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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
최 상 규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하고 홀가분하게 죽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없든가 아주 적은 사람‘ 그러나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당초에 볼일을 많이 가지고 세상에 나온 사람은 더욱이. 결국 중간에서 내리고 만다. 목표를 저만큼 앞두고서도. 하지만 그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일이므로 아주 편리한 법칙이기도 하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벤치 한 구석이 비어 있었다. 앉았다. 하루를 끝낸 심신이 축 늘어졌다. 잠깐 조는 기분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졸아지지 않았다. 딱딱한 나무때기 위에 앉은 채로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자세를 모색했다(항시 편안한 걸 소망하면서 왜 진작에 그런 걸 궁리해두지 못했던가). 불면을 면할 수 없었고, 조는 기분도 낼 수 없었다.
맞은편에도 벤치가 있었고, 거기에도 사람들이 편안치 못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운명을 달리하는 사람들. 그들은 이편 사람들과 정반대로 가게 되니까. 그 사이를 가로막고 두 줄의 선로가 놓여 있는 낮은 공간. 열차가 없을 때에는 항시 비어 있는 공간. 아까운. 문득 거기 물을 가득 채워 운하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배를 타고 지하동굴을 지나…… 물결도 일지 않게. 한가롭고 조용하게. 참으로 기발하고 인간애적인 착상이었다. 모든 인간적 현상이 거기 따라와주기만 한다면. 마음만 먹으면 지하철을 지하운하로 바꾸는 일쯤 누워 떡먹기이다. 거꾸로 선 점성술사가 되기로만 한다면. 그러나 시장께서는 노발대발할 것이다. 그런 소리를 한 죄로 비시민으로 강등시킬지 모른다.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건 필요에 역행하는 것이다. 이 얼간아!’ 이렇게 되면 못된 민성으로 타락하는 착상. 그러나 인간은 욕망을 창조하지 필요를 창조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필요에만 얽매어 살았던들 아마 인간은…… 언제 인간이 전화가 필요해서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던가? 비행기가 필요해서 만들어 타고 다니기 시작했던가? 그러나 지하철은 순전히 필요의 산물이다. 그런데 ‘소리없는 지하 운하’ 는……원망(願望)이다. 물론 머리 위 지상과 세계와는 잘 맞아들어 갈 수 없는, 심히 불편한…… 그러나 원망 그 자체는 순수한 리얼리티다. 아무리 작은 발상일지라도. 그리고 이런 단정을 내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약간 자기 존재를 실감할 수 있다.
열차의 접근신호가 울렸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선의 구획을 향하여 서서히. 시스템. 질서. 열차는 정해진 위치에 설 것이다. 몇 센티의 오차는 있어도 좋다. 우리는 그걸 확신하고, 아직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물체의 도착을 기다린다. 멍청해도 좋다. 빨간 신호등을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 동안만은 혼을 때버려도 손해나지 않는다.
문득 낮에 읽었던 잡지기사가 생각났다. 미국의 〈바람둥이 클럽〉. 심심해 못 견디는 사람들에게 혼음의 장소를 제공해주는 업체. 탐방기사였다. 입장하고 난 후에 옷을 벗고 안 벗고는 자유. 남들이 하는 걸 보다가 벗고 싶을 때 벗는 것이다. 뚱뚱보여인이 짝을 못 찾아 윗도리만 갈친 채, 천장을 바라보며 몇 시간씩 앉아 있기도 한다. 혹시 그녀는 점점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건 탐방기자의 눈에 뜨인 어떤 소녀였다. 남의 눈에 뜨이기 힘든 한쪽 구석에 한 아가씨가 발가벗고 앉아 있었다.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적당한 짝을 찾고 있는 것도 아닌 모습으로 그저 명하니 앉아 있었다. 뚱뚱보 여인에 비해 자랑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몸매를 하고 있는 전도양양한 아가씨가. 그래 기자가 물었다, 아가씨는 왜 옷을 벗고 있느냐고. 그랬더니 소녀는 대답했다. 이 안에 들어와보니 옷 벗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죠. 멍청한 사람들이다. 왜 그렇게 멍청하냐고 물어봐야 소용없다. 그럴려면 무엇하러 이곳엔 들어왔느냐고 물었다간 주제넘은 질문 하지도 말란 지청구나 먹기 십상이다. 그러나 소녀는 참 아기자기하게 멍청하지 않은가?
우리가 아기자기할 틈을 주지 않고 열차가 왔다. 문이 열리고 몇 사람이 내렸다. 사람들이 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종류건 사람이 줄을 섰다 하면 처음과 끝은 있는 법. 그건 꼭 우연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연도 작용한다. 그런데 왜 늘 맨 꽁무니인가. 전차시대부터 버스시대를 거쳐 전철시대에 이르기까지 ? 맨 끝에 섰으니까 멘 나중에 타야 한다는 법도에 따라 차에 오르자 문이 닫혔다.
유행을 따르는 데 앞장서는 것도 바보지만, 유행을 버리는 데 앞장서지 않는 자도 바보다. ‘열차’를 ˙유행’과 대치하고 보니 걸맞아들어갔다. 그러나 후반부터는…… 문득 그것마저 실천에 옮기자는 생각이 들었다. 서 있는 위치가 또 특권적으로 그걸 용이케 하는 문 앞이었다. 다음 역은…… 서울역이었다. 어디 세상에 할 일 다 하고 죽는 사람이 흔하던가 더구나 타를 차고 가는 데에는…… 내릴 곳에서 내리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보다는 미리 내려는 것이 얼마나 희망적이고 여유있는 행동인가.
