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머리말
인간이란 말에 스스로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니, 인간만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있다느니, 인간만이 사유할 수 있다느니 하는 생각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권적인 위상을 부여해준다. 그것은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났음에 기쁨을 주고 위안을 준다.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간주의 내지 휴머니즘이라는 말에 대해 인간들이 애착을 갖고 옳다는 확신을 갖는 것은 이 점에서 충분히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인간’만큼이나 ‘노동’ 역시 우리의 관심사다. 그런데 여기서는 약간 다른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노동하는 사람이 노동이라는 말에 애착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노동이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고 하는 생각,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며,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왔다는 생각, 나아가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생각은 노동자에게 특권적인 위상을 부여해준다. 이런 생각을 보통 ‘노동의 인간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노동자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묘한 것은 이러한 생각을 지지하고 이 생각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은 단지 노동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자와 대립 내지 적대적 관계에 있는 자본가들이 노동에 대해 갖는 애착과, 그것에 부여하는 특권은 노동자가 그렇게 하는 것 이상이다. 그들은 심지어 이러한 생각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자신들이 하는 모든 활동을 ‘노동’이라고 정의하려 한다. ‘위선’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진지하다.
실제로 이러한 노동의 인간학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만들어진 것은 부르주아 사상가들에 의해서였다. 예를 들면 노동을 모든 가치의 척도로 정의함으로써 정치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사람은 스미스(A. Smith)였고, 그것이 모든 가치를 생산하는 가치의 원천이라고 말한 사람은 리카르도(D. Ricardo)였다. 또 이러한 노동 개념을 확장하여 절대정신의 활동에까지 적용한 사람은 헤겔(G. Hegel)이었다. 그는 노예의 노동이야말로 세상의 문명을 만들어가고 지배하는 힘이며, 그것이 주인의 인정을 받는 진정한 주인이 되는 기초라고까지 말한다. 흔히들 말하듯이,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청년 맑스의 명제는 이러한 스미스나 리카르도,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 등장한 인물들은 맑스를 제외하고는, 비록 ‘혁명적’이라는 말이 따라붙기는 하지만, 부르주아 사상의 대표자들이다. 통상적인 평가대로 그들은 ‘노동의 인간학’에 기초를 마련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노동자에게 이론적 자선을 베푼 자비로운 사람들이었던 걸까? 아니면 맑스처럼 부르주아 사회에 분노하여 그것의 전복을 꿈꾸며 노동자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었을까? 잘 알다시피 모두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앞장서 기초를 닦았던 저 노동의 인간학이란 그들에게 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이러한 의구심은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즉 노동자가 노동의 인간학을 지지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중심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당연한 것일까? 맑스주의, 혹은 모든 노동자계급의 사상이 노동의 인간학에 기초해야 한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일까? 이 노동의 인간학은 노동자들에게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2.노동의 인간학: 인식론적 배치
스미스가 정치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노동이라는 개념을 모든 부와 가치를 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지만 노동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은 스미스 이전에도 있었다. 로크(Locke)는 노동이 소유와 관련된 개념이라고 보았고,*주1) 흄(Hume)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려고 했다.*주2) 또 튀르고(Turgot)나 캉티용(Cantillon) 이후 노동의 양은 가치의 측정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 노동은 상대적인 것이었고,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환원가능한 척도였으며, 실질적으로 절대적 준거의 역할을 한 것은 의식주와 연관된 사용가치였다. “말하자면 가격의 척도는 식품이었으며, 이 점에서 농업생산과 밀과 토지에 절대적 특권이 부여되었던 것이다.”*주3)
*주1) ■■J. Locke, The Second Treatise of Government, 강정인/문지영 역, ■통치론: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 (까치, 1996), 35쪽 이하.■■
*주2) ■■H. Arendt, The Human Condition, 이진우·태정호 역,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141쪽.■■
*주3) ■■M. Foucault, Les mots et les choses, 이광래 역, ■말과 사물■, (민음사, 1987), 267쪽.■■
이들과 달리 스미스는 노동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척도로서 간주한다. 그것은 부를 표상하는 여러 가지 척도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부를 비교하고 평가하게 해주는 단일한 척도며, 주관적인 가치평가에 좌우되는 표상의 일종이 아니라 표상의 외부에 있는 객체적이고 불변적인 척도인 것이다.*주)
