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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9년(2015년) 4월 2일 후기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 (11)
서울경기강원지역방 3310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3310
의 후속타입니다.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 를 열한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영어 불서읽기에는 환희장엄 법우, 클나라 법우, 저 관문 이렇게 3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Edited and introduced by Bhikkhu Bodhi, In the Buddha's Words> 중 II. The Bringer of Light의 Text를 읽었습니다. 교재 57페이지 밑에서 20째 줄부터 66페이지 2째 줄까지입니다.
<Bhikkhu Bodhi 스님의 In the Buddha's Words>를 읽는 동안의 후기는 영어와 저희가 시도해 본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아직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이 없어서 이 후기는 순전히 저희 영어불서 읽기 모임의 작품이 되겠습니다.
II. The Bringer of Light
제2장 빛을 가져오신 분
3. THE QUEST FOR ENLIGHTENMENT
깨달음을 추구하심
(1) Seeking the Supreme State of Sublime Peace
숭고한 평화의 위없는 상태를 찾아서
16. “Still in search, monks, of what is wholesome, seeking the supreme state of sublime peace, I went to Uddaka Rāmaputta and said to him: ‘Friend, I want to lead the spiritual life in this Dhamma and Discipline.’ Uddaka Rāmaputta replied: ‘The venerable one may stay here. This Dhamma is such that a wise man can soon enter upon and dwell in it, himself realizing through direct knowledge his own teacher’s doctrine.’ I soon quickly learned that Dhamma. As far as mere lip-reciting and rehearsal of his teaching went, I could speak with knowledge and assurance, and I claimed, ‘I know and see’—and there were others who did likewise.
16. “비구들이여, 또 다시 건전한 것을 찾아서, 숭고한 평화의 위없는 상태를 구해서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가서 말했다. ‘벗이여, 나는 그대의 법과 계율에 따라 영적인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웃다까 라마뿟따가 대답했다. ‘존자여, 이곳에 머무르시오. 나의 법은 지혜로운 자라면 오래지 않아 직접적인 지혜를 통해서 스승의 가르침을 스스로 깨달아, 들어갈 수 있고 머무를 수 있습니다.’ 나는 오래지 않아 그 법을 배웠다. 그의 가르침을 단지 입술로 외우고 암송하는 것에 관한 한, 나는 이해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고, ‘나는 알고 본다.’라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봐 주었다.
“I considered: ‘It was not through mere faith alone that Rāma declared: “By realizing it for myself with direct knowledge, I enter upon and dwell in this Dhamma.” Certainly Rāma dwelled knowing and seeing this Dhamma.’ Then I went to Uddaka Rāmaputta and asked him: ‘Friend, in what way did Rāma declare that by realizing it for himself with direct knowledge he entered upon and dwelled in this Dhamma?’ In reply Uddaka Rāmaputta declared the base of neither-perception-nor-nonperception.13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라마가 “스스로 직접적인 지혜를 통해서 깨달음으로써, 나는 이 법에 들어가고 머무른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단지 믿음만을 통해서는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라마는 이 법을 알고 보면서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가서 물었다. ‘벗이여, 그대는 어떻게 스스로 직접적인 지혜를 통해서 깨달음으로써 이 법에 들어가고 머무른다고 선언하는 겁니까?’ 그는 대답으로 지각이 있는 것도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말했다.(주13)
NOTE 13. N’eva saññānāsaññāyatana. This is the fourth and highest formless attainment. It should be noted that Uddaka Rāmaputta is Rāma’s son (putta), not Rāma himself. The text gives the impression that while Rāma had attained the base of neither-perception-nor-nonperception, Uddaka himself had not done so. The attainment of this base leads to rebirth in the base of neither-perception-nor-nonperception, the highest plane of rebirth in saṃsāra. The lifespan there is said to be 84,000 eons, but being conditioned and impermanent, it is still ultimately unsatisfactory.
(주13)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색계의 네 번째이고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이다. 여기서 웃다까 라마뿟따는 라마의 아들(뿟따)이고, 라마 자신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경은 라마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얻었지만, 웃다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경지의 성취는 윤회의 재생 중 가장 높은 단계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다시 태어남으로 이끈다. 그곳에서의 수명은 84,000겁이지만, 조건 지워지고 무상한 것이다. 그곳도 역시 궁극적으로는 불만족스러운 곳이다.
“I considered: ‘Not only Rāma had faith, energy, mindfulness, concentration, and wisdom. I too have faith, energy, mindfulness, concentration, and wisdom. Suppose I endeavor to realize the Dhamma that Rāma declared he entered upon and dwelled in by realizing it for himself with direct knowledge.’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라마만 믿음, 정력, 알아차림, 집중[선정]과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믿음, 정력, 알아차림, 집중[선정]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만일 내가 라마가 직접적인 지혜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들어가고 머무른다고 주장하는 법을 깨닫기 위해 애써보면 어떨까?’