땅 밑에서 나오니, 으레 밖은 밝으려니 했었는데, 지상은 밤이었다. 서울역. 그날로서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었다. 순전히 ‘열차’를 ‘유행’에 대입해본 장난 때문에 도착되어진 곳. 그렇다고 실수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사람에게 들킨 두더지처럼 깜짝 놀라 땅 밑으로 되들어가는 것도 서투른 짓이었다. 혹시 누가 눈여겨보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수상하게 생각될 것인가. 몸뚱이를 실수케 하는 저능한 머리를 역사(驛舍) 이마빼기의 시계가 비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곱시 삼십이분. 지하도에서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덩달아 그들을 따라 걸었다. 픽 웃음이 나왔다. 쑹맥. 정확하게 숙맥 (菽麥) =콩과 보리. 숙맥블변(不辨) =콩과 보리도 분간 못할 만큼 사리에 어두운 바보. ‘풍차(風車)와 A를 분간 못 한다’는 표현이 영어에 있다. ‘낫 놓고 기억 자도…….’를 이것과 똑같이 보는 것은 좀 비약일 테고·…· 하여튼 그러한 머릿속의 상황에 밀리어 걸었다. 왼손에는 여행용이 아닌 서류가방을 들고. 그러나 서류는 들지 않았었다. 중요하지 않은 책이 두어 권. 그리고 빈 도시락. 그러나 가방의 내용물은 아무도 짐작 못 할 것. 위장의 필요는 없었다. 행동만 이상하지 않으면 아무도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어디를 갈까? 매표구를 둘러보았다. 부산행. 정장을 한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그리로 다가갔다. 몇 시 찬가요? 여덟시 사십 분입니다. 부산까지 얼만가요? 좌석권은 매진됐습니다. 다음 차는 요 옆 창구로 가보십시오. 거기는 아홉시 반 차였다. 좌석이 있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표를 파는 직원은 매우 공무원적으로 친절했다. 표를 사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역사를 나왔다. 앞으로 두 시간. 그 두 시간이 지난 후라야 차표의 효력은 발생할 것이다. 광장에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다. 그때서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을 깨달았다. 왜 그 두 시간을 만들었는가. 길 건너 신호등의 빨간빛을 바라보며 멍청해야 하는 두 시간을 왜 만들었던가. 도대체가 이런 창조성 있는 행위를 할 나이가 아니지 않는가. 그 창조성이라는 것이 또 아주 퇴폐적인……
그건 ‘순수한 원망’ 속에나 파묻어둘 일이었다. 누구나 가끔 그런 짓을 해보고 싶을지는 모르지만, 남들은 그걸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그런데 뭘 잘났다고 대표자나 되는 것처럼 나서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못마땅했고, 또 약간 겁도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금방 또 안심했다. 부관 페리의 선표를 산 것은 아니었다. 홍콩쯤 가는 비행기표를 산 것도 아니었다. 또 아무것이라도 아직 출발하기 전이었다. 안 타면 그만이었다. 두 시간쯤 후에 발생할 차표의 효력 같은 건 화나면 쓰레기통에라도 집어던지고 언제든 온당한 행위로 전환하면 그만이었다. 온당한 행위? 그걸 생각할 시간은 두 시간이나 있었다. 그럼 그 두 시간을 보낼 장소는? 우선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다 불편하면 발이 옮겨지겠지. 멍청하다는 것이 절대의 자유임을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
문득 아내 생각이 났다. 아직 그녀는 기다리는 일은 시작하지 않고 있을 것이었다. 혹시 두 시간 후면 개시될지 모를 ‘불행한 아내의 밤’을, 그녀는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가정을 다스린다(가정과 출신이었다). 그러나 가장을 다스릴 수는 없다. 그걸 깨우쳐 줄 수 있는 기회가 가끔 주어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도 그걸 아직 그녀는 몰랐다. 뿐만 아니라 습도와 점도가 입에 알맞는 밥을 이틀에 한 번밖에 짓지를 않았거나 못 했다(어쨌거나 면책할 길은 없다). 그래 도시락그릇에 꼭 맞는, 법 비슷한 떡덩어리를 계속 먹어야 할 앞날이 깜깜해 아내를 내쫓아버리고 싶어지는 심정을 아내는 전혀 알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절대로 내쫓기지 않는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대담하게 무책임하길 계속했다. 결국 그런 관계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아내를 갈아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나 비위생적이며 몰상식한 생각인지를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생각을 가끔 안 할 수 없는 남편의 괴로움을 사랑의 인내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만큼, 아내는 몰염치하게 순결한 것이었다. ˙
그러한 아내가 고맙게 생각된 적이 한 번 있었다. 미스 강이라는 애가 몹시 따랐었다. 그 애는 사십대의 남자가 제일 멋있다고 말했었다. 옳기도 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안정된 언동, 정리된 견해, 안심과 신뢰…… 그러나 그게 남자에겐 슬픈 일이라는 걸 그 애는 모르고 있었다. 또 땀냄새 발냄새가 나지 않고 와이셔츠 깃이 깨끗하게 몸가짐이 의젓해 보이고 하는 것 등이 저절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님도 모르고 있었다. 그 모두가 뒤에 있는 남자의 아내의 지겨운 손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소녀는 서글퍼져야 하고 뉘우쳐야 하리라. 그래 그 애의 뺨에 살짝 입맞춰주면서, 너도 분명 이십 년쯤 후에는 젊은애들이 좋아할 만한 신사를 하나 양성해낼 장본인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뒷날 그 애가 시집을 갈 때, 결혼선물 대신 그 관계의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는 웃었다. 저도 그 의미를 모를 그런 웃음을.
가게들이 있었다. 바깥쪽에는 과일과 과자 등속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안에는 몇 개의 탁자를 놓고 국수 김밥 등을 팔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로 들어갔다. 남자주인은 조금도 수상하게 생각지 않고 맞아주었다. 나이어린 남녀들이 한쪽에서 굉장히 재잘거리며 김밥과 삶은 계란을 먹고 있었다. 소주를 반병 시켰다. 안주는 식사 겸해서 비빔국수를 시켰다. 위엣 것을 열심히 먹어치우는 한편, 저희가 아는 작은 세계를 열렬히 지껄여치우고 있었다. 애들의 수직적 방언을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언어가 정신계의 역학(力學)이라는 외경스러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명령의 말은 백만대군을 움직이고 ‘자유’ 란 말은 민족을 움직인다는 억척스러운 현상을 애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애들은 죽음을 먹으면서 죽음을 지껄이고 있었다. 거리에 숱하게 깔려 있는 죽음에 섞이어 꿈틀거리며, 열심히 최종의 죽음을 준비 하고 있었다. 방법도 모르면서 꾸준히, 슬프게, 괴롭게, 편하게…….