*주) ■■A. Smith,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김수행 역, ■국부론■, (상), (동아출판사, 1992), 36쪽 이하; M. Foucault, 앞의 책, 268쪽.■■
리카르도는 여기서 좀더 심층으로 밀고 들어간다. 즉 노동은 가치를 측정하는 절대적 단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상품의 가치를 결정해주는 원천이다. 생산활동으로서 노동이 바로 모든 가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가치는 부를 표상하고 표시하는 기호가 아니라, 노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생산물이 되었다. 노동은 척도에서 기원과 생산의 차원으로 그 위상을 바꾼다. 노동은 ‘모든 가치의 기원’이며 생산자라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제 분석의 중심은 교환에서 생산으로 이동한다. 그 결과 시장이나 교환을 다루는 유통이론에 앞서 가치의 생산을 다루는 생산이론이 일차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주)
*주) ■■스미스와의 이러한 차이는 보통 스미스의 ‘지배노동가치설’과 ‘투하노동가치설’이라는 말로 표시된다. 즉 리카르도는 스미스의 가치 개념이 어떤 생산물이 시장에서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이라고 보는 것을 비판하면서, 어떤 생산물에 투하된 노동량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함으로써 상품간의 상대적 비교관계에서 가치 개념을 독립시켜 절대화한다(D. Ricardo, On 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and Taxation, 정윤형 역,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비봉출판사, 1991), 76쪽).■■
더불어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환이 나타난다. 그것은 생산자로서 노동 개념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희소성 개념과 관련된다. 이전에 희소성은 소유하지 않은 욕구의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배고픈 자에게는 곡식이 희소성을 가지며, 머물 곳이 없는 자에게는 집이 희소성을 가지고, 일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도구가 희소성을 갖는다. 이런 의미에서 희소성은 교환과 유통의 이유였다. 반면 리카르도 시대에 희소성은 근본적이고 기원적인 불충분함이다.*주) 즉 노동이나 경제활동이 이 세상이 나타난 것은 인간이 너무 많아져서 토지의 자연적 생산물로는 더 이상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을 때였다. 맬더스(Malthus)의 인구법칙, 즉 곡식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식량의 부족은 본래적인 문제라는 명제는 이러한 생각을 명확하게 정식화해서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제 희소성은 경제활동 내지 경제학이 작동하게 되는 항상적인 전제조건이 된 것이다. 노동이란 이러한 희소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벌이는 가치생산활동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요 기원일 수 있는 것이다.
*주) ■■M. Foucault, 앞의 책, 303쪽.■■
인간이 어떤 적극적인 활동성으로 정의될 수 있다면, 이는 노동의 개념을 통해 정의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사실 헤겔은 이러한 활동성을 ‘외화’(Entäußerung)라는 개념으로 확장하여 일반화하며, 이를 절대정신의 활동을 특징짓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즉 그가 보기에 노동이란 주체의 합목적적 활동이며,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활동이다. 그러나 ‘정신’처럼, 주체가 인간이나 어떤 개체가 아니라 주체적 활동 그 자체라면, 노동이라는 개념은 합목적적 활동과정으로 바꾸어 정의해야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헤겔은 합목적적 과정 자체를 주체로 정의하는 관점으로 발전한다.*주) 이러한 개념이 정신의 현상학에서 정신이 외화하여 자기발전하는 역사적 과정으로, 역사철학으로 이행할 수 있는 핵심적인 계기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외화라는 개념이 정신현상학이나 논리학을 비롯한 헤겔의 체계 전체를 특징짓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청년 헤겔뿐만 아니라 헤겔 철학 전반을 특징짓는 개념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 ■■G. Lukcs, Der junge Hegel, 이춘길 외 역, ■청년 헤겔■ 2, (동녘, 1987), 182쪽. 루카치는 이 책에서 청년 헤겔의 중요 저작인 ■정신현상학■의 중심 개념이 ‘외화’라고 하면서, 이러한 개념의 형성에 스미스 등의 경제학이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동의 인간학을 가장 극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하는 ■경제학·철학 초고■에서 맑스는 이러한 점을 충분히 지적하고 있다. “헤겔은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으며, 대상적 인간...을 그 자신의 노동의 결과로 파악하고 있다.”*주1) 이런 점에서 “헤겔은 근대 정치경제학자들의 관점에 서있다. 헤겔은 노동을 본질로서, 자기를 입증하는 인간의 본질로서 파악한다.”*주2) 그리고 보다시피 여기서 맑스는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라고 하는, 노동의 인간학을 응집하는 명제를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주3)
*주1) ■■K. Marx, Ökonomische-philosophische Manuskripte, 김태경 역, ■경제학 철학 수고■, (이론과 실천, 1988), 126쪽.■■
*주2) ■■같은 책, 127쪽.■■
*주3) ■■하지만 알튀세르(L. Althusser)는 여기서 ‘인간’이나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는 방식은 유적 존재(Gattungswesen)로 인간을 정의하는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의 인간학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차라리 포이에르바하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L. Althusser, Pour Marx, 이종영 역, ■마르크스를 위하여■, (백의, 1996), 182쪽 이하, 269쪽 이하). 알다시피 이러한 명제는 ‘인간’이라는 말을 피하면서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집합”이라는 정의를 제시하는 1845년 이후에는 약화된다(■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하지만 ‘노동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자본■의 한 부분에서 맑스는 인간과 거미, 혹은 인간과 벌을 대비시키면서 노동을 ‘합목적적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K. Marx, Das Kapital, 김영민 역, ■자본■, I-1, (이론과 실천, 1987), 214~215쪽).■■
