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일본군 경복궁 습격 (나무위키)
▪︎1894년 7월23일, 새벽 5시 지금 청와대로 들어가는 효자로 쪽 영추문을 일본 공병대가 부쉈다. 격렬한 교전이 벌어지고 오전 7시 30분 조선 병사가 북악 쪽으로 후퇴하며 사격이 멈췄다.
▪︎일본의 권유로 미국으로부터 거금을 들여 사들여 경복궁 방어에 사용하려 했던, 게틀링 기관총 8문 .. 정작 전쟁이 일어 났을때 한발도 못쐈다. 왜? .. 기관총을 경복궁에서 사용하면 선대의 왕들께서 물려준 경복궁이 파손될 수 있으니 고종이 멈추라고 했다. 천하의 천치바보가 고종이 아닌가.... 무뇌아 ...... ㅡ나무위키
▪︎그때, (아베의 고조 할아버지가 되는) 야마구치 일본군 대대장이, 건청궁에 있던 고종에게 칼을 들이밀고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고종은 군사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났다. (일청전사 초안) 병사들은 통곡하며 총을 부수고 군복을 찢으며 도망했다.(매천야록)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무기고에 있던 조선군 무기를 효창동에 있는 여단 사령부로 옮겼다. 그때 조선군으로부터 일본군이 획득한 무기 목록은 이렇다.
ㅡ 크루프 산포 8문 / 개틀링 기관포 8문, 모젤, 레밍턴, 마르추 소총 2000정 / 화승총과 활 다수 / 군마 14필 (경성부사). 조선군이 보유한 모든 병기는, 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명품 무기들이었다.
▪︎이틀 뒤 풍도에서 일본 군함이 청 군함을 격침시키고, 연이어 성환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섬멸했다. 8월 1일 상황을 장악한 일본이 청에 선전포고 했다.
해월 최시형의 재판, 1898년 5월 29일(양 7월 18일)에 고등재판소에서 해월과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 등 4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한국 검사 1호는 결국 매국노로 변신한 이완용, 판사1호는 동학혁명을 촉발시킨 관직을 고종으로부터 사들인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을, 당시 황제 이명복(고종)이 임명하다. 결국, 해월선생과 3인은 법대로 처형당했다.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은 모두 검사, 판사, 재판관 출신들이었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 -1926) 전라북도와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 출신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1858 -1916) 평리원 재판장서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1865 -1919) 평리원 재판장(현재의 대법원장)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 -1928) 평리원 재판장과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1854 -1934) 평리원 재판장서리
■을사5적 중 지방 재판소 판사 출신인 이완용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 모두가 요즘의 대법원격인 평리원의 재판장 혹은 재판장 서리를 지냈다.
이들은 을사조약에 찬성함으로써 스스로 매국노의 길을 택한 것이다.
※ 평리원(平理院): 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현재의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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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상 쓸데 없는 인간은 인격은 덜 된 채 공부만 해댄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