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순간까지도 아름다운 태양
문희봉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본다.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싱싱하게 요동치던 세월도 있었는데, 고교 시절 태권도장에서 이단옆차기, 올려 차기를 하는 폼이 너무나 유연하고 멋져 보였었는데. 매주 한 번씩 즐기던 배구경기에서 스파이크도 꽤 잘한다 칭찬받았었는데. 지금은 턱걸이 한두 번은 그만 두고 철봉에 매달리는 것도 쉽지 않다.
올곧게 벋은 소나무보다 휘어져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고 값이 나가는 법이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 휘청 굽이친 물줄기가 더 아름답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흘러가는 길이 더 운치가 있고 아름답다.
내가 자동차를 굴리게 된 것도 자그만치 70년을 훌쩍 넘겼다. 그간 만고풍상을 다 겪었다. 망망대해에 뜬 일엽편주일 때도 있었고, 고봉 준령의 바위틈에 가까스로 뿌리를 내린 어린 소나무 신세일 때도 있었다. 협곡의 좁은 길을 운전할 때가 있었고, 광대처럼 외줄 타는 솜씨를 발휘해야 할 때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수로에 빠져 허우적거린 때도 있었고, 마라톤을 해야 할 때 단거리 선수인 양 오버할 때도 있었다.
언제까지나 맑은 날만 계속될 수 없고, 곧은 길만 이어질 수는 없다. 때로는 궂은 날도 있어야 가뭄이 계속되지 않아서 사막화도 막을 수 있다. 굽이굽이 힘든 고갯길을 넘어보아야 삶의 의미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낙엽’이라는 단어에는 감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묻어난다. 낙엽 타는 내음에 향수가 느껴지고 낙엽 밟는 소리에 가슴 뭉클한 낭만이 전해 온다. 낙엽에는 이처럼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모두가 그립게 느껴진다.
기계를 오래 사용하다 보니 요즘은 카센타 출입이 잦아졌다. 하숙집 밥 삼 년 먹으면 뼛속이 다 빈다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조로현상이 너무 일찍 찾아온 것 같다. 좌우쪽 어깨 관절이 부실하고 몸속에 결석이 너무 많아 괴롭힘을 당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눈물샘은 언제 다 퍼냈는지 바싹 말라 있어 눈물을 요할 때 사람 노릇 한 번 못했다.
누가 봄을 젊은이들만의 소유물이라 했던가? 젊은이의 봄은 기쁨으로 차 있는 홑겹의 봄이지만 나이 든 사람의 봄은 기쁨과 슬픔을 아울러 지닌 겹겹의 봄이라는 사실은 왜 모르고 있는가?
비결이 뭐 있겠나. 비바람 불고, 폭설도 내리고 했지만, 가끔 해뜰 날이 있었으니 그런 날 바라고 살아온 것이라고 할까나. 바람은 나뭇잎만 흔드는 게 아니다. 내 몸 구석구석에서 나를 떠나겠다 마구 흔들어댄다. 그렇지만 굽이굽이 힘든 고갯길을 넘어 보아야 삶의 의미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자위를 한다.
이제 남은 인생을 멋지게 살아야 하는데 걱정이 앞선다. 웰다잉을 하기 위한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겠다. 마디마디 기름때가 낀 못 박힌 거친 손이지만 큰 과일을 따려면 많은 자잘한 열매들을 솎아낼 줄 아는 지혜도 갖추어야 한다. 살아감에는 긍정의 힘이 좋다.
이젠 내 몸의 원기는 거의 고갈 되었다는 생각이다. 계절로 따지면 야윈 가슴을 더 아리게 하는 늦가을 오후쯤일까. 천 원짜리 한 장 없어도 한겨울을 보내던 그런 적막한 세월도 있었다. 그러니 무슨 일인들 견뎌내지 못하랴.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야 한다. 고통 없는 삶은 비극이다. 병은 인생을 지혜로 이끄는 선지자라 했다. 누워 있는 곳이 병원인 듯 집인 듯, 여보를 부르다가 간호사를 부르다가 그렇게 내 아픔은 깊어만 갈 게다. 해묵은 나프탈렌 냄새 풍기지 말고, 말이 천사의 집이고 실버타운이지 애지중지 키워 온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고 이 세상에서 쫓겨나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 실버타운이다. 그런 곳에 가기 전에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일이다.
지금까지 버텨준 내 애마에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일십백천만의 정신으로 살 것이다. 간장종지처럼 볼이 패이고, 어둡고 안개 자욱한 길을 걸으며, 소리 없이 기도해야 하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이만 오천여 개의 낡은 부품들이 하나같이 합심하여 주인을 지켜준 나의 명마에게 감사할 뿐이다.
태양은 지는 순간까지도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