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동부승지 정이한(鄭而漢)에게 이르기를,
"왜인·야인을 접대(맞아들여 대면하다) 하는 것은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은데, 평안한 것이 몸에 배어, 해가 오래고 날이 깊어, 모든 일에 게으르고 늦어질까 두려우니, 마땅히 삼가 조심하기를 항상 하루같이 하여, 혹시라도 조금도 허술함이 없도록 하라."
하고, 즉시 예조와 병조에 명하여, 해당되는 관리를 경계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이 앞서 임금의 몸이 완전하게 평복되지 못하여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사건을 아뢰지 않았으므로, 일이 지체되는 것이 많았는데, 이에 이르러 비로소 사건을 아뢰매, 모든 사무를 재결하는 데 처리하기를 물흐르듯 하되, 모두 끝까지 정밀하게 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밤 2고(鼓)에 이르러 도로 편치 않았다.
上謂同副承旨鄭而漢曰: "接待倭、野人, 所係匪輕, 忸於平安, 歲久日深, 凡事恐或至於緩弛, 當謹愼常如一日, 毋或少弛。" 卽命禮兵曹, 當該官戒飭之。 前此, 上體未盡平善, 承政院不啓事, 事多留滯, 至是始啓事, 裁決庶務, 處之如流, 皆極其精, 無異平日, 至夜二鼓, 復不豫。
- 세종 32년(1450) 2월 14일-
첫댓글 실질적으로 마지막 유언에 해당히는 지시사항이었네요. 왜인과 야인…
그렇죠. 조선왕조란 나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야인과 왜인을 경계하고 단속하며 살아온 나라인 셈이죠.
야인과 왜인을 잡으면서 태조이성계가 말그대로 경험치 쌓고 왕이 되었으며
야인과 왜인이 조직력을 갖추니까 양난이 나고
그 중 왜가 결국 조직력을 강화해서 조선을 삼킨뒤
그 씨앗을 뿌려 이완용, 박정희, 윤석열, 뉴라이트로 성장하게 했으니
우리 현대인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일겁니다.
아, 참고로 왜인은 일본인과 별개의 존재입니다. 왜인은 정확히는 왜구라고 할수 있겠죠.
일본인을 왜인이 지배하는 게 못해도 메이지 유신이래 일본의 형세라 할 수 있을겁니다.
추신: 현대 한국인들의 밑도 끝도 없는 탐욕도 왜정이 뿌린 씨앗이라 봐도 됩니다.
@밸틴1 태종때에 혼일강리역대국도를 제작했으니 그 세계지도를 보고 조선의 위치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4군 6진은 명과 만주 세력을 경계한 것이고 쓰시마 상륙전은 고려말부터 위세를 떨친 왜구들에 대한 경계. 할아버지때부터 두 세력 때문에 골머리를 알았고 자신이 죽고난 후에도 그런 일이 반복될까 그 염려로 한 업무지시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공화정의 반헌법세력들이 공산당 운운 하는 지능떨어지는 2분법적 사고와 공포를 조장하는 꼴을 보며 어떻게 왕정시대 왕들보다 세계정세를 못 보는지 한심해서 가져와 보았습니다. 우리도 명목상 20위 안에 들어가는 국가인데 리더급들이 한국 지도, 세계지도 및 지리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지도 궁금하네요.
@Red eye 그렇군요.
몽골제국의 트라우마, 북로남왜, 명청의 해금정책으로 인해 고립된 조선왕조가 어느정도 정세파악을 하였는데,
말씀대로, 남북한 지도자들의 정세파악 인식이 그 조선왕조의 절반도 못되는 거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