“I soon quickly entered upon and dwelled in that Dhamma by realizing it for myself with direct knowledge. Then I went to Uddaka Rāmaputta and asked him: ‘Friend, was it in this way that Rāma declared that he entered upon and dwelled in this Dhamma by realizing it for himself with direct knowledge?’—‘That is the way, friend.’—‘It is in this way, friend, that I also enter upon and dwell in this Dhamma by realizing it for myself with direct knowledge.’—‘It is a gain for us, friend, it is a great gain for us that we have such a venerable one for our fellow monk. So the Dhamma that Rāma declared he entered upon and dwelled in by realizing it for himself with direct knowledge is the Dhamma that you enter upon and dwell in by realizing it for yourself with direct knowledge. And the Dhamma that you enter upon and dwell in by realizing it for yourself with direct knowledge is the Dhamma that Rāma declared he entered upon and dwelled in by realizing it for himself with direct knowledge. So you know the Dhamma that Rāma knew and Rāma knew the Dhamma that you know. As Rāma was, so are you; as you are, so was Rāma. Come, friend, now lead this community.’
“나는 곧 직접적인 지혜로 나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그 법에 들어가고 머무르게 되었다. 그때 나는 웃다까 라마뿟따에게 가서 물었다. ‘벗이여, 그대가 직접적인 지혜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이 법에 들어가고 머무른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그렇소, 벗이여.’—‘벗이여, 내가 직접적인 지혜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이 법에 들어가고 머무르는 것도 바로 이런 방식이오.’—‘벗이여, 우리 도반 수행자들에게 이런 존자를 가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 큰 얻음이오. 내가 직접적인 지혜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들어가고 머무른다고 주장하는 법은 그대가 직접적인 지혜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들어가고 머무르는 그 법과 같소. 그리고 그대가 직접적인 지혜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들어가고 머무르는 그 법은 내가 직접적인 지혜로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들어가고 머무른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법이오. 그러니까 그대는 라마가 알고 있는 법을 알고 라마는 그대가 알고 있는 법을 아는 것이오. 라마가 그러하듯이 그대도 그렇고, 그대가 그러하듯이 라마도 그렇소. 자, 벗이여, 우리 함께 이 교단을 이끌어 갑시다.’
“Thus Uddaka Rāmaputta, my fellow monk, placed me in the position of a teacher and accorded me the highest honor. But it occurred to me: ‘This Dhamma does not lead to disenchantment, to dispassion, to cessation, to peace, to direct knowledge, to enlightenment, to Nibbāna, but only to rebirth in the base of neither-perception-nor-nonperception.’ Not being satisfied with that Dhamma, disappointed with it, I left.
“이렇게 나의 동료 승려인 웃다까 라마뿟따는 나를 스승의 자격으로 대우하고 나에게 최상의 공경을 표했다. 그러나 나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법은 미몽에서 깨어남, 냉정함, [괴로움의] 소멸, 평화, 직접적인 지혜, 깨달음,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다만 지각이 있는 것도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다시 태어나게 할 뿐이다. 그 법에 만족하지 못하고 실망해서, 나는 그곳을 떠났다.’
17. “Still in search, monks, of what is wholesome, seeking the supreme state of sublime peace, I wandered by stages through the Magadhan country until eventually I arrived at Uruvelā near Senānigama. There I saw an agreeable piece of ground, a delightful grove with a clear-flowing river with pleasant, smooth banks and nearby a village for alms resort. I considered: ‘This is an agreeable piece of ground, this is a delightful grove with a clear-flowing river with pleasant, smooth banks and nearby a village for alms resort. This will serve for the striving of a clansman intent on striving.’ And I sat down there thinking: ‘This will serve for striving.’14
17. "비구들이여, 나는 또 다시 건전한 것을 찾아서, 숭고한 평화의 위없는 상태를 구해서, 마가다 지방에서 차례로 돌아다니다가 세나니가마[장군촌] 근처의 우루웰라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나는 마음에 드는 땅과 아름다운 강기슭이 있는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이 있고 근처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는 멋진 숲을 보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곳은 마음에 드는 땅이고, 이곳은 아름다운 강기슭이 있는 유유히 흐르는 맑은 강이 있고 근처에 탁발할 수 있는 마을이 있는 멋진 숲이다. 이곳은 용맹정진을 원하는 좋은 가문의 사람이 용맹정진하기에 적당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용맹정진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에 앉았다.(주14)
NOTE 14. Text II,3(2) continues from this point with an extended account of the Bodhisatta’s extreme ascetic practices followed by his discovery of the middle way.
