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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석 李雨錫 (1896 ~ 1994)】 "1920년 북로군정서 무기 운반대, 청산리 대첩 참가"
1896년 9월 17일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아버지 이창규(李昌奎)와 어머니 현풍 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는 이길득(李吉得)·이길동(李吉童)을 사용하였다. 7세부터 한학을 수학하다가 13세인 190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듬해 아버지를 찾아 서울로 갔다. 서울에서 5년간 전창석(全昌錫) 한약방에서 근무하였다. 1913년 한약방을 그만두고 금강산과 황해도 해주(海州)·장연(長淵)·송화(松禾)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기(鍮器) 행상을 하였다. 1918년 황해 해주 용매섬에서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9년 4월 서간도로 건너갔다.
1920년 2월 선양(瀋陽)으로 가서 한족회(韓族會) 회원 이영선(李永善)의 소개로 이시영(李始榮)과 이장녕(李章寧)을 만났다.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가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과 부독판 여준(呂準)을 만나 독립군이 되기 위해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입교를 청하였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20년 3월 개소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 북로군정서)사관연성소에 입교하기 위해 안투현(安圖縣)을 거쳐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로 갔다. 류허현 삼원보에서 왕칭현 서대파로 이동 중에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의 포성을 들었다.
삼둔자전투는 1920년 6월 4일 국내로 진공한 독립군들이 일제의 헌병순찰대를 격파하고 두만강을 넘어 북간도로 오자 일본군이 독립군을 추격하면서 벌어졌다. 1920년 6월 6일 일본군 남양 수비대장 아라이 지로(新美二郞) 보병 중위는 약 1개 중대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허룽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로 추격해왔다. 이에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일본군을 물리쳤다.
삼둔자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6월 7일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50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북간도로 넘어왔다. 월강추격대 지휘관은 야스가와(安川) 소좌(少佐)였고, 기관총대와 헌병 및 경찰대 혼합부대였다. 일본군들은 온성군(穩城郡) 하탄동(下灘洞)에서 불법으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봉오동 골짜기로 진격하였다. 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사령관 홍범도(洪範圖), 군무도독부 사령관 최진동, 국민회군(國民會軍) 사령관 안무(安武)가 연합 부대를 결성하여 일본군 월강추격대를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였다. 봉오동 골짜기에 독립군이 매복하여 일시에 공격을 가해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대한군정서 본부로 가서 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을 만나 사관연성소 입교를 청하였다. 그러나 사관연성소 1기는 이미 과정이 시작되어 2기에 입학하려면 한달을 기다려야했다. 그리하여 김좌진의 명령으로 1920년 6월 러시아 연해주로 무기 구입을 위해 떠났다. 무기 구입을 위해 떠나는 인원은 총 230여 명으로 운반대는 200여 명, 운반대를 호위하는 경비대가 30여 명이었는데 경비대 분대장에 임명되었다. 재만 독립군은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해갔다.
일본은 재만 독립군을 척결하지 않고서는 식민지 한국을 경영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1920년 8월 서북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의 전체 구상과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총지휘한 인물은 당시 육군대신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이다. 다나카는 조슈(長州) 군벌의 우두머리로 일본 군부의 거물이며, 평소 대외 침략 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침략주의자였다. 더욱이 1920년 10월 조선군 사령부 휘하의 일본군이 ‘훈춘(琿春) 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빌미로 간도를 침공하여 수많은 재만 한인 동포들을 학살한 경신참변을 자행하였다.
일본은 초토 기간을 약 2개월로 하고, 일본군 제19사단장을 부대 편성자로 하여, 출동 지역을 동서남북 4방향으로 일본군 약 2만 명을 대거 만주 지역에 진입시켜 일시에 한국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재만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로 집결하였다. 그는 대한군정서에 소속되어 청산리 대첩을 수행하였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이 지휘하는 대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8개 독립군부대들이 연합하여 일본군 정규군을 상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벌인 치열한 전투였다.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천수평 전투·어랑촌 전투·맹개골 전투·만기구 전투·쉬구 전투·천보산 전투·고동하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 대첩 후 추격해 오는 일본군을 피해 대한군정서를 비롯해 대한독립군, 서간도의 서로군정서 등 독립군 주력 부대들은 북만주로 이동하였다.
