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 지나며 열대야와 불볕더위가 마지막 남은 열기를 토하며 여름의 끝자락을 향해 식어가고 있다.
옛 사람들은 무더위를 어떻게 견디며 식혔을까. 전기냉방기구가 없던 그 시절, 무더위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피서 도구라야 부채, 대자리, 발(簾), 등등거리, 죽부인 등이 전부였으니 ‘바람을 타고 설산으로
훨훨 날아가 맨다리로 얼음장을 밟고 싶은’(이덕무의 ‘고열행’) 꿈을 꾸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싶다.
그렇다고 속수무책 땀만 뻘뻘 흘렸던 것은 아니다.
더위를 물리치는 법을 적은 다산 정약용의 ‘소서팔사(消暑八事)’라는 시가 있다.
소나무 둑에서 활쏘기, 회화나무 그늘에서 그네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하기, 깨끗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동쪽 숲속에서 매미 소리 듣기, 비 오는 날 시 짓기, 달 밝은 밤 발 씻기가 그것이다.
고려 때의 학자 이인로는 ‘탁족부(濯足賦)’에서 ‘돌 위에 앉아 두 다리 드러내고
발을 담그니 불 같은 더위가 지나가네.’라며 탁족의 시원함을 노래했다.
옛사람들에겐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더위를 쫓는 ‘탁 족’만한 피서가 없었을 것이다.
탁족은 선비들에게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방편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관조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정신수양이기도 했다.
체면과 체통을 중시하는 선비들은 인적이 드물고 산수가 좋은 계곡을 찾아 시원한 물속에 발을 담그고 시를 읊으며 자연과 풍류를 벗 삼았다.
여유와 멋이 가득 느껴지는 친자연 피서법이 아닐 수 없다.
더위를 짜증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계절의 순환 속에서 겪는 과정의 하나로 여기는 태도인 것이다.
이처럼 선조들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연에 동화하는 방법으로 순리에 따라 한여름 무더위를 이겨냈다.
◆ 물 좋고 반석 좋은 곳에 정자 하나
조선시대 화가들의 ‘탁족도’를 보면 이러한 선비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윗저고리를 풀어헤치고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노옹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세속을 초탈한 듯 무념 무상한 모습과 더불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정자다.
사실 우리 땅의 좀 알려진 계곡치고 정자 하나쯤 세워져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정자가 들어앉은 계곡치고 풍경이 빼어나지 않은 곳은 없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된 ‘침수정(枕漱亭)’도 청송의 주왕산을 잇는 팔각산과 포항의 동대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류하여 영덕 옥계계곡을 이룬 곳 가운데서도 가장 풍광이 빼어난 지점에 손성을(1724년~1796년)이란 선비가 세운 정자이다.
기념물 지정은 침수정 뿐만 아니라 정자를 중심으로 한 옥계 계곡 일원을 포함하고 있다.
옥계계곡 가운데 경관이 가장 빼어난 곳에 있는 침수정은 조선 정조 8년(1784년)에 손성을이 본향인 경주 양동을 떠나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고자 건립하였다.
그러나 광해군 1년(1609년)에 같은 이름의 선비가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벼슬을 마다하고 은사(隱士)의 길을 택하면서 지은 누정이라는 이설도 함께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정조는 조선 22대 임금이고 광해군은 15대인데 그 편차가 상당하다.
기문이 없어서 확실한 시기는 알 수가 없으나 월성 손씨 문중의 족보를 근거해 보면 정조 8년 설이 타당해 보인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아담한 목조 팔작 기와집으로 앞으로 마루를 내고 뒤쪽의 반은 방으로 꾸며져 있다.
경사진 대지에다 앞쪽에 기둥을 세워 누정의 형태로 만들었고 앞쪽의 담장도 개방하여 계곡의 풍광을 즐기도록 했다.
병풍암을 배경 삼고 정자 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옥구슬 같은 계곡의 경관이 더욱 돋보인다.
