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모님이 영화 '파일럿'이 그렇게 재밌다는 말과 함께, 웬일로 먼저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셔서 요즘 화제의 신작 '파일럿'을 보고 왔습니다.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답게 상영관은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더군요.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조정석이 홍보를 위해 유퀴즈나 놀토 등의 예능에 출연했고, '파일럿'이 최근 입소문을 타고 꽤나 잘 나가고 있는 코메디 영화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 후기 등을 찾아보려 커뮤니티를 뒤지다보니 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 아니냐'는 논란이 있는 것 같더군요.
저는 이 논란에 대해 그 어떤 사전정보도 없던 상태에서 영화를 관람했고, 그래서 소위 '페미니즘 영화' 논란에 대해 나름대로 중립적인 시각에서 평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아 이렇게 내맘대로 평론을 남겨보려 합니다.
일단 영화 자체의 퀄리티는,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간만에 잘 나온 코메디 영화, 그냥 생각 비우고 깔깔대며 즐겁게 스트레스를 풀고 나온 영화, 티켓값을 충분히 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죠.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단면을 부담스럽지 않게, 꽤나 영리하고 적절하게 녹여내 각자의 캐릭터의 개성을 잘 살렸습니다. 인기를 얻은 비연예인의 인지도를 상징하는 척도가 되는 '유퀴즈'의 출연, 그런 셀러브리티가 말 한마디의 부적절함으로 인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던지,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어화둥둥 띄워주다가 논란이 생기자 순식간에 손절하는 회사와 지인들, 유튜브 크리에이터 동생, 팬덤문화의 변방이 아닌 중심부로 급부상한 중장년의 팬클럽 등등.
일단 영화의 스토리가 진행되고 갈등과 위기가 빚어지는 계기 자체가 여성들의 불쾌감을 유발할수 있는 부적절한 언행에서 시작되고, 소위 '불의를 못 참는' 서브캐릭터가 그 언행을 공론화했기에 소위 '페미니즘 영화'라는 논란을 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충분히, 그런 논란을 살 가능성도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논란을 살 가능성도 있겠구나'라는거지, 그 논란이 '정당한 문제제기'라는건 아닙니다. 소위 말하는 '불편러'에게 꼬투리 잡히려면 충분히 잡힐수 있겠구나 싶은 정도지, 그러한 논란을 의도하지도 않았고 그러한 논란을 통해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고자 하는 영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영화는 꽤나 영리하게 각자의 입장에서 균형을 맞춥니다. 조정석이 연기한 주연 한정우의 발언은 충분히 여 승무원들 입장에서 충분히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고, 그냥 '아 왜 저래~'하면서 직원들끼리 입방아를 찧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딱히 문제제기나 공론화 없이 넘어갈 수도 있는 정도의 수위입니다.
문제제기를 하고 공론화가 되더라도 회사 안에서 자체적인 징계를 받고 일단락되거나, 본인이 여 승무원들에게 사과를 하는 선에서 매듭지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하필 시사고발 프로그램 류의 방송에 제보가 들어가고 방송이 되면서 전국민에게 낱낱이 까발려지게 되고, 한정우는 회사에서 해고됨과 동시에 타사에서도 기피하는 블랙리스트에 올라버립니다. 즉 한정우 본인의 과실 자체는 심각하다고 할 수 없지만, 파급력으로 인해 엄청난 단죄를 받게 된겁니다. 한정우 입장에선 굉장히 억울할만하죠.
한정우가 동생의 신분으로 여장한 한정미의 직장내 절친이 되는 윤슬기는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심지굳은 인물입니다. 그로인해 고난을 겪지만 꿋꿋이 혼자 이겨내려 하죠. 극 후반부에 그런 절친이었던 윤슬기가 한정우의 발언을 녹음해 언론에 제보한 당사자, 즉 한정우가 나락으로 떨어지며 여장을 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게 드러납니다.
윤슬기의 신념과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하는 고난이 만만치 않기에, 여기까지만 놓고 표면적으로 보면 윤슬기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직장내 성희롱의 피해자로서, 가해자에 맞서 싸우지만 그로인해 고난을 겪는 여성'이라는 캐릭터성이 구현되고, 윤슬기의 이러한 캐릭터성이 '페미니즘 영화'라는 논란의 단초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윤슬기의 '가해자'인 한정우는 해당 발언을 제외하면 딱히 도덕적 흠결이나 지탄받을 만한 반인륜적 행태를 보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도덕적이지만, 적당히 속물적이기도 한 지극히 평범한 인간군상으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인의 본업에 몰두하다보니 아내와 아이에게 무신경하고, 홀어머니 칠순도 안 챙기는 무심한 사람이긴 하지만 그건 부부간의 대화를 통해 해결을 볼 일이니까요. 오히려 항공사 기장이라는 고소득 전문직으로서 아내에겐 윤택한 생활비를 벌어다주고, 어머니와 동생의 집을 대신 사 주는 등 가장으로서의 역할엔 지극히 충실합니다. 딱히 불륜이나 외도를 저지른 것도 아니니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짓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한정우는, 윤슬기의 고발로 인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윤슬기가 고발한 해당 발언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과연 한정우가 그토록 호된 단죄를 받아야 할만큼 큰 죄악을 범했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닙니다. 한정우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지만, 해당 발언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나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한정우의 억울함은 극중에서 한정우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 표현됩니다.
