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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
일본 요코하마 출생으로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일본인 변호사 가지마 노보루(鹿島昇·1925년생)씨가 번역한 것으로 돼 있는 양장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국회도서관에서 접한 순간 기자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실크로드 흥망사’란 부제가 붙은 이 ‘환단고기’는 서기 1982년인 쇼와(昭和) 57년, ‘역사와 현대사(歷史と現代社)’를 발행인으로, ‘(주)신국민사(新國民社)’를 발매인으로 해서 도쿄에서 출간된 일본어 책이기 때문이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기자는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밝혀놓은 ‘환단고기’에 관심을 가져왔다. 위서(僞書)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지대한 영향 때문이다. 한글은 1443년 세종 때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문자는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정설이다. 한자(漢字)만 해도 갑골문에서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왔고 알파벳도 북셈문자와 페니키아문자를 거쳐 발전해왔다. 일본의 가나(假名)는 한자 초서 등에서 유래했지만, 일본에는 가나 이전에 고대 문자가 있었고 그것이 가나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조선 세종대에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 ‘원시 한글’이라 할 문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원시 한글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놀랍게도 환단고기는 그 해답을 제시한다.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라는 사람이 ‘삼성기’와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란 네 책을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녹도문과 가림토 문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에는 환웅이 신지 혁덕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적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환단고기를 연구해온 사람들은 “녹도문은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든 글자이고, 갑골문에 앞서 한자의 근원이 된 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녹도문이 어떻게 생긴 문자인지는 밝히지 못했다. 녹도문은 표의(表意)문자일 가능성이 높고, 환단고기는 그 모양을 그려놓지 못했으므로 녹도문을 원시 한글로 추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환단고기 단군세기는 세 번째 단군인 가륵(嘉勒) 2년, 가륵 단군이 삼랑 을보륵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로 된 지금의 한글과 아주 비슷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그 문자의 모양을 보여준다. 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은 단군세기를 인용해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리켜 ‘가림다(加臨多) 문자’라고 한다며 앞의 가림토와 같은 모양의 문자를 보여준다. 단군세기에는 ‘가림토’로, 태백일사에는 ‘가림다’로 한 글자가 다르게 표기돼 있지만, 환단고기는 원시 한글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세종 때의 집현전 학자들은 이 문자를 보고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이 아닐까. 학자들은 다 알고 있지만 국민은 모르는 아주 이상한 사실 하나가 있다. 삼척동자를 붙잡고 “고구려를 세운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열이면 열 “고주몽”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의 이름이 과연 고주몽일까? ‘고구려를 세운 인물은 고주몽이다’라고 밝혀놓은, 우리 민족이 펴낸 가장 오랜 사서는 ‘삼국사기’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요, 이름은 주몽이다’라고 기록하고, 바로 다음에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라는 주를 달아놓았다. 주몽은 추모로도 불릴 수 있고 중해로도 불릴 수 있다고 삼국사기는 분명히 밝혀놓은 것이다(원문 : 始祖東明聖王姓高氏諱朱蒙云鄒牟云衆解).
고구려 시조는 주몽인가, 추모인가
‘주몽’과 ‘추모’와 ‘중해’는 발음이 비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말은 중국어와 다르다. 신라시대 우리말을 한자로 적기 위해 ‘이두’와 ‘향찰’를 썼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에서도 유사한 방법으로고구려 말을 한자로 적었을 것인데, 어떤 이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적고, 어떤 이는 추모로, 또 어떤 이는 중해로 적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인들이 세 이름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했느냐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조 때인 서기 1145년 김부식이 편찬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것이 서기 668년이니,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패망한 때로부터 477년이 지나 만들어진 것이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또 하나를 살펴보자. 중국 길림성 집안에는 고구려 당대인 서기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우뚝 서 있는데, 이 비문은 ‘옛날 시조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나와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 당대에 세워진, 삼국사기보다 731년 앞선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이 ‘추모’로 기록된 것이다. |
지금 전해지는 삼국사기는 고려 때 김부식이 편찬한 바로 그 책이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삼국사기는 조선 태조 3년인 서기 1394년 김거두란 사람이 그때까지 전해진 삼국사기를 토대로 새로 목판을 만들어 찍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삼국사기는 빠진 글자가 있어 완독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 중종 때인 1512년 이계복이 김거두의 삼국사기를 개판(改版)해서 새로 찍어냈으며 이것이 오늘날 한글로 번역되고 있는 삼국사기다.
1512년에 인쇄된 삼국사기가 고구려의 사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고구려 당대에 세운 광개토태왕릉비가 사실에 가까운 진실을 더 많이 담고 있을까. ‘사실(史實)’은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조작될 수 있지만, 사람의 이름을 조작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더구나 광개토태왕릉비는 아들이 아버지를 자랑하기 위해 세운 것인만큼 시조의 이름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 시조 이름을 ‘추모’로 부르는 것이 옳은데, 현대에 나온 모든 사서는 동명성왕을 주몽으로 부르고 있다. TV 드라마까지 주몽으로 불러, ‘고구려 시조는 주몽’이란 인식이 고착화된 상태다.
한글의 뿌리를 연구해야
추모 이야기를 거론한 것은 첫째, ‘고구려 시조 이름을 당대 이름에 가깝게 바로잡자’는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고대 우리 민족이 쓰던 말을 한자로 옮기다 보면 다르게 적힐 수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삼국사기에 ‘북부여 속담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주몽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이 있으므로 추모와 주몽은 활을 잘 쏘는 아이를 뜻하는 고구려 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고구려 말 발음을 한자로 옮길 때 추모로 적을 수 있고 주몽, 중해로도 적을 수도 있다. 추모와 주몽, 중해가 발음이 비슷하듯 원시 한글을 뜻하는 ‘가림토’와 ‘가림다’도 발음이 흡사하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고려 말의 이암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고려 말 우리 민족은 가림토와 발음이 비슷한 원시 한글을 갖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글자가 조선 세종조의 집현전 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쳐 훈민정음이 탄생했을 수도 있다.
위서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주목받는 것은 정확성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옛날의 사실(史實)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적해볼 수 있는데, 요즘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이 밝혀지는 사실 중에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아주 많다. 그렇다면 가림토와 가림다 문자도 가벼이 넘길 수 없다. 집현전의 학자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사람이 입과 목을 이용해 발음하는 것을 보고 수년 사이에 훈민정음을 만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자는 쉽게 창안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학자들도 무엇인가로부터 힌트를 얻어야 역사적인 창조를 할 수 있다. 한글을 사랑하는 학자라면 한번쯤 환단고기의 진위부터 한글의 시원(始原)까지 모든 것을 연구해봐야 하지 않을까. 집현전 학자들이 환단고기에 제시된 가림토(가림다) 문자를 발굴해 그것을 토대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고, 그 가정이 옳은지를 추적해보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치우 등장시킨 환단고기
사실 환단고기를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축구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는 치우천왕이 그려진 엠블럼을 들고 나왔다.
언제부터 우리는 치우를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인물로 보게 됐는가. 치우를 단군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바로 환단고기다.
물론 1911년에 편찬된 환단고기에 앞서 치우를 우리 선조로 규정한 책이 있었다. 1675년(조선 숙종 1년)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쓴 사람이 펴낸 ‘규원사화(揆園史話)’가 그것이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사서(史書)가 아닌 사화, 즉 ‘역사 이야기책’이란 이유로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규원사화에 담긴 내용이 100% 허구일 가능성은 매우 작다. 일부는 분명 진실일 텐데 우리의 사학자들은 이를 위서로 단정짓고 아예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규원사화가 살려내지 못한 치우를 환단고기가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그것도 단군에 앞선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치우는 중국인의 조상?