술과 국수가 왔다. 국수에서는 별로 구미를 당기는 냄새가 나지 않았다. 젓가락을 들어 비비기 시작했다. 술을 보니 반이 아니라 온병이었다.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마실 만큼 마시라는 것이었다. 분매(分賈) 기피증. 그는 장사로서 불행하고 있었다. 술을 따르었다. 불순한 희석주. 그러나 그건 지하수보다 고등한 것이었다. 신은 물을 창조했을 뿐이지만, 인간은 술을 창조했다. 마셨다. 모든 소주와 마찬가지로 구수하지도 향기롭지도 않았다. 모든 창조를 신의 영분으로 돌리려는 사람도, 술도 신이 만들었다는 설은 거부하리라. 술은 그만큼 인간적이고 속세적이다. 이교도의 신들은 술을 좋아 했고, 급기야는 멸종해버렸다. 그러나 유독 술을 좋아하지 않는 신만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종교란 영세의 방법우로서는 지극히 편협한 것이다. 국수를 입에 넣고 씹었다. 불기와 소금기가 강했다. 뜨겁고 짰다. 프로메테우스는 엉뚱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그는 꼭두각시였다. 불은 신들에게 있어서 아까워할 만한 게 아니었다. 그걸 '인간이 갖는 것을 신들이 두려워할 리도 없었다. 인간이 물고기를 구워먹는다고 해서 신들과 맞설 힘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훔친다는 행위를 통해서 그걸 사람에게 내려준 것은, 인간에게 취득의 어려움을 가르쳐주자는 속셈 에서였다. 프로메테우스는 그 교육 보조재료였다. 그리고 끝까지 그 고역을 다하기 위해 코카서스 산상에서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었다. 그때 프로메테우스는 후세의 슈베르트와 똑같은 기원을 했을 것이다. 내일 아침 에는 제발 다시 깨어나지 말았으면 하고. 불은 하나의 원리였다. 그리고 그것의 취득을 인간이 미화한 것이었다. 사랑을 모르는 신올 내세워서.
소주를 작은 잔으로 홀짝거리기가 귀찮아 엽차잔을 비우고 거기 따랐다. 그리고 냉수를 마시듯 뱃속에 흘려넘겼다. 그리고 국수를 먹었다. 여전히― 짰다. 가게 주인은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 소금을 주는 방법에 있어서 지독하게 인색하고 심술궂었다. 신은 참으로 엄청나게 많은 소금을 만들었었다. 암염을 제외하고도, 바닷물 속에 함유된 염류는 해수 1 리터당 35그램으로, 이것을 고체로 만들어 온 육지에 쌓는대도 두께가 152미터나 된다. 그런데 아무리 그걸 육지에 쌓아기가 힘든다 하더라도, 어쩌면 그걸 송두리째 바닷 속에 쓸어넣었단 말인가? 그보다는 좀 덜 가혹한 방법을 생각해낼 수가 있었지 않을까? 그렇게 해두어도, 신들도 무식 해서 몰랐던, NaCL 염화나트륨을 추출해낼 수 있는 인간의 지혜를 믿고 있었던 때문일까? 아니면, 신들은 부적(符籍)도 알아볼 줄 모르는 도깨비들의 조상이었던가?
반 병만 마시려던 술을 한 병 다 마시고 났건만 국수는 반 이상 남아있었다. 그래도 주인은 조금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게를 나오며 주머니 속의 차표를 조몰락거려보았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렇다할 동태의 변화가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그 가게와 역 사이에 다방이 있었다. 이층이었다. 삼십 평 가까이나 되어 보이는데, 사람이 꽉 차 있다시피 했다. 굉장히 소란한 음악이 땅땅 울리고 있었다. 남녀가 앉아 있는 맞은편 자리를 얻어 앉았다. 함부로 다루어진 의자는 삐걱거렸고, 쿠션의 촉감도 울툭불툭했다. 그러나 등받이가 제법 넓고 높아 견갑골을 적절히 안정시켜주었다. 빈의자나 탁자 위에 가방들이 많이 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방 안의 대개의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얼른 알 수 있었다. 맞은편의 남녀도 마찬가지였다. 짐은 없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후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은 들떠 있지 않고 침착하고 심각했다. 여자는 매우 건강해 보이는 몸집이었지만, 양끝이 처져 내린 진한 눈썹에는 수난자의 그것과 같은 비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었고, 남자는 꽤 사치한 색조의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머리 손질이 잘 안 되어 있어 별로 길지도 않은 머리가 봉두난발 형이었다. 혹시 여자가 예정에 없이 아이라도 밴 처지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무엇을 마시겠느냐고 물어온 다방아가씨에게 코피를 달라고 하고 눈을 감았다. 뱃속에 급속히 들어간 소주두 홉이 꾸물꾸물 작동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이 여전히 땅땅거렸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니 음질은 과히 나쁘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트레블과 볼륨이 지나쳐 있었다. 기계실 안에는 헤드폰을 낀 소년이 앉아 있었다. 유리상자 안에 들어앉아 있는 자신의 대견스러운 모습을 밖에서 찾아보기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총명스런 눈이 다방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진행되던 곡이 끝나자 소년의 입술이 마이크를 향해 움직이며, 스피커에서는 격에 안 맞도록 증폭된 목소리의 한국어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무디 블루라는 곡이 끝났으며, 그것이 누구의 신청곡이었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놀라운 억양이었다. 도대체 시정의 언어가 아니었다. 어쩌다 방송에서 듣게 되는 정체모를 청년의 사뭇 ‘짓’을 부린 괴이하고 꼬불꼬불한 억양이 바로 그 다방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둘러보아야 맨 기차시간을 기다리기에 지쳐 시끄러운 것에조차 무관심해져버린 몰취미한 사람들이지, 한가롭게 비위에 맞는 유행음악을 일부러 신청하여 듣고 있을 것 같은 사람은 발견되지 않는 그 다방에서. 소년은 거기에다가 누리끼한 미소로 넓적한 얼굴을 일그러뜨려 보이는 재주까지 발휘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배웠을까? 누구의 부탁을 받은 것일까?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그것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면 또 무엇이 될까? 소년은 여전히 지껄이고 있었다. 피터프램튼과 비지스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둘러봐야 소년의 박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리고 소년은 그런 것에 관계없이, 열에 뜬 펜들 앞에 나선 인기 연예인 같은 대범하고 파렴치한 얼굴로 지껄임을 계속하고 있었다.
다방아가씨가 코피를 가져왔다. 나중에 돈을 내러 카운터에 가는 수고를 면제받기 위해 그 자리에서 돈을 주자 아가씨는 말없이 받아 들고 돌아갔다. 그때 그 역겨운 스피커의 음성은 아무개씨가 신청해 즌 아바의 노잉 미 노잉 유를 들려드리겠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코피는 뜨겁고 떫었다. 그것이 뱃속에서 어떻게 소주와 어울리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지그시 눈을 감아보았다. 의자 등받이가 또 지그시 견갑골을 누르고 리듬이 분명한 음악 소리가 여자의 목소리를 튀겨 냈다. 아무래도 오래 견디기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집으로라도 돌아가지 않는 한, 몸 붙일 곳 없는 그 시각의 세계. 또 코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맞은편 남녀가 일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좋은 것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나쁜 것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무엇이 됐든, 도착하기까지의 차 위에서의 시간은 그것하고는 관계없이 확보된 시간이다. 사형대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처럼 그건 절대적으로 보장받은 시간이다. 그 시간에 무엇을 하느냐가 문제다. 끝에 올 것을 앞당겨 하느냐, 지금까지의 것을 잡아들여 하느냐, 아니면·…·그들이 침대권을 샀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들이 정성껏 끌어안고 입맞추고 시간을 아끼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기를 비는 마음으로 아무도 모르게 그들을 전송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뒤남겨진 사람이 된 심정으로 나머지 코피를 마셔버렸다.