하지만 여느 정자와 달리 침수정은 계곡을 압도하지 않고 학처럼 고고하게 바위 위에 걸터앉아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소박함과 친근감을 듬뿍 배어나게 한다.
당시 경주 땅이었던 이곳에 경주부윤을 비롯해 이웃고을 수령들과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아와 글을 남기고 풍류를 즐기곤 했는데, 그 풍류는 여느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같은 풍류라 해도 끈적이거나 질탕한 것과는 거리가 먼, 서늘하면서도 깨끗한 선비의 정갈한 느낌이었다.
침수정 계곡은 오랜 세월 변하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 흐르고 있다.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것도, 깊은 계곡의 빼어난 주위경관도 변함이 없다.
‘옥계’라는 이름은 옥같이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는 계곡이란 뜻이다.
실제로 그 이름값에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맑고 깨끗하며 굽이굽이 물살이 똬리를 틀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아드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또한 옥계계곡은 영덕이 자랑하는 은어의 서식지인 오십천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들머리 주변에 ‘선경옥계(仙境玉溪)’를 새긴 비석이 있는데, 신선이 살 만큼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하다는 뜻이다.
손성을이 그 옥계의 비경을 보고 계곡 입구에 침수정을 지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이 침수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는 경북 영천과 전남 화순에도 있는데 그 이름의 유래가 따로 있다.
‘침수정(枕漱亭)’의 ‘침수’는 ‘돌을 베개 삼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 한다’는 의미이다.
즉 속세를 버린 은자의 여유로운 태도를 말한다.
옛날 중국에서 노장사상이 풍미할 때 세속을 떠나 유유자적하던 옛 선비들의 생활상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침석수류(枕石漱流)’에서 따온 말이다.
그런데 ‘진서’라는 문헌에 의하면 이 침석수류는 진나라 때 손초라는 사람이 친구인 왕제에게 흉금을 터놓고 말하면서 “돌을 베개 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겠노라”(枕石漱流)라고 해야 할 것을 실수하여 “돌로 양치질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 삼겠노라”(漱石枕流)라고 잘못 말해버렸다고 한다.
그랬더니 친구 왕제가 어떻게 흐르는 물을 베개로 벨 수 있으며, 어떻게 돌로 양치질하느냐고 지적을 하자, 이에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손초가 제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옛날의 은자인 허유가 말했던, 쓸데없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물로 귀를 씻으려 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자기의 실언을 합리했다고 한다.
◆ 옥계삼십칠경(玉溪三十七景)
침수정 둘레는 산과 물이 아름답고 기암괴석이 많아 손성을은 그 절경을 각각 37경으로 따로 이름 지어 널리 예찬하였다.
이를 ‘옥계37경’이라 하는데 ‘팔각산 37경’이라고도 부른다.
영덕군 달산면 옥계리 소재 팔각산(628m)은 뿔처럼 생긴 8개의 암봉이 이어져 있는데서 유래되었다.
경방골의 ‘호박소’와 꽃봉오리 모양으로 앉은 ‘진주암’ 새색시 쪽진 머리처럼 생긴 옥녀봉이 솟아있으며, 마치 거북이 세 마리가 금방 물 밖으로 기어 나온듯한 삼귀담이 있다.
구정담 푸른 물은 사자암과 삼귀암을 돌아 나가고, 멀리 삼층대와 구슬바위는 진경산수화를 그려낸다.
또 갓끈을 씻어 세속을 초월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탁영담과 향로에 향불을 피우는 것 같은 향로봉, 촛불을 밝히는 형상을 한 촛대봉 외에 병풍처럼 침수정을 둘러치고 있는 병풍바위, 마고할미가 금강산으로 가져가다가 무거워서 떨어트렸다는 전설의 구슬바위, 학이 둥지를 털었다는 학소봉 등 계곡 주위의 깎아 놓은 듯한 기암괴석과 명소마다 많은 전설이 깃들어 있다.
손성을은 그 경관의 아름다움을 ‘옥계삼십칠경첩’이라는 문장으로 남겼다.