그런데 치우가 우리 조상이 아니라 중국인의 선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다면 치우를 앞세우며 좋아했던 한국인은 정말 우스운 존재가 된다. 문제는 치우를 중국의 선조로 만들려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황제, 염제와 더불어 치우를 중국인의 3대 시조로 꾸미고 있다.
중국인을 가리켜 자칭, 타칭 ‘한족(漢族)’이라고 한다. 한족은 진시황에 이어 한(漢)고조 유방이 두 번째로 중원을 통일하고 난 다음에 생겨난 이름이다. 한나라가 등장하기 전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은 ‘하화족(夏華族)’이었다.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夏)나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하화족은 중국을 이룬 전설상의 인물인 3황5제 가운데 5제의 첫 번째 인물인 황제를 시조로 여긴다. 한민족 하면 단군의 후예를 지칭하듯, 하화족은 황제의 후손을 의미한다. 하나라는 5제 중 한 명인 우(禹)가 세웠다고 한다.
천·지·인의 3수론
오행론은 수화목금토 사이에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어느 것과 어느 것이 어떤 조건으로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음양론과 오행론이 공자를 태두로 한 유교에 흡수됐고, 그러한 유학이 한반도로 유입됐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꽃을 피우는데, 퇴계의 성리학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1567~1618)에 의해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 등에게 전파됐다. 그 영향으로 500여 년에 걸친 내전(전국시대)을 종식한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막부’는 퇴계의 성리학을 토대로 한 문(文)의 시대로 들어간다.
이러한 흐름이 있는 만큼 음양오행론은 한·중·일의 공통된 사유체계로 이해돼왔다. 이러한 사유체계를 거부하는 것이 천부경이다.
음양론이 음과 양 두 개의 수로 만물 변화를 설명한다면, 천부경적 사유체계는 천(天)·지(地)·인(人) 세 개의 수로 만물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다. 음양론은 두 개로 설명을 하니 대립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데, 천부경적 사고는 변증법의 ‘정-반-합(正反合)’ 이론처럼, 제3의 방안을 제시해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특징이다.
천부경의 우주관은 불교의 우주관과도 다르다.
주목할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을 뿐 중국이나 인도에서 나온 서적에는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천부경적 사유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학자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천부경’을 입력하면 김백호 최민자 수월제 이중철 김현두 김백룡 최동환 문재현 유정수 권태훈 조하선 윤범하 등 수많은 학자가 주해한 천부경 관련 서적이 뜬다.
현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에서 비롯됐다. 단군교는 1910년 대종교로 개칭했는데, 이때 나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단군교’라는 이름을 유지하며 떨어져 나갔다. 앞에서 밝혔듯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에 의해 처음 편찬됐으니 천부경은 그때 세상에 알려진 셈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종교와 단군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지 않았다. 대종교를 이끈 나철은 1916년 자살하고, 이듬해인 1917년 계연수는 대종교에서 떨어져 나간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제가 단군교를 없앰으로써 단군을 모시는 종교는 대종교만 남게 됐다. 이때 단군교를 따르던 많은 신자가 대종교로 넘어왔지만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55년이 흐른 1975년에 이르러서다.
가장 오래된 천부경은 환단고기의 천부경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민족종교인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예사로 볼 일이 아니다. 환단고기가 특정인이 지어낸 위서로 밝혀진다면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는데, 최치원은 ‘문창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은 최치원 사후 1000년 이상이 지난 1925년, 집안에 전해오던 최치원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이 ‘최문창후전집’에도 천부경이 실려 있다고 한다.
천부경은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는데, 최문창후전집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과 74자는 같고 7자가 다르다.
그러나 7자는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다른 한자가 아니라 거의 유사하게 해석되는 한자다. 이 때문에 천부경이 환단고기 쪽으로 전해지는 과정과 최치원 집안에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7자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조선 말의 기정진(奇正鎭·1798~1879)도 그때까지 구전되는 것을 전해 듣고 천부경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천부경은 기정진 선생의 제자의 제자인 김형택씨가 ‘단군철학석의(1957)’란 책에 남겨놓았다.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1자가 다르나, 역시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 세 가지 천부경 가운데 정본으로 여겨지는 것이 환단고기의 천부경이다. 대종교도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같은 글자의 천부경을 경전으로 인정한다.
세 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온 것이 환단고기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최문창후전집에 나오는 천부경과 단군철학석의에 나오는 천부경은 환단고기를 참고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천부경도 위서가 될 수 있다.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대종교와 천부경을 민족철학으로 여겨 해석한 학자들도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그런 상황인데도 한국 지식인들은 환단고기의 실체를 제대로 추적하지 않고 있다.
안타깝게도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4권의 책을 묶어 펴낸 환단고기는 지금 전하는 것이 없다.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편찬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1920년 중국 도교 전문가인 전병훈(全秉薰·1857~1927)은 ‘정신철학통편’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이 책 서문에 천부경 전문을 싣고 해석을 달아놓았다.
전병훈의 정신철학통편은 지금 전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천부경을 실은채 인쇄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계연수는 1911년 환단고기 필사본 30부를 만들었다고 하므로 전병훈은 이를 보고 출간을 앞둔 ‘정신철학통편’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세력 가운데 일부는 “환단고기는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먼저 출판됐다”고 주장했다.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는 없고 그의 제자라는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출판사를 통해 인쇄해 내놓기 전에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나왔다면 이유립은 거꾸로 일본판 환단고기를 베껴 한국에서 출판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한국 출판사에서 출간된 환단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 김은수씨의 ‘주해 환단고기’(가나출판사)와 임승국씨가 1986년 5월 정신세계사에서 내놓은 ‘겨레를 밝히는 책들-한단고기’이다. 임씨는 이유립씨와 함게 국사찾기 운동을 한 사람인데, 그는 ‘환단고기’가 아니라 ‘한단고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쓴 ‘실크로드 흥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환단고기’가 1982년 ‘역사와 현대사’에서 출간된 것으로 확인됐으니 기자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수밖에….
가지마 노보루가 출판한 환단고기가 일본인들이 창작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환단고기를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역사서’ ‘민족의 철학을 밝혀주는 지침서’로 흠모했다면 정말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이다. 다급해진 기자는 환단고기를 출간한 국내 출판사를 하나씩 접촉하며 어떤 경위로 이 책을 내게 됐는지 알아봤다.
환단고기는 참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앞에서 언급한 임승국씨의 한단고기(정신세계사) 외에도, 1987년 고려가라는 출판사가 다섯 권으로 펴낸 ‘대배달민족사’ 제1권에 실린 환단고기, 1989년 김은수씨가 주해해서 기린원이 펴낸 환단고기, 1994년 민족문화사 편집부가 출간한 환단고기, 1996년 계연수를 편자로 해서 한뿌리출판사에서 내놓은 환단고기, 1998년 코리언북스출판사가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해서 출간한 환단고기, 2000년 바로보인출판사가 문재현씨의 풀이로 내놓은 환단고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와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기자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원문(한자)과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의 원문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발견은 한편으로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해석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했다는 오해를 나을 수도 있으므로 기자의 마음은 다급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위서 시비가 있는 책인데….
조급함은 곧 불안감으로 증폭됐다.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에 접목시켜놓았기 때문이었다. 가지마는 일본 신도의 원류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는 모략위서(謀略僞書)다’라는 제목을 단 머리글에서 위서 시비가 있는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부인하며 환단고기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신도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反유교 反조선 기치 내건 개화기 일본
가지마는 어떤 생각을 했기에 일본 신도의 정통성을 바로 세운다며 환단고기를 출간한 것일까. 그 답을 찾아준 이는 서울 청운동에 있는 ‘국학연구소’의 김동환 연구원이다. 일본 신도를 연구하는 김 연구원은 가지마를 ‘의식 있는 일본의 재야사학자’로 정의했다. 김 연구원으로부터 일본 신도의 역사와 가지마 노보루의 역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도 일본에 가면 불교의 절과 신도의 신사(神社)가 함께 있는 것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조선 퇴계에서 비롯된 성리학적 세계관과의 결별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일본이 친(親)유교(성리학), 친(親)조선이었다면,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의 일본은 반(反)유교 반(反)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를 위해서는 봉건제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일본은 한반도로부터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에도 고유한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줘야 했고, 메이지(明治)시절 일본의 엘리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등 일본의 고유 자료를 강조했다.
