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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좌파들이 바라보는 이미지에 어떻게 쏙 갇히며 옥쇄를 채우면서,
우파 할아버지들만 기분좋게 하면서 퇴보하며 발전한다고 해왔는가를 적었습니다.
박근혜대표의 적잖은 좌파정책과 중도정책이 있으면서도,
좌파가 어떻게 '반동'공식이나 학생운동공식으로 모는 가에 대해서, 너무도
안이하게 반성없이 현실적 판단을 묵살하고, 유물사상 움켜쥐면 새롭다는
차원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우파 내부가 문제입니다.
아래 글 많이 봐주셨으면 합니다.
좌파 이념과 우파 이념을 넘어서서 영국의 애국주의로 나아간 좌파정당 기든스와,
우리네 중도주의가 얼마나 다른 것인지,..... 좌파 지식인만이 포위된 속에서 좌파 경력자들이
비전향한 상태로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어라 강요하는 식에서 어떻게 쓰여지는지,
어떤 분이 '중원'이란 표현이라고 했지만,
한총련의 죽창과 사고의 다양성을 거부하는 매사에 전쟁용어 쓰는 차원을 제외한 것이
얼마나 많고 넓은지,
거기에서 이성적 언어 없이 소통은 가능한 것인지,.....
그러한 것을 이젠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입니다.
한국의 이데올로기 제조공식과, 원론의 공식의 차이와,
한국의 제조공식에선 애국심이 설 자리가 없음을 퍼뜨려야 할 때입니다.
막연하게 극단심리에 피곤하고 싶지 않은 마음의 개인주의의 피로감만이 중도를 대변할 것입니다.
-------------------------------------------------------(밑에 글을 지우고, 여기에 끼워 붙입니다)
정확한 교육이 있어야, 중도정치를 하고 중도정치 평가를 받는다.
좌파들이 박근혜대표의 ‘정체성’ 문제제기 이후에 우파에 눈치보는 국면을 변함없는 그들의 대중세뇌공식으로 탈출하려는 의지가 선명하게 보인다. 인터넷에서 ‘감성정치’라고 매 순간 순간 댓글을 달아주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은 재론의 여지가 없으나, 일차적으로 돌아가는 구조를 선명하게 바라봐야 될 것이다.
(1) 그들의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배제해 버린다.(우파는 늘 우파중심의 학력을 저학력으로 고정해놓는다. 따라서, 학력차가 절대적으로 나는 내부를 교란하기 위한 심리전은 너끈히 가능할 것이다.)
(2)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 도구적으로 제도논리를 사용한다.(이는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서 지배계급이 국가논리를 사용한다는 부분을, 슬쩍 소개하고서 그 다음순서로 하는 교육임.)
(3) 관용이 없다. 다른 것을 포용하는 바가 없다. : 이는 사회 안정 논리를 위해서 더 이상 양보해서 안되는 바에 대해서, 대중들의 심리를 이반시켜서 우파 내부의 중심역할 하는 담론을 꼬꾸라 뜨릴 때 쓰는 어법이다.
(4) 색깔을 푹 찍어서 가슴 팍에 빨강으로 주홍글씨를 써놓는다. : 좌파들이 얼마나 ‘반동낙인’을 즐기는 지, 이효리의 씨에프 등으로 도배되는 하루 못잖게 알게 모르게 ‘반동낙인’언어폭력에 시달리는 현실의 입장이, 우파 내부의 학력자는 학력자의 체면으로 다수의 저학력자는 뭐가 뭔지를 몰라서 정확히 답변을 하고 있지 못한다. 이 문제는 (2)와 연결된다.
하나 같이 좌파가 그린 우파의 인물소묘는 뭔가를 움켜쥐고 꽉 틀어막고 확확 휘두르고 숨통을 막는 이미지이다. 최장집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휴머니스트)에서 ‘세자리즘’ 이라 하더 나와서, 왠 ‘세자’정신이 있단 말인가 했는데, 알고보니 ‘씨저’를 말한 것이다. 우파를 그리는 소묘는 늘 권력을 쥔 독재자 한명에 억압받는 선량한 사람이란 식의 좌파 소묘였다. 조선일보에서 술을 대단히 많이 드시는 것으로 소문이 난 홍석준 기자가 박근혜대표와 이회창후보에 똑같이 부여하는 이미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또다른 우파 소묘 그림이 있다. 사회평론 [길]이 밑그림을 그리고 진중권이 활짝 활개를 건 바탕이다.