그리고 난 후, 그 일방적으로 몰아대는 음향을 많이도 들었다. 조니 미첼의 돈이냐 사랑이냐, 아다모의 쌍트와마미, 올리비아 뉴튼존, 이글즈, 다이아나 로스, 거기다 이젠 육순이 훨씬 넘은 페리코모의 젊은 시절의 음성까지·…· 아아, 그 삐걱 거리고 조잘거리고 덜렁 거리고 펄럭거리는 조잡한 다방에서·…· 그러나 거기에서는 가야금이나 생황(笙篁) 소리보다는 얼마나 시의적 절한 소리들이었던가…….
나왔다. 소리를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못 이겨 나온 것이었다. 시간은 아직도 반동강이 남아서 짓누르고 있었고, 그걸 앉아서 받아낼 도리가 없어서 일어선 것이었다. 밖은 썰렁했다. 용의주도한 여행객이 아니라도 그때 집을 나선다면 바바리코트쯤은 결치고 나올 정도로. 나머지 한 시간, 또 무얼 해야 하는가. 아직 아무도 수상히 여기는 차는 생겨나지 않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지하철로 몰아내리는 일도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기차표를 버리거나 물릴 명분이 없었다. 걸었다. 역의 대합실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우선 공중변소엘 다녀왔다. 사태는 여전했다. 그러나 서 있을 수는 없었다. 한 시간을 어떻게. 기차를 탄다는 게 그렇게 조급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빈 의자가 있는 곳을 또 찾아가기가 싫었다. 의자가 있는 곳은 모두가 뭘 먹 거나 마셔야 하는 곳. 그것도 먹거나 마시는 시간뿐이지, 먹을 것을 소화시킨다거나 다음 계획을 수립하는데 사용되기를 거부하는 곳들뿐이었다. 이상한 세상. 먹다가 마실 때 이외에는 인간은 앉아서는 안 된다고 결의라도 하고 꾸며놓은 것 같은 세상. 서 있을 수가 없어 어슬렁거렸다. 같은 곳을 자꾸 맴돌았다. 한번 보았던 사람들 두 번 보기도 하고, 세 번 보기도 하고·…·아직 아무도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안심이었다. 그러나 혼자라는 게 상당히 불편했다. 혼자가 부자유스럽지 않기 위해서는 협력을 필요로 할 정도니, 어지간히 비참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대합실을 메우고 있는 그 사람들이 역시 행복해 보이지를 않고, 처량하고 청승맞은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따분하고 지겹다는 생각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빨간 신호등을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은 무위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파랑으로 변할 때까지는 혼을 빼내도 손해가 없다는 자세로 멍청해 있었다.
문득 목이 마르다는 생각을 했다. 뱃속이 미끈거리고 가렵다는 생각을 했다. 됐다. 구실을 찾았다. 이제 자격을 얻었다. 의자에 앉을 자격을. 대합실 위충에 있는 구내식당은 꼭 실내악 연주장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에도 몇 번 했었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가 그렇게 노곤하게 고전적이었고, 불필요한 장식이 없는 창틀과 벽이 또한 그랬다. 일하는 사람들은 훈련받은 짐사나 하인처럼 과묵했고, 멀찍멀찍 놓여진 테이블들이 지난 시절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 사람들은 좀 활기가 있고 다채로웠다. 그들은 지루하다는 표정을 보이지 않고 조용조용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말하지 않는 입은 웃거나 뭘 먹거나 마시고 있었다. 애들의 옷이 아기자기했고, 가방이나 코트들이 윤기가 있었다. 억지로라도 우아해보려는 품위가 군데군데 발견되었고, 주스나 맥주로 시간을 희롱해 보낼 만큼은 세련된 준비성과 참을성이 눈에 띄었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지만.
지나가는 웨이터를 불러, 맥주가 뱃속의 가려움증을 고쳐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촌닭이나 바라보듯이 불쾌한 얼굴을 짓고 쳐다보았다. 그래 그냥 단순하게 맥주를 달랬더니 아무 말 않고 가버렸다. 생전 처음 불쾌해보는 것도 아니련만, 그는 느닷없는 유머에 그렇게도 멋없는 반응을 보였다. 다행히 아무도 딴 사람은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없었다. 보고 있던 사람도 없었다. 무섭도록 순진하게 세상을 신임하고 있는 사람들. 남을 실없이 의심하지 않고 내버려두며, 그러면서도 우정이나 호의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
맥주가 갖다놓여졌다. 거품이 일게 따르니까 노란 액체가 반쯤 차자 흰 거품이 잔 가장자리까지 끓어올랐다. 병을 놓고 거품이 내려앉기를 기다렸다. 남은 사십분이 참으로 더디게 더디게 촛불처럼 타고 있었다.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거품이 또 슬며시 끓어올랐다. 그것이 잔을 넘기 전에 집어들어 입술에 대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셨다. 두 모금의 시간을, 세 모금째의 죽음을…… 뱃속의 가려움이 서서히 멈췄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머릿속이 간지럽기 시작하였다. 주기를 의식했다. 심심하지 않게 될 징조였다. 이제 취기가 돌기 시작하니 그건 금방 멎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액체연료만 적절히 이어주기만 한다면 자동인형은 심심치 않게 작동을 계속해갈 것이었다. 희망이 생겼다. 이제 혼자서라도 자유로울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것은 벌써 몇 번이나 생각했고, 또 그 생각을 확인했다. 그런데 꼭 누군가가 보이지 않게 미행하며, 눈에 뜨이지 않게 감시하고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선뜻 선뜻 스쳐지나감을 이때에야 비로소 확실히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럴 리는 없다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맥주를 마셨다.