이런 움직임은 성리학을 수용한 막부를 날려버리고 일본적인 것을 상징하는 천황 중심으로 뭉치자는 주장으로 이어져, 천황 숭배가 강화됐다.
일본 천황의 위패는 대개 신궁에 모시니 신도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본은 불교가 들어온 7세기부터 신사와 절을 공존, 융합시키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전통을 이어왔다.
신사와 절이 함께 있고, 가정에는 신도의 제단인 ‘가미다나(神棚)’와 불교의 제단인 ‘불단(佛壇)’이 함께 놓인 것이 바로 신불습합의 전통이다.
신도를 부흥하려 한 일본의 엘리트들은 불교도 봉건적이고 외래적인 것으로 보고 불상과 불경을 훼손하고 거부하는 ‘폐불훼석(廢佛毁釋)’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불교는 신도만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라 척결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엘리트들은 불교 탄압을 중단하고 신불습합을 인정하며 신도 부흥에 매진했다.
이 시기 일본은 총리대신 밑에 전국의 신궁과 신사를 관리하는 ‘신기국(神機局)’을 뒀다. 신기국은 일본서기와 고서기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작하는 일을 진두지휘했다. 일본을 한국보다 오래된 전통문화를 가진 나라로 바꾼 것이다. 신기국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도 일본의 토속신을 모시는 신궁과 신사를 만들게 했다.
“신국민과 만선사관을 위해 번역”
이러한 운동이 일기 전, 일본 신도를 부흥시킨 인물로 꼽히는 ‘고사기전(古事記傳)’의 저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1730~1801)가 일본 국학 부흥을 부르짖었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국민(國民)’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국민은 국가가 결정한 것을 그대로 따르는 민중이다. 이 때문에 군국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자 했을 때 일본인들은 이를 비판 없이 수용했다. 가지마 노보루는 비판 없는 맹종이 일본인에게 패전과 피폭(被爆)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할 때까지 일본 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을 패망시키고 군정을 실시한 미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킨다’는 원칙에 따라 새로 만든 헌법(평화헌법)에는 신기국을 둔다는 조항을 넣지 않았다. 이로써 일본 신도는 메이지 시대 이전처럼 자력으로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시절로 되돌아갔다. 이때 ‘신도를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한 일본인들은 ‘신도의 위기는 비판 없는 일본인의 근성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이들은 ‘국민’이란 단어에는 ‘무비판’과 ‘무조건 수용’의 뉘앙스가 담겨 있으니 이제 일본인은 국민이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인민임은 부정할 수 없어 ‘신국민’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일본의 지식인 가운데 한 명이 가지마 노보루다. 다음은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배운 창해출판사 전형배 사장의 의견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일본은 동북아를 무대로 한 역사 주체 가운데 방계에 해당한다. 일본은 동북아 역사 무대의 중심이 아니었지만 지금부터는 중심이 되자는 것이 신국민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다. 이는 미국과 영국의 관계와 비슷하다. 미국은 영국에서 갈려나온 방계이지만 지금은 영국을 제치고 세계의 중심이 됐다. 그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도 동북아의 주무대에서 갈려 나온 방계이지만 지금부터는 동북아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그 일을 할 주체세력으로 신국민을 설정했다. 한반도와 만주에 살던 형님이 못한 일을 섬에 살던 일본인이 대신해서 하자며, 신국민을 그 일의 중추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의지는 중국에 문화적으로 편입돼 있는 조선은 물론이고 아예 중국의 영토가 된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일본과 같은 역사를 만들어온 공간으로 삼자는 ‘만선(滿鮮)사관’과 궤를 같이한다. 만주와 조선에 있는 형님이 잃어버린 정신을 일본에 살던 동생이 대신 세우겠다는 것이 만선사관과 신국민에 담긴 의지다. 가지마는 그들의 뿌리를 찾기 위해 환단고기를 번역한 측면이 있다.”
“미국이 영국 대신하듯 일본이 한국을 대신한다”
신국민은 비판능력이 있어 나라가 결정한 것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 신국민은 메이지 시절의 엘리트가 조작한 일본 고대사를 객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가지마 노보루의 책을 출간한 ‘신국민사’다. 신국민사는 신도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일본 재야 사학자와 재야 국학자들의 모임이 됐다. 가지마는 이 모임의 핵심이기에 ‘환단고기’ 서문에 ‘일본서기와 고서기는 모략위서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가지마 노보루는 불교와 유교가 들어오기 전 한반도와 일본에는 고유한 종교가 있다고 봤다. 일본에서는 이를 신도라 하고 한국에서는 선도(仙道)라 하는데, 가지마는 일본의 신도와 한국의 선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여겼다. 중국에서는 유교 외에 신도나 선도와 비슷한 도교(道敎)가 생겼는데, 이 셋이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게 가지마의 생각이다.
‘鬼道 檀君敎’
가지마는 한·중·일 3국의 토속 종교 간의 영향을 분석하는 것이 일본 신도의 이론을 세우고 발전시키는 초석이라고 여겨 한국인보다 먼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한 것이다. 그 후 가지마는 역시 신국민사를 통해 ‘신도이론대계(神道理論大系)’라는 신도 교과서를 펴냈는데, 여기에서 그는 한국의 선도를 연구한 속셈을 분명히 밝혔다. ‘신도이론대계’의 제5장은 ‘신교오천년사(神敎五千年史)’란 제목인데 여기에 ‘귀도 단군교(鬼道 檀君敎)’란 문구가 있다. 가지마는 홍암 나철이 만든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정의한 것이다. 그리고 단군교는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도 규정했다. 고대에는 일본의 신도가 한반도의 선도나 중국의 도교로부터 영향을 받았겠지만 근대에는 거꾸로 일본의 신도가 한국과 중국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 가지마 노보루의 주장이다. 만주와 조선은 일본인의 역사공간이라는 만선사관으로 무장한 일본의 우익을 우리는 어떤 논리로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그리고 중국의 동북공정은 또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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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 연구원에게서 가지마 노보루 이야기를 들은 기자는 취재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환단고기의 위서(僞書) 여부를 밝혀보려던 목적은 잠시 접고,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먼저 번역 출간한 이유부터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국내에서 나온 대부분의 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란 인물이 환단고기를 편찬했고 이유립이 이를 세상에 전달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계연수와 이유립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어 두 사람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한 것이다. 환단고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계연수는 실존인물이 아니거나 가명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또 다른 일부는 “이유립이 우회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극할 요량으로 가지마에게 먼저 환단고기를 건네줬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이유립도 실존인물이 아니다. 가지마가 환단고기를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허위로 이유립이라는 인물을 내세웠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 시급했다. 계연수는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911년대의 사람으로 이미 고인이 됐을 것이니 이유립의 실체부터 추적해보기로 했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전했다는 이유립을 어떻게 찾아야 하나. 기자는 환단고기를 펴낸 출판사를 상대로 이 질문을 던졌는데, 1996년 환단고기를 출간한 바 있는 한뿌리출판사의 권태흥 대표가 “이유립을 알고 싶으면 창해출판사의 전형배 사장을 만나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주었다. 전형배 사장을 만나면서 이유립에 대한 의문은 눈 녹듯이 풀리게 되었다. 전형배(全炯培·48) 사장은 보성고, 고려대 정외과 79학번 출신의 출판인이다. 전 사장은 1998년 창해출판사의 자회사로 ‘코리언북스’를 만들어 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한 ‘역주본(譯注本)·장구본(章句本)’이라는 부제를 단 세 권짜리 ‘환단고기’를 내놓은 바 있다(장구본은 환단고기를 장과 구로 나눠 정리했다는 뜻).