헤겔적인 노동의 개념화는 노동과 노동자를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포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이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인정투쟁에서 패배하여 노예가 된 자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노동을 해야 한다. 그러한 노동의 과정에서 노예는 금욕주의나 회의주의 혹은 불행한 의식에 빠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동을 통해 물질적 세계의 법칙을 파악하고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획득하며, 그것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켜가는 존재로서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즉 자신이 세계의 실질적 주인임을 의식하게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주인에게 자신을 노예가 아니라 자립적 의식으로서, 주인으로서 인정받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자립적 의식의 진리는 결국 노예의식이다.”*주1) 그 결과 “사물과 자신 사이에 노예노동을 끼워놓은 주인은···그 스스로가 비생산적 위치로 전락하며, 세계사의 변증법에서 노예의식을 그 자신의 의식보다 우월한 위치로 고양시킨다.”*주2)
*주1) ■■G. Lukcs, 앞의 책, 128쪽.■■
*주2) ■■같은 책, 129~130쪽.■■
한편으로 자본의 축적이 가치적인 면에서 노동의 산물인 잉여가치의 축적이며, 소재적인 면에서 죽은 노동의 축적일 뿐이라는 맑스의 명제는, 축적으로 정의되는 자본의 역사, 자본주의의 역사가 노동의 역사고 노동이 실현되는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그 역사는 동시에 노동하는 계급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전복되는 혁명으로 종결되는 역사기도 하다.*주) “자본주의의 조종이 울린다. 착취자가 착취당한다.” 어떤 면에서든 역사란 노동이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런 노동과 문명화에 의해 진행되는 발전과 진보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주) ■■푸코는 혁명과 역사에 관한 이러한 관념이 근대의 인간학적 배치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즉 그가 보기에 축적으로서 역사란 인간의 유한성을 통해 노동과 축적, 역사를 정의하는 근대적 인간학의 인식론적 배치를 반복하는 것이다. 또한 혁명으로 종결되는 자본주의의 역사란, 이윤율의 저하로 인해 투자와 생산이 안정화되고 부동화(不動化)되는 리카르도의 비관주의에서 보이는, 역사적 유한성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M. Foucault, 앞의 책, 308~309쪽).■■
도식화의 위험이 따르지만, 요약해서 말하자면, 노동의 인간학은 노동이 모든 가치의 기원이고 원천이라는 명제,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명제, 그리고 역사는 노동의 본질을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명제로 구성된다. 첫째 명제는 가치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명제로서, ‘가치=노동’이라는 등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노동가치론의 가장 기본적인 공리다. 둘째 명제는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명제로서 ‘인간=노동’이라는 등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노동의 철학의 출발점이다. 셋째 명제는 역사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역사=노동’이라는 등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역사를 부의 증대, 문명의 진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의 증대로 보는 대부분의 역사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주1) 또한 노동자계급의 존재 자체에서 혁명의 동력을 발견하고,*주2) 그 혁명에서 역사의 목적/종말을 보는 모든 역사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주3)
*주1) ■■아도르노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역사철학에 반하는 역사철학적 비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Horkheimer/ Adorno, Dialektik der Aufklärung, 김유동 외 역, ■계몽의 변증법■, (문예출판사, 1995); M. Heidegger, Die Technik und die Kehre, 이기상 역, ■기술과 전향■, (서광사, 1993) 참조.■■
*주2) ■■예를 들면 G. Lukcs, 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 박정호/조만영 역,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1986), 237쪽.■■
*주3) ■■하지만 노동가치론과 노동의 철학, 역사철학 역시 노동의 인간학의 일부를 이루는 한, 노동의 인간학을 구성하는 세 명제를 순환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노동의 인간학에서 ‘가치’와 ‘인간’과 ‘역사’는 노동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모이고 응축된다. 이런 점에서 노동의 인간학에서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노동’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것이 노동의 인간학을 평범한 인간주의로 환원할 수 없는 이유라고 해야할 것이다. 굳이 도식적 대비를 하자면 ‘인간중심주의’와 구분되는 ‘노동중심주의’라는 말을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의 인간학이 노동자들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유일 것이고, ‘인간중심주의’가 비과학의 이름으로 처단되고 난 이후에도*주) 노동의 인간학이 그대로 존속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며, 또한 이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사상과 이론이 노동의 인간학 안에 머무는 이유일 것이다.
