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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간 |
거 리 |
출발 시간 |
소요 시간 |
비 고 |
노치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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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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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2봉 |
1.00 |
11:18 |
53 |
30분 행사 |
수 정 봉 |
1.05 |
11:40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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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원 재 |
4.95 |
13:58 |
138 |
30분 점심 |
고 남 산 |
5.16 |
15:42 |
164 |
|
통 안 재 |
0.9 |
16:20 |
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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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포 리 |
1.62 |
16:44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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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14.68 km |
06:19 |
05:19 |
실 소요시간 |
산행기록
지도 #1
10:13
노치마을에 도착합니다.
노치마을 안내판에는 엉뚱한 글들이 소개되어 있군요.
갈대가 많아서 노치마을이라고?
이 노치마을 뒤편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전면에 수령 500년이 넘는 소나무 다섯 그루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병풍처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 소나무 숲은 조선 초 경주정씨가 터를 잡고 경주이씨가 들어와 노치마을을 형성하면서 산세가 너무 좋아 마을 수호신으로 모시기 위해 이 터에 소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 가꾼 곳이다. 그 나무 바로 밑에 당산제단이 있다. 노치마을 당산제堂山祭는 7월 백중에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올리는 제사로 지역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한편 마을에서는 자신의 동네 이름을 “갈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산줄기의 높은 곳이 갈대로 덮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노치마을은 수정봉에서 고리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위에 있어, 비가 내려 빗물이 왼쪽으로 흐르면 섬진강이 되고 오른쪽으로 흐르면 낙동강이 되는 마을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갈재’라는 이름이 산에 갈대가 많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것에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갈대라고 한다면 바다나 강가의 물이 있는 곳에 자라는 식물 아닌가? 그런데 산꼭대기에 갈대가 많아 ‘갈대 노蘆’를 써서 蘆峙마을이라니!
이는 국어학적으로 보아 이 마을의 생김새를 보고 가져온 이름이 변하여 현재 이름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즉 예로부터 이 마을은 주촌면과 운봉읍의 경계였다. 그러기도 하려니와 백제와 신라의 국경마을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이 마을은 자연스럽게 '갈라지다', ‘갈리다’라는 의미를 갖는 마을이었다.
갈라산이나 갈미봉 같은 이름의 '갈'도 칡이나 갈대와는 관계없이 '산꼭대기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이라는 특유의 의미를 지닌 봉우리들이다. 이 '갈라지다'라는 말에 한자가 들어오면서 훈차訓借하여 칡'葛'을 쓰다 보니 난데없이 칡이 많이 나는 봉우리가 되었고, 음차音借를 하다 보니 갈→갈대→갈대 노蘆를 써서 그것을 거꾸로 해석하여 ‘갈대가 많은 산’이 노령蘆嶺 혹은 노치蘆峙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점잖게 주촌면과 운봉읍을 가르는 마을 혹은 峙를 감안하여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이루던 고개가 있던 마을이라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령산맥의 노령蘆嶺의 옛 이름이 갈재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추령秋嶺이 가을 단풍이 예뻐서 추령이 된 것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가르다→갈→가을→‘가을 秋’가 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59쪽
이 노치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제1구간이 지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품은 전북·전남·경남 등 3개 도, 남원·구례·하동·산청·함양 등 5개 시·군의 21개 읍·면 117개 마을을 잇는 22개구간(20개의 본선과 2개의 기선) 295km로 지리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환형環形으로 연결하고 있다. 둘레를 잇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사람과 생명, 성찰과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지리산 둘레길은 숲길(43.8%), 농로(20.8%), 마을길(19.9%) 등으로 이어져 있다.
2007년1월24일 사단법인 숲길을 창립하여 조사, 설계, 정비사업을 추진, 2008년3월 지리산둘레길안내센터 사무동을 완공하였다. 2008년4월27일 ‘지리산둘레길’ 시범구간인 남원 산내~함양 휴천의 개통식을 시작으로 2008년10월16일 인월~산내 구간 개통, 2009년5월22일 남원과 산청구간 총연장 70km를 개통하였다. 그러고는 2011년5월, 총 209.3km(남원, 함양, 산청, 구례, 하동) 개통하였고, 2012년 5월 총 295km 환형의 전체구간을 완전 개통하였다.