5·16 반혁명 사건 연루자 박창암
그는 “환단고기와 이유립에 대해 알고 싶다”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고교 시절 그는 역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동북공정 문제가 불거진 지금은 간도가 어디인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엔 간도가 어디에 있는 땅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사시간에 그는 선생님에게 “간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가 “시험을 앞둔 놈이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쥐어박혔다고 한다. 국사 선생도 간도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 그는 국사 찾기운동을 펼치는 박창암(朴蒼巖·1921~2003, 육군 준장으로 예편)씨가 펴내는 월간지 ‘자유’를 접하게 됐다. 박씨는 아호를 ‘만주’라고 정할 만큼 간도를 비롯한 고구려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남 북청 태생으로 만주국립연길(간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의 조양천(朝陽川)초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1943년 만주국 군대인 간도특설대에 입대했다. 간도특설대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공산게릴라를 추적하기 위해 만주국이 조선인을 뽑아 만든 대(對)게릴라전 부대였다. 지금은 간도특설대가 공산게릴라뿐 아니라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독립군까지 탄압했다고 해서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튼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씨는 이후 흔들리지 않고 강력한 반공(反共) 외길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평양에서 협신(協新)공업학교 교사를 하다 서울로 옮겨 1949년 육군 중위로 임관해 6·25전쟁을 치르게 됐다. 전쟁 중 그는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과 대북 심리전 분야에 주로 참여했다. 이러한 그가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다. 그는 5·16에 주체세력으로 참여해 구정권의 부패를 날리는 서슬 시퍼런 ‘혁명검찰부’의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2년 후인 1963년 3월11일 김재춘씨가 이끄는 중앙정보부는 그가 반혁명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5·16 당일 박정희 소장과 함께 해병대를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건너 쿠데타를 성공시킨 김동하 예비역 해병대 중장과 박임항 예비역 육군 중장, 이규광 예비역 육군 준장(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인 이순자 여사의 삼촌) 등 5·16 핵심 멤버가 그와 함께 5·16을 뒤집는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유립과 박창암의 만남
박정희 세력이 아직 민정(民政)으로 이양하지 않은 시점에서 터져 나온 이 반혁명사건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 사건은 ‘군사혁명을 통해 목적한 바를 성공시켰으니 이제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자’는 세력과, ‘군사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차제에 군복을 벗고 정부를 이끌어 군사혁명의 취지를 강화하겠다’는 박정희 세력 사이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법정에 선 박창암씨는 “혁명의 목적은 달성됐으므로 군은 당초의 약속대로 참신한 민간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한다”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맹비난했다. 재판부는 박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으나 1년 후 그는 형 면제처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교도소에 있는 사이에 박정희는 대장으로 전역하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박씨 등에게 형 면제처분과 함께 복권 조치를 취했다. 교도소에서 나온 박씨는 박정희 정부와는 거리를 두고 그가 생각해온 철학을 관철하기 위해 1968년 사재를 털어 월간 ‘자유’지를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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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은 고래부터 전해오는 우리의 선도(仙道)사상에도 상당히 정통해,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첫 번째 책인 ‘단군세기(檀君世紀)’를 썼다. 단군세기는 단군이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대통령’처럼 무려 47대를 내려간 직책 이름이라며 47대 단군 이름을 낱낱이 밝혀놓은 것이 특징인데, 셋째 단군인 가륵 시절 한글과 모양이 아주 흡사한 가림토 문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단군세기에 들어 있다. 한마디로 이암은 유·불·선(儒佛仙) 3교를 두루 섭렵한 인물인데 그는 유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학맥에서는 배제되었다. 이에 대해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영규씨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암은 일찍이 성리학을 받아들인 학자다. 그의 제자가 고려 말 삼은(三隱) 가운데 한 명인 목은 이색인데, 이색은 고려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내며 훗날 조선의 이념을 세우게 되는 많은 유학자를 길러냈다. 따라서 조선의 성리학은 이암-이색의 학맥을 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면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암과 이색을 조선 성리학 계보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조선 유학을 이어준 인물로 선정했다. 사림파는 명분에 집착하는 정도가 강했으므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선 개국에 반대한 정몽주를 그들의 스승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의 사림파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는 이암과 이색이 유학만을 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된 것 같다. 작은아버지가 스님이었던 이암과 그의 제자인 이색은 불가(佛家)에 대해서도 많은 글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은 성리학 일색으로 점철된 사회였지만, 고려 말은 사상적으로 아주 분방한 사회였다. 이 때문에 이암은 전통적인 사서와 사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란 이후의 조선 유학자들은 성리학 일색으로 가면서 우리의 고유 사상과 역사를 배척했다. 이암이 조선 유학의 맥에서 배제된 것과 그가 쓴 단군세기가 주목받지 못한 것은 조선 유학자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학을 공부했지만 조선을 이끈 정통 유학자 계보에서는 제외된 이암. 이것이 집안의 운명이 되면서 고성이씨 집안은 비(非)유교적인, 다시 말하면 우리 고유의 선도적인 것을 이어 나가는 계기를 잡은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이암의 현손(玄孫)으로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 활약한 학자인 이맥(李陌·1455~1528)의 등장으로 확인되는데, 이맥은 환단고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책인 ‘태백일사(太白逸史)’의 저자다.
