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천년고찰 실상사 불상의 복장에서 라틴어로 된 성무일도가 발견된 이야기
성무일도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라틴 전례에서 사용되는 기독교 전례서이다. 매일 7차례 정해진 시간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문과 시편, 교부들의 설교 등이 담겨있다.
특히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매일 기도 의무를 채우기 위해 간단한 휴대용 책이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성무일도를 펴낸 배경이다.
불교의 석문의범과 같은 가톨릭의 전례 기도문을 수록한 큰 책자가 성무일도이다.
유럽에서 발간된 라틴어로 쓰여진 중세의 성무일도서가 지리산의 한 사찰에 400년 동안 보존되어 내려왔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한국에 천주교와 기독교가 들어오기 200년 전에 성무일도가 조선에 전래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우리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대흥사에 전해지는 서산대사의 황금 십자가와 지리산에 전해지는 성무일도의 본 주인은 한사람 바로 쎄스페데스 신부이다.
조선에 최초로 건너온 예수회 신부의 십자가는 어떻게 서산대사의 품에 안겼으며 그가 수지했던 성무일도는 지리산의 한 사찰에 전해지게 되었을까?
스페인 마드리드 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정확한 판단력과 훌륭한 설교의 재능을 타고났다. 그는 일본에 와서 1년 만에 일본인과 대화할 수 있는 일본어 실력을 갖추고 130명에게 직접 세례를 베풀었다.
1579년에는 수도인 교토에 진출하였으며 장군을 개종시켜 그 휘하 병사들에게까지 세례를 주었다. 1585년에는 3,000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1587년에는 영주의 가족들과 주민 1,665명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다. 쎄스페데스의 선교에 대한 열정과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그해 4명의 불교 승려가 그의 설교를 듣고 개종하였다. 그는 뛰어난 설교 능력과 개종 성과로 인해 오사카에 있던 일본 관구의 부원장이 되었다.
그때 일본의 최고 실력자 도요토미가 방문하였다. 오랜 시간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쎄스페데스 신부는 토요토미에게 말했다. 예수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영생의 삶을 살기를 권했다. 토요토미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
"가톨릭 교리는 나로서는 크게 만족할 만한 것입니다. 한 아내밖에 허락하지 않는 교리 외에는 별로 어려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리만 없다면 나도 곧 신자가 되겠습니다."
신부와 친밀한 대화를 나눈 토요토미는 얼마 후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가톨릭 금교령을 발표한다. 토요토미가 신부를 자기 영내로 부르지 않고 직접 찾아간 이유는 예수회 관구에서 스페인 상선을 통해 신무기 조총 조달을 해주기를 바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오다 노부나가 때부터 해오던 일이었다. 이제 일본 내 예수회 관구도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신부는 관백의 부탁을 거절하였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가톨릭 장군인 소서행장(아우구스티노)이 선발대가 되어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에게 배속된 12,000명 병사들은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소서행장은 전쟁 중 병사들의 축복과 고백성사를 받아줄 종군 신부가 필요했다. 편지를 써서 쎄스페데스 신부를 조선으로 초대한다.
마침내 1593년 조선 땅 웅천 지금의 진해 앞바다에 첫발을 디딘다. 그는 1년 6개월 동안 전쟁 중인 조선을 누비며 눈부신 활동을 하였다. 조선에서의 주요 활동은 천주교 장군들이 있는 성채를 방문하여 축성 기도를 해주고 성사를 받아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조선인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일도 주요 임무가 되었다.
그때 쎄스페데스 신부를 모시고 동행했던 일본인 수사가 1명 있다. 일본인 수사의 이름은 환깐 레옹이다. 그는 쎄스페데스 신부를 보좌하는 수사이지만 나이는 많았다. 그리고 그는 불교 승려생활을 하다가 개종하여 수사가 된 사람이다. 천재적인 언어 학습 능력과 선교에 열정적인 쎄스페데스 신부와 승려 출신의 일본 수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그들이 1년 6개월간 조선에 머물면서 일본군의 성채만 방문하고 돌아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 포로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던 신부 일행은 조선의 여러 사찰을 방문하고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키가 크고 피부가 하얀 서양 신부을 접한 조선 스님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추정해 본다. 바이블이란 말도 가톨릭이란 말도 예수라는 말도 처음 듣는 말이었을 것이다. 단지 서쪽에서 귀한 가르침을 가지고 오신 신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 예수회 신부들은 인도의 고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왔다. 천축과 서역, 서양이 구분되지 않았던 조선 스님들에게는 처음 보는 서양 신부가 인도에서 온 고승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가톨릭 신부가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건네준 라틴어로 씌여진 성무일도를 인도 불경으로 귀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모실 때 복장유물로 봉안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서산대사의 십자가도 어떤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는지 미스테리이다. 불교 승려의 선교에 열정을 가졌던 쎄스페데스 신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조선의 최고 승려를 개종시키면 조선의 모든 승려와 불교도들을 개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일본의 승려 출신 수사 환깐 레옹이 부추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일본에 처음 왔던 프란시스 사비에르 신부도 일본 선교에 힘쓰다가 중국 황제를 선교하면 아시아 작은 나라들은 저절로 선교가 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사비에르 신부는 마카오에서 중국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다가 병을 얻어 1552년 선종하였다.
후에 중국 선교에 크게 성공한 마태오 리치가 1552년 태어났으니 불교식으로 하면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환생이 마태오 리치이다. 그는 아시아 선교서원을 가지고 태어나서 중국선교에 평생을 바치게 된 것이다.
조선에 최초로 전해진 십자가가 서산대사의 유물이라는 사실은 한국의 종교 교류 역사에서 대단히 특이한 일이다. 기록이 없어 여러가지로 추정만 무성했다. 그러나 지리산 실상사 불상의 복장유물에서 출현한 성무일도서를 통하여 새로운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온 쎄스페데스 신부와 조선 최고의 고승 서산대사가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눴을 가능성이다. 신부는 복음을 전하고 신표로 십자가를 선물한다. 대사가 십자가를 품에 안고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기를 기원했을 것이다. 서산대사를 개종시키면 조선의 모든 사람들을 빠르게 개종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닐까? 지구의 절반을 돌아서 조선에까지 진리의 말씀을 전하러 온 신부를 서산대사는 어떻게 여겼을까?
서양의 다른 종교라 여기지 않고 인도불교의 한 종파로 여기지 않았을까?
라틴어로 된 성무일도를 선물받고 인도의 불경으로 귀하게 여겨 부처님 복장으로 모신 조선의 스님들이다. 구원의 상징인 황금 십자가를 선물받은 서산대사는 손목의 수정 염주를 풀어 신부의 손목에 매어 주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사진 4번은 쎄스페데스 신부와 일본인 승려 출신 환깐 레옹 수사를 조각으로 표현하였다.
진해 웅천은 조선 땅에서 최초로 미사를 올린 장소이다. 일본에서는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로 부른다. 창원시에서는 쎄스페데스 방한 400주년을 기념하여 쎄스페데스 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사진 1.2.3.번은 지리산 실상사 불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성무일도이다.
대원사 티벳박물관장 석현장 스님
태안성당 주임 곽승룡 비오 신부(전 대전 가톨릭대학교 총장)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