인터넷에서 지리산 둘레길 공식 관리기관인 ‘사단법인 숲길’에 들어가 보면 상당한 자료들을 모아놓았다. 아주 자세한 구간 설명과 함께 생생한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일반적인 자료이니 그것만 가지고 진행한다는 것은 자칫 무미건조해질 우려가 있다. 그것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계획을 짜보는 게 둘레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 졸저 전게서 36쪽
산에 오르기 전 간단하게 몸을 풉니다.
개는 열심히 짖어대고...
"너는 짖어라! 우리는 몸을 푼다."
10:25
노치마을의 상징물입니다.
백두대간이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으니 자랑스럽기도 한 마을입니다.
대원들 하나 둘씩 대간 출정식 제를 지내기 위해 단이 있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조망이 좀 그렇습니다.
주촌리에서 산줄기 아니 대간길이 고리봉으로 올라 우측 만복대로 흐르는 모습만은 뚜렸합니다.
나중에 지리산 서부(북)능선 구간을 하다보면 고리봉이 두 개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예습을 해볼까요?
어떤 게 진짜 고리봉인가?
정상석이 있는 고리봉1248m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은 고리봉’이다. 멀리서 보면 이 고리봉은 만복대와 노고단 혹은 반야봉에 눌려 좀 왜소하게 보이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까 본 백두대간이 갈리는 2등급 삼각점이 있었던 1305.4m의 고리봉과 구분하여 이 봉우리를 작은고리봉이라고도 부른다. 합당할까?
고리봉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아예 정리하고 지나가자. 예전 국립공원에서 제작한 지도에는 이 '작은 고리봉'이 두리봉으로 실려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우리 고어古語에서는 고리봉의 고高와 두리봉의 두頭 모두 높은 정상의 봉우리를 뜻하는 공통점이 있어 이에 착안하여 두 봉우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리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고리봉이 산행 이정의 중심이 되고 두리봉이 인구의 회자에서 밀려짐에 따라 그 둘을 구분하고자 '큰'자와 '작은'자를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고어를 놓고 보자면 높을高 보다는 머리頭가 더 높고 '대장'의 의미로 자주 채택되었음은 백두산을 통하여 이미 증명이 되었던 터, 그렇다면 오히려 ‘작은고리봉=고리봉’, ‘큰 고리봉=두리봉’이라 칭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한편 예전 서부능선의 고리봉에서 가지를 쳐 고기리로 떨어지던 탈출로가 이제는 거꾸로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갈림봉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이 고리봉에 삼각점 그것도 2등급 삼각점(운봉 25)이 박혀 있어 그 중요도는 익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쨌든 지리산의 한 축을 담당했던 서부(북)능선의 중심이 만복대보다 오히려 고리봉 즉 큰고리봉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작은고리봉은 달궁과 관련하여 황장군이 지키던 황령치가 지금의 묘봉치로 추정되는 만큼 이참에 이 작은고리봉을 아예 묘봉妙峰으로 부르는 건 어떨까?
<사진 18> 작은고리봉 정상석. 이참에 고리봉 혹은 묘봉으로 부르면 어떨까?
참고로 남원 사람들은 고리봉이라고 하면 남원시 금지면과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요천(천황)지맥 끝자락에 있는 고리봉710.1m을 먼저 쳐준다. 풍수지리설 때문이다. 즉 이에 의하면 남원은 그 생김새가 배모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홍수가 날 경우 남원 전체가 빗물에 휩쓸려 떠 내려 갈 형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고리봉이 배모양을 한 남원의 선수船首를 이 봉에 매어두는 역할을 하는 산이라고 하니 가히 남원의 진산이라고 할만도 하다. 물론 이 고리봉이 섬진강과 요천이 만나는 합수점 부근에 위치해 있고 생김새도 고리 모양이어서 풍수가들이 볼 때에는 이 고리봉을 남원을 매어두는 역할을 하는 봉우리로 봤을 것이긴 하다.
- 졸저 전게서 485쪽
그 만복대 우측으로 서시지맥이 갈리는 모습을 보이며 그 아래는 고기저수지의 제방도 보이는군요.
만복대의 ‘대臺’의 의미는?
대臺는 보통 외형 상 내려다보았을 때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곳이거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바위 꼭대기의 넓고 평평한 반석盤石을 얘기한다. 그런데 바위는 기가 모이는 힘이 대단하여 바위 주변에서 수행하거나 기도하는 것이 효험이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큰 바위 주변에 수도처로서의 대臺가 많다는 것이다. 이 기도발이 먹힌다는 것은 비단 스님들의 수행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이 산신으로부터 영험함을 전수받는 데에도 상당한 효험이 있다고 한다.