북방사 위주로 정리한 이맥의 태백일사
태백일사는 삼신오제본기-환국본기-신시본기-삼한관경본기-소도경전본훈-고구려국본기-대진국본기로 구성돼 있다. 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는 우리 민족 중심의 천지창조를, 환국본기(桓國本紀)는 7대에 걸친 환인이 이끈 환국(하늘나라) 이야기를, 신시본기(神市本紀)는 환웅이 세운 배달나라 신시 역사를,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는 단군조선과 함께 3조선을 이룬 막조선과 번조선 역사를,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담고 있고, 고구려국본기는 고구려 역사를, 대진국본기는 발해 역사를 담고 있으니, 태백일사는 환단고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웅이 이끈 신시 시대에서 고구려 사이에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이 있어야 하는데 그 부분은 빠져 있다. 왜 이맥은 고조선사를 빼놓은 채 태백일사를 쓴 것일까. 이유는 고조부인 이암이 ‘단군세기’란 이름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정리해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맥은 태백일사를 통해 고조부가 정리하지 못한 단군조선 이전 역사와 단군조선 이후의 북방사를 정리했다. 이와 관련, 이유립으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은 전형배 사장은 약간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과 삼한은 3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태백일사다. 세 조선 가운데 가장 중심인 조선이 단군이 이끈 ‘신조선’(만주에 위치)인데, 신조선에 대해서는 고려 말 이암이 단군세기로 정리한 바 있다. 이암은 나머지 두 개 조선인 ‘말한조선’(한반도에 위치)과 ‘번한조선’(중국 요서지역에 위치)에 대해서는 정리하지 못했다. 이맥은 고조부인 이암이 정리하지 못한 나머지 두 조선의 역사를 삼한관경본기에 정리함으로써, 세 개 조선으로 구성된 고조선사를 완성했다.” 그러나 이맥은 고구려와 함께 존재한 신라와 백제의 역사는 물론이고 발해와 동시대를 이룬 통일신라사를 태백일사에서 빠뜨렸다. 이맥은 조선이 고구려와 발해사에 주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누락된 역사인 북방사 위주로 역사를 밝혀놓았을 수 있다. 이맥이 이러한 선택을 한 데는 그의 집안 내력과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
이암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고려는 아직 성리학이 뿌리내리기 전의 나라인지라 우리 고유의 사상을 공부해도 무방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토대가 있었기에 불교식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과 서경(평양) 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묘청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다. 이암은 요즘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시중의 지위에 오른 인물인데 그가 불교와 선도를 공부한 것은 고려 말의 사상적 유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세조·예종·성종 때의 고대 사서 수거령
이러한 사상적 유연성은 성리학만을 숭상한 조선시대로 들어가면서 꽉 막히게 된다. 조선은 세조와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아주 강력한 ‘고대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고대 사서’란 성리학적 관점이 아닌, 우리 민족의 관점에서 우리 역사와 철학을 기록해놓은 책으로 추정된다. 1469년의 일을 기록한 예종실록에는 ‘서울에서 고대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는 10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갖다 바치고, 지방에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의 관가에 바쳐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다…’는 내용이 있다. 이맥은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과 중종 때 암행어사 등으로 활약한 인물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려진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의 고조부인 이암의 예로 볼 때 이맥의 집안에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대 사서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맥은 지금은 실전(失傳)된 발해사 기록물인 ‘조대기’ 등 많은 책을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다. 그는 고대 사서를 관가에 바쳐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 이러한 사서를 인용해 태백일사를 지었을 수도 있다. 조선은 중국 은나라 사람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을 이었다고 자칭한 나라인지라, 평양에 기자묘와 기자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렸다. 기자 조선이 평양에 있었다고 한 것은 그 후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는 한반도였다’는 ‘반도(半島)사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반도사관을 형성하면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대륙)에 저항하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자처하게 된다. 만주 대륙은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가 아니라는 반도사관은 지금까지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이맥은 일찍이 반도사관을 거부하며 대륙사관을 수용한 인물이다. 태백일사를 남긴 이맥의 손자가 조선 인종·명종 때 활동한 이방(李滂)이다. 이방은 인종 1년인 1545년 국경지방인 평안도 삭주도호부의 부사로 발령받았다. 고성 이씨 종중의 이영규씨는 “우리 집안에서는 이방이 삭주도호부 부사로 부임한 것을 좌천성 인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기의 문인이었던 계연수
이방은 삭주에 눌러 살며 자손을 잇게 됐는데, 그로부터 20세손이 바로 계연수로부터 환단고기를 받아 세상에 내놓는다.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게 된 데는 조선말에 활동한 또 한 명의 고성 이씨인 이기(李沂·1848~1909)가 큰 역할을 했다. 이기도 단군세기를 남긴 고려말 이암의 후손인데, 그의 선조가 전북지방으로 이주해 그는 김제에서 태어났다. 이기는 ‘호남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한다. 이기는 민씨 정부를 쳐부숴야 한다며 동학을 일으킨 전봉준을 만났으나 김개남과 의견이 갈려 떨어져 나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농민군이 양반을 욕보이고 민가를 약탈하자 그는 거꾸로 농민군 토벌에 앞장서 공을 세운다. 1902년부터는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국가를 바로잡으려면 민족 내부의 적부터 제거해야 한다’며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해, 을사 5적을 죽이자는 선언문과 ‘악인(惡人)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적은 ‘참간장(斬姦狀)’을 만들어 돌리다 체포돼 1년간 진도로 유배됐다. 그리고 1909년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와 단학회를 세우고 얼마 후 사망했다. 이러한 이기의 문인이 바로 1911년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이맥이 쓴 태백일사는 이기에게서 얻었다’라고 밝혔다. 계연수는, 자신의 집안에 안함로가 쓴 ‘삼성기’가 있는데 이것과 평안도 태천에 사는 백관묵 진사에게서 구한 ‘삼성기’를 합쳐 ‘삼성기전(三聖紀全)’을 만들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또한 계연수는 이암이 쓴 ‘단군세기’는 태천의 백관묵 진사와 삭주 뱃골에 사는 이형식 진사에게서 얻었는데, 두 책은 한 글자도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고 기록해놓았다. ‘북부여기’는 범장이 지은 것인데 단군세기를 전해준 태천의 백관묵 진사에게서 얻었다고 밝혀놓았다. 이어 계연수는 이기 선생의 감수를 거쳐 자신이 환단고기로 옮겨 적었고, 홍범도와 오동진이 자금을 마련해 환단고기를 인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계연수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계연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전형배 사장은 계연수가 실존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데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1969년 성창호씨가 펴낸 ‘해동인물지(海東人物志)’란 책을 보여줬다 이 책의 ‘곤(坤)’권에 계연수가 등재돼 있는데 이를 옮기면 이렇다(사진 참조). |
‘계연수(桂延壽)의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다.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년)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년)에 만주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 군데가 틀렸다. 첫째는 무술년에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간행했다는 부분인데,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묶어 환단고기를 낸 1911년은 신해년이다. 둘째, 계연수가 태백유사 등을 간행했다고 했으나 계연수는 태백유사가 아닌 태백일사를 환단고기 안에 집어넣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월5일) 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 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환단고기는 신해년(1911)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해동인물지에서 계연수가 몸을 의탁한 것으로 돼 있는 이상룡은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는 독립운동가인데, 그 또한 고성 이씨였다. 환단고기는 고성 이씨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
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여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남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세,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6·25전쟁이 났을 때 금산의 산속에 있는 집 헛간을 빌려 피난 살림을 했는데, 그만 불이 나 살던 집이 타버렸다. 그때 남편이 보던 책들도 타버렸는데 그 일로 인해 남편은 석 달을 앓아누웠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갖고 다녔는데, 아마 다른 곳에 숨겨놓은 것을 가져왔거나 아니면 그의 머릿 속에 기억해놓은 것을 꺼내 새로 썼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집 앞에 무궁화를 심고 무궁화꽃을 책갈피에 끼워두는 버릇도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정부 시절 이유립은 이씨 왕조를 보존하자는 주장을 펼치다가 왕정주의자로 몰려 구금됐었다고 한다. 그리고 5·16군사정변이 일어나던 해에도 예비검속에 걸려 또 한 차례 구금됐다고 한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
이유립은 피난지인 금산에서 화재를 당한 것말고도 대전을 거쳐 성남에 살던 시절 수해를 당해 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으니 그의 환단고기는 머릿속에 암기한 것이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필사해놓았던 환단고기일 가능성이 크다.
대전에서 생활할 때 이유립은 책만 읽었으므로 생활은 부인이 책임져야 했다. 신 할머니는 구걸에서부터 행상까지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먹여살렸다고 한다. 생활이 궁핍했던 만큼 이들은 자녀들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했다.
대전에서 살 때 이유립 선생은 국사광복을 외치는 전단을 만들어 돌렸다. 그로 인해 조금씩 주목을 받다가 1970년대 간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던 박창암씨와 연결돼 월간 ‘자유’에 역사 문제에 대한 글을 대량 기고했다. 그리고 의정부로 올라가 지내다 막 고려대에 입학한 전형배 사장 등 젊은 사람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역사를 가르쳤다.
월남한 이유립씨에게서 오래전부터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사람 가운데 오형기(吳炯基·10여 년 전 작고)씨가 있다. 오형기씨는 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이유립씨보다는 10여 세 연하였다고 한다. 그는 친형이 좌익활동을 하다 사살된 이력이 있어 은거해 살면서 이유립씨에게서 역사와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전형배 사장은 “이유립 선생은 월남한 직후인 1949년 오형기씨에게 그가 갖고 온 환단고기를 필사하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환단고기 필사를 마친 오형기씨는 환단고기 말미에 ‘환단고기발(桓檀古記跋)’이라는 제목의 발문을 써놓았다. 이유립씨와 제자들은 서기(西紀)는 물론이고 단기(檀紀)도 쓰지 않았다. 연도를 적어야 할 땐 환웅이 신시(神市)를 연 때를 기준으로 한 ‘신시개천’ 연호를 사용했다. 1949년은 60갑자로는 을축년이고 신시개천으로는 5846년이다. 오형기씨가 쓴 ‘환단고기발’에는 이렇게 해석되는 한문이 적혀 있다.
