리가 물리쳐야 할 것은, 악과 악마이지 하느님과 하느님 뜻은 아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도 객관적으로 보고 남의 얘기처럼 얘기하면, 물리쳐야 할 것은 악과 악마지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은 아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멀리 구원을 바라보지 않고 당장 나의 좋고 싫음만 보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 입에 단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는 것이고, 병을 고쳐주는 약을 쓰다고 뱉는 아이와 같습니다. 물리쳐야 할 것은 약이 아니라 병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유하면 너무도 그 이치를 잘 볼 수 있는데 우리 자신의 실제를 보면 구원은 멀고 쾌락은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에게 프란치스코는 이런 경고성 권고를 합니다. “쾌락은 일시적이고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적습니다.”
구원은 멀고 쾌락이 가까운 미성숙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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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나는 없는 곳으로 간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주님께서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갔냐고 사람들에게 물으십니다. 저는 오늘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요즘 무엇을 구경하러 다니십니까?
저는 거의 구경하러 다니지 않습니다. 옆에 영화관이 있어도 영화 구경하러 가지 않습니다. 근처에 그림 전시관이 많아도 그림 구경하러 가지 않습니다. 근처에 Concert Hall이 많아도 가지 않습니다.
사랑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가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 서부에 여러 번 갔지만 많은 사람이 꼭 들르는 그랜드캐니언이니 디즈니랜드니 라스베이거스 같은 데 가지 않았습니다. 가서 보면 좋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겠지만 굳이 보러 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고, 돈과 시간을 투자하고 애까지 쓸 만큼 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막에는 꼭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Death Valley라는 곳에를 가봤습니다. 그러면 저는 왜 사막에 가고 싶었겠습니까? 사막에 가면 뭐 볼거리가 있겠습니까? 아무 볼거리가 없지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함, 그것이 볼거리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의 별이 볼거리라면 볼거리입니다.
그러니 제가 보고 싶었던 것은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그 황량함, 그 아무것도 없음입니다. 저의 감수성 안에서 있는 것은 없는 것보다 대단하지 않습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합니다.
제가 하늘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늘이 푸르러서 또는 하늘에 구름이 떠서가 아니라
하늘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밤하늘의 별을 좋아한다면 별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컴컴함 한가운데 별이 떠 있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대단합니다. 하느님께서 대단하신 것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없는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작은 것은 그 어디에 있습니다. 그러나 무한히 큰 것은 그 어디에 없습니다. 그 어디에 있는 것은 작은 것입니다. 그래서 무한히 큰 것은 차라리 없음, 無이고 이런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간 것은 무엇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없음, 무이신 하느님을 보러 간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자 했다면 그 무엇이 있는 장터나 극장이나 왕궁에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하느님을 보러 갔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 있는 세례자 요한은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제가 밤하늘의 별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별이 좋아서가 아니라 밤이 좋아서입니다.
밤하늘이 아니라면 어찌 별을 볼 수 있겠습니까? 별은 밤하늘을 비추는 존재가 아니라 밤하늘 때문에 빛을 발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무엇에 홀리고 무엇에 끌려 어디를 가는 존재입니까? 그렇다면 사라져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과 같아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처럼 아무것도 없는 광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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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꿈꾸라! 희망하라!>
-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
한밤중 잠깨면 가장 먼저 일별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교황님의 모습은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87세의 고령인데도 정신은 영원한 청년입니다. 지치거나 피곤해하시는 기색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어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도 청중들에게 주옥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대로 대림 막바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적절한 말씀입니다.
“좋은 제자는 깨어 있다. 깨어 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이 위험하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깨어 있음은 지혜의 표징이며, 무엇보다 신자 삶의 최고의 길인 겸손의 표징이다.”
요지의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깨어 있어라, 회개하여라, 기뻐하여라, 대림1-3주일까지 주제 말씀을 늘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무척 춥습니다. 추우니 저절로 깨어 있게 되고 정신도 밤하늘 별처럼 맑고 밝습니다. 13년전 “겨울 예찬”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추워도 환상들 말끔히 사라져 본질만 남은
맑고 깨끗한 투명한
하여 한없이 단순하고 깊은
겨울이, 겨울 배밭이, 겨울 산이 좋다
늘 봐도 좋고 편하다
있음 자체가 위로와 힘이다
나이 오십을 넘으니
겨울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던 어느 수녀님이 생각난다”-2009.12
예언자는 한결같이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입니다. “꿈꾸라, 희망하라-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부단히 우리를 부추기는 예언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그렇고, 복음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그러합니다. 정말 우리는 깨어 있는 참 사람을 만납니다. 예나 이제나 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주제가 꿈, 희망, 비전입니다. 역시 2009년 그해 썼던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 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그런가 하면 그보다 훨씬 전 1998년 1월에 썼던 “봄꿈”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그해 겨울 이 시를 안고 마음 따뜻이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해는 눈도 많았습니다. 갈수록 눈도 보기 힘든 겨울을 지냅니다.
“창문 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2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시입니다. 부단히 꿈꾸는 사람이,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꿈은 희망입니다. 모든 것 다 지녔어도 희망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희망은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이어 지금까지 아침 수도원 산책중 즐겨 부르는 “바다”라는 동요입니다. 희망의 여정 강론때는 신자들과 함께 늘 불렀던 노래입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 저어 가요.”