이는 누천년 간 사제지간에 전승 혹은 같은 직업군에서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험담의 일부로도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니 이렇게 대단히 신비스러운 바위 주변에 '토굴'들이 많다 보니 큰 바위를 일컫는 '대臺'가 '토굴'의 이름에 붙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리산에는 ‘지리10대’ 가령 문수대, 우번대, 서산대, 문창대 등 이런 ‘대臺’가 10곳 이상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을 굳이 찾는다면 이와 같은 수려한 경관을 볼 수 있는 암벽과 그 아래로 석간수가 흐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지리산에 있어서 '대臺'의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산재한 유명 수도처에 옛날부터 '대臺'자가 붙어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예전의 수도승들은 땅굴을 파고 기거하면서 수행을 했다 한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땅굴 대신에 깊은 산중에 한 칸 암자를 짓는 형태로 변했는데 어쨌든 이런 연유로 하여 자신이 거주하는 곳을 낮추어 일컫는 말로 '토굴土窟'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토굴은 혼자 수행할 공간만 있는 조그만 암자의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낮추어 일컫는 이 '토굴'을 불가에서는 암자와 구별하여 대臺라 칭한다 한다. 그러니 문수대라 함은 문수암을 말하는 것도 되고 묘향대라 함은 묘향암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수도처로서의 '대臺'는 토굴의 다른 이름이며 토굴의 배경이 되는 바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사진 17> 문수암 정경. 노고단 아래 있는 토굴로 지리10대 중 하나이다.
그런데 만복대는 이런 ‘대臺’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저 봉우리의 다른 이름 즉 ‘정상이 두드러지게 평평한’의 의미인 돈대墩臺의 뜻으로 쓰였으니 위에서 얘기한 ‘대臺’와는 좀 다르다 하겠다.
- 졸저 전게서 483쪽
서시지맥이 나왔습니다.
지맥枝脈이라!
대간을 처음하는 분들께 지맥을 설명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오늘은 그냥 지맥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기로 합니다.
지맥은 대간과 정맥의 하위개념이다. 즉 대간大幹〉정맥正脈〉지맥枝脈이니 지맥은 산줄기 계급 체계의 제일 하위에 있는 개념이다. 물론 기맥, 분맥, 단맥, 여맥도 상정할 수 있지만 너무 세분시키는 것이기도 하며 논란만 부추기는 격이니 여기서는 언급을 피한다.
지맥이라는 계급이 붙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즉 ①‘산줄기 요건’으로 백두대간이나 정맥 그리고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지맥에서 가지를 친 줄기여야 한다. 그리고 ②‘물줄기 요건’으로 그 줄기가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 발원하는 물줄기와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합수점형)여야 하며, ③마지막으로 ‘산줄기의 길이 요건’으로 그 도상거리가 30km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들이다.
다만 ②요건의 경우 산줄기를 조금 더 유용하게 쓰기 위하여 특별한 경우에는 예외를 두는 바, 가령 관련된 물줄기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것(㉯울타리형)이나 반도의 모양새를 가진 땅에서 호수나 강 혹은 바다 등으로 진행하는 산줄기(㉰산줄기형)의 경우 등이 그것이다.
즉 정리하자면 ㉮합수점형, ㉯울타리형, ㉰산줄기형 등 세 가지가 유형에 해당되어야 한다. 좀 어려운 내용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산줄기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니 차근차근 살펴보자.
- 졸저 전게서 405쪽 이라
무탈하게 진부령까지 대간 완주를 기하는 제를 올리고....
둘레길을 걷는 진주팀도 올라와 여기저기를 살펴봅니다.
"이곳이 백두대간 길입니다."라는 설명만 귀에 들어오는군요.
백두대간이 무엇이라는 설명도 해주셔야죠.
애들도 있던데....
소나무가 아주 멋집니다.
산림청에서 제작한 안내판에도 여지없이 노치마을의 유래가 "갈대가 많아...."라고 표기되어 있군요.
인터넷의 폐해입니다.
서부지방산림청장에게도 제 책을 보내줘야 하는건가?
다만 백두대간에 대한 소개만큼은 제대로 되어 있군요.
30분 정도 행사를 마치고 산행을 시작합니다.
발걸음들이 다 가볍습니다.
11:10
지도 #1의 '가'의 곳입니다.
좌틀하면 구룡폭포로 진행하는 길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이 루트는 덕치리로 떨어져 도로를 따라 구룡폭포로 진행하는 길입니다.