*주) ■■L. Althusser, 앞의 책, 272쪽 이하.■■
그러나 노동의 인간학은 단지 노동에 관한 담론이나 이론이 아니라 노동과 다른 개념들이 계열화되는 양상을 특징짓는 것이다.*주) 따라서 중요한 것은 노동이라는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가치’나 ‘인간’, ‘역사’와 같은 핵심적인 개념들이 노동이란 개념과 계열화되는 양상이다. 예컨대 정치경제학은 가치와 노동을 연결하는 선 위에 있다기보다는 가치와 인간, 역사가 노동을 통해 정의되는 입체적 공간 안에 있는 것이다. 노동의 철학 역시 헤겔이나 청년 맑스가 보여주듯이 인간과 가치, 역사가 노동과 계열화되는 공간 안에서 작동된다. 그렇다면 노동의 인간학이란 노동을 정점으로 하여 가치와 인간, 혁명이 반복하여 계열화되는 일종의 인식론적 배치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주) ■■이러한 계열화 개념에 관해서는 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이진경, ■들뢰즈: ‘사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서울사회과학연구소 편,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푸른숲, 1997) 참조.■■
3. 노동의 인간학: 욕망의 배치
이상에서 보듯이 노동의 인간학은 하나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이론적이든 경험적이든 다양한 문제들을 언제나 노동과, 그리고 그와 결부된 다른 핵심적인 개념들과 관련하여 사고하고 판단하게 하는 포괄적인 인식론적 배치다. 정치경제학은 물론 사회학, 혹은 정치학, 혹은 역사학, 교육학 등 다양한 이론들이 그러한 배치 안에서 사유할 수 있으며, 이 경우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선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노동의 인간학은 단지 이러한 인식론적 배치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고 그것을 특정한 양상으로 방향 짓고, 사람들의 생각과 욕망, 행동을 특정한 양상으로 반복하게 하는 현실적인 조건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이는 노동과 ‘가치’의 관계를 통해서, 또 노동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서, 노동과 ‘역사’의 관계를 통해서 작동한다. 여기서는 특히 앞의 두 문제에 집중해서 살펴보겠다.
첫째, 노동과 ‘가치’의 문제. 모든 가치의 본질은 노동이고,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활동은 노동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원의 한 구석에서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거나 춤추는 아이들의 활동은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치화되지 않기 때문이고, 가치를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먹을 밥을 하거나 찢어진 옷을 꿰매는 활동은 노동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 가치 있는(valuable) 활동임이 분명하지만, 가치를 생산한다고 말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에게 팔기 위한, 교환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활동이 아닌 것이다.
가치란 다른 상품과 교환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교환가치를 뜻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행동이 교환가치를 생산하기 위해 행해진다면 그것은 노동이 된다. 아이들의 춤추는 활동이 가수의 노래를 치장하는 백댄스가 되면 그것은 노동이 된다. 사람들 앞에서 부르던 노래를 클럽이나 스튜디오에서 부르게 되면 교환가치를 생산하며, 따라서 노동이 된다. 밥을 짓는 활동은 식당에서 행해지면 노동이 되고, 바느질은 세탁소에서 하면 노동이 된다.*주)
*주) ■■물론 이러한 밥짓거나 바느질하는 노동이 자본가의 집에서 자본가를 위한 봉사로 행해지면 비생산적 노동이 되고, 상업적인 식당이나 공장, 세탁소 등에서처럼 자본의 가치를 증식시키는 활동으로 행해지면 생산적 노동이 된다. 이런 점에서 “직접적으로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즉 자본을 증식시키는 노동이 생산적이다.”(K. Marx, ■직접적 노동과정의 제결과■, 김호균 편, ■경제학 노트■, 107쪽)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개념에 관해서는 ■잉여가치학설사■, 1권, (아침, 1989), 165쪽 이하를 참조.■■
여기서 노동과 가치의 관계에 기묘한 전도(顚倒)가 발생한다. 즉 어떠한 활동도 가치화되지 못하면, 다시말해 가치로서 인정(recognition)받지 못하면 노동이 되지 못한다. 가치로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가나 화폐소유자에 의해 구매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활동이 노동이 되기 위해서는 자본가나 화폐소유자에 의해 그것이 구매되어야 한다. 하나의 동일한 활동이 노동이 되게 하는 것은 활동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구매하려는 사람, 곧 자본가나 화폐소유자다.