우리의 궁극의 참 꿈이자 참 희망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꿈을 현실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새삼 우리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은총의 선물인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 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저절로 꿈과 희망이 아닙니다. 꿈과 희망은 힘이요 빛입니다. 꿈도 희망도 부단한 훈련이 필요합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하여 온몸과 온 맘으로 부단히 깨어 한결같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 전례 기도에 충실하는 것, 바로 꿈과 희망을 위한 영성 훈련입니다. 하느님 나라 꿈과 희망의 실현에 이보다 더 좋은 영성 훈련도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가 희망을 선포하는 대상은 바빌론 유배 중인 희망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들에게 예루살렘은 참 꿈, 참 희망의 표징이면서 자신의 미래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예루살렘의 빛나는 미래를 앞당겨 살아가야 할 대림시기의 우리입니다. 절망의 유배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인생 광야 여정 중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불행한 여인으로 의인화된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입니다.
“환성을 올려라, 기뻐 소리쳐라, 즐거워하여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의 천막터를 넓혀라. 네 장막의 휘장을 아낌없이 펼쳐라. 네가 좌우로 퍼져 나가고 네 후손들이 뭇 나라를 차지하여 황폐한 성읍들에 자리 잡을 것이다.”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오늘 지금 여기서 꿈을 현실화하여 하느님의 나라, 예루살렘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꿈의 사람이, 희망의 사람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는 필수요 이래야 늘 깨어 있는 삶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내가 잠시 너희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애로 너를 다시 거두어 들인다.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 내가 맹세한다. 산들이 밀려나고 언덕들이 흔들린다 하여도 나의 자애는 너에게서 밀려나지 않고 내 평화의 계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철석같은 약속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주님이 함께하시니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새 예루살렘이 됩니다.
아주 예전 “참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라던 수녀님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바로 우리는 복음에서 참사람 하나 만납니다. 바로 희망의 표징, 세례자 요한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또 하나의 세례자 요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로 광야 여정중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참 은혜로울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이들은 왕궁에 있다.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좋습니다. 답은 나왔습니다. 내가 대림시기 주님의 길을 닦음으로 내가 또 하나의 참사람, 세례자 요한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세례자 요한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람인 우리는 세례자 요한 이상이라는 주님의 확신에 넘치는 놀라운 말씀을 들어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가 얼마나 복된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어쨌든 당대 한결같이 주님의 길을 마련했던 세례자 요한은 빛나는 구원의 표징, 희망의 표징이었고, 그분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은 백성은 모두 하느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의로우시다!”
얼마나 은혜로운 하느님 체험이자 깨달음인지요! 반면 무지에 눈멀고 완고한 바리사이들과 율법교사들은 세례도 받지 않고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칩니다. 새삼 구원은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좋은 은총의 선물인 구원도 기꺼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깨닫게 하시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여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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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루카 7,27)
'주님께로 나아가자!'
오늘 복음(루카 7,24-30)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 관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러 광야로 나간 군중에게,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파견한 "예언자"이지만,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오심에 앞서 파견되어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는 예언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이라고…. 그렇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교회는 주님의 성탄을 앞두고 '판공성사 시즌'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부님이 신자들에게 판공성사(고해성사)를 주느라 바쁩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성탄을 앞두고 판공성사를 주시는 신부님들이 바로, 오시는 주님의 길을 닦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니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말고, 잘 성찰해서 모두 판공성사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함께 다시 살아나서, 다가오는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오시는 주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살리러 오십니다. 그리고 '다시 살리기 위해서' 매일 '말씀과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크나큰 자비'입니다. 이에 깊은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오늘도 자비이신 주님께로 나아가 다시 살아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지만, 크나큰 자비로 너를 다시 거두어들인다. 분노가 북받쳐, 내 얼굴을 잠시 너에게서 감추었지만, 영원한 자애로 너를 가엾이 여긴다."(이사 54,7)
(~창세 18,33)
★'(~창세 18,33)'은 어제까지의 '성경필사'입니다. 드러냄이 아니라, '함께 하자는 마음에서' 오늘부터, 매일 조금씩 성경필사 한 것을 복음 묵상글 끝에 올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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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eMAtv-C59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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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루카 7, 27)
사람의 길은
사람이며
사람에 앞서
사람다움을
일깨워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을 위하는 삶이
곧 나를 위하는
삶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느님보다
앞서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실 하느님만을
가리킬 뿐입니다.
사람의 평가는
곧 하느님의
평가입니다.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은
펼쳐집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외적인 시각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내면의 길을
닦습니다.
내면의 길은
말씀이며
겸손이며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세례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뜻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길의 시작은
뜻을 세우는
마음입니다.
흔들리는 사람은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은 어디에
사는지의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이냐의
가치입니다.
요한 세례자의
마음은 가치를
향하고 가치를
닦습니다.
사람의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길을
가지 않는 우리가
문제입니다.
보내고
또 보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마음의 눈(目)을
다시 닦으며 다시
말씀의 마음으로
돌아서는 시간입니다.
우리 마음에
있어야 할
하느님의 뜻을
요한 세례자는
믿음으로
실천합니다.
사람의 믿음이
삶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느님을 가리키는
믿음을 만나는
믿음의 대림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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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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