그러니 능선을 따라 구룡폭포로 진행하는 길이 아님에 주의하여야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구룡폭포가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조금 이따 자세하게 그 비밀을 알려드립니다.
해밀에서 백두대간을 하시는 분들은 다른 분들이 얘기해주지 않는 아니 모르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서비스 받습니다.
해밀의 자랑입니다.
우측으로 수정봉이 살짝 고개를 내밉니다.
대간길은 거저 묵묵히 땅만 보고 걷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살펴보고, 느끼고 그리고 연구하며 공부하는 역사의 장입니다.
완주가 목표가 아니라 우리의 백두대간을 알아가는 과정에 방점을 둡니다.
해밀의 대장님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다 갖춰져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해밀 6기 여러분들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11:18
덕운봉이라는 코팅지가 붙어 있는 지도 #1의 '나'의 곳입니다.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759.2봉이라 표기되어 있죠.
이곳이 주천면과 운봉읍 그리고 이백면이 만나는 이른바 삼면봉三面峰입니다.
아주 중요한 봉우리입니다.
이 봉우리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살펴볼까요?
백두대간은 생물生物이다
문제는 이 구룡폭포가 가지고 있는 지위의 문제이다. 구룡폭포로 내려가는 원천천은 물줄기가 좁고 상당히 빠르다. 관련하여 좀 어렵긴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이고 산줄기 특히 백두대간과 관련된 문제이니 짚고 넘어가자. 예전 그러니까 적어도 신생대 제4기 정도 그러니까 2~3백만 년 전에는 백두대간이 지금의 고남산~여원치~수정봉에서 노치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이백면과 주천면의 면계를 따라 진행하다가 728.8봉에서 덕치리 방향으로 꺾여 지금의 구룡폭포를 넘어 906.2봉~1109.3봉을 지나 잠시 서시지맥 길을 따라 만복대로 가는 루트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신생대 제4기 이후 우리나라의 지형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다음 이 부근에서 두부침식頭腐浸蝕으로 인해 하천쟁탈stream piracy이 일어났다.
하천 쟁탈로 바뀐 백두대간길
살펴보면 운봉고원의 지질은 대부분 중생대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원의 남쪽과 북쪽에는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가 분포하고 있다. 운봉고원은 해발고도 450~550m 범위의 분지상 고원이다. 남동쪽의 산지에서 주촌천周村川이 발원하여 람천濫川에 합류한 다음 북류 및 동류하여 엄천강을 지나 남강에 유입되어 결국 낙동강에 흘러든다. 한편 백두대간 너머인 운봉 고원 최남단의 고기리에서는 원천천이 발원하여 좁고 깊은 협곡을 형성하며 서쪽으로 흘러 요천에 유입되어 결국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운봉 고원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주촌천의 유역은 침식 작용이 활발하지 않지만 경사가 매우 급한 원천천 유역은 하천의 침식작용이 상대적으로 활발할 것이다. 그러니 원천천은 좁고 깊은 협곡을 이루며 상류 쪽으로 골짜기를 더 확대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천천과 주촌천의 경계를 이루는 고기리, 덕치리와 주촌리 일대에서는 원천천이 주촌천 유역에 침입하여 그 유역을 원천천의 유역으로 취하는 하천 쟁탈(stream piracy)이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니 위 지형도의 #60 도로 중 백두대간이 지나는 ‘가’~‘나‘ 구간의 좌측은 하천쟁탈의 흔적으로 지금은 주천면 땅이지만 예전에는 운봉땅이었을 것이고, 그 하천인 '舊 주촌천' 즉 무능하천은 물이 흘러 그 물은 북동진하여 람천에 합류되어 남강→낙동강으로 가는 물줄기였을 것이다. 곧 낙동강의 최상류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원천천은 지금의 고기리가 아닌 덕치리와 호경리의 경계에서 그저 호경리로 흘러 요천에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르는 물줄기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럴 경우 고리봉~고기3거리~노치마을~759.2봉의 라인은 백두대간이 아닌 것이 된다. 반면 만복대~1109.3봉~906.2봉~728.8봉~ 759.2봉(일명 덕운봉)라인이 원백두대간 라인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니 지금의 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라인은 곡중분수계谷中分水界divide in valley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현재 운봉 고원의 남서쪽에 치우쳐 위치한 백두대간의 분수계가 수만 또는 수십만 년 후에는 고원의 중앙부로 이동될 가능성이 높다.