‘을축년(1949년) 봄 나는 강화도 마리산(마니산)에 들어가…정산(이유립의 호) 이유립씨로부터 환단고기를 정서하라는 부탁을 받고…신기개천 5846년 을축 5월 상한(上澣·상순이라는 뜻) 동복 오씨 오형기 발(乙丑春余入江島之摩利山…李靜山裕?氏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神市開天五千八百四十六年乙丑五月上澣同福吳炯基跋)’
조병윤씨의 환단고기 인쇄 사건
이유립씨와 오형기씨가 모두 고인이 된 지금 이유립씨가 오형기씨로 하여금 필사본을 만들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오형기씨의 필사본이 있었기에 화재와 홍수로 환단고기를 잃은 이유립씨는 이를 다시 복원해낼 수 있었다. 전형배씨를 비롯해 이유립씨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오형기씨의 필사본을 복사하거나 영인해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있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 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1970년대 말 이유립씨에게서 우리 역사와 한문을 배운 제자 가운데 선린상고 출신으로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하던 조병윤(趙炳允·1956년생)씨가 있다. 신시개천 5876년인 서기 1979년 조병윤씨가 아주 ‘큰 사건’을 일으켰다. 이유립 선생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박기엽(朴琪燁)씨가 이끄는 광오이해사(光吾理解社)를 통해 오형기씨가 필사한 환단고기를 영인 인쇄 출판하면서 판권란에 그 자신을 단단학회 대표로 적어놓은 것이다.
이유립씨는 허락도 없이 영인 인쇄를 한 데다 단단학회 대표를 자칭한 조병윤씨에 대해 파문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병윤씨는 승려가 됐다고 한다. 이러한 사단을 겪었지만 조병윤씨가 출간한 환단고기는 외부로 전파됐다.
이 같은 사실은 정연종씨가 쓴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조이정 인터내셔날, 1996)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환단고기는 1948년(1949년을 잘못 적은 듯) 필사본 초판이 나오고 1979년 재판이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조병윤씨가 환단고기를 출판한 후 이유립씨는 전형배씨에게 오형기씨의 발문을 제외한 환단고기 100부를 영인 인쇄하게 했다. 그러나 오형기 필사본이 안고 있는 오자는 일부만 수정한 채로 영인 인쇄했다는 것이 전씨의 증언이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오형기씨 발문이 달린 환단고기와 오형기씨 발문이 삭제된 환단고기 두 종류가 등장하게 됐다. 전형배씨의 말이다.
“한자 중에는 모양이 비슷한 것이 많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무자(戊子)년을 무오(戊午)년으로 적을 수 있다. 오형기씨의 환단고기에는 이러한 오자가 있는데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풀어줄 때 구두로 이러한 오자를 수정해주셨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환단고기의 70~80%가 오형기씨 발문이 달려 있는 책을 원문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세상에 내놓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오자도 수정하지 못한 것이다. 선생은 환단고기가 후세에 잘못 전해질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오류는 연도인 숫자를 적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는데, 숫자 오류는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 위서 시비를 일으키는 주 원인이 될 수 있다. 환단고기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면 이유립 선생이 오자를 고쳐주고 주석해준 것을 토대로 번역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는 1982년 가지마 노보루가 환단고기를 번역 출판하기 전인 1979년과 1980년 환단고기의 영인 인쇄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지마는 두 책 가운데 어느 것을 원본으로 삼았을까.
가지마의 환단고기에는 그가 구한 환단고기의 원문 사본(寫本)이 실려 있는데, 이 사본은 오형기씨 필사본과 모양이 똑같고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어 있었다. 이로써 가지마는 한국에서 오형기씨의 발문이 붙은 조병윤씨 발행 환단고기를 입수했다는 것이 확인됐다.
“박창암씨가 가지마에게 원고 전달”
그러나 거기서 취재를 멈출 수는 없었다. 가지마의 환단고기에서는 원문이 실려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원문을 일본어로 번역해놓은 것이 실려 있다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형기씨 본(本)을 구한 가지마는 자신의 한문 실력으로 환단고기를 번역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누군가가 풀어준 것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일까. 이 의문도 전형배씨가 해답을 주었다.
“이유립 선생은 우리에게 환단고기를 우리말로 풀어주는 강의를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우리말로 번역과 주석을 해놓은 원고도 갖고 계셨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유립 선생은 이 원고를 ‘자유’지 발행인인 박창암 장군(2003년 작고)에게 줬고, 박 장군이 이 원고를 가지마에게 줬다. 이유립 선생은 자신의 원고가 일본으로 간 것을 알고 나로 하여금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를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했다.
내가 박 장군을 찾아가 ‘원고 주인이 돌려받고자 한다. 출판되지 못하는 원고라면 빨리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고 하니 박 장군은 화가 나서 내 정강이를 걷어차려고 발길질까지 했다. 박 장군은 이유립 선생이 주해한 환단고기를 일본어로 내준다는 조건을 걸고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긴 것으로 안다. 그 난리를 치고 나서 원고가 돌아왔는데, 돌아온 것은 이 선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라 복사본이었다.
선생님의 원고를 가져간 가지마는 대종교를 배신한 강모씨의 설명을 덧붙여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 선생은 박창암 장군과 결정적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박 장군도 결국 가지마에게 당한 셈이다.”
“환단고기에는 誤字가 있다”
한문은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시중에는 한때 이유립씨에게서 환단고기를 배운 사람이 이씨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주해한 것과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해한 것 등 여러 종류의 주해본이 나와 있다. 전형배씨는 이렇게 말한다.
“환단고기에는 분명 오자가 있을 수 있다. 환단고기로 묶인 네 종류의 책은 비밀리에 전수된 것이라 필사로 전해져왔다. 필사를 하다 보면 글자를 잘못 적거나 한두 줄을 통째로 빠뜨리고 옮겨 적을 수 있다. 이러한 책 네 권을 모아 다시 계연수 선생이 편집하고 이기 선생이 감수한 최초의 환단고기 30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남한(한국)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도 남아 있지 않고, 오직 이유립 선생이 1949년 오형기 선생에게 필사시킨 것만 전하고 있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 강의를 하며 오형기 선생 필사본의 오자를 바로잡아주셨지만, 환단고기에는 이유립 선생도 알지 못한 오자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오류는 계연수 선생이 필사한 환단고기나 이맥 선생 등이 저술한 태백일사 원본이 발견돼야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러한 책이 북한에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해보는 수밖에 없다.”
가지마에게 원고를 넘겨준 사건을 계기로 이유립씨는 박창암씨와 멀어지고 새로운 사람과 만난다. 그가 새로 만난 사람 중에는 군인 출신과 5공화국의 실세들이 있었다. 이유립이 ‘자유’지를 통해 잃어버린 고대사를 밝히던 1980년, 서점가에서는 김정빈씨가 권태훈씨 일대기를 토대로 쓴 소설 ‘단(丹)’이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또 박창암을 모델로 삼아 김태영씨가 쓴 소설 ‘다물(고토를 회복하자는 고구려 말)’도 큰 인기를 모았다.
5공 실세, 군부와 연결된 이유립
이런 분위기에서 우리 것을 되찾으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일어나면서 5공 실세와 군인들이 이유립을 찾게 됐다. 이유립을 만난 5공 실세는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1983년 5공화국은 ‘국풍(國風) 83’이라는 행사를 벌였는데, 이는 이유립씨의 영향을 받아 5공 실세들이 마련한 민족주의 이벤트였다. 군인들은 이씨의 역사 강의를 주로 들었다.