공산주의자를 용납 못하는 현실의 정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란 것이, 미국의 힘으로 군사정부에서의 수난을 피한 김대중지지자들의 기본 시각일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그 동네에서 최고로 공산당이 세면서도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는 국가들만을 지칭한다. 그 국가의 성장잠재력이 약해서 성장률이 높아야 온 국민이 행복한 한국적 현실에 안 맞는 것은 그들엔 별개이다. 우파 탓으로 돌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는 표현이 우파=파시즘이다.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선량한 어른과 선량한 대학생들을 속이면서, 우파에 참을 수 없는 ‘원죄’가 있는 듯이 세뇌시킨다. 그러나, 이는 매우 피상적인 수준으로 레닌 스탈린 김일성 김정일 공산당등이 미제국주의의 압력이 작용한다고 할 때, 매우 상투적으로 붙는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여기에 보론으로 붙는 게, 일본의 ‘일진회류’의 액션과 닮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조갑제기자의 십수년 일관된 홍보와 정확한 사태를 먼저 알리지 않고, ‘조지기’부터 시작하는 그의 언론전략은 대학생들에 절대로 뚫리지 않는 세뇌의 장벽을 쌓아 왔다. 대중들은 본시 책임감은 없고 과격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는 풀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국한문혼용체의 [월간조선] 잡지 하나로만 고정시키니 홍보가 되지 않고, 되도록이면 젊은층에 거부감이 많은 방향으로만의 길이 흘렀다.
여기에서, 중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다. 한국의 현실정치판은 개념정의 자체부터가 확실하게 잘못되어 있다. 여기에서가 문제이다. 좌파정치를 열나게 한다고 하는 열린당에 대해서 좀처럼, 젊은층에까지 ‘좌파정치’를 한다고 퍼지질 못한다. 게다가, 이것까지 양보하냐? 바보 한나라당 하고 욕해도, 한나라당은 계속 공산담론 변증법 기준의 ‘반동’으로 대학가 좌파들에서 찍히고 만다. 줄기차게 반복되어 주장한 것은, 우파 내부에서 ‘지식잣대’를 결정적으로 우파가 절대로 지게끔 혼란시키는 중심세력이 있어서 이러한 결과가 벌어지는 것이다.
김대중대통령 집권기에 사회에서 어디서나 읽혀질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생각의 나무)를 생각해 보자. ‘제3의 길’의 진짜 독자는 20세기 현실공산당의 한계를 절실히 깨달은 좌파정당의 자유민주주의적 방향수정을 의미한다.
‘제3의 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식인’과 ‘시민주체’의 좌파적 성역과 자유민주주의 영역의 다리 놓기일 것이다. 이는 세계적 석학인 ‘기든스’가 영국노동당의 최고 브레인들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면서, 영국을 조화로운 국가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자부심을 반영한 것이다.
반면에 한국은 어떠한가? 좌익의 한쪽 켠에는 누가 말려라 ‘죽창갖고 간다’하는 한총련 극렬 행동대가 있고, 유물변증법의 악마사상 그대로 다 가지면서 세뇌시키고 거기에서 ‘폭력혁명’ 부분에서 ‘극우의 행동을 보여주마’하며 말하는 조갑제기자의 열혈 지지자가 있다. 늘, 극단은 선악판단을 넘어서 ‘과격’이미지로만 드러난다. (여기에서, 칭키스칸 숭배하는 몽골리즘은 우파 내부를 고립시키면서 장님으로 사는 법을 배우면서 유럽좌익의 갖가지 사상에 세뇌되는 일이다.)
한총련 행동대원 죽창 맨과 정확한 대칭이 되도록 행동해도 된다는, 진중권과 사회평론 [길]이 합작한 이미지 도식에서, 빠져 나와서 정확한 비평으로 깨우치기는커녕 이 판이 계속 고정되도록 ‘전쟁’이니 ‘전사’니 하면서 북한의 관제언어 속으로 더욱 빨려 갔다.