(주14) Text II,3(2)는 이 지점에서 계속되어 보살의 고행과 뒤따라오는 중도의 발견 이야기가 이어진다.
18. “Then, monks, being myself subject to birth, having understood the danger in what is subject to birth, seeking the unborn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I attained the unborn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being myself subject to aging, having understood the danger in what is subject to aging, seeking the unaging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I attained the unaging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being myself subject to sickness, having understood the danger in what is subject to sickness, seeking the unailing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I attained the unailing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being myself subject to death, having understood the danger in what is subject to death, seeking the deathless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I attained the deathless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being myself subject to sorrow, having understood the danger in what is subject to sorrow, seeking the sorrowless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I attained the sorrowless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being myself subject to defilement, having understood the danger in what is subject to defilement, seeking the undefiled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I attained the undefiled supreme security from bondage, Nibbāna. The knowledge and vision arose in me: ‘My liberation is unshakable. This is my last birth. Now there is no more renewed existence.’”
18. “그때 비구들이여, 나는 스스로 태어남에 묶여 있지만, 태어남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서, 태어나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구해서, 나는 태어나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얻었다. 스스로 늙음에 묶여 있지만, 늙음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서, 늙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구해서, 나는 늙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얻었다. 스스로 질병에 묶여 있지만, 질병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서, 아프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구해서, 나는 아프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얻었다. 스스로 죽음에 묶여 있지만, 죽음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서, 죽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구해서, 나는 죽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얻었다. 스스로 슬픔에 묶여 있지만, 슬픔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서, 슬프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구해서, 나는 슬프지 않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얻었다. 스스로 번뇌에 묶여 있지만, 번뇌에 묶여 있는 것의 위험을 알고서, 번뇌가 없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구해서, 나는 번뇌가 없고 속박에서 벗어난 위없는 안온(安穩)함인 열반을 얻었다. 내 안에 이러한 앎[知(지)]과 봄[見(견)]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삶은 없다.’라고.”
(from MN 26: Ariyapariyesana Sutta; I 160–67)
(맛지마 니까야 26: 성스러운 구함 경에서)
(2) The Realization of the Three True Knowledges
세 가지 진정한 앎[삼명(三明)]의 깨달음
11. [Saccaka asked the Blessed One:]15 “Has there never arisen in Master Gotama a feeling so pleasant that it could invade his mind and remain? Has there never arisen in Master Gotama a feeling so painful that it could invade his mind and remain?”
11. [삿짜까가 세존께 물었다](주15) “고따마 존자께는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는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고따마 존자께는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는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NOTE 15. Saccaka was a debater whom, on an earlier occasion, the Buddha had defeated in a discussion. Aggivessana, the name by which the Buddha addresses him just below, is probably his clan name. The present discourse begins with a discussion about pleasant and painful feeling, which gives the cue for Saccaka to pose these questions to the Buddha.
(주 15) 삿짜까는 토론을 좋아하는 자이었는데, 전에도 붓다와의 토론에서 패배한 적이 있다. 악기웨사나는 바로 다음에 붓다께서 그를 부르는 이름인데, 아마도 종족의 이름인 것 같다. 이 설법은 즐겁고 괴로운 느낌에 대한 토론으로 시작되는데, 삿짜까가 이런 질문을 붓다에게 제기했다는 암시가 된다.
12. “Why not, Aggivessana? Here, Aggivessana, before my enlightenment, while I was still only an unenlightened bodhisatta, I thought: ‘Household life is crowded and dusty; life gone forth is wide open. It is not easy, while living in a home, to lead the holy life utterly perfect and pure as a polished shell. Suppose I shave off my hair and beard, put on the ochre robe, and go forth from the home life into homelessness.’
“왜 없었겠는가, 악기웨사나여? 내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악기웨사나여, 내가 단지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재가(在家) 생활은 혼잡하고 먼지가 끼어 있지만, 출가의 생활은 활짝 열려있다. 가정을 가지고 사는 동안에는, 잘 닦인 소라처럼 온전히 완벽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내가 머리칼과 수염을 깎고, 황토색 가사를 입고, 집을 버리고 집 없는 생활로 출가를 하면 어떨까?’
13–16. “Later, while still young, a black-haired young man endowed with the blessing of youth, in the prime of life … [as in Text II,3(1) §§14–17] … And I sat down there thinking: ‘This will serve for striving.’
13–16. “나중에 아직 청춘의 축복을 듬뿍 받고, 인생의 전성기에 있던 새까만 머리의 젊은이인 나는 … [Text II,3(1) §§14–17에 나온 것처럼] … ‘이곳은 용맹정진을 하기에 적당한 곳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곳에 앉았다.