결국 노동이 가치의 본질이며,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인 한,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합목적적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자본에 의해 구매되는 활동이고, 자본에 의해 결정되는 활동이다. 즉 노동을 노동으로서 정의하는 것은 자본가나 화폐소유자다. 이 경우 노동은 ‘노동력이란 상품의 사용가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인 노동자는 노동하지 않고선 살 수 없다.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노래든, 춤이든, 공부든, 사랑이든 모든 종류의 활동이나 활동에 대한 욕망은, 노동을 통하지 않고선, 노동을 가치화함으로써 획득하는 화폐 없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모든 활동과 욕망은 한편으로는 생존의 조건인 노동 이후로 미루어지고, 노동에 대한 잔여적인 영역으로, 일종의 ‘레저’로 밀려난다. 이를 위해서도 노동은 필수적인 조건이고 전제적인 욕망이다. 다른 한편 그 모든 활동을 어떻게든 가치화될 수 있게 하여 노동으로 변환시키고자 하게 된다. 이는 모든 욕망이 노동의 욕망으로, 가치화하려는 욕망으로 환원됨을 의미한다.
가치를 생산하고 싶다는 욕망,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치 있게 살고 싶다는 욕망을 대신하고 대체한다. 그런데 그러한 욕망은 앞서 말했듯이 정확하게 자신의 활동을 판매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자본에 의해 구매되어 자본에 포섭되고 싶다는 욕망. 이런 점에서 ‘노동의 욕망’은 분명히 자본의 욕망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이러한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아야 한다. 자신의 생존, 가족의 생존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여기서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욕망이 된다.
한편 자본가는 말한다. 노동하지 않는 자, 다시 말해 자본 내지 화폐와 교환될 만한 활동을 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노동 무임금’을 외치는 자본가의 유명한 구호가 나온다.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이는 노동력을 구매하여 잉여가치를 생산하고자 하는, 그것을 자신의 의지 아래 복속시켜 움직이게 함으로써 자본을 증식시키고자 하는 자본의 욕망을 정확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노동 없이는 먹고 살 수 없기에 노동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에 자신의 노동력과 노동의사를 판매하는 행위 없이는 먹고 살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조건이야말로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을 수 없다는 태도를 만들어내는 것이란 것이다.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라고 불리는 과정이, 토마스 모어가 양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했던 그 끔찍한 과정이, 요컨대 직접생산자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과정이 이러한 욕망의 배치가 작동하게 되는 현실적 조건을 이룬다는 것은 잘 아는 바와 같다.*주)
*주) ■■하지만 이는 노동의 인간학 이전에 이미 진행되었던 과정이다. 즉 시간적으로 ‘본원적 축적’이 노동의 인간학에 선행한다. 다시 말해 ‘본원적 축적’이 모든 욕망을 노동의 욕망으로 환원하게 하는 현실적 조건이라면, 노동으로써 가치를 정의하고 노동의 욕망을 가치화하려는 욕망으로 정의하는 노동의 인간학은 그러한 조건을 표현하는 ‘표현형식’이라고 하겠다.■■
둘째, 노동과 ‘인간’의 관계. 인간의 본질이 노동이라고 하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인간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간다운 본질을 구현하는 보람찬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하지 않는 자, 예컨대 실업자, 게으름뱅이, 부랑자, 구걸로 편안히(?) 돈을 벌려는 자, 가치화되지 않는 활동, 예컨대 노래나 춤, 그림, 게임 등등에 미쳐있는 자는 모두 ‘인간’이 아닌 것이다.
16~17세기, 혹은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 시작되었던 그 이전 세기부터 인간에 속하지 않는 이 ‘사회적 해충’들을 교화하여 인간으로 만들려는 거대한 노력이 유럽 전역에서 행해진다. 부랑을 제한하고 그것을 처벌하는 이른바 ‘빈민법’은 그것 가운데 하나다. 빈민의 이름으로 불리던 그 법들은 그들을 ‘자유의지’에 의한 범죄자로 취급하였으며, 그들이 노동하지 않는 것을 그들의 의지의 결여에서 찾았다.*주1) 따라서 그들은 “짐차 뒤에 결박되어 몸에서 피가 흐르도록 매를 맞고 그 뒤에는 그들의 출생지나 그들이 최근 3년간 거주하던 곳으로 돌아가서 ‘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그리고 부랑자로 다시 체포되면 태형에 처하고 귀를 절반 자르며, 세 번 체포되면 중죄인으로서 ‘공동체의 적’으로 규정되어 사형에 처해졌다.”*주2) 1547년 영국의 법에 따르면, ‘노동하는 것을 거절하는 자’는 그를 게으름뱅이라고 고발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했다.*주3)
*주1) ■■K. Marx, ■자본■, I~3, 824쪽.■■
*주2) ■■은 책, 824쪽.■■
*주3) ■■은 책, 824쪽.■■
또 파리 시민 100명 당 1명 꼴로 ‘종합병원’이라는 이름의 수용소에 가두었던 ‘거대한 감금’ 역시 이러한 ‘해충’들을 인간세계로부터 격리하여 인간으로 개조하거나 교화하려는 조치 가운데 하나였다.*주1) 그 수용소에서, 경제적으로는 실패였음이 판명난 노동을 그들에게 강제했던 것은,*주2) 그것이 그들을 인간으로 ‘구제’하기 위한 시설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감금과 더불어 강제노동은 인간과 노동의 등식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원칙이 자본주의적 실천이성의 요청으로 확립된다. 그렇다면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노동의 인간학의 공리적 명제는 이러한 요청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노동을 통해서 인간을 정의하고,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으로 만들려는 자본의 욕망과 과연 무관한 것일까?