1980년까지 이유립은 의정부 자일동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는데 그의 형편을 안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그를 서울 상계동으로 모셨다. 의정부 시절의 이유립씨에 대해 전형배씨는 “한겨울 끼니가 없어 사모님이 라면을 끓여놓고 일을 나가셨는데, 집이 워낙 추워서 점심때가 되면 삶은 라면이 꽁꽁 얼어 있었다. 이 선생은 이 얼음 라면을 깨서 점심과 저녁으로 드시며 공부를 하고 후학을 가르치셨다. 어렵게 사는 것에 단련이 되어서인지 외풍이 센 방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4년 개천절 때 이유립은 배달문화상을 받고 제자들 덕분에 김포를 거쳐 서울 화곡동에 살게 되었다. 화곡동 시절 이유립은 군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그들에게 우리 역사를 자주 강의했는데 그로 인해 군에서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다물회’가 만들어졌다.
이때부터 전형배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이씨의 문집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인들의 도움으로 전형배씨가 김낙천(金洛天) 고려가 사장을 만나 부탁을 하자, 김 사장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니 득실을 따지지 말자”며 즉석에서 이유립 문집을 내는 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환단고기는 물론이고 ‘자유’지 등 여러 곳에 쓴 이유립의 글을 모아 5권짜리 ‘대배달민족사’ 출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 차에 강의를 하던 이유립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며 타계했다(1986년 4월18일). 그의 타계는 ‘독립유공자 이유립옹 별세’라는 제목으로 도하 언론에 보도됐다.
이석영씨 도움으로 강화도에 단단학회 건물 마련
생전의 이유립 선생과 교류하던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이유립 선생은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이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개천민족회’를 이끄는 송호수 박사다. 경신년은 서기로 1980년이다.
일각에서는 조병윤씨도 이 말을 들었기에 1979년 환단고기를 인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전형배씨는 “계연수 선생이 경신년에 환단고기를 세상에 내라고 했다는 말을 외부인에게서는 들은 적이 있어도, 이유립 선생으로부터는 그러한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생전에 이유립은 5·16 군사정변을 예언한 명리학자이자 ‘사주첩경’ 저자로 유명한 같은 고성 이씨의 이석영(李錫暎·1920~1983)씨와도 깊은 유대관계를 맺었다. 이유립은 참성단이 있는 강화도 마니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는 이 산을 ‘마리산’으로 불렀다. 그는 이석영씨의 도움으로 마리산 입구에 건물을 짓고 ‘단단학회’ 간판을 내걸었다.
이기와 이유립의 스승인 계연수는 단학회를 이끌었다. 계연수의 스승인 이기는 단군교 창립에 가담했다가 떨어져 나왔는데, 그후 대종교로 나가지 못한 세력이 유지한 단군교는 일제에 의해 폐쇄됐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제에 의해 폐교 위기에 몰린 단군교를 단학회에 다시 합친다는 뜻으로 광복 후 이유립이 만든 것이 바로 단단학회(檀檀學會)다. 마리산에 허름하긴 하지만 단단학회 건물을 만든 이유립 선생은 열정을 갖고 ‘커발한 개천각(開天閣)’을 지었다. 커발한은 ‘커다랗고 밝고 환하다’는 것을 축약한 우리말로 개천각을 묘사한 말이다. 환단고기는 환인을 인류를 만든 하느님으로, 환웅을 우리 민족의 계조로, 단군은 우리 민족을 토대로 국가를 만든 시조로 그렸다. 이 때문에 이유립은 우리 민족은 환웅부터 모셔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이유립은 개천각 중앙에 환웅을 놓고 그 왼쪽에 치우, 오른쪽에 단군을 놓았다.
금나라 시조 모신 커발한 개천각 커발한 개천각에 모신 인물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금나라 시조인 아골타다. 중국 정사(正史) 모음인 25사(史) 가운데 하나인 ‘금사(金史)’ 등은 아골타를 고려 사람 또는 신라 사람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금나라는 송나라와 함께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압박하다 몽골초원에서 일어난 원(元)나라에 패망했다. 이러한 금나라의 후예인 누르하치가 조선 중기 때 만주에서 ‘후금’을 세웠고 뒤를 이은 아들(태종)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중국과 조선을 지배해 들어갔다. 최근 재야사학계에서는 금과 후금-청을 우리 민족의 역사에 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고 있는데 이유립은 일찌감치 금 태조를 커발한 개천각에 모심으로써 금과 후금-청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킨은 것이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아골타가 대금제국 태조인 ‘대성무원(大聖武元) 황제’라는 이름으로 모셔져 있다.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커발한 개천각과 단단학회는 무속인들의 기도처가 됐다. 마니산은 기가 센 곳으로 알려져 무속인들이 기도처로 삼고 싶어하나,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있어 기도처를 지을 수 없다. 이러한 무속인들의 사정과 심각한 생활고에 직면한 86세의 신매녀 할머니의 사정이 맞아떨어지면서 단단학회와 커발한 개천각은 무속인들이 거처하며 기도를 올리는 공간이 된 것이다. 생전의 이유립 선생은 단군이 무속인들의 기도 대상이 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는데 불행히도 현실은 그가 바라지 않던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중국의 동북·탐원·단대공정과 일본의 만선사관
이유립을 추적하면서 기자의 머리에서 맴돈 의문은 ‘왜 우리 사회에서 이유립은 가공 인물이라는 주장이 나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 재야사학계에서 거론되는 주장은 대부분 환단고기와 맥을 같이한다. 환단고기는 우리 민족의 무대가 반도와 대륙이었다는 ‘대륙 사관’으로 씌어졌다. 반면 일제 때 시작된 과학적인 강단(講壇)사학은 조선시대부터 등장한 ‘반도사관’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제작된 청동기가 출토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24~20세기에 청동기 문명이 꽃핀 흔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요하 상류에서는 기원전 25~20세기에 만들어진 청동기문명과 그 이전에 꽃핀 신석기 후기문명 유적이 발굴되었다. 중국 문명은 황하문명을 뿌리로 한다. 황제족과 염·황족, 하화족은 모두 황하나 황하 중하류의 중원(中原)을 무대로 삼았다. 그런데 황하문명보다 500여 년 이상 오래된 요하문명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역사학계는 요하문명도 중국 문명의 일부이고 황하문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의 연장선에서 중국은 요하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이는 치우를 황제, 염제와 더불어 중국의 조상이라며 ‘중화 3조당’을 지었다. |
그러나 요하 상류에서 발굴되는 청동기는 황하가 아닌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다. 고인돌의 분포 역시 그곳에서 시작돼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됐음을 보이고 있다. 요하문명의 주력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모는 매우 비슷하지만 언어는 전혀 다른 것을 쓰고 있다. 언어학적으로 따진다면 한국과 가까운 것은 일본이다.
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인종인데도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갖게 됐을까. 그 이유는 문명의 뿌리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중국인은 황하를 중심으로 무대를 넓혀갔고 한민족은 요하에서 시작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한민족 가운데 하나인 고구려족은 만주를 지배했고,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중원을 넘어 전 중국을 점령하고 티베트(서장)와 위구르(신장)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족과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넘겨줌으로써 중국사로 편입될 이유를 만들고 말았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책인데 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이유립과 계연수를 실존하지 않은 인물로 여기려 하는 것일까.