17. “Now these three similes occurred to me spontaneously, never heard before. Suppose there were a wet sappy piece of wood lying in water, and a man came with an upper fire-stick, thinking: ‘I shall light a fire, I shall produce heat.’ What do you think, Aggivessana? Could the man light a fire and produce heat by taking the upper fire-stick and rubbing it against the wet sappy piece of wood lying in the water?”
17. “자 나에게 전에 들어보지 못한 세 가지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가령 젖은 물기가 많은 장작이 물위에 놓여있다 하자. 이제 어떤 사람이 와서 질 좋은 불 피우는 막대를 가지고 와서, ‘불을 지펴야겠다. 열이 나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악기웨사나여, 그대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질 좋은 불 피우는 막대를 가지고 와서 물위에 놓여있는 저 젖은 물기가 많은 장작에 비벼서 불을 지피고 열이 나게 할 수 있겠는가?”
“No, Master Gotama. Why not? Because it is a wet sappy piece of wood, and it is lying in water. Eventually the man would reap only weariness and disappointment.”
“그럴 수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왜냐하면 그것은 젖어서 축축한 장작이고 물위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지치고 실망만 할 뿐입니다.”
“So too, Aggivessana, as to those ascetics and brahmins who still do not live bodily withdrawn from sensual pleasures, and whose sensual desire, affection, infatuation, thirst, and fever for sensual pleasures has not been fully abandoned and suppressed internally, even if those good ascetics and brahmins feel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ey are incapable of knowledge and vision and supreme enlightenment; and even if those good ascetics and brahmins do not feel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ey are incapable of knowledge and vision and supreme enlightenment. This was the first simile that occurred to me spontaneously, never heard before.
“악기웨사나여, 그와 같이 감각적 즐거움에서 몸으로 물러나서 살고 있지 않고, 그들의 감각적 즐거움을 향한 감각적 욕망, 애정, 반함, 갈애와 열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마음] 안에서 억제하지 못한 고행자들이나 바라문들에게 있어서, 그 선한 고행자들과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듯한 느낌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또 그 선한 고행자들과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전에 들어보지 못한 첫 번째 비유이다.
18. “Again, Aggivessana, a second simile occurred to me spontaneously, never heard before. Suppose there were a wet sappy piece of wood lying on dry land far from water, and a man came with an upper fire-stick, thinking: ‘I shall light a fire, I shall produce heat.’ What do you think, Aggivessana? Could the man light a fire and produce heat by taking the upper fire-stick and rubbing it against the wet sappy piece of wood lying on dry land far from water?”
18. “악기웨사나여, 다시 전에 들어보지 못한 두 번째 비유가 자연스럽게 나에게 떠올랐다. 가령 젖은 물기가 많은 장작이 물에서 멀리 떨어져 마른 땅에 놓여있다 하자. 이제 어떤 사람이 와서 질 좋은 불 피우는 막대를 가지고 와서, ‘불을 지펴야겠다. 열이 나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악기웨사나여, 그대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질 좋은 불 피우는 막대를 가지고 와서 물에서 멀리 떨어져 마른 땅에 놓여있는 젖은 물기가 많은 장작에 비벼서 불을 지피고 열이 나게 할 수 있겠는가?”
“No, Master Gotama. Why not? Because it is a wet sappy piece of wood, even though it is lying on dry land far from water. Eventually the man would reap only weariness and disappointment.”
“그럴 수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왜냐하면 그것은 비록 물에서 멀리 떨어져 마른 땅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젖은 물기가 많은 장작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사람은 지치고 실망만 할 뿐입니다.”
“So too, Aggivessana, as to those ascetics and brahmins who live bodily withdrawn from sensual pleasures, but whose sensual desire, affection, infatuation, thirst, and fever for sensual pleasures has not been fully abandoned and suppressed internally, even if those good ascetics and brahmins feel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ey are incapable of knowledge and vision and supreme enlightenment; and even if those good ascetics and brahmins do not feel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ey are incapable of knowledge and vision and supreme enlightenment. This was the second simile that occurred to me spontaneously, never heard before.
“악기웨사나여, 그와 같이 감각적 즐거움에서 몸으로 물러나서 살고 있지만, 그들의 감각적 즐거움을 향한 감각적 욕망, 애정, 반함, 갈애와 열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마음] 안에서 억제하지 못한 고행자들이나 바라문들에게 있어서, 그 선한 고행자들과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또 그 선한 고행자들과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전에 들어보지 못한 두 번째 비유이다.