아홉시 이십분에 개찰을 했다. 천천히 결어서 열차 안의 좌석을 찾아 앉기까지 사분이 걸렸다. 다음 육분은 매우 빨리 지나갔다. 앉은 채로 밤새워 가기에는 부산이 멀다는 생각을 했다. 꼭 그래야만 될 의무가 없음을 확인했다. 부산까지 기차표를 샀으니까 부산까지 가야 한다는 고집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알아준대도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천안에서고 대전에서고…… 가다가 가기 싫으면 아무데서고 내려버리면 그만이며, 그것이 가까울수록 돌아오기는 쉽다는 계산을 했다. ˙그때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슬며시 열차는 출발하고 있는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꼭 아홉시 삼십분이었다. 좌석은 모두 차 있었다. 그러나 통로로는 사람들이 무슨 볼일들인지 왔다갔다 했다. 그것이 차츰 뜸해졌다. 그런데 그냥 서 있는 사람들이 둘 있었다. 하나는 몸집이 작고 약아 보이는 두상(頭柏)인데 수금사원이나 임상검사실 조수 같은 타입이었고, 하나는 보통 키에 몸집이 좀 큰 청년으로 공과대학을 갓 나온 신입사원 같은 인상을 주었다. 둘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보아 동행이었고, 그 차실에서 서서 가는 사람들은 또 그들 둘뿐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 서 있는 곳이 바로 곁이었다. 별로 마음 쓸 건 없다 하고, 대합실에서 사두었던 주간지를 뒤적거리기 시작하는데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조금 후에 두 사람이 움직이는 기미에 고개를 돌려보니 그들은 뜻하지 않았던 짓을 시작했다. 화투놀이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앞쪽을 향해 앉은 두 승객의 양해를 구해 의자 하나를 반대쪽으로 젖혀 두 사람을 도로 앉힌 후, 마주보게 된 두 의자의 팔걸이에 한쪽씩 궁둥이를 걸치고 앉아, 허름하게 만든 공공칠가방을 두 무릎에 걸쳐놓고서 참으로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련한 열의를 가지고 한 사람이 칠 차례가 되면 다른 한 사람은 가방을 붙잡고 있어야 할 정도로 불안정했으니까, 화투놀이는 금해져 있을 텐데 겁도 없이 판을 벌이는 그들을 처음에는 괴이쩍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차장이 지나가고 여객전무가 지나가고 공안원이 지나갔건만 그들이 그 앞에서 멈칫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말 한 마디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난 후에는 덜컥 그 두 사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사태였다. 그런데 그들은 거리낌 없이 그 금해진 놀이를 높은 소리를 내면서까지 하고 있었고, 그것을 단속해야 할 사람은 그걸 묵인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관절 뭣하는 사람들인가. 그런 위법행위를 해도 지탄받지 않을 만큼 중요하고 잘난 사람들인가?
그들이 먼곳에 있었던들 그런 걸 개의치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불운하게도 바로 옆좌석이었다. 겉으로는 주간지를 읽는 척 했지만 마음속은 불안했다. 열차는 그런 대로 계속 달렸다. 그리고 그들은 얼마 후에 한판을 끝냈다. 둘째판을 또 시작하는데 차내 판매원이 왔다. 그들은 맥주를 두 병 샀다. 젊은쪽이 진 모양으로 돈을 냈다. 그들은 또 놀이를 계속했다. 둘째판이 끝났을 때, 되돌아오는 판매원이 다음 칸에 보였다. 그들은 판을 치우고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판매원이 오자 또 맥주를 샀다. 젊은쪽이 또 진 모양, 돈을 냈다. 결국 맥주내기였구나 생각하니 좀 가소로웠다. 그래 좀 편해진 마음으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옆에서 한잔 드시죠, 하는 소리가 났다. 문득 돌아보니 작은쪽이 잔을 내밀고 있었다. 금방, 그걸 받을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듣기 좋게 사절했다. 뱃속이 지금 이상해서 맥주는 마실 수가 없고, 소주나 한잔 마셔볼까 하는 중이라고. 그는 그러시냐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젊은쪽에게로 잔을 가져갔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그게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무엇이 이상한지도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천안에 서거든 내리리라고 마음먹었다.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빴다. 그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부당하게만 생각되어 견딜 수 없었다. 뒤숭숭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애쓰는데 열차는 부지런히 달리고 있었고 그들은 계속 맥주를 마셨다. 술 생각이 났다. 그것도 맥주를. 그러나 그들이 보는 데서는 맥주를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얼마 후에 판매원이 왔다. 굴욕적으로 소주를 샀다. 그들이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또 나빴다. 홧김에 거푸 소주를 따라마셨다. 뱃속에 모반의 기미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술을 종이컵에 쏟는데 열차가 섰다. 천안이었다. 울렁거리는 뱃속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술을 목구멍에 넘기는데 열차가 다시 출발했다. 이제 내리긴 틀린 노릇이었다. 대전까지 또 가보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놈들은 또 가방을 내리는 것이었다. 또 하는 것이었다. 화가 치밀었다.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뱃속이 꿀럭거렸다. 견디다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놈들은 모르는 척, 놀음에만 열중해 있었다. 벽소에 갔다. 들어가자마자 뱃속엣 것이 솟구쳐올랐다. 소주 한 병과 마른안주 씹어삼킨 것을 다 토했다. 나오는 것이 없을 정도로 웩웩거렸지만, 뱃속과 머릿속의 평안은 되찾을 길이 없었다. 얼굴과 눈이 뚱뚱 부어오른 느낌이었다. 다행히 세면장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나왔다. 손을 씻고 낯까지 씻었다. 척척하게 젖은 손수건을 짜서 주머니에 넣고, 다시 배리와 분노의 차실 안 좌석을 찾아들어가 앉았다.
어떻게 손에 맥주가 담긴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들은 이쪽 자리로 와 앉아 있었다. 왼편 창측에 덩치가 작은 재수생 같은 소년이 구겨져 잠들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맏딸에게 가출당한 주부 같은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옆, 가운데 자리에 난데없는 젊은 여자가 벙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곁에 젊은쪽이 앉아서 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보는 이쪽 좌석의 통로 쪽에 작은쪽이 끼어앉아 술잔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네 사람의 좌석에 여섯 사람이 들어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좌석을 밀치고까지 육박해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 젊은 여자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여자였다. 좀전에 앉았던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몰랐고, 그 젊은 여자는 어디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 셋은 친해져 있었다. 마치 미리 짜고서 거기서 만난 사람들처럼. 그러면 삼인조? 문득 곁의 작은 사나이한테 들은 이야기가 꿈 속에서 들었던 것처럼 어렴풋이 생각났다. 관광회사에 근무한다고·…· 일본인 단체관광객이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을 마중가는 길이라고·…·그 이상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웬 술을 이렇게들 마시고 있는가? 그런 볼일로 밤새워 내려가고 있는 사람들이 ? 언제부터 이렇게 앉아 마시기 시작했는가? 그들 술만 얻어마시고 있는 건가? 담배도 두어 갑 샀었던가? 샀겠지. 생각이 나진 않지만 이렇게 함께 마시고 있는 결 보니, 그들의 술만 거기 얻어먹고 있었지는 않았겠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상황이 변해 있는가? 그들의 요청이 있었건 없었건, 같이 앉아 가자고 했겠지. 옆에 앉은 재수생을 좀 밀치고 자리를 내주었겠지. 맞은편 자리도 그렇게 어떻게 됐겠지. 그런데 여자는? 처음 만난 사람들 같지가 않지 않은가? 어디 숨었다가 나타났는가? 그리고 이젠 도망칠 구멍도 없이 셋이서 꽉 자리를 밀어채우며 포위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가장하며, 저희끼리만 평범한 이야기들을 계속 주고받고 있지 않은가.