백두대간을 걷는 이들이여! 고리봉에서 내려와 고기삼거리~노치마을의 60번 도로를 따라 걷는 약2km 구간을 그냥 걸을 일이 아니다. 도로 왼편은 섬진강 최상류 지류인 원천천 유역으로, 원천천이 두부침식으로 분수계를 넘으면서 과거 낙동강 최상류 구간을 쟁탈한 곳이라는 사실과 도로 오른편은 여전히 낙동강 유역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러면서 원천천은 급경사의 사면을 따라 활발하게 두부침식을 하면서 분수계를 넘고 하천쟁탈을 하였기에, 완만하게 이어지는 낙동강 최상류 구간보다는 침식력이 탁월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도로를 경계로 농경지 바닥의 고도는 왼편이 오른편에 비해 10cm가량 더 낮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자. 그래야 백두대간이 더 재미있을 것 아니겠는가! 이는 둘레꾼들도 마찬가지이다.
- 졸저 전게서 53쪽 이하
이렇듯 중요한 의미를 갖는 759.2봉과 구룡폭포입니다.
어느 정도 설명이 됐습니까?
다시 걷죠.
어제 내린 눈이 제법 쌓였습니다.
11:40
그러고는 이내 수정봉입니다.
3등급삼각점(운봉308)이 있는 수정봉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진행하기로 합니다.
존경하는 고남님이 운봉막걸리를 두 박스나 갖고 오셨습니다.
주지사 갈림 삼거리를 지나면 여원재 민박집을 안내하는 간판이 보이고 그러고는 두어 군데 식당과 민박집이 나온다. 기다리던 곳이다. 여기서 한 끼 식사와 물을 보충할 수 있다.
“운봉 막걸리가 아주 맛나기로 유명해. 목이나 축이고 가자.”
'우리 술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하는 운봉 막걸리는 냉장 상태에서 2~3일 숙성시켜 마셔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무덤 옆을 지나 좁은 오솔길을 빠져 나오면 바로 여원재이고 여기가 태조 이성계와 관련 있는 고개다. 대부분 당일치기로 구간진행 하는 대간꾼들이 산행을 마치는 지점이기도 하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87쪽
막걸리를 곁들여 점심을 먹고 일어납니다.
30분 정도 머물렀습니다.
12:33
갓바래재라 불리는 입망치를 지나,
지도 #2
수정봉에서 이백으로 흐르는 줄기 뒤로 서시지맥이 보이는군요.
12:58
엣 성의 흔적을 봅니다.
예전 백제와 신라가 이 운봉을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운봉만큼은 경상도와 전라도가 혼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고즈넉한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좌측 주지사 뒤로 바위봉이 심상치 않습니다.
남원 시내가 뿌옇게 보인느군요.
우측은 이백.
13:22
여기서 대간길을 우측으로 보내고 잠시 주지사 뒷봉을 다녀옵니다.
도요새님입니다.
오지산행을 홀로 즐기시는 분이죠.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웬일로....
바로 저 봉우리인데....
13:30
그 봉우리 위에 부처님이 계시는군요.
고남님이 포즈를 잡습니다.
이건 또 언제 찍으셨나?
저도 폼 한 번 잡고.....
지나온 방향.
남원....
관세음보살....
여원재 넘어 방아산성과 고남산.
고남님이 고남이라는 닉을 제공해준 산으로 태조 이성계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고개와 봉우리입니다.
방아산성은 동학농민혁명의 방아치 전투와 관련 있는 곳이고....
우측으로 황상대첩의 현장 황산을 봅니다.
그런데 저 아래 여원재를 보노라니 대원들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군요.
아니 이 분들이 발에 모터를 다셨나?
부처님 저 분들 좀 심상치 안호아 보이나이다.
저렇게 정신없이 다니다 큰일 나겠나이다.
13:38
다시 내려갑니다.
13:44
주지사 입구.
좀 서둘러 내려옵니다.
13:55
민박집 입구를 지나,
조금 전 내려온 주지봉을 봅니다.
아까 그 방위봉은 우측에 있는 암봉입니다.
13:59
그러고는 여원재입니다.