19. “Again, Aggivessana, a third simile occurred to me spontaneously, never heard before. Suppose there were a dry sapless piece of wood lying on dry land far from water, and a man came with an upper fire-stick, thinking: ‘I shall light a fire, I shall produce heat.’ What do you think, Aggivessana? Could the man light a fire and produce heat by rubbing it against the dry sapless piece of wood lying on dry land far from water?”
19. “악기웨사나여, 다시 전에 들어보지 못한 세 번째 비유가 자연스럽게 나에게 떠올랐다. 가령 물에서 멀리 떨어진 마른 땅에 마른 물기 없는 장작이 있다고 하자. 이제 어떤 사람이 와서 질 좋은 불 피우는 막대를 가지고 와서, ‘불을 지펴야겠다. 열이 나게 해야겠다.’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악기웨사나여, 그대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사람은 질 좋은 불 피우는 막대를 가지고 와서 물에서 멀리 떨어져 마른 땅에 놓여있는 마른 물기 없는 장작에 비벼서 불을 지피고 열이 나게 할 수 있겠는가?”
“Yes, Master Gotama. Why so? Because it is a dry sapless piece of wood, and it is lying on dry land far from water.”
“할 수 있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은 마름 물기 없는 장작이고, 물에서 멀리 떨어진 마른 땅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So too, Aggivessana, as to those ascetics and brahmins who live bodily withdrawn from sensual pleasures, and whose sensual desire, affection, infatuation, thirst, and fever for sensual pleasures has been fully abandoned and suppressed internally, even if those good ascetics and brahmins feel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ey are capable of knowledge and vision and supreme enlightenment; and even if those good ascetics and brahmins do not feel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ey are capable of knowledge and vision and supreme enlightenment.16 This was the third simile that occurred to me spontaneously, never heard before. These are the three similes that occurred to me spontaneously, never heard before.
“악기웨사나여, 그와 같이 감각적 즐거움에서 몸으로 물러나서 살고 있고, 그들의 감각적 즐거움을 향한 감각적 욕망, 애정, 반함, 갈애와 열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마음] 안에서 억제한 고행자들이나 바라문들에게 있어서, 그 선한 고행자들과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또 그 선한 고행자들과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앎과 봄과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주16) 이것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전에 들어보지 못한 세 번째 비유이다. 이것들이 나에게 자연스럽게 떠오른, 전에 들어보지 못한 세 가지 비유들이다.
NOTE 16. It is puzzling that in the following paragraphs the Bodhisatta is shown engaging in self-mortification after he comes to the conclusion—in this passage—that such practices are useless for the attainment of enlightenment. This anomaly raises a suspicion that the narrative sequence of the sutta has become jumbled. The appropriate place for the simile of the fire-sticks, it seems, would be at the end of the Bodhisatta’s period of ascetic experimentation, when he has acquired a sound basis for rejecting self-mortification as a way to enlightenment.
(주 16) 이 단락에서 이러한 수행[고행]이 깨달음의 성취에 무익하다는 결론에 이른 후에, 붓다가 다음 문단에서 고행에 몰두한다고 나타내 보이는 것은 황당하다. 이 모순은 경의 설화의 순서가 뒤섞였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제기한다. 불 피우는 막대의 비유의 적절한 자리는 그가 고행을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고 거부하는 완전한 기초를 확립한, 보살의 고행 기간의 끝 부분이어야 할 것 같다.
20. “I thought: ‘Suppose, with my teeth clenched and my tongue pressed against the roof of my mouth, I beat down, constrain, and crush mind with mind.’ So, with my teeth clenched and my tongue pressed against the roof of my mouth, I beat down, constrained, and crushed mind with mind. While I did so, sweat ran from my armpits. Just as a strong man might seize a weaker man by the head or shoulders and beat him down, constrain him, and crush him, so too, with my teeth clenched and my tongue pressed against the roof of my mouth, I beat down, constrained, and crushed mind with mind, and sweat ran from my armpits. But although tireless energy was aroused in me and unremitting mindfulness was established, my body was overwrought and strained because I was exhausted by the painful striving. But such painful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17
20.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가령 이를 악물고 혀를 입천장에 눌러서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억누르고, 억압하고, 압도하면 어떨까?’ 그래서 이를 악물고 혀를 입천장에 눌러서 대고,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억누르고, 억압하고, 압도했다. 내가 그렇게 하자,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렀다. 마치 힘센 사람이 허약한 사람의 머리나 어깨를 꽉 잡고, 그를 억누르고, 그를 억압하고, 그를 압도하는 것처럼, 이를 악물고 혀를 입천장에 눌러서 대고, 나는 마음으로 마음을 억누르고, 억압하고, 압도하자 겨드랑이에서 땀이 흘렀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고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확립되었지만, 고통스런 정진으로 힘이 다 빠졌기 때문에 내 몸은 지나치게 긴장되었고 팽팽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아픈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NOTE 17. This sentence, repeated at the end of each of the following sections as well, answers the second of the two questions posed by Saccaka in §11.