압록강은 고속도로였다 만주를 잃어버리면서 우리는 철저하게 중국 문명에 고개를 숙이는 문명을 만들었기에 이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환단고기를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계연수와 이유립은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평북)에 살았다. 계연수가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줬다고 한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줬다고 한 이형식’도 청천강 이북의 평안도인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 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전해진 것일까. 고성 이씨 용헌공파 종중의 이영규씨는 “조선시대 서울 경기·황해는 말할 것도 없고 평양과 전라 경상 충청까지 한양의 권력이 철저히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고대 사서 수거령이 내리면 그곳에서는 따르지 않을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북 지방은 다르다. 그곳은 국경지역인지라 한양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않았다. 평북은 귀양도 보내지 않던 곳이니 관가의 영향력이 작아 환단고기 류의 사서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다. 이유립이 태어난 삭주엔 압록강이 흐른다. 지금은 수풍댐이 있어 압록강이 넓어졌지만 댐이 있기 전엔 그리 넓지 않았다. 댐이 건설되기 전 삭주 지역의 압록강 폭은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하구 폭과 비슷했다. 삭주에서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 등 고구려 유적이 많은 중국 요녕성의 집안(集安) 지역을 만날 수 있다. 철도나 도로 같은 육상 교통수단이 발달하기 전까지 강은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강은 배를 만들 수 있게 된 신석기 시대 이래 ‘고속도로’ 기능을 해왔다. 평북 사람들은 압록강에서 배를 저으며 수시로 고구려 유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것을 본 조선인들은 만주를 무대로 한 대륙사관을 갖게 됐을 터이니 고대 사서 수거령을 심적으로 거부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동대사 정창원 문서 중국은 25사를 비롯한 방대한 역사서와 사서오경을 필두로 한 유교 경전, 그리고 음부경을 비롯한 도교의 경전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 ‘고사기’ ‘만엽집’ ‘풍토기(風土記)’ 같은 수많은 책이 신도의 경전이자 일본 고대사를 적은 역사서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잦은 병란으로 삼국사기 이전의 역사서와 경전이 멸실된 상태다. 교토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고도로 꼽는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뒤편의 정창원(正倉院)은 고대 일본의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적잖은 학자는 정창원에 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우리 민족이 만든 자료들도 보관돼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왜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을까. 문서를 공개하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럼에도 일본은 100여 년 전 만주와 조선을 그들의 역사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만·선(滿鮮) 사관’을 만들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를 중국에서 떼어내 만주국을 세웠다. 만선사관으로 압축된 일본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꺾이긴 했지만 일본 우익들은 이를 다시 내세우려고 한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없는 시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펼쳤다. 그리하여 하나라와 은나라는 물론이고 3황5제 시절까지도 역사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티베트와 고구려가 있던 만주를 중국의 역사 공간으로 끌고 오는 (세칭)서남공정과 동북공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비롯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을 중국사에 편입시키는 탐원(探源)공정도 펼치고 있다. 소중화 사상이 판치던 시절 환단고기 류의 사서는 인쇄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필사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위서 시비를 받는다면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에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그리고 필사 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를 살피는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기자는 이유립은 실존인물이고 그가 남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는 것, 오형기씨 필사본에는 오자가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
전형배씨가 밝히는 ‘이유립 사관’ “영락대통일은 오늘날의 민족통일 사상” | |
▼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은 3개의 조선으로 돼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유립 선생도 비슷한 인식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신조선과 막조선 불조선이 있었는데, 만주의 신조선이 가장 강력했다. 그리고 불조선의 마지막 왕인 기준이 연나라에서 온 위만에게 쿠데타를 당해 나라를 빼앗기고 망명했다. 이 기준의 무리가 한강 이남에 삼한을 만들었다. 이유립 선생은 단군조선의 세 조선을 ‘전(前)삼한’, 기준 무리의 3한을 ‘중(中)삼한’, 고구려·백제·신라를 ‘후(後)삼한’으로 불렀다. 이 선생은 이러한 3국 체제는 3수론을 가진 천부경 사상과 일치한다고 하셨다. ▼ 환단고기에 북부여기가 별도의 책으로 들어 있는 이유는. “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지역의 우리 민족은 열국시대로 들어가는데 이때 북부여가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본다. 단군조선처럼 전권을 장악하지 못했지만 고조선이 무너진 후 만주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것을 북부여로 보는 것이다. 북부여는 여섯 왕이 내려가다가 주몽에 의해 고구려로 바뀐다. 이 때문에 이유립 선생은 북부여를 원시고구려, 고구려를 본고구려, 대진국(발해)을 중고구려, 고려를 후고구려로 보았다. 북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보면 이 나라는 900년을 이어간 것이 된다. 발해라는 이름은 중국이 부른 것이지 우리가 부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대진국으로 불렀다.” ▼ 이유립 선생은 광개토태왕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안다. “이유립 선생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광개토태왕을 매우 높게 평가해 영락대통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다. 광개토태왕은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하고 신라 백제와도 사실상의 통일을 이룩한 군주다. 그러나 3조선 개념에 따라 신라와 백제를 존속시켜주었다.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음에도 백제를 멸하지 않았고, 신라 왕자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 신라를 존속시킨 것이 바로 영락대통일 개념이라고 이유립 선생은 강조하셨다. 영락대통일은 지금으로 말하면 연방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고구려는 말갈족과 함께 중국과의 전쟁에 나섰는데 이는 말갈족이 고구려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 속에 있던 연방원이었음을 의미한다.” 영락대통일은 연방제국 개념 ▼ 이유립 선생은 중국인들이 우리 역사를 왜곡했다고 봤나. “고구려 제국 안에 있던 우리 민족을 말갈 여진 옥저 읍루 등 별도의 이름을 붙여 기록해놓은 것을 대표적인 왜곡으로 보았다. 말갈은 고구려 말로 ‘강가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중국의 역사서는 이들을 말갈족이라고 적어 놓음으로써, 마치 고구려족과는 별종인 것처럼 묘사했다고 비판하셨다.” ▼ 이유립 선생의 사관은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가. “만일 중국인들이 한국에서는 영남인과 호남인이 자꾸 싸운다는 기록을 많이 남겨놓았다고 가정해보자. 먼 훗날 이 기록을 보게 되는 사람들은 ‘영남인과 호남인은 종족이 달랐던가 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선생은 중국의 사서들이 옥저 여진 말갈 읍루로 자꾸 나눠서 기록해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셨다. 지금 우리가 유의할 것은 일본이 우리 민족을 둘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북한 사람은 조선인, 남한 사람은 한국인으로 적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이 쌓이다 보면 남북한 사람은 별개의 종족이라는 인식이 생기게 된다. 영락대통일은 남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과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까지 하나로 합칠 수 있는 거대한 통일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 계연수 선생은 묘향산 석벽에 새겨진 천부경을 탁본해 대종교에 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유립 선생께서는 계연수 선생이 약초를 캐서 서울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고 하셨다. 그때 대종교에서는 천부경을 인정하지 않아 계연수 선생이 묘향산 석벽에서 천부경을 탁본했다는 말을 약초를 팔면서 퍼뜨렸다고 하셨다. 그런 소문을 내야 대종교가 천부경을 빨리 인정할 것으로 보고 그렇게 했다고 이유립 선생은 웃으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
학자들의 임무
그렇다면 이젠 학자들이 보다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한다. 환단고기 실증 작업은 북한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북한에는 계연수가 만든 환단고기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북한의 구월산에는 환인과 환웅 환검(1대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묘향산에는 단군사라는 사당이 있다.
과거 북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요하에 있었다는 주장을 해왔으나 최근에는 평양의 단군릉 건립을 계기로 고조선은 대동강에 있었다는 쪽으로 역사의 폭을 좁히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황하문명이나 요하문명과 구분되는 대동강문명을 만들어, 김일성-김정일 체제 구축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의 연구는 정치적인 이유로 위축된 북한 사학을 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한국의 강단(講壇)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환단고기 연구를 피해간다면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만선사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소중화 류의 반도사관이 환단고기 류의 대륙사관을 억누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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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donga.com/docs/magazine/shin/2007/09/14/200709140500006/200709140500006_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