여기서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로와 만나게 됩니다.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라! 백의종군로가 무엇인가?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해로 거슬러 올라가자. 당시 왜구가 부산포에 상륙한 이래 조선의 육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그렇게도 우국충정을 떠들어 대던 대신과 관료들은 도망가기 바빴고 나라를 지키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는 왕인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나라의 끝 압록강 변 의주에 임시 수도를 정한 무능하기 짝이 없는 선조는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명은 주판알 튕기기에 바빴다. “①혹시 조선이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중국을 치기 위해 허위 원군을 요청하는 게 아닌가? ②기우杞憂라면 요동이나 계주를 보호하는 울타리인 조선을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요동과 계주 같은 평원이 아닌 지형이 험준한 조선땅을 이용해 방어할 수 있고 그러면 병력 동원도 줄일 수 있으며 또한 조선을 이용할 수 있으므로 군사비도 덜 들지 않겠는가.”라는 결론을 내고서야 참전 결정을 하게 된다. 그렇게 명나라 원군이 들어오게 되었고 1593년 1월 명은 평양전투에서 처음으로 왜군에 승리를 거둔다. 애당초 왜구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고 다만 왜구가 압록강을 넘는 것만 막으려 했던 명은 계속 왜구를 밀어붙여 전쟁을 끝내려 하지 않고 조선을 배제한 채 왜구와 강화협상에만 매달리게 된다. 그렇게 지루한 협상이 4년 정도를 끌며 지지부진하게 되자 지원군이 아닌 점령군인 명나라와 침략군인 왜군의 대치 상태 속에 이 나라 민초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기만 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남명 조식의 제자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호남의 곡창지대로 통하는 요충지를 지키고 있고 호남과 한강 그리고 대동강으로 통할 수 있는 해로를 이순신이 장악하고 있어 왜구들의 물자 수송이 어려워 그나마 왜구의 공격을 더디게 만들거나 양면 공격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선조가 국경을 넘어 명으로 망명하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었다. 전혀 조선인답지 않았던 조선인 이순신과 경의를 중시한 남명학파 가령 곽재우나 정인홍 등의 덕이었다.
위와 같이 개전 이래 육군과는 달리 연전연승을 하여 섬나라 왜구의 해군이 감히 이순신을 두려워하여 바닷길을 통해 병력이나 물자 수송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신뢰는 대단하였다. 하지만 명과 왜의 강화회담이 장기화 되고 이런 명나라에 대해 불만이었던 선조는 류성룡 등으로 하여금 이여송을 채근토록 하는데 명은 이에도 꿈쩍하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던 것이다. 당시 민중들에게 곽재우, 정인홍과 이순신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반면 왜가 한양에 접근을 하기 전에 벌써 도망갈 궁리나 하는 선조에 대한 평은 어땠을까?
결국 명과 왜구가 서로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담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왜구는 다시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이때 선조는 이순신으로 하여금 부산포로 가서 일본군을 공격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해군인 이순신 장군으로서는 배에서 싸워야 하는데 해군도 아닌 왜구의 육군을 공격할 수도 없음은 물론 무모한 공격으로 패할 경우 이순신이 있어 그나마 보호 받고 있던 호남지방이나 한강, 임진강 그리고 대동강 등의 수로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이러한 불가 이유를 들어 왕명을 따르지 않자 선조는 장계를 내려 이순신을 잡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러다 다행히 남명 조식의 제자 정탁(1526~1605)의 유일한 상소로 4월 1일에야 풀려나게 된다.
그러면서 이순신에게 경남 초계(지금의 합천)에 있던 권율 도원수 휘하에서 계급 없이 전쟁에 임하라는 이른바 ‘백의종군'을 명하게 된다. 이때부터 120일 후인 1597년 8월 3일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군수군통제사로 제수받기 전까지 백의종군하며 움직이게 된다. 서울을 출발한 장군은 경기도, 충청도, 전라북도의 여산, 삼례, 전주, 임실을 거쳐 합천으로 가던 중, 4월 24일부터 25일까지 남원과 운봉에서 이틀을 머문다. 여기서 도원수 권율이 순천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합천으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구례를 거쳐 순천으로 가게 된다. 남원시와 구례군에서는 이를 기리기 위해 이 동선動線을 좇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백의종군로白衣從軍路'라 이름하고 길을 정비했다. 남원 구간의 백의종군로는 장군이 남원에서 구례로 가는 2박 3일간의 여정을 담은 구간이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44쪽
여원재에 대해 살펴볼까요?
