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분별
“사리분별이 뚜렷하고 소신이 있음.”
생활기록부에 남은 담임 선생님의 그 짧은 평가가, 때때로 내 발목을 붙잡는다. 중요한 선택 앞에 설 때마다 그 여섯 글자가 떠오르며 나를 멈춰 세운다.
사리분별.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힘.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본래 분별력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무심했고, 안이했고, 세상을 너무 쉽게 보았다.
금융인으로 삼십 년을 살며, 나는 수없이 많은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대출 심사서, 신용 평가서, 계좌 개설 신청서. 한 사람의 운명이 달린 서류들이었다.
어느 날, 한 중년 남성이 찾아왔다. 사업 자금 대출 신청이었다. 서류는 완벽했다. 담보도 충분했고, 신용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았다.
“사업 계획서를 다시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나는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숫자는 맞았다. 그러나 논리가 어긋났다. 수익 구조가 현실과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이 부분, 다시 검토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는 당황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대출은 불발되었다.
몇 달 후, 그가 다른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했다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족까지 함께 무너졌다고 했다.
나는 그날, 멈춰 섰던 내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동시에 두려웠다. 만약 내가 그냥 도장을 찍었다면? 그의 파산을 내가 앞당긴 셈이 되었을 것이다.
사리분별은 때로 냉정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따뜻한 배려일 수 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판단’이라는 말 앞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게 되었다. 판단은 늘 결과로만 평가되지만, 그 과정에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 망설임과 침묵이 깃들어 있다. 서류 위에는 찍히지 않는 마음의 흔적이 있고, 계산식으로는 환산되지 않는 불안의 무게가 있다. 나는 그것을 직감이라 부르기보다 책임이라고 불렀다. 사리분별이란 결국 옳은 답을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틀릴 가능성까지 끌어안고 결정을 감당하려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게를 견디는 일이야말로 어른이 된다는 것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분별력이 처음부터 내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 1학년, 첫 성적표를 받던 날이 떠오른다.
‘11등.’
나는 우쭐했다. 120명 중 11등이라니. 별거 아니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에서 성적표를 다시 보다가 숨이 멎었다. 과목 점수 집계가 틀렸다. 실제로는 95등이었다.
나는 다음 날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제 성적이 잘못 기재됐습니다.”
“올려달라는 거냐?”
“아닙니다. 내려주세요.”
선생님은 한참을 나를 보셨다. 그리고 고쳐주셨다. 11등에서 95등으로.
그 순간의 부끄러움은 평생 잊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이 나를 바꿨다.
젊은 시절, 나는 자살 예방 상담 전화를 받는 봉사를 시작했다. 25년째다. 물론 객지 근무로 봉사를 할 수 없었을 때도 있었다.
어느 밤, 한 청년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다 끝내고 싶어요.”
나는 그의 말을 오래 들었다. 판단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그저 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이 순간, 정말 끝내고 싶은 건 삶인가요, 아니면 고통인가요?”
전화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고통이요.”
“그렇다면 우리 함께 고통을 끝낼 방법을 찾아봅시다. 삶을 끝낼 게 아니라.”
그는 울었다. 나도 울었다.
사리분별은 때로 질문이다. 무엇을 끝내야 하는가, 무엇을 살려야 하는가.
그날의 통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사리분별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오래 맴돌았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그 삶을 포기하지 않게 붙잡는 일. 그 미묘한 경계 위에서 나는 자주 흔들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성급한 위로나 단정적인 조언보다, 끝까지 함께 질문을 건네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생의 마지막 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분별은 결론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라는 것을 그때 배웠다.
예순이 넘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사리분별 앞에 섰다.
문학 공모전에 작품을 낼 때마다 고민한다. 이 문장이 진실한가. 이 감정이 과장된 것은 아닌가. 독자를 속이는 것은 아닌가.
고등학교 때 그 성적표처럼, 나는 내 글 앞에서 정직하고 싶다.
95등을 11등이라 우기지 않았듯, 평범한 일상을 거창하게 포장하고 싶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엄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있는 그대로를 보는 힘이다.
열여섯 살 소년이 성적표를 내려달라 찾아온 그 순간, 담임 선생님은 무엇을 보셨을까.
지금 나는 안다.
사리분별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부끄러움 속에서 자라나는 것임을.
한 번의 정직이 평생의 기둥이 되듯, 순간의 분별이 인생의 나침반이 된다는 것을.
성적표의 수정 흔적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흔적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출발선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중요한 선택 앞에 서면,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11등의 허상에 취했던 그 소년을, 95등의 진실 앞에 섰던 그 오후를.
그리고 묻는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사리분별이란, 결국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2026년 2월호 수필과비평 게재>
첫댓글 그저께 가입인사하고 수필 한 편 올렸는데 '문봄' 문우들께서 댓글로 소통해 주시지요~~ㅎ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틀린 말은 아니죠.
그러나 문학은 맞고 틀리고가 아닌 정직한 마음이 출발선이죠. 특히 시와 수필은요.
문학의봄 카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진솔한 내용의 '사리분별'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 카페에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로 문안 여쭙겠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11등으로 갔을 것 같은데 대단하십니다. 저는 11등 못해봤어요.
1등아니면 거의 꼴등을 했지요
대단하십니다~
일등도 꼴등도 아무나 하는게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