(주 17) 이 문장은 각 문단의 마지막에도 되풀이되는데, §11에서 사짜까가 제기한 두 질문 중 두 번째에 대한 대답이다.
21. “I thought: ‘Suppose I practice the breathless meditation.’ So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and nose. While I did so, there was a loud sound of winds coming out from my ear holes. Just as there is a loud sound when a smith’s bellows are blown, so too, while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nose and ears, there was a loud sound of winds coming out from my ear holes. But although tireless energy was aroused in me and unremitting mindfulness was established, my body was overwrought and strained because I was exhausted by the painful striving. But such painful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21.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숨을 쉬지 않는 명상을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입과 코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다. 내가 그렇게 하자, 요란한 바람 소리가 내 귓구멍에서 나왔다. 마치 대장장이의 풀무가 바람을 일으킬 때 요란한 소리가 나듯이, 내가 입과 코로 쉬는 들숨과 날숨을 멈추었을 때, 요란한 바람 소리가 내 귓구멍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고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확립되었지만, 고통스런 정진으로 힘이 다 빠졌기 때문에 내 몸은 지나치게 긴장되었고 팽팽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아픈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22. “I thought: ‘Suppose I practice further the breathless meditation.’ So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While I did so, violent winds cut through my head. Just as if a strong man were pressing against my head with the tip of a sharp sword, so too, while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violent winds cut through my head. But although tireless energy was aroused in me and unremitting mindfulness was established, my body was overwrought and strained because I was exhausted by the painful striving. But such painful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22.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숨을 쉬지 않는 명상을 더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다. 내가 그렇게 하자, 격렬한 바람이 내 머리를 도려냈다. 마치 힘센 사람이 날카로운 칼날로 내 머리를 찍어 누르고 있는 것처럼, 내가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을 때, 격렬한 바람이 내 머리를 도려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고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확립되었지만, 고통스런 정진으로 힘이 다 빠졌기 때문에 내 몸은 지나치게 긴장되었고 팽팽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아픈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23. “I thought: ‘Suppose I practice further the breathless meditation.’ So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While I did so, there were violent pains in my head. Just as if a strong man were tightening a tough leather strap around my head as a headband, so too, while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there were violent pains in my head. But although tireless energy was aroused in me and unremitting mindfulness was established, my body was overwrought and strained because I was exhausted by the painful striving. But such painful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23.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숨을 쉬지 않는 명상을 더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다. 내가 그렇게 하자, 내 머리에 격렬한 두통이 일어났다. 마치 힘센 사람이 질긴 가죽 끈을 가지고 내 머리에 머리띠를 동여매고 있는 것처럼,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을 때, 내 머리에 격렬한 두통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고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확립되었지만, 고통스런 정진으로 힘이 다 빠졌기 때문에 내 몸은 지나치게 긴장되었고 팽팽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아픈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24. “I thought: ‘Suppose I practice further the breathless meditation.’ So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While I did so, violent winds carved up my belly. Just as if a skilled butcher or his apprentice were to carve up an ox’s belly with a sharp butcher’s knife, so too, while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violent winds carved up my belly. But although tireless energy was aroused in me and unremitting mindfulness was established, my body was overwrought and strained because I was exhausted by the painful striving. But such painful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24.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숨을 쉬지 않는 명상을 더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다. 내가 그렇게 하자, 격렬한 바람이 내 배를 썰었다. 마치 숙련된 백정이나 그의 도제가 날카로운 백정의 칼로 황소의 배를 썰어내는 것처럼, 내가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을 때, 격렬한 바람이 내 배를 썰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고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확립되었지만, 고통스런 정진으로 힘이 다 빠졌기 때문에 내 몸은 지나치게 긴장되었고 팽팽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아픈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25. “I thought: ‘Suppose I practice further the breathless meditation.’ So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While I did so, there was a violent burning in my body. Just as if two strong men were to seize a weaker man by both arms and roast him over a pit of hot coals, so too, while I stopped the in-breaths and out-breaths through my mouth, nose, and ears, there was a violent burning in my body. But although tireless energy was aroused in me and unremitting mindfulness was established, my body was over-wrought and strained because I was exhausted by the painful striving. But such painful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25.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숨을 쉬지 않는 명상을 더 하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다. 내가 그렇게 하자, 내 몸에 거센 불이 붙었다. 마치 두 명의 힘센 사람이 허약한 사람의 양팔을 꼭 잡고 뜨거운 숯불 구덩이 위에서 그를 굽는 것처럼, 내가 입과 코와 귀로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멈추었을 때, 내 몸에 거센 불이 붙었다. 그러나 지칠 줄 모르는 힘이 내 안에서 솟아나고 끊임없는 알아차림이 확립되었지만, 고통스런 정진으로 힘이 다 빠졌기 때문에 내 몸은 지나치게 긴장되었고 팽팽해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아픈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26. “Now when deities saw me, some said: ‘The ascetic Gotama is dead.’ Other deities said: ‘The ascetic Gotama is not dead, he is dying.’ And other deities said: ‘The ascetic Gotama is neither dead nor dying; he is an arahant, for such is the way arahants dwell.’