당시 상황을 보자. 군산진에서 패한 패잔병들은 이른바 ‘왜구(倭寇) 루트’를 통하여 도망갔다. 김천을 지나 그들의 2차 집결지는 지금의 바로 이 남원 운봉이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그는 토벌군의 구원요청을 받고 긴급 출동하여 백두대간 상의 이 여원재 부근에 주둔하게 된다. 그때 홀연히 백발의 여인이 꿈에 나타난다. 그 여인은 이성계에게 일본군을 물리 칠 계략을 일러준다. 반신반의했지만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이성계는 그 여인의 작전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여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 전투가 진포대첩과 함께 고려 4대 대첩 중 하나인 ‘황산대첩’이다. 택리지에도 ‘우리 태조가 왜구를 크게 섬멸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토는 택리지의 일어 번역본인 조선팔역지를 통하여 익히 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이성계는 이 여인에 대한 고마움을 기려 사당을 지었고 그 사당을 여원(女院)이라 하였다. 그러니 여원이 있는 부근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여원재(女院岾)라 불렸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여원치(女院峙)라고 기록되어 있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91쪽
운성대장군 석상 좌측에 있는 안내판이 이순신백의종군로 안내판입니다.
이 여원재에서 이백면 방향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아주 중요한 유적들이 있습니다.
유적의 보고 여원재
이렇듯 여원재는 태조 이성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한편 지금의 운봉읍과 이백면을 잇는 24번 도로는 여원재 옛길과 조금 다르다. 여원재에서 남원 방향 도로로 약 100m 정도 내려가면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원재마애불(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2호)’ 안내 푯말이 보인다. 이곳에서 산자락 아래로 신작로 같은 너른 숲길이 이어진다. 산자락 아래가 이백면 양가리와 운봉읍 장교리를 잇는 ‘여원재 옛길’이고, 남원과 인월-함양을 잇던 조선시대 간선도로인 통영별로 ‘응령역-인월역’ 구간 길이다. 숲길을 잠시 내려서면 오른쪽 절벽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마애불을 만난다. 이 마애불 오른쪽에는 1901년 운봉현감 박귀진이 태조 이성계와의 인연 설화를 새긴 명문이 있다. 즉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노파(지리산 도고道姑 할미)의 계시를 받아 왜구를 섬멸하였고, 이는 지리산신이 나타났던 것으로 여겨 불각佛閣을 짓고 모시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420년 전인 1597년(정유년) 6월 9일(음력 4.25일) 낮. 남명 조식의 제자 정탁鄭琢(1526~1605)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나 ‘백의종군길’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권율 도원수부가 있는 경남 초계(합천)로 가기 위해 이 길을 지나 운봉 박롱(혹은 박산취)의 집에서 유숙한다. 비가 몹시 내려 길을 멈추고 있는 사이, 권율이 전라도 순천으로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음날 구례로 향하게 된다. 바로 남원-구례-하동-산청 방향으로 ‘지리산권역 백의종군로’가 바뀌게 되는 순간이다.
<사진 10〉 명나라 장수 유정이 여원재를 두 번 지났다고 하는 유정부과 각자.
이 마애불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옛길은 예전과는 달리 남원시에서 제초 작업을 하여 ‘백의종군길’을 활성화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쓰러진 나무와 초목이 뒤엉켜 어지럽고 빽빽한 숲은 발 디딜 곳을 찾을 수 없어 진행하기가 어려웠던 곳이었는데 남원시 덕에 옛길을 찾은 것이다. 약 5분 정도 인적 없는 편안한 길을 더 내려가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1558~1619)이 두 번 이 길을 지나갔다며 ‘유정부과劉綎復過’라고 글을 새겨놓은 거대한 바위에 닿는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함께 협공하기로 한 약속을 어겨 순천 왜성에 주둔하던 일본군의 일망타진을 무산시킨 유정이 ‘여원재 옛길’을 두 번째로 지나간 것은 1594년 음력 3월이다. 그로부터 약 3년 뒤 백의종군을 하며 이 길을 지나가던 이순신 장군은 이 바위를 보았을까? 지리산권역의 ‘이순신 장군 백의종군로’와 맞물려 있는 이 ‘여원재 옛길’이 복원되어 한결 여유롭게 '백의종군 길'을 지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200여m 더 내려가면 1593년 5월 그가 처음 이곳을 지나면서 ‘유정차과劉綎此過’라고 각자한 바위도 볼 수 있으니 이왕이면 조금 더 발품을 파는 게 나을 것이다. 두류전지에는 ‘유장군석각’이라는 대목에 나온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65쪽
전선 정비를 위하여 나무를 베고 있는 한전직원들 뒤로 빠져나옵니다.
