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없는 맑은 날이면 남편과 손잡고 모종을 사러 시장에 갔다. 한 뼘 텃밭에 심을 고추 모종부터 사고 가지, 오이, 방울토마토 같은 것들도 한두 개씩 샀다. 해를 거듭해도 발전 없는 농사 솜씨였지만 이웃 어르신들이 밭에 무언가를 심으면 '때가 됐나 보다!' 하면서 우리도 서둘러 텃밭을 만들었다. 고추 다음으로 찾는 것은 애호박이었다. 우리 부부의 애호박 농사는 형편없었다. 한 해에 겨우 한 개나 따 먹었을까. 그래도 애호박전을 좋아하는 남편 생각에 해마다 빼놓지 않았다. 집에서 기른 애호박은 유난히 달고 아삭해 전을 부치면 별미였다. 남편은 내가 부쳐 준 애호박전에 막걸리를 한산하며 "난 애호박전이 정말 좋아." 하곤 했다. 그렇게 함께 늙어 갈 줄 알았건만, 남편은 지난여름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숨 돌릴 겨를도 없이 그의 회사와 주변을 정리해야 했다. 정신없이 지내고 보니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집이 온통 풀밭이었다. 사람 다니는 길이라도 내야겠다 싶어 호미를 들고 풀을 뽑는데 애호박넝쿨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 꽃 몇 송이도 보였다. 가만히 살펴보니 새끼손가락만 한 열매 하나가 달려 있었다. 문득 '저 호박이 잘 자라면 추석 차례상에 전을 부쳐 올릴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틈만 나면 애호박넝쿨 앞에 앉았다. 애호박이 얼마나 자랐는지 살피는 것이 일과가 됐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앉아 바라봤다. 그가 보고 싶을 때도, 혼자 살아 내야 한다는 두려움에 짓눌릴 때도 그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 애호박이 손바닥 크기 정도로 자랐다. '오늘 딸까, 내일 딸까? 언제 따야 차례상에 더 맛있는 애호박전을 올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추석을 이틀 앞둔 새벽, 꿈을 꿨다. 남편이 어두운 텃밭에 서 있었다. 꿈에서나마 그를 봤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다음 날 아침 애호박을 따 전을 부쳐 차례상에 놓았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세 개 심은 애호박 모종 가운데 한 줄기에서 계속 애호박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를 먹고 나면 또 하나가 열렸다. 신기했다. 마치 남편이 주는 선물 같았다. 11월 중순까지 애호박을 거의 스무 개나 땄다. 애호박넝쿨에 서리가 내렸을 땐 더 이상 애호박이 열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겨울 가면 다시 봄이 오겠지….’ 마음을 달래며 겨우 돌아섰다. 나는 지금 봄을 기다리고 있다. 남편이 내 손을 잡고 모종을 함께 고르고, 같이 심고, 솜씨 부족한 나를 대신해 마술을 부려 또 애호박을 듬뿍 선물해 주리라는 믿음으로. 그러면 나는 애호박전과 술 한잔을 그의 무덤 앞에 놓고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재잘거릴 것이다. 최승이 | 충남 부여군 (제19회 생활문예대상 금상)
외손녀의 바람
초등학교 2학년 외손녀를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봐줬다. 그 덕에 지금도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 하루는 외손녀가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읽었다. 굶주린 채 성냥불로 추위를 견디던 성냥팔이 소녀가 오래전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품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며 삶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손녀가 내게 물었다. "할아버지도 죽어? 죽은 다음엔 어떻게 돼?" "하늘로 올라가서 우리 손녀 내려다보겠지." "나는 못 봐?" "응, 하늘은 너무 높아서 여기서 안 보여." "하늘까지 올라가는 엘레베타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 엘리베이터가 있으면 좋겠지. 하지만 넌 올라올 수 없어." "왜?" "그 엘리베이터는 죽은 사람만 타고 올라갈 수 있으니까." "할아버지랑 오래오래 놀고 싶으니까 나 결혼할 때까지 죽지 마. 나보다 먼저 죽으면... 휴대폰 꼭 들고 가. 그래야 나랑 얘기할 수 있잖아." "하늘나라에서도 쓸 수 있을까?" "그럼! 영화에서 보면 우주선에서도 통화하잖아." 외손녀는 언젠가 우리가 같이 놀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것 같다. 누군가 하늘에 가면 남겨진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거라는 말도 믿는 듯하다. 훗날 손녀의 바람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손녀는 나와 얼마나 다정했는지 기억조차 못할지 모른다. 사춘기 이후부터는 나와 어울리는 시간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새긴다. 반복되는 외손녀와의 이 일상이 언젠가는 내가 바라고 바랄 순간이라는 것을. 김성일 | 경기도 과천시 청려장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임금이 장수 노인에게 하사한 지팡이로, 명아주 풀로 만들어 가볍고 단단하며 건강과 장수를 상징한다. 이 전통을 이어 전국 지자체는 1993년부터 해마다 100세를 맞이한 이들에게 청려장을 제작해 선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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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소중한 멘트주셔서
감사합니다 ~
푸르럼이 점점 더해가는
신록의 계절,,
평안한 불금보내시고
늘 건승을 기원합니다
~^^
안녕 하세요..망실봉님
좋은 글 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불 금 보내시고
월요일 반갑게 뵐께요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습니다
핑크하트 님 !
공유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
휴식이 필요한 주말
즐겁고 여유롭게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