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년간 칭송받아온 공자는 논어 양화편 24장에서 미움받는 사람의 특징을 설명한다. ‘용감하지만 무례한 놈 과감 하지만 융통성 없는 놈.' 그 말을 들은 공자의 제자 자공 역시 말을 거든다. '편변을 지휘라고 여기는 놈, 오만한 걸 용감하다고 여기는 놈, 비난을 정의로 여기는 놈. ' 되게 뻔한 말처럼 들린다. 비난을 일삼는 이는 인간관계에 실패한다. 싸가지가 없으면 왕따를 당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게 정녕 상식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케이스가 생긴다. 도가 지나칠 정도로 남을 비난하고 헐뜯는 사람들 납득이 안 될 정도로 편견에 가득 찬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 이상하지 않은가? 수천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깨달았고 또한 이미 알고 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머나먼 옛날부터 뭉치는 걸 전제로 진화해 온 동물이다. 모 실험에 따르면 우리 뇌는 몽둥이로 두들겨 맞을 때와 친구들에게 은따 당할 때를 크게 구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고통조차도 진짜 고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은따 당하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어떤 관계에서든 실패하고 싶지 않은 게 인간이다.
앞서 말한 사실을 붙여놓으면 머리가 조금 복잡 해질 것이다.
1. 우리 모두는 인간관계를 망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2. 우리 모두는 인간관계가 망가지는 원인을 안다.
그러니까 남을 비난하면 미움받는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데도 미움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남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차가 원성이 워낙 드러워서 알아도 안 고쳐지는 거 아닐까? 진짜 해답은 논어에 있다. 앞선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정말로 주목해야 포인트는 바로 나쁜 특징과 함께 좋은 특징까지 묶어 놓은 부분이다. 사실 이들이 단순히 특징을 나열하고자 했다면, 무례한 사람이 싫다는 말 앞에 굳이 ‘용감하지만’ 같은 좋은 말을 붙이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 놀랍게도 무례한 사람은 무례함을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비난을 싫어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배달의 민족에 별점 테러를 남기는 사람은 자기가 객관적이고 냉철한 줄 안다. 진영 논리에 갇혀 반대편을 깔보는 사람은 자기가 지혜로운 줄 알고 남을 비난하고 약점을 폭로하는 렉카 유튜버는 자기가 공공의 알 권리와 정의를 위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람들은 실제로 대다수가 용감하고 똑똑하고 정의롭다.
우리는 흔히 착각하곤 한다. 나쁜 놈은 나쁜 짓만 할 거라고.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 착각이야말로 자기 객관화에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우리는 가장 먼저 희대의 살인 마피아 알 카포네가 뒤에서는 온갖 기부와 선행을 저질렀으며 희대의 악마 조주빈이 뒤에서는 온갖 봉사활동을 수십 차례 다닌 일이 그렇게까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는 걸 반드시 알아야 한다. 보시다시피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나름대로의 좋은가치를 추구하려 한다. 절대 악이라고 생각되는 이들 조차도. 그러나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오류를 범한다. 일부 행동에 자신을 띄워 맞추고는 다른 행동에 대한 판단에 멈추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주 재미있는 소재가 있다. 조별 과제에서 무임승차한 조원들을 까는 조장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이 있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조언이 무임승차자였다면 왜 인터넷에는 조별 과제 피해자만 존재하는 걸까? 가해자들이 갑자기 없던 염치가 생겨서 입을 닫고 있는 걸까? 물론 그런 사람도 종종 있겠지만서도 아마 대다수는 이 질문을 들으면 의문이 해소되실 것이다. 혹시 팀플을 할 때 남의 말을 안 듣고 독단적으로 구는 사람에게 주도권을 양보했던 경험이 없었을까? 우리가 리더였을 때는 좋은 리더였나? 팀원 이었을 때는 좋은 팀원이었나? 장담컨대 나쁜 팀원 나쁜 리더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사람은 만화 캐릭터가 아니다. 성격이야 사람마다 다르지만서도 사람들이 매번 같은 상황에 매번 똑같은 리액션을 하진 않는다. 인간이 원래 그렇다. 결국 핵심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의 기질이 어떻든 간에 어떤 상황에서 얼마나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편견은 좋게 쓰면 굳건한 신념이 되고, 우리의 예민함은 좋게 쓰면 낡은 관습과 불평등을 뒤집는 정의 우리의 공격성은 좋게 쓰면 타성에 굴하지 않는 용감함이 된다. 그리고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기질을 가졌다고 한들 이 기질이 어떤 상황마다 끊임없이 다르게 표현된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정의는 언제라도 비난이 되고, 용감함은 무례함으로, 신념은 무식으로 변할 것이다.
첫댓글 "편변을 지휘"는 아마도 "惡徼以爲知者" 잘못된 생각, 남다른 것을 살피는 것을 지식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편견을 지식"이라고 고쳐야 할 듯하네요. 그렇지요. 모두가 뻔히 아는 이야기를 왜 했을까요? "나쁜 특징과 함께 좋은 특징까지 묶어 놓은 부분"이라는 분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겠지요? 좋은 것으로도 나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 세상 일이라는 게 사실은 다 양면성이 있다는 고정관념과도 어느 정도는 통용되는 부분이 있어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착각" 또는 "오해"하는 것이겠지만 말이지요. "용감하지만"이라는 말도 그렇지요. 만용에도 용기라는 말이 들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용을 용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도", "수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답니다. 상황에 어울리는, 관계에서 요구되는 "정도"에 딱 들어맞아야 그게 올바른 것이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