문제는 그러하다. 앤서니 기든스의 중도주의와, 좌익에 밀릴 거 다밀리면서 조갑제기자의 열혈지지자와 한총련 죽창 맨이 ‘극우’와 ‘극좌’를 통째로 싸잡아서 ‘과격’으로 이야기하고, 좌파정치권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소리없이 다 지지가 가는 차원의 중도주의 명명은 명백하게 다르다. 단 한번의 폭력적 억압이 없이도, 어떻게 행동을 해도 부정적인 시선이 가도록 짜여진, ‘시선의 그물망’을 째내고 나와야만 문제가 개선된다.
강정구교수가 적화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황장엽 비록에 적시된 적화직전의 과도기 상태로서의 국가연합제를 지지한다고 보도가 되었다. 문제는 이 말 뜻에 대해서 홍보가 안되니, 강정구 교수에 대해서 선량한 사람 잡는다는 감성주의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더불어 국가안보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도, 국민을 개만도 못한 권리로 보지 않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북한인권주장에 매몰되는 방식도, 국가안보 괜찮은 데 왜 생사람 잡고 난리야 하는 철부지 수준의 거부반응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정확하게 좌파와 우파 사이의 여론의 중간 역할을 하는 시민적 지식층의 숫자가 없다. 우파지식인으로 모든 권력을 독점한 듯한 박효종교수는, 오늘은 열린당 잔치에 불려간 듯 하다. 한나라당을 받드는 절대지식인자리를 놓지 않고 있는 자들이 거의 다 박효종 교수 수준이다.
저학력수준으로 평생을 살아오고 절대지식인의 말에 절대적 신뢰를 보내온 우파 네티즌분들은 하루 빨리 깨어야 한다. 고등학교 때에 ‘철학교재’가 있는 속에서 지금이 젊은이들이 자라나고 있다고. 그들도 주어진 정보를 가공하여 판단하고 있다고. 인터넷 장악도 더 없이 소중하지만, 질적 가치가 있는 정보로서 정확한 지식을 제시하는 일도 중요하다. 신지호교수의 ‘뉴레프트’관련하여 영국의 민노당 수준의 이미지를 갖는 좌파지식인단체에 대한 지식사기극은, 운동권 선배들이 선량한 대학후배 사기쳐 먹는 수법이 선량한 어른 버전으로 확장된 것을 말해준다. 침묵하는 다수들의 ‘클릭’으로 반영되는 젊은 시선은,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제공된 정보만으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차원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파는 반공교육의 중단에서의 대안 마련에 실패했다. 조갑제기자의 북한의 자유파괴 위협을 소개하여 안보경각심을 소개하려는지, 김정일 붕괴시켜서 황장엽 옹위하여 김영삼대통령 친척을 구출하려는 지 잣대와 방향이 완벽하게 틀려버린 차원에 대해서도, 수십년 전 감수성으로 절대지식인은 다 알겠거니 하는 차원으로 가고 있다. 부동산공법에서도 노무현정부에서 주민참여정치가 활성화되어도 절대로 주민의견을 묻지 않는 특정영역이 있는 데, 우파의 자존심을 불어넣으면서 행동을 요구하며 ‘동지와 적’을 만들면서, 그들에 이익을 주긴 커녕 인간경시로 이용해 먹고 버리려는 차원을 숨기려 짜여진 의혹이 너무나 강렬해 보인다.
우파는 늘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왕조로 해석한다. 그러나, 홍진표씨가 증언한 바와 같이 다수의 친북좌파의 충성대상은 궁극적으로는 공산당 지도자라도 현실적으로는 북한의 공산당이다. 그것을 전제해야 북한의 대남적화야욕을 그리는 그들의 도식에서의 변증법 문제가 해석이 된다. 나는 젊은 층들도 생각할 수 있으니, 구체적인 바를 그려서 보여주기 기법을 해야 마땅할 것으로 보나, 우파 네티즌의 상당부분이 사유는 원래 못해 하면서 애국심을 중시하는 층이라 그러한 지 자주 묻혀진다. 그런데, 세상에 보수세력이 국가안보를 지켜서 자유주의 지킨다면서, 북한공산집단을 추종하는 ‘뇌사모’수준이 흔히 알고 있는 바의 사유방식도 이해 못한다면, 상명하복에 의해서만 좌파를 공격하고 공격의 책임은 절대적 지식인에 떠맞기는 전근대적 사유인 것이다.