26. “그러자 천신들이 나를 보고서 몇몇은 이렇게 말했다. ‘고행자 고따마는 죽었다.’ 다른 천신들은 ‘고행자 고따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천신들은 ‘고행자 고따마는 죽지 않았고 죽어가고 있지도 않다. 그는 아라한이다. 아라한은 이렇게 머무는 것이니까.’라고 말했다.
27. “I thought: ‘Suppose I practice entirely cutting off food.’ Then deities came to me and said: ‘Good sir, do not practice entirely cutting off food. If you do so, we shall infuse heavenly food into the pores of your skin and this will sustain you.’ I considered: ‘If I claim to be completely fasting while these deities infuse heavenly food into the pores of my skin and this sustains me, then I shall be lying.’ So I dismissed those deities, saying: ‘There is no need.’
27.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내가 음식을 완전히 끊는 수행을 하면 어떨까?’ 그러자 천신들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존자여. 하지만 음식을 완전히 끊는 수행을 하지 마십시오. 만일 존자께서 그런 수행을 하신다면, 우리가 하늘의 음식을 당신의 털구멍에 부어넣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당신을 지탱해줄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완벽하게 음식을 끊는다고 선언했는데, 이 천신들이 내 털구멍에 하늘의 음식을 부어넣어서 그것이 나를 지탱한다면, 나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나는 ‘필요 없소.’라고 말하면서 그 천신들을 물리쳤다.
28. “I thought: ‘Suppose I take very little food, a handful each time, whether of bean soup or lentil soup or vetch soup or pea soup.’ So I took very little food, a handful each time, whether of bean soup or lentil soup or vetch soup or pea soup. While I did so, my body reached a state of extreme emaciation. Because of eating so little my limbs became like the jointed segments of vine stems or bamboo stems. Because of eating so little my backside became like a camel’s hoof. Because of eating so little the projections on my spine stood forth like corded beads. Because of eating so little my ribs jutted out as gaunt as the crazy rafters of an old roofless barn. Because of eating so little the gleam of my eyes sank far down in their sockets, looking like the gleam of water that has sunk far down in a deep well. Because of eating so little my scalp shriveled and withered as a green bitter gourd shrivels and withers in the wind and sun. Because of eating so little my belly skin adhered to my backbone; thus if I touched my belly skin I encountered my backbone and if I touched my backbone I encountered my belly skin. Because of eating so little, if I defecated or urinated, I fell over on my face there. Because of eating so little, if I tried to ease my body by rubbing my limbs with my hands, the hair, rotted at its roots, fell from my body as I rubbed.
28.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일 내가 콩죽이나 편두콩죽이나 살갈퀴콩죽이나 완두콩죽을 매번마다 한줌씩,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콩죽이나 편두콩죽이나 살갈퀴콩죽이나 완두콩죽을 매번마다 한줌씩, 아주 적은 양의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하자, 내 몸은 극도로 수척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내 사지(四肢)는 포도 덩굴 줄기나 대나무 줄기의 마디처럼 되었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내 엉덩이는 마치 낙타의 발굽처럼 되었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나의 등뼈는 염주알을 꼬아놓은 것처럼 두드러졌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나의 갈비뼈는 오래된 지붕 없는 헛간의 무너질 것 같은 서까래처럼 여위어서 튀어나왔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내 눈빛은 깊은 우물에 깊숙이 빠진 물빛처럼 보여 동공의 깊숙한 곳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내 머리 가죽은 녹색의 쓴 호리병박이 바람과 햇볕에 쪼그라들고 시들듯이 쪼그라들고 시들었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나의 뱃가죽은 등뼈에 달라붙었다. 그래서 내가 나의 뱃가죽을 만지려고 하면 등뼈가 손에 잡혔고, 내가 등뼈를 만지려고 하면 뱃가죽이 손에 잡혔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대변이나 소변을 보려고 하면, 나는 얼굴 위로 넘어졌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내 손으로 사지를 비벼서 몸을 편안하게 하려고 하면, 뿌리에서부터 썩은 머리카락이 몸에서 떨어졌다.
