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교육원의 마지막 수업은 한글 글꼴에 대한 어떤 방송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이 방송에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가 하나 나오는데,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가장 오랫동안 쓰여 온 글꼴인 '명조체' 와 '고딕체' 가 국내에서 만들어진 글꼴이 아니라 일본산 글꼴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내용인즉슨, 일본에 글꼴로 유명한 모리자와 사가 있는데, 1950년대에 사진식자기(인쇄기의 한 종류인 모양입니다)를 한국에 팔기 위해 한국인(최정호 등)에게 글꼴 제작을 의뢰하면서 일본어 글꼴 명조체와 잘 어울릴 만한 한글 글꼴 디자인을 의뢰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명조체라는 것입니다. 고딕체 역시 마찬가지구요. 요컨대 명조체와 고딕체는 일본 업체가 일본의 인쇄기계를 한국에 팔기 위해 한국의 문자를 연구하여 만들어낸 글꼴인 셈입니다. 이 글꼴로 과거 우리나라의 교과서를 비롯하여 수많은 서적이나 잡지가 인쇄되었다고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80년대에 아래한글 초기 버전이 나왔을 때 내장 글꼴은 단 4개 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명조/고딕/필기... 또 하나는 아마 궁서체였던 것 같은데 확실친 않군요. 이 4개 정도의 글꼴이 있을 때 일반적으로 '본문' 에 쓰일 만한 글꼴은 거의 명조였을 테니 50년대부터 80년대까지의 대부분의 글은 명조체 하나로 버텨 왔다고 보아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겁니다.
<과학동아> 에 실린 다른 글을 보니, 이 때 수입된 명조글꼴은 모리가와 사의 것만 있던 게 아니라 일본 '샤켄' 사의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쇄에 들어갈 때엔 '모리가와로 해 주세요' 또는 '샤켄으로 해 주세요' 식으로 명조체라는 말도 제대로 쓰지 않기도 하였다는군요. ( 참고 http://blog.naver.com/badacopy/70070788919 )
이런 역사를 가졌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한글 '명조' 체와 '고딕' 체의 글꼴 원판은 한국에 없습니다. 일본에 있지요. 방송에서는 일본 모리가와 사를 방문하여 명조체와 고딕체의 '원판' 을 요구하자 바로 보여 주더군요. 50년대에 만든 우리나라 가장 보편적 글꼴의 원판이었습니다. (성인 남자의 손가락을 제외한 손바닥 만한 카드에 글자가 하나씩 쓰인 형태더군요) 당신들이 50년대에 인쇄기계를 팔아먹기 위해 개발한 50년대의 그 명조체가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는 널리 쓰인다고 말하자, 모리가와 사의 담당자는 '50년대에 (선배들이) 그토록 완성도 높게 만들어서 (한국에서 그 뒤 만든 것보다 뒤떨어지지 않기에) 아직까지도 잘 사용해 주시는 것 같다. 계속 사용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 이라는 취지로 감격에 차 말하더군요. 그들 입장에서는 뿌듯하겠지요.
오늘날 많은 글꼴이 나오고 있고, 특히 '탈네모꼴' (모든 글자가 동일한 '네모' 안에 들어가는 형태가 네모꼴. 그렇지 않은 것이 탈네모꼴. 탈네모꼴의 대표적인 글꼴이 안상수체)도 나오고 있지만 명조와 고딕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로 개발되는 글꼴 중에도 X명조, X고딕 식의 글꼴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유럽을 보면 같은 알파벳인데도 국가마다 자국의 색깔이 강한 글꼴들을 사용하곤 한다는데, 우리나라도 '국민 글꼴' 정도는 이제 명조와 고딕의 범주를 좀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P.S.
유럽의 몇 가지 글꼴들. 같은 알파벳이라도 국가색이 나타납니다.
1. 독일의 '블랙 레터'

블랙 레터는 독일 지역 수도사들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구텐베르크에 의해 사용되던 것도 이 블랙 레터의 한 종류였습니다.

그러나 나치 시절 블랙레터는 나치독일의 글꼴로 명성(?)을 날리게 됨에 따라 2차대전 이후 블랙레터에 나치의 이미지가 새겨지는 불상사가 있기도 하였지요.
2. 스위스의 헬베티카 글꼴
헬베티카란 스위스의 라틴어 국명인 Confoederatio Helvetica 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서체는 신세리프 글꼴의 하나로서 외견상 아리엘 체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http://www.storysearch.co.kr/photo/?at=view&azi=1819&vimg=005f0b4fd70051b5b472d2d181e27611088.l.jpg
(사진이 유료라고 해서 링크만 걸어 봅니다)
3. 영국의 타임즈 글꼴
http://www.storysearch.co.kr/photo/?at=view&azi=54893&vimg=014888a51be23f3cc77ef7d8b52abfb702d.l.jpg
영국 신문사 <더 타임즈> 에서 개발한 글꼴로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글꼴 중 하나라고 합니다.
첫댓글 제가 주로 가는 역사문이라는 역사 카페에서 미주가효님이 쓰신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