*주1) ■■M. Foucault, Madness and Civilization, (Tavstock, 1967), 38쪽 이하.■■
*주2) ■■같은 책, 232쪽.■■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본은 축적과 함께 이러한 ‘비인간’을 스스로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즉 자본의 축적은 유기적 구성의 상승을 야기함으로써 산 노동을 끊임없이 죽은 노동으로 대체하며, 인간의 대열에 들어 노동하고 있던 사람들을 노동하지 않는 비인간의 세계로 끊임없이 몰아낸다.*주1) 과잉인구는 아직 취업하고 있는 노동자들에 대해 실업화하려는 압력을 일상적으로 행사한다. 이를 ‘실업화 압력’이라고 부르자. 그것은 자본에 대해 대항하거나, 자본에 복종하지 않는 자, 자본의 요구에 적절하지 않게 된 자를 ‘비인간’이 될 운명으로 내몰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노동자 전체로 하여금 죽음에 근접한 그 끔찍한 운명을 항상적으로 떠올리게 함으로써 자본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강요한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선 어떠한 형태의 노동에도 적응해야 하고, 갑작스런 업무나 배치의 변경에도 순응해야 하며, 그렇지 못한 자는 무능력하거나 불성실한 자로서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주2) 이로써 자본은 그 구체적인 물적 형태와 기술적 형태, 그에 요구되는 노동의 형태에 무관하게 노동력을 채취하여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한다. 노동하려는 자, 인간의 세계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자는 어떠한 종류의 일이나, 어떤 고통스런 규율도 감수하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주1) ■■K. Marx, ■자본■, I~3, 715쪽 이하.■■
*주2) ■■이에 대해 맑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실업화 압력은]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를 그 비열하고 가증스런 [자본의] 독재에 굴복시키고, 그의 전체 생활을 노동시간으로 전환시키며, 그의 처자를 저거노트의 수레바퀴(Juggernaut-Rad) 밑에 던져 넣는다...[그리하여] 상대적 과잉인구, 또는 산업예비군을 언제나 축적의 규모 및 힘과 균형을 유지하게 하고 있는 그 법칙은 헤파이토스의 쐐기가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못박은 것보다 더 단단하게 노동자를 자본에 못박는다.”(같은 책, 729~730쪽)■■
과잉인구는 또 ‘인간’의 대열 안에 들어가기 위한, 혹은 그 안에 살아남기 위한 노동자들의 경쟁을 만들어낸다. 이 경쟁은 노동자들 사이에 적대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다른 노동자는 모두 자신의 경쟁자요 적이다. 노동자로,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고용을 위한 노력은 그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 자신 스스로 선택한 것이요 자신의 욕망이 된다.*주) 예컨대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 컴퓨터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은 사실상 그런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본의 요구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에 의해 구매되고 가치화되는 한에서만 먹고살 수 있고, 그런 한에서만 활동할 수 있기에 그것은 노동자 자신의 능력이요 나 자신의 욕망이다. 반면 실업이나 실직은, 자본이 요구하는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을, 다시 말해 노동자 자신이 무능력함을 뜻하는 것이 된다.
*주) ■■맑스는 제임스 스튜어트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노예제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노예였기에 노동을 강요당했다. 지금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욕망의 노예기에 노동을 강요당한다.”(같은 책, 731쪽)■■
결국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노동의 인간학의 명제는,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조건 아래서, 노동자가 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게 만드는 욕망의 배치를 작동시킨다. 우리는 이 욕망의 배치 안에서, 자본이 요구하는 능력과 자질을 자신의 신체에 새기게 된다. 취업하기 이전부터, 취업한 이후에도, 그리고 취업에 실패하거나 취업에서 탈락한 경우에도.
요컨대 욕망의 배치로서 노동의 인간학이란 자신의 활동을 가치화하고자 하는 욕망의 배치고, 자본이나 화폐소유자에게 자신의 능력을 팔고자 하는 욕망의 배치며, 이렇게 하여 정의되는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배치다.