어디쯤 왔을까? 다른 승객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시계를 보았지만 두시 안팎이라는 것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눈의 초점이 맞지 않고, 머릿속의 처점도 형편없이 흩뜨려져 있었다. 처참하게 약해져 있었다. 어떠한 적과도 맞서기는 틀려 있었다. 더구나 그들 삼인조와는 도저히 자신이 서질 않았다. 곤드레만드레 되어 있었다. 아니, 되어져 있었다. 빌어먹을. 술을 따라주다니, 무슨 놈의 친절이냐? 이게 모두 음모 아니냐? 이자들이 어떻겐가 해보려고 일부러 꾸미고 있는 흉계 아닌가? 도리없이 여기 말려들어야 하는가? 그런데 이자들이 하는 짓은 옆자리에 끼어앉아 맥주잔을 권하는 것 뿐이 아니냐? 무슨 놈의 음모가 이따윈가? 수상하다. 정말로 수상하다.
술을 마셨다. 그리고 빈잔을 맞은편 젊은쪽에게 내밀었다. 작은 쪽이 술을 따랐다.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불을 제대로 붙일 자신이 없었다. 삼인조가 지켜보는데 불도 못 붙이는 취태를, 약점올 보일 수가 없었다. 감겨지는 눈을 힘들여 뜨고 맞은편 젊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아주 착해 보였다. 얼굴이나 말씨나, 악당의 일원이라고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주 천연덕스럽게 악당의 하나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가식. 위장. 여자의 역할은 그것이었다. 불쌍하게도 그렇게 반반하게 생기고 선량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이 패거리에 끼어 있다니. 그런 걸 알면 어머니나 동생이 울 것 아닌가? 나쁜놈들. 저 헤벌쭉이 웃고 있는 젊은놈은, 지금은 저렇게 여자에게 경어를 쓰며 연극을 하고 있지만, 일을 끝내고 여관방이나 저희의 소굴로 돌아가서는 여자의 목을 끌어안고 달려들겠지. 그리고 이 나이 먹은 작은쪽은 사업의 성과가 좋지 않은 걸 가지고 신경질을 내며 두 졸개를 꾸짖어댈 것이고…… 못된것들. 못된것들. 그런데 이것들이 이렇게 궁둥이도 옴짝 못 하게 꽉 조여 앉아서…… 누가 속을 줄 알고, 제놈들의 가면에 속아넘어갈 줄 알고? 두고보자. 부산에 도착할 때쯤엔 지금보다 술이 깨어 있을 것이다. 아무리 힘으로 못 당해도, 이렇게 눈을 감고 곯아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은 말짱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말테다. 하지만 음흉하다. 무엇을 획책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자끼리가 아니고 나이어린 여자까지 끌어넣어가지고…… 이건 정말 음흉한 짓이다. 그런데 춥다. 술이 깨는 모양이다.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려보았지만 소용없다. 부르르 몸이 떨린다. 그리고 또 자고 싶다. 모든 걸 잊고 따뜻한 곳에서 사지를 쭉 펴고 잠들고 싶다.
그들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소리가 먼 곳에서 전해오는 웅얼거림처럼 들려올 뿐, 무슨 이야긴지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젠 완전히 저희끼리 똘똘 뭉쳐 짓을 부려가며 연극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가 나서, 아무리 귀에 신경을 모아보아도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꼴깍 잠이 들어버리기라도 하면, 이들은 멸시와 조소의 곁눈질을 하며, 남이 알아듣지 못할 은어 같은 걸로, 이자가 드디어 완전히 곯아떨어졌다고 신호를 하여 쾌재를 부르겠지. 그래 잠들지 않으려고 했다. 최소한 귀만이라도 완전히 잠들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되지 않았다. 그들의 중얼거림은 점점 멀어지고, 점점 약해졌다. 그리고 이것도 죽음의 한 형태라는 마지막 생각도 가물가물 사라져 갔다.