"한정우가 그정도로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즉 한정우는 윤슬기가 그정도의 호된 단죄를 의도하지 않았을지언정, 윤슬기로 인해서 과도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윤슬기는 '회사 내 감사부서나 성평등 센터 등을 통해 합리적으로 단죄할 수 있었던 사안을, 섣불리 언론에 제보함으로 인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인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본인의 신념과 정의감 자체는 옳을지언정, 그 신념과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이 틀렸다는거죠. 소위 말하는 '사적 제재'를 가한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한정우의 발언(사실 윤슬기의 제보의 메인은 한정우가 아닌 한국항공의 노정무 상무의 발언이죠. 한정우는 적당히 맞춰주다가 선을 넘은 발언을 한게 곁다리로 끼어들어가서 같이 덤탱이 쓴거구요)으로 인한 사회적 이슈를 통해 한국항공의 경영권을 빼앗아오며 재벌가의 후계자 자리를 가져가려는 한에어(한국항공의 자회사 LCC)의 노문영 이사는, 직장내 성희롱으로 인해 남동생이 후계 구도에서 멀어진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한에어의 여자 기장 비중을 50%까지 올린다고 호언합니다. 그리고 성희롱의 공익제보자라 할 수 있는 윤슬기를 본인의 회사인 한에어로 스카웃하죠. 성평등 이슈가 발생한걸 본인의 호재로 활용하고자 성평등을 부르짖으며 이미지 메이킹을 하려는거죠.
하지만 정작 노문영 이사는 성평등과 페미니즘에 진심으로 관심을 갖지도 않을 뿐더러, 공익제보자 윤슬기를 면전에서 대놓고 꼽주기까지 합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정미의 정체가 들통날 수 있는 루머가 퍼지자 이슈를 돌릴 희생양으로 윤슬기를 기꺼이 제물로 삼습니다.
즉 노문영 이사는 같은 여성임이도 성평등이나 페미니즘에는 눈꼽만큼 관심도 없고, 오히려 남동생에게서 경영권을 빼앗아오기 위한 도구로서 이슈를 이용하는 철저히 계산적이고 속물적인 인물인 셈입니다. 정작 노문영 본인도 능력은 더 있으면서도 '여자라는 이유로' 회사의 메인이랄 수 있는 한국항공을 남동생에게 내주며 후계구도에서 밀려야했던 피해자이면서 말이죠. 친환경을 부르짖으며 정작 친환경과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이는걸 '그린 워싱'이라고 하듯이, 노문영 이사는 '페미니즘 워싱'이라고 할 수 있는거죠.
정리하자면, 한정우는 정의감만 앞선 윤슬기에 의해 언어적 성희롱이 과도하게 이슈화되며 지나친 단죄를 받은 피해자이기도 하고, 윤슬기는 합법적이고 순리적인 방법을 통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사적제재를 가한 가해자이기도 하고, 성평등 이슈에 진심은 전혀 없는 속물적인 노문영 이사(그것도 같은 여성이자 남혈통 우선주의의 피해자이기도 한)에게 이용만 당한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극중 절대적인 가해자와 피해자는 사실상 없다고 할수 있죠. 오히려 감독은 모든 인물은 복합적이고, 겉으로 보이는 모습 그 이면을 고찰해야하며, 그게 사회 군상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싶어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는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사회적 담론을 형성하거나 고발하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라, 철저하게 흥행에 초점이 맞춰진 '코메디 영화'라는거죠. 오히려 최대한 균형을 맞추려 상당히 영리하게 캐릭터를 구성한 감독의 고심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물론 아예 은유와 메시지를 절저하게 배제했다고 할 순 없습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오묘한 은유가 꽤나 많이 담겨있다고 느껴지네요. 윤슬기가 여장한 한정미에게 느끼는 감정은, 내부고발자로서 직장 내에서 배척당하고 멸시당하는 상황에서 찾은 친구일 수도 있지만 묘하게 레즈비언 느낌을 풍기고, 한정우의 여장은 남성이지만 여성의 복장을 하고 다니는 드랙퀸 혹은 트랜스젠더를 은유하기도 하며, 여자라고 하는데 어딘가 남성적인 아우라가 느껴지는 한정우에게 성적으로 이끌리는 서현석은 게이(혹은 바이섹슈얼)의 느낌도 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깊게 파고들면 그렇다는거지 메인 플롯과는 딱히 상관없는, 해석의 영역일 뿐이니 문제될건 더더욱 없을테구요.
결론 : 이 영화는 코메디 영화다. 페미니즘 영화라서 불편하다는건 불편러의 트집이다. 문제삼으려 들면 한도 끝도 없다. 그냥 재밌게 보면 된다.
첫댓글 파일럿판 걸캅스
그게 아니라는게 제 글의 요지인데 안 읽어보셨군요.
@민서애비명수 걸캅스는 페미니즘을 말 하는거처럼 보여도 일베스러운 꼰대 영화였고 영화도 그냥 대충 만든 희대의 망작이고 파일럿는 방금 보고 왔지만 클리세 범벅에 페미니즘을 이해 하려는척 하는 꼰대들의 변명 같은 영화라고 생각해서 걸캅스라고 한거고 사실 걸캅스와 파일럿은 비슷 하지만 다른 영화고 영화 퀄리티도 파일럿이 조금 더 나은 수준이긴 해요 하지만 2024년에 나올 만한 영화도 아니고 메세지도 너무 진부하고 뻔하죠
라이너가 평가한게 있는데 그게 정확하더라구요..
여자인척 하지만 여자인적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