1920년 (음)11월 북만주 뤄베이현(蘿北縣) 동흥진(東興鎭)에 도착하여 다음해인 1921년 2월까지 머무르다 러시아 자유시(自由市)로 갔다. 그러나 재소 빨치산 부대인 박그레고리 부대에 무장 해제당하였다.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감금되었다. 감금되었을 때 독립군 최악의 비극인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알렉세예브스크, 러시아 아무르주 스바보드니시)에서 이르쿠츠크파의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가 원동공화국(遠東共和國) 제2군단 제29연대의 지원을 받아 상해파 한인 군대들, 즉 사할린의용대를 무장 해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소속되어 있었던 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이만(Iman, 현 러시아 달네레젠스크)에 도착한 후 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을 무장 해제시키려는 극동공화국정부의 태도가 의심스러워 이동을 포기하고 1921년 3월 만주로 돌아갔다.
박그레고리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와 함께 있다가 자유시 참변을 당하고 참변이 끝난 후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삼림 속에 있는 감옥에 갇혀 벌목 작업을 하며 1921년 8월부터 1922년 2월까지 6개월을 지냈다. 병을 핑계로 감옥에서 병원이 있는 자유시로 나왔다가 그곳을 탈출하여 흑룡강을 건너 북만주로 갔다.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이었지만 청산리 대첩 이후 본대와 떨어져 1922년 초까지 본대에 합류하지 못했다. 배달촌(倍達村)에서 1922년 10월까지 머무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달라고 부탁했던 안정근(安定根)의 소식을 기다렸다.
1922년 10월 이후 배달촌을 떠나 1923년 초 닝안(寧安)현에 도착하여 김좌진을 만났다. 김좌진에게 그동안 겪었던 일을 보고하고 새로운 광복 사업을 추진 중인 김좌진을 떠나 1923년 3월 남만주로 향했다. 서간도 액목현(額穆縣, 현 자오허, (蛟河))에 도착한 뒤 서로군정서 재건에 참여하여 한인 동포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응원단이라는 무장 단체를 만들어 오히려 동포들에게 피해를 주는 무리들을 설득하여 서로군정서 별동대로 편입시켰다. 또한 병농 일치의 둔전제에 의거해 만들어진 대단위 집단 농장의 관리 책임자가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액목현에 머무는 동안 서간도, 즉 남만주의 독립군들은 통합 운동을 벌여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서로군정서도 정의부에 가입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어 민족주의 계열과 충돌을 일으키자 혼란을 피해 그때까지 자신이 추진해 오던 모든 사업을 정의부에 인계하고 자신은 이리하(二里河)라는 마을에서 2년간 소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7년 32세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북만주의 아청현(阿城縣) 대석하(大石河)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아청현에서 거주할 당시 이 지역에는 오광선(吳光鮮)·신숙(申肅)·지청천(池靑天)·홍진(洪震)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1930년대 북만주 한인 사회를 관할하며 항일 운동을 전개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설립한 인물들이었다. 1931년 7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932년 3월 2일 일제가 괴뢰국인 ‘만주국’를 세우고 청의 마지막 황제인 부의(溥儀)를 황제로 앉혔다.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의 활동은 더욱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모든 잠재 세력을 총동원하여 중국 항일군과 힘을 합쳐 일제와 만주국에 대항해 싸웠다.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하이린(海林)에서 미산(密山)으로 가다가 만주국군에게 체포되어 약 6 ~ 7개월 동안 무링현(穆棱縣)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중국 항일군인 이두(李杜) 부대가 감옥을 습격하여 풀려났다. 이후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 활동은 침체되었고 지청천·홍진·오광선 등은 상하이(上海)로 떠났고 후일을 기약하며 만주에 남았다. 가족을 데리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칭강현(靑崗縣)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40년 3월 신숙이 비밀 결사 단체인 재만동지회를 결성하자 비밀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이 되자 조국으로 귀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