갑자기 여러 사람이 수런거리는 소리에 어렴풋이 잠이 깨었다. 규칙적인 열차의 진동과 소리. 냄새. 발소리, 짐을 내리는 소리, 하품 소리…… 거기에다 열차의 쇠바퀴 밑에 레일의 이음매가 갈려나가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더해지고, 쇠와 쇠가 마찰하는 높은 음향이 차실을 흔들었다. 정신이 났다. 고개를 가슴에 묻고 있는 채 반쯤 눈을 떴다. 일어선 사람들의 아랫도리가 보이고 신발을 찾아꿰는 발들이 보이고·…·사람들이 내릴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부지중에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추웠다. 동정을 바라고 싶을 정도로 추웠다. 그 바람에 눈을 좀더 떴다. 삼인조의 하반신을 찾았다.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잠들어 있는 걸 깨워주지도 않았고, 종착점 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귀띔해주지도 않고 있었다. 버리고 갈 심산인가? 얼마 전까지 그렇게 억척스럽게 달려들어, 위협적으로 육박해오던 자들이? 볼일은 다 끝난 것인가? 내려서 보자는 것인가?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았던 젊은 남녀는 벌써 통로로 나서서 출구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 있었다. 그들은 벌써 오래 전에 외면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작은쪽이 눈앞에 있었다. 그 허름한 가방을 들고서. 눈이 마주치자 외면해버리려는 것을 말로 잡았다. 다 왔나요? 그렇다고 했다. 그래 또 중얼거렸다. 깜박 잠이 들었었군요, 취했었나보죠? 그러니까 사나이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무셔야죠, 주무셔야죠. 주무셔야 하구말구요. 놈은 이상하게도 같은 말을 반복했지만, 태도만은 완전히 예상을 뒤엎고 배반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네시 반이었다. 열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여가더니, 멎었다. 아주 멎은 것이었다. 선반에서 가방을 내렸다. 전날 밤과 똑같은 무게였다. 앉았던 자리에는 주간지가 구겨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조촘조촘 아랫도리를 찬바람에 휘감고, 고개 위로는 열차 냄새를 뒤흔들었다. 삼인조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차실 문을 나서자 승강구를 통하여 때 아닌 겨울 바람이 휘몰아쳐 올라왔다. 가을이 남쪽에서부터 얼기 시작한 건가.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뛰었다. 어떻게 뛰었는지, 어떻게 집찰구를 빠져나왔는지 알 수 없었다. 추위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어쩔 줄 모르는데, 술에 취해 잠들었다 깨었으니 더욱 몸이 떨리는 것은 당연했다. 역사를 나와 계단을 내려오며 삼인조를 눈으로 찾았다. 있었다. 저만큼 앞쪽에서 셋이 뭉쳐 있는 것이 푸른 불빛 아래 보였다. 자, 이젠 어떻게 할 테냐. 차내에서의 의혹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옆을 지나쳤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다, 악당들! 추웠다. 빈 택시가 한 대 저만큼 서 있었다. 기다리고 있듯이. 이것 또한 음모가 아닌가 생각했으나, 추위가 그 다음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올라탔다. 문을 닫자마자, 이거 왜 이렇게 추우냐고 일부러 투정부리듯 말했더니, 운전사는 자기도 웬일로 이렇게 갑자기 추워졌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어디로?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우선 대교로 쪽으로 가자고 했다. 차는 텅 빈 어두운 대로상에서 좌회전했다. 차가 방향을 고정시키자 뒤를 돌아보았다. 삼인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악당들! 빈 거리를 차는 요란하게 질주했다. 창 밖을 내다보아야 가로등만 드문드문 밝혀 있을 뿐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영도로 가자고 했다. 아침에 볼일이 거기에 있으니까·…·우선 좀 자야겠으니 불이 켜진 여관 앞에서 세워달라고 했다. 영도 쪽으로 길을 돌아갈 때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으나 쫓아오는 차는 보이지 않았다. 악당들 ! 그러나 마음이 놓였다. 정신이 다시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차는 자꾸 질주했다. 한없이 가려느냐고 물었더니, 불켜진 여관이 없어서라고 했다. 또 얼마를 달리다가 여인숙도 괜찮으냐고 운전사가 물었다. 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좋다고 했더니, 차를 크게 좌회전했다. 차가 멎었다. 큰 집도 아닌데 밖으로 충계가 나 있고, 여인숙은 이층이었다. 내렸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난간에 의지해서 간신히 계단을 올랐다. 문을 밀었더니 열렸다. 두 다리에 힘을 주며 안으로 들어갔다. 무얼하는 사람들인지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자지 않고 복도에 있었다. 검붉은 색깔로 보이는 그들은 주인이 아니었다. 딴 쪽에서 주인이 나왔다. 방. 있다고 했다. 열차에서 지금 내려 추워 죽을 지경이라고 했더니 뜨거운 방이 있다고 했다. 한 방문이 열리자, 쓰러지듯 들어앉았다. 급히 신발올 벗어던지고 이부자리 밑에 손부터 넣었다. 열차의 그것보다도 더 강한 여인숙의 냄새가 났다. 그러나 거기엔 온기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선 춥지 않아야 했다. 기뻤다. 냄새나는 불결한 여인숙 방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앞뒤 생각없이 방바닥과 요 사이로 파고들었다.
또 잠이 깨었다. 눈알이 열기를 받아 팽창되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금방 잠이 들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빳빳하고 넓은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굉장히 눈이 부셨다. 커튼도 없는 맨유리창으로 햇빚이 빠각빠각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얼른 이불자락올 끌어다 얼굴을 덮었다. 누릿한 냄새가 맡아졌다. 해를 본 기억이 강렬하게 머릿속을 쑤셨다. 또 몇 시간이 지난 것이었다.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이블자락 밖으로 고개를 내놓고, 여전히 뻑뻑한 눈을 뜨고 시계를 보았다. 아횹시 반이었다. 골치가 쑤시고 뱃속이 쓰라렸다. 그런데 해는 또다시 떠올라 다시 하루치를 살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머리맡 쪽 구석에 가방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윗저고리가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발치 쪽에 벙섯하니 틈이 벌어진 문이 고리가 걸리지 않은 채 닫혀 있었다. 문을 걸고 자라는 주인여자의 목소리를 잠결에 들었던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 문짝 앞에 백 원짜리 주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숙박료를 주었던 기억이 어슴푸레했다. 그 거스름돈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꽤 안전한 잠자리를 가졌던 것이었다. 이불을 들치고 하체를 꺼냈다. 입은 채로 잔 바지가 구깃구깃했지만 아주 형편없는 꼴은 아니었다. 양말도 신고 있는 채였다. 윗저고리를 끌어다 소매에 괄을 꿰었다. 그리고 일어서보았다. 외면적 인 육신은 아무데도 고장난 곳이 없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하체가 허뚱거렸지만, 그 아침에 그만큼 성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서 나가 바깥바람을 좀 쏘이고, 비틀거리는 뱃속에다 뭘 좀 집어넣자고 마음먹었다. 거울이 없어 손짐작으로 넥타이를 졸라매고,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넘겼다. 가방을 집어들고, 방바닥의 백 원짜리도 잊지 않고 주워넣었다.