이리하여 노동의 인간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두 개의 축에서, 노동중심주의의 인식론적 배치의 뒤편에서 우리는 자본의 욕망 내지 요구를 노동자가 자신의 욕망으로 삼게 하는 욕망의 배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부르주아의 사상가들이 노동의 인간학을 구성하는데 진심으로(!) 몰두했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즉 그들이 노동의 인간학에 몰두했던 것은 위선도 아니었고, 노동자에 대한 동정도 아니었으며, 순수 진리에 대한 욕구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확하게도 자본의 욕망이나 요구를 노동자 자신의 욕망으로 삼게 만드는 욕망의 배치를 구성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노동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는 인식론적 배치로서 노동의 인간학은, 가치화하는 한에서만 노동이 된다는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또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일 수 있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자본의 욕망을 노동의 욕망으로, 자본의 요구를 노동자의 욕망으로 대체하는 욕망의 배치로서 작동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만큼 인식론적 배치로서 그것이 보여주는 노동에 대한 애정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욕망의 배치로서 그것은 자본의 욕망에 따라 노동자의 삶을 포섭하는 양상 또한 그만큼 강렬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식론적 배치로서 노동의 인간학이 보여주는 면모와 욕망의 배치로서 그것이 보여주는 면모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처럼. “눈앞에서 보지만 결코 믿을 수 없다.” 특히나 인식론적 배치 안에서 노동이나 인간, 가치, 역사 등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사람에게, 그것이 작동시키는 욕망의 배치란 결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것이 맑스가 노동의 인간학을 정립한 이래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이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아닌지?
그것은 아마도 노동자가 노동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간주하는 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배치일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러한 욕망의 배치 아래서 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삼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의 신체를 보는 우리 자신의 습속을 형성했던 ‘초험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만큼 자본의 권력을 우리의 신체, 우리의 시선, 우리의 욕망에 대해 작용시키는 권력의 배치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본의 지배를 폐기하고자 한다면, 자본의 권력을 전복시키고자 한다면, 이미 우리 자신의 욕망이 되어버린 그 자본의 욕망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본의 욕망을 우리 자신의 욕망으로 만드는 저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욕망의 배치를 변환시켜야 하는 것은 아닐까?
4. 노동의 인간학과 맑스주의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명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노동의 인간학을 통해 작동하고 있는, 그래서 그러한 이름으로 불렀던 욕망의 배치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것과 인식론적 배치로서 노동의 인간학 사이에 있는 거리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했다. 먼저 앞의 두 명제로 잠시 되돌아가자.
먼저, 가치의 본질을 노동으로 환원하는 노동가치론의 공리적 명제가 자본주의라는 조건에서 모든 활동을 가치화하려고 하는 욕망, 노동의 욕망을 생산함을, 그리고 모든 욕망이 그 욕망으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노동하지 않는 자,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부르주아지의 적대적 요구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았다.
그런데 노동가치론은 ‘무노동 무임금’을 주장하는 부르주아지의 이 주장을 근본적으로 반박할 수 있을까?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비용이라는 논리만으로 그러한 반박에 충분할까? 예컨대 실업자들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그들에게 노동력 재생산 비용인 임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도 쉽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노동가치론의 저 공리적 명제를 전제하는 한, 그들은 노동하지 않는 자고, 따라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들이 임금을 받는다면, 노동하는 사람은 대체 바보란 말인가?’ 이게 단지 부르주아지만의 생각일까?
우리는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이 끔찍한 주장을 근본에서 뒤집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하지 않는 자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즉 노동을 하든 안 하든 먹고 살 수 있는 비용, 즉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사회적으로 지급되어야 한다. 물론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노동에 대해 별도의 임금을 추가로 지급하려 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 그 경우 최소한의 임금에 경제적으로 만족하면서 자기가 하고싶은 활동을 하고 살거나, 아니면 좀더 경제적으로 나은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거나 하는 판단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노동은 비로소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 될 것이다.
활동을 가치화해야 한다는 노동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그것은 가치화를 통해서만 활동이 노동이 되는 현실적 조건을 돌파해야 함을 뜻한다. 바로 그런 만큼 그것은 가치화되는 활동만을 노동으로 정의하는 이론적 명제를 돌파해야 함을 뜻한다. 노동의 인간학이라는 인식론적 배치에서 벗어나는 것.