병풍바위에는 손성을 선비가 문패 삼아 직접 새긴 ‘山水主人’이라는 음각 글씨가 있다.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7대 종손 손창호씨가 붉은색을 입혔다.
말하자면 “여기 보이는 곳은 다 내 소유이다”라는 뜻인데 산자수명의 주인을 자처하는 배포가 느껴지기도 하고 자연에 대한 욕심의 한 단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침수정은 월성 손씨 문중 소유의 정자이므로 일반인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도록 열쇠로 채워두었는데, 바로 앞에서 민박을 운영하면서 정자를 관리하고 있는 손창호씨의 안내로 침수정 마루에 들어설 수 있었다.
손씨는 개방하면 사람 체취가 베어들어 서로가 좋은데 사람들이 신발을 신은 채 마루에 올라가고 음식물 찌꺼기를 함부로 버리는가 하면 심지어 담배꽁초도 아무 데나 버려 할 수 없이 열쇠를 채워 둔다고 하였다.
마루에 앉자마자 사방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방을 둘러보니 선계가 따로 없다.
하지만 이미 옥계계곡은 소문이 날대로 다 나버려서인지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계곡 곳곳에는 여름 한 철 내내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야영객들이 친 원색의 텐트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을 즐겨 찾는 피서객들은 더 이상 알려질까 걱정이 되는 곳이다.
이곳의 풍광은 가히 으뜸이었다.
흔히들 이런 곳에선 시가 절로 나올 법하다고들 하지만 문인수 시인의 시론에 위하면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 했거늘 기암괴석과 물색이 빚어내는 자연의 풍경을 인간이 담아내는 것조차 이곳에서는 불가능할 듯하다.
그저 이곳에 벌렁 드러누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겠다는 생각만 든다.
절로 다 내 세상이고 내 눈이 닿는 곳은 다 내 것이라는 생각도 들만도 하겠다.
손씨는 이 정자의 최고 별미를 마루에 누워 보름달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
긴 협곡따라 계속되는 빼어난 경관
빼어난 경관은 긴 협곡을 따라 계속된다.
어느덧 인간의 세계를 벗어나 선계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어디가 그림이고, 어디가 자연인가.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들지만 그릇을 쓸모 있게 만드는 것은 그릇 속의 빈 공간이다.
’ 도덕경의 이 구절은 현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관과 통한다.
건물도 그렇고 풍경도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본질이며 무엇을 담아내느냐 일 것이다.
손창호씨는 대뜸 정자에서 바라다보는 풍경 가운데 눈이 거슬리는 것이 없느냐고 묻는다.
계곡 건너편 소나무에 묶여 있는 너덜너덜한 ‘수영 금지’ ‘다이빙 금지’ ‘다이빙 사망사고 발생한 곳’ 등의 현수막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빼어난 자연 속 뷰포인트에까지 낡은 현수막이 가로 걸쳐있는 것은 확실히 꼴불견이다.
내친김에 나도 물었다.
“올라오면서 보니 마을주민들이 달산 다목적댐 건설 반대투쟁을 하고 있던데 여기 옥계정은 별 영향이 없습니까?” 옥계계곡 수몰 우려나 댐 용수를 직접
취수해 포항으로 공급하려 한다는 주민들의 주장은 순전히 오해란다.
손창호씨도 설마 이런 빼어난 자연을 그냥 수장시키겠냐고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며, 옥계지역은 대상구역에서 제외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물 또한 그 양이 너무 많거나 적으면 거대한 물줄기로 위압하거나 앙상한 바닥을 드러내 초라해진다.
모든 것이 다 적당하게 있으면서 서로 어울릴 때 계곡은 가장 아름답다.
사람들은 그 물살 아래 커다란 소에서 튜브를 타고 물놀이를 즐긴다.
옥같이 맑고 투명한 물이 흐르는 이 계곡을 오래도록 보존하여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권순진
시인ㆍ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