좌파에 대한 정의의 엉망은, 우파가 지켜야 할 자유민주주의의 성곽인 ‘국가’문제에서도 극도의 혼돈을 보여준다. 몽골리즘은 결국은 ‘국가안보’를 엿바꿔 먹고서도, 생각이 멈춘 어른들에게 자 환상에 빠져봐, 망각해봐 하는 마취제로 보여진다. 모든 국가는 경계와 영역이 명백하다. 좌파들이 경계를 넘고 영역을 넘는다는 주장은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의 친척을 구출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띤 조선일보 세력들은, 학원가에서 좌경지식이 무작정 들어가게 해놓았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국민이야 어떻게 되던 말건.
여기에서도, 최소한 삼십년 전의 패러다임과 최근의 패러다임의 충돌이 가능하다. 조갑제기자의 열혈지지자는 수십년 전 패러다임으로, 절대적 지도자 1인과 수십인이 공유하는 수준으로 국가가 통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강한 국가의 조건]에서 지적했듯이, 그러한 국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를 않는다고 한다. 후쿠야마의 주장은 동아시아 논리로 생각하면 그러하다. 천하를 공되게 하는 나라가 이상이며, 천하를 패거리와 집단의 논리로 함은 열등체제인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당파싸움’이 수십년 비난의 대상으로 올라온 것은 여기에서 기인된다. 모든 통제술은 단위 개념을 포함한다. 조선일보와 조갑제기자의 패러다임은, 아직도 절대 무력이 가능할 때인 듯이 수십명과 절대적 지도자 수준이면 모든 것을 뒤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 서 있는 듯 하다.
중도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애국심을 통해서 이념논쟁을 하다가도 딱 멈추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김대중정치를 다 허락하고 좌익이라고 삿대질하는 김영삼계보정치와, 두 놈이 똑같다면서 성장국가의 회복을 바라는 세력이 있고, 국민의 권리가 증진되는 성장국가의 회복이 여론이 높아지면, 두 세력은 갑자기 합세하여 절대적으로 흐려 버리고 있다.
박근혜대표의 사회에서 배제된 약자들의 복지에 신경쓰는 것은 좌파적인 것이 명백하다. 들뢰즈의 안티외디푸스를 생각할 것도 없더라도, 우파의 모든 반대를 무릎쓰고 열린당의 가족법이란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테마에 동의한 것은 좌파적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앤서니 기든스 수준의 수준높은 중도정치가 실현하려는 박근혜대표의 의도가 설 자리가 잃어지도록, 우파정치 뿐만 아니라 좌파정치도 양보해서는 안될 부분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여권 실세인 김두관씨가 지난 50년간의 일을 몇 년 간에 뚝딱 바꾼다는 부분에 대하여, 국민에 자세하게 내용이 퍼지지 않은 부분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교육 이야기하면 늘 노인세대에 걸맞 도록 연사와 연설장이 되고, 그림을 그리면서 입체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너무 드물다. 노인세대 기준으로 과학에 대한 미신은 가능하되, 파워 포인트를 직접 쓰는 새로운 시각의 영원한 테마 해설은 없다.
첫댓글 한국에선 '넥타이'를 맨 품위갖춘 좌파담론에 따라가는 게 주로 '중도'일 것입니다. 침묵하는 다수의 지치는 마음을 이해해야 하고, 그들에 정확한 진실을 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좌파는 넥타이 맨 상태로 조금만 우파적인 것 주장하면 중도가 되고, 우파는 안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의 이념 제조공식의 심
층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념전쟁에 '중도'는 없다고 말하기 보다, 정확한 개념 규정으로 '애국적 영역'을 좌파가 양보해서 안된다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파는 너무나 할아버지 젊을 쩍에 군사무력 배경의 십수명의 통제 가능성을 좋아합니다. 좌경사상 움켜쥐어도 실제는 변화거부자가 우파내에 좌파 폼 내는 자들
입니다. 간단하게 '한나라당의 미운오리 원희룡씨가 얼마나 변화를 거부하나요? 유물변증법에서 자기 파벌에 동지를 지칭할 때 말고, 그 차원을 넘어서의 시류감각 시대감각의 이야길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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