14:19
565.3봉에서 우틀하고,
지도 #3
장교리 좌측으로 교묘하게 이어지는 대간길을 걷습니다.
그나저나 대원들 꼬리가 잡히질 않습니다.
철탑 바로 우측이 방아산성인데....
14:44
방아산성 입구를 지나서야 겨우 대원들 꼬리를 잡습니다.
농민군이 대패를 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박봉양은 영남지방에서 막강한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무엇보다도 이를 운봉고원이라는 지형에서 찾고 싶다. 즉 방아산성은 마한이나 백제 때 운봉지역이 고원지대라는 걸 염두에 두고 조성한 석성이다. 그런데 이 석성은 운봉 쪽에서 보자면 그저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이백이나 산동에서 보자면 640m나 되는 상당한 고봉이다. 그러니 그 우측의 고남산이 846.8m이고 보면 운봉을 치고 인월을 지나 산청으로 진격을 하자면 어차피 여원재477m가 아닌 방아치가 유격전술에 용이했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데 유복만, 남응삼이 이끄는 농민군은 해발 640m의 거친 서쪽 사면을 치고 올라가야 하지만 민보군은 100m 정도만 오르면 되며 더욱이 부근에 산재해 있는 직경 30cm 정도의 돌을 굴려 공격을 하니 농민군은 이미 이길 수 없는 전투가 되고 말았다.
- 졸저 '현오와 걷는 지리산' 72쪽 각주1)
15:00
대간길에 있는 무덤.
15:23
관암재 부근의 이 무덤도 외롭지 않아 좋겠습니다.
15:30
805.6봉을 올라,
나무 계단을 오르면서 주위를 조망합니다.
요천 건너 남원시 산동면 일대가 보이고 중앙 뾰족봉이 요천지맥의 맹주 천황산909.6m입니다.
그 우측으로 개동산과 신무산이 보이고....
조금 전 지나온 주지봉.
우측 다음 구간때 진행하게 될 대간길.
15:42
고남산846.8m 정상에는 산불감시초소와,
2등급삼각점(고남21)이 있고,
이성계 관련 안내판이 있습니다.
공원에서 우회전하여 람천 제방 길을 따라 걷는다. 그 람촌 뒤로 고남산846.4m이 한결 가까워졌다. 1380. 9. 진포대첩으로 퇴로를 잃은 왜구들을 토벌하기 위해 고려 우왕의 명을 받은 태조 이성계가 저 고남산에 올라 약수로 목욕재계를 하고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고남산은 태조봉으로도 불린다. 문헌에는 적산赤山, 고조봉高租奉, 제왕봉帝王峰, 일광산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정상에는 KT송신탑이 설치되어 있다. 정상에는 석축으로 쌓은 3층 천제단이 있는데 황산대첩 시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올라 전승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 졸저 전게서 74쪽 이하
KT송신탑.
고남산 정상석은 조금 더 내려가야죠?
좌측 낮은 봉우리가 황산이고 우측이 서부능선의 덕두산과 바래봉입니다.
별로 시야가 안 좋습니다.
정상석을 보고 10여 분 기다렸다 단체사진 촬영을 합니다.
16:20
통안재입니다.
이제 대간길에서 벗어나 하이파이브를 하며 오늘 구간 완주를 자축합니다.
이번 6기 팀들은 준비가 아주 잘 된 분들 같습니다.
오늘 구간을 6시간 정도 걸렸으니 행사진행 시간과 점심 시간을 빼면 5시간이니 시속 3km 정도로 걸었다는 얘기입니다.
뭐 이런 초보들이 있습니까?
대간길을 빠져나와 권퍼리로 내려옵니다.
개인적으로 이 권포리는 상당히 기억에 남는 곳입니다.
이곳에 이르러 대간길을 혼자했기 때문이죠.
지루함 때문이었습니다.
주지봉.
지리서부능선을 봅니다.
마을회관에서 좀 쉬고.....
서부능선....
모두 고남으로 통합니다.
저녁식사는 운봉 뷔페에서 하기로 했고....
수지구청으로 돌아와서는 오랜만에 이한검 대장님을 만나고 귀가를 합니다.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많은 분들과 즐겁게 산행하시는 모습 부럽습니다
저는 고남산을 탐방하면서 이리저리 헤매었습니다
때로는 교과서 같고, 대로는 재미있는 산행기 같아 좋습니다
오늘도 멋진 하루 이어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