방문 밖은 어두운 복도였다. 들어올 때 보았던 촉수 낮은 백열전구가 그때까지도 빨갛게 켜져 있었다. 바로 방문 앞에 구두가 있었다. 그것을 신고 걸음을 옮겨놓았다. 콘크리트 바닥이 쓰린 뱃속처럼 서걱거렸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내다보지도 않았다. 복도를 꼬부라지자 유리문이 있어 열었더니 찬바람이 숨을 막으며 온몸을 휘감았다. 때아닌 추위는 꿈 속의 것이 아니었었다. 얼른 밖으로 나와 문을 닫고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는 주차장 겸 서비스공장이었다. 큰길에 면해 있었다. 보도로 나서자 무작정 해를 둥지는 방향으로 걸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전선이 날카롭게 울고 거리에는 먼지가 일었다. 집들이 모조리 낯 황량하고 생기없어 보였다. 추웠다. 몸이 떨리는 것을 걷는 동작으로 억제했다. 영 풍속이 달라져버린 머릿속과 뱃속은 추위에 상관없이 얼음덩어리라도 집어넣어야 진정이 될 것처럼 제멋대로 덜렁거리고 출렁거렸다. 한참을 걸어가자 대교를 향해 내려뻗힌 큰길로 나섰다. 거기서부터는 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멀찍이 골목 안에 냉면집의 깃발이 보였다. ‘냉’자만 보고서도 발길이 저절로 그쪽으로 움직이었다. 옛날 피난시절에 싸구려 냉면집이 여러 개 있던 골목이었다. 그러나 골목 모양은 많이 변해 있었다. 가게로 들어갔다. 조그맣고 누추한 가게였다. 일하는 사람들이 게을러 보였고 오늘을 맞은 것을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아직 안 된다는 대답을 예상하고 물은 건데, 냉면이 된다고 했다. 조그만 행운의 예조 같아서 반가웠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담배가 있었다. 라이터도 있었다. 깔깔한 입 안에 담배연기는 별로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양치질도 안 한 입 안을 소독하는 심정으로 끝까지 다 피웠다. 엽차는 뜨거웠다. 그것이 순발적으로 열기를 전해주어 오히려 자극적 이었다. 후후, 입으로 불면서 한 잔을 다 마시고 또 달랬다. 그걸 석 잔이나 마시는 동안 거의 아무 생각도 안 했다. 좀 지루하다 생각되어질 때 냉면이 왔다. 색깔도 모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때 밥알을 먹을 수 없는 생리적 슬픔을 생각하고 마음을 달래며, 맥빠진 손으로 젓가락을 쥐고 서투르게 저어 섞었다. 그리고 국물 모양이 뻑뻑해지자 그릇을 들고 그 차고 독한 것을 냉수를 마시듯이 들이켰다. 뱃속이 움찔움찔 물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또 달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갈망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거리에 나섰다. 큰길과 병행하는 뒷길을 걸어내려갔다.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머릿속과 뱃속이 무거웠다. 그걸 겨우 지탱할 정도의 힘 밖엔 몸에 남아 있지 않았다. 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심정으로 무겁게 걸었다. 갈 곳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다. 다 와버린 것이었다. 올 때는 깜깜한 밤이었지만, 이젠 환한 대낮이 되어버린 어제의 내일에, 주독에 곯아버린 몸을 끌고 되돌아가는 일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지나쳤지만 모르는 사람들뿐이었고, 가게들이 있었지만 아무 관계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짜증이 났다. 걷는다는 것이 아주 무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차를 타기 위해서 큰길 쪽으로 나가려 했을 때였다. 멀리 공중에 보이는 것이 있었다. 점도 아니고 선도 아닌 백색의 그것.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열 개·…·스무 개·… 서른 개·…·그것들이 공중을 날고 있었다. 큰길로 나가려던 생각을 금방 잊어버리고, 그쪽으로 결음을 재촉하였다.
선창가에는 때묻은 발동선이 여러 척 꺼불꺼불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검은 기름에 횐 거품. 바다는 처참한 죽음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강한 바람에 미친 듯이 출렁이며 부서지고 있었다. 그 상공엔 햇빛이 충만했다. 건너편 도시의 건물들이 보오얗게 그것을 흡수하고 있었다. 거기 그 공간에 수없이 많은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바람을 등지고, 바다를 타고, 햇빛을 헤치고, 하늘을 밀며 치솟고, 선회하고 횡전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그것들은 공중에서 그런 동작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까웠다. 아주 가까웠다. 장마철이 지날 무렵의 낮은 구름조각보다도 더 가까운, 뻗치기만 하면 금방 손에 닿을 듯한 거리. 햇빛을 반사하는 흰 깃털로 덮인 탐스러운 몸뚱이. 힘차게 움직이는 딴딴하고 긴 날개. 가끔 높은 소리로 기성을 발하는 길고 튼실한 부리. 발동선의 기계 소리. 강한 바다 냄새. 걸어나갈수록 그것들은 더욱더 가까워졌고, 갈매기들은 조금만 친해지면 어깨에라도 내려앉을 것처럼, 멀어지려고도 하지 않았고 피해 달아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바다는 미친 듯이 흰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고 있었고, 갈매기들은 보이지 않게 아우성치는 회리바람 속에서 종잇장처럼 가볍게 난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바람에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 힘으로 제 뜻으로 날고 있었다. 눈들이 있었다. 반짝이는 새까만 눈알들이 보였다. 그것들이 눈곱만큼도 거부의 빛을 보이지 않았고 도주의 기색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할 길이 없었다. 머릿속의 혼란도 잊었고 뱃속의 모반도 잊고 있었다. 위치에 대한 관념이 없어져 있었고, 돌아간다는 일 같은 건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오 ! 오 ! 발을 구를 듯한 심정으로 큰소리를 내어 갈매기들을 불렀다. 몇 번이고 불렀다. 그러나 갈매기는 한 마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가방을 땅바닥에 놓아버렸다. 두 손을 그들을 향해 뻗치고 하늘을 휘저었다. 그러나 한 마리도 갈매기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비둘기들이라 해도, 그것들에게 뿌려줄 콩 같은 건 있을 리 없었다. 대신 손에 잡히는 것은 밤 사이에 거기 있게 된 동전들이었다. 그것이 양손에 다 십여 개씩 잡히었다. 그것을 꺼내 다시 팔을 뻗치고 갈매기를 향해 흔들어대었다. 그 부름에 응해주는 갈매기는 여전히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그걸 주어야만 했다. 그것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흔들어도 갈매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지금까지와 똑같이 위로 아래로 좌로 우로 분분히 날기만을 계속하고 있을 뿐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생각다 못해 그걸 뿌렸다. 하늘이나 바다로가 아니라, 길바닥에다 잘 보이도록, 언제든지 물어가고 싶을 때 물어갈 수 있도록,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절규하였다.
갈매기야, 먹어라! 갈매기야, 먹어라!
가방을 집어들었다. 눈으로 들어오는 그것들 모두를 머릿속에 잡아 넣고 몸을 돌렸다. 머릿속이 가득했다. 가슴속이 벅차오르도록 흐뭇했다. 다리로 올라가는 계단을 달리다시피 디디고 올라갔다. 됐다. 이젠 말할 수 있다. 돌연히 사라졌다 나타난 걸 괴이하게 생각하며 물어오는 아내나 직장 사람들한테,
“나는 갈매기를 보고 왔지.”
세찬 바람에 미친 듯이 옷자락을 날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었지만 발걸음만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었다.
-끝-
2016년 11월 1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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