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와 주역 그리고 카발라는 서로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공통적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지켜보면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모든 만물이 유사성과 다양성에서 비롯된다고 했습니다
유사성을 가진 채로 다양성을 펼치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 세상만물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전체 안에 부분이, 부분 안에 전체가 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주역과 타로, 카발라를 같이 한 번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역의 화산려(火山旅)는 위의 불은 타올라서 위로 올라가지만 아래의 산은 그치고 머물러 있어서 서로 어긋나서 곤궁하게 되고 신뢰 가운데 더불어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여행(곤궁함)이다. 마치 타로의 바보 카드와 닮았다. 다만 카발라에서 말하는 바보는 유일자가 떠나는 유쾌한 모험이고, 주역의 화산려는 어떤 면에서 업(業)과 덕(德) 그리고 곤궁함을 통한 배움이라는 좀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서 비록 가진 것이 많다고 하나 사람에게 신뢰를 잃고 삶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면 곧 나그네와 다름없다. 그래서 화산려의 역방향은 뇌화풍(풍성함)이다. 화산려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시작부터 비루하고 옹졸하게 굴다가 재앙을 초래하는 것과 조금 가졌고 안정했다 해서 교만히 웃다가 울부짖게 된다는 마지막 부분이다. 어차피 인생은 조금 가졌다고 또 조금 안정된 상황 속에 있다고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게다가 경로에서 높은 차원에 있는 바보 카드처럼 항상 긍정적이고 또한 기쁘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떠밀려나듯이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때도 있고 그 움직임의 원인이 내게 있을 수도 있다. 케테르가 ‘원인들의 원인’이라 불리는 것을 기억하자. 나를 이루는 수많은 원인과 특성들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활력과 움직임을 주는 그 무엇은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아마 그 원인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의 삶의 균형을 위한 자구책이거나 아프고 힘들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삶의 채찍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케테르의 다른 이름은 의지이듯이, 인간은 또 다른 경험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를 발휘해야 하고 그것이 케테르로부터 양극성의 세상으로 최초로 발출되는 호크마 사이의 경로인 바보 즉 황소(א)의 경험이다.
헤르메스주의에서는 유일자(케테르)가 스스로 황소(א)가 되어서 세상으로 내려오고 자신이 그 황소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기 위해서 채찍인 소몰이 막대(ל)가 되어서 자기 자신을 안내한다고 말한다. 때로는 자신에게서 남는 것을 덜어내고 때로는 공의롭게 징벌하기도 하는 무서운 얼굴로 드러나고 때로는 알 듯 모를 듯 미세하게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 조정 중에 있다. 내가 신이라는 말보다는 내 앞의 사람들이 신이거나 나에게 주어진 고통과 시련이 스스로가 나에게 주는 균형이라는 관점은 그것을 극복하도록 돕는 어떤 힘을 준다. 그러나 주역은 보다 냉정하게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삶이 언제나 ‘외줄타기’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돕는다. 화산려에서와 마찬가지로 뇌산소과(雷山小過)에서도 우리 삶에 내재되어 있는 위태로움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외줄타기 선수를 만난다. 거기에서 나에게 무엇을 주거나 빼앗는 누군가는 없다. 다만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경우에 발생하는 추락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왜 외줄타기를 해야만 하고 거기서 떨어졌을 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중요한 요점은 현재 내가 조금 과한지 아니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지금과 같은 때에 내가 너무 급하거나 높이 날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가 중요하다.
정의카드와 유사한 뇌산소과는 바보카드인 화산려와 유사하다. 타오르는 불과 머무르는 산인 화산려처럼, 격분하면서 나아가려는 우레와 그 아래에서 머무르려는 산이기 때문에 급히 나아가려고 하면 결국 함께 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음양의 조화를 중요하게 간주하는 주역에서 위아래 팔괘가 동일한 양(陽)이고, 전체적으로 음(陰)인 소(小)가 과하다. 주역에서 음은 아래가 편하지만 양은 위가 편하다. 날아가는 새의 상(象)을 닮았음에도 이 때에는 너무 높이 날면 흉하고 신중히 땅에 머무르면 길하다. 여행을 떠나온 바보에게 소과(小過)는 음양의 균형을 배우는 위험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주는 자도 그 경험을 하는 자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다만 날아야할 때에 날아야 하지만 지금은 아래에 낮게 머물러야 하는 때가 왔을 뿐이다.
첫댓글 화산려와 나그네...
뇌산소과와 정의카드..
좋은 정보에 진심 감사드립니다..._()_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