혹은 정반대의 길도 있다. 그것은 모든 활동이 노동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는 것도,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화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배우는 것도, 혹은 음악을 듣는 것도, 심지어 산소를 생산하는 나무들의 활동까지도 모두 가치화하는 것이다. 이는 그런 활동이 생산한 모든 ‘가치 있는 것’(the valuables)에 대해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현재의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정치가나 국회의원들의 활동은 아무런 경제적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들의 행동이 어떻든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사노동을 하는 주부나 공부하는 학생들, 창작을 위해 사색하는 예술가들의 활동도 이 사회가 존속하는데 긴요한 활동들이다. 나무들이 대기를 정화하고 물이 대지를 정화하는 활동 또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활동을 하도록, 그 활동의 내용에 상관없이 최소한의 임금--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사회적으로 지급하는 것, 나무들의 생산활동에 대해서도 그 결과를 소비한 자들이 예컨대 산소세 형태로 나무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국회의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보다 결코 조금도 부당하지 않다. 이 길을 따르는 경우에는 노동과 가치의 등식을 해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가치를 오직 교환가치로 정의하는 또 다른 정의에 대해, 활동의 가치를 오직 상품성으로 평가하는 정의에 대해 근본적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의 본질을 노동으로 환원하는 명제가, 노동하지 않는 자는 인간이 아니라는 부르주아적 실천이성의 요청에 상응한다는 것을 보았고, 그것이 비인간화의 위협과 동일한 실업화 압력을 통해서 자본의 요구를 노동자 자신의 욕망으로 삼게 만든다는 것을 보았다.
실업 이후 자신감을 잃거나 무력감에 빠지는 사람들, 혹은 자신의 무능력이나 ‘비-인간됨’을 보이는 듯해서 실직했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낮에 산을 오르는 사람들, 지금도 끔찍한 수용시설에 갇혀 ‘인간’이 되는 고통을 감수하며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에서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명제의 구체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반면 노동하지 않는, 따라서 가치를 생산하지 않고 임금도 받지 못하며, 그래서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여성들의 모습에서 그 명제의 구체적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강제하는 현실적 조건을 돌파해야 한다. 다시 말해 노동의 중단이 ‘인간적’ 삶의 중단 혹은 삶 자체의 절단을 뜻하는 자본주의적 강제--경제적 강제--의 조건을 돌파해야 한다. 그리하여 노동 아닌 다른 모든 활동에서도 ‘인간’으로서 즐거움과 기쁨을 충분히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 실업에 대해 별다른 동요 없이 덤덤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런 만큼 취업이나 승진에 대해서도 충분히 덤덤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또한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라는 이론적 등식을 돌파해야 하며, 그리하여 노동을 하든 않든 충분히 동등하게 인간일 수 있어야 한다. 노동하는 자 스스로 노동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고, 노동을 통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하며, 인간이 되기 위해 노동을 하고자 하는 욕망의 배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상에서 우리가 주장한 것이 또 다른 종류의 인간주의를 개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노동과 비노동의 구별을 제거하자는 것이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제거하자는 것이며, ‘노동’과 ‘인간’의 강박에서 벗어나자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노동과 인간의 개념, 그런 욕망의 배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나 가치, 역사를 노동이라는 개념으로 환원하는,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위안으로서 노동중심주의를 과감하게 벗어던지는 것, 그리하여 노동의 인간학을 통해 작동하는 욕망의 배치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이는 맑스주의의 과거를 현재적 상황 속에서 검토하고, 그것을 통해 맑스주의의 미래를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하려는 하나의 문제설정 방식이다. 그것은 노동의 인간학에서 벗어나서 맑스주의를 새로이 재구성하고 변환시키고자 하는 문제설정이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계급에게 던지는 성급한 작별인사가 결코 아니고,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 사소한 문제들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가는 맹목적 함몰도 아니며, 맑스나 맑스주의에게 던지는 냉정한 배신의 칼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노동에 관한 문제, 자본주의에 관한 문제, 혹은 맑스주의적 문제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하나의 변환을 시도하고자 함일 뿐이다.
중요한 개념들을 노동으로 환원하는 이론적 배치가 반드시 노동의 문제를 올바로 다루는 방법을 뜻하지는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인간이라는 개념으로 환원하는 이론적 배치가 인간의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아닌 것처럼. 마치 모든 것을 생명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것이 생명과 관련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고 해결하는 방법은 아닌 것처럼. 여기서 제기된 노동의 인간학에 대한 비판이 정치경제학이나, 맑스주의 철학, 혹은 맑스주의 역사학을 모두 쓸모 없으니 던져 버리자는 것을 뜻하지는 않으며, 또 그것들의 기존 연구가 전적으로 무효하다는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노동과 인간, 가치라는 개념들로 짜여진 인식론적 배치 안에 머무는 한 그 성과들이 축소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며, 그 배치가 그 연구들에 대해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근본적 한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고, 그 연구들이 나아갈 수 있는 풍부하고 다양한 방향들을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개념이나 주제를 노동으로 환원하는 것, 혹은 노동을 모든 이론적 사유의 근거(Grund)로 삼는 것, 노동이라는 개념이 사유의 진보성과 혁명성을 보증해 주리라는 생각, 맑스주의의 정통성이나 통일성을 노동이라는 기초개념에서 확보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바로 여기서 벗어날 때, 우리는 맑스주의의 다양한 개념들이 하나의 말뚝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열화의 선을 그리며 새로운 이론적 사유의 지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