29. “Now when people saw me, some said: ‘The ascetic Gotama is black.’ Other people said: ‘The ascetic Gotama is not black; he is brown.’ Other people said: ‘The ascetic Gotama is neither black nor brown; he is golden-skinned.’ So much had the clear, bright color of my skin deteriorated through eating so little.
29. “이제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몇몇은 ‘고행자 고따마는 검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고행자 고따마는 검지 않고, 갈색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고행자 고따마는 검지도 않고 갈색도 아니다. 그는 황금빛 피부를 가졌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조금 먹었기 때문에 내 피부는 깨끗하고 밝아졌지만 나빠지고 있었다.
30. “I thought: ‘Whatever ascetics or brahmins in the past have experienced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is is the utmost; there is none beyond this. And whatever ascetics and brahmins in the future will experience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is is the utmost; there is none beyond this. And whatever ascetics and brahmins at present experience painful, racking, piercing feelings due to exertion, this is the utmost; there is none beyond this. But by this racking practice of austerities I have not attained any superhuman distinction in knowledge and vision worthy of the noble ones. Could there be another path to enlightenment?’
30. “나는 생각했다. ‘과거의 고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한 어떤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 극한이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 미래의 고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한 어떤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 극한이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또 현재의 고행자들이나 바라문들이 애씀으로 인한 어떤 아프고, 고통스럽고, 꿰뚫는 느낌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 극한이다. 이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스러운 고행의 수행을 통해 나는 고귀한 자들에게 가치 있는 앎과 봄에 있어서 어떤 초인간적인 특징도 얻지 못했다. 깨달음에 또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31. “I considered: ‘I recall that when my father the Sakyan was occupied, while I was sitting in the cool shade of a rose-apple tree, secluded from sensual pleasures, secluded from unwholesome states, I entered and dwelled in the first jhāna, which is accompanied by thought and examination, with rapture and happiness born of seclusion.18 Could this be the path to enlightenment?’ Then, following on that memory, came the realization: ‘This is indeed the path to enlightenment.’
31. “나는 생각했다. ‘나는 아버님이 사꺄족의 [농경제의] 의식을 거행하실 때, 시원한 잠부 나무[갯복숭아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즐거움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들을 떨쳐버린 뒤, 나는 첫 번째 선정[초선(初禪)]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일으킨 생각[심(尋)]과 지속적인 고찰[사(伺)]이 일어났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희(喜)]과 행복[낙(樂)]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주18) 그런데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자 그 기억을 뒤따라 ‘이것은 진정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라는 인식이 일어났다.
NOTE 18. Ps explains that when the Bodhisatta was a child, his father brought him along to attend the ceremonial plowing festival of the Sakyans. The young prince’s attendants left him under a rose-apple tree and went to watch the plowing ceremony. Finding himself all alone, the Bodhisatta spontaneously sat up in the meditation posture and attained the first jhāna through mindfulness of breathing. Though the sun moved, the shade of the tree remained over the Bodhisatta. When the attendants returned and found the boy seated in meditation, they reported this to the king, who came and bowed in veneration to his son.
(주 18) 맛지마 니까야 주석에는 보살이 어린아이였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꺄족의 농경제(農耕祭) 의식에 참석하러 데리고 갔다고 설명한다. 젊은 왕자의 수행원들은 그를 갯복숭아나무 아래 남겨두고 농경제 의식을 보러갔다. 오직 홀로 남겨진 것을 알고는, 보살은 자연스럽게 명상 자세를 취하고 앉아서 호흡의 알아차림을 통해서 초선에 도달했다. 태양은 이동했지만, 나무 그늘은 그대로 보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수행원들이 돌아와서 소년이 명상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 왕에게 보고했는데, 왕은 와서 자신의 아들에게 경의의 표시로 절을 했다.
32. “I thought: ‘Why am I afraid of that happiness that has nothing to do with sensual pleasures and unwholesome states?’ I thought: ‘I am not afraid of that happiness that has nothing to do with sensual pleasures and unwholesome states.’
32.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왜 감각적 즐거움과 불건전한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행복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감각적 즐거움과 불건전한 상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33. “I considered: ‘It is not easy to attain that happiness with a body so excessively emaciated. Suppose I ate some solid food—some boiled rice and porridge.’ And I ate some solid food—some boiled rice and porridge. Now at that time five monks were waiting upon me, thinking: ‘If our ascetic Gotama achieves some higher state, he will inform us.’ But when I ate the boiled rice and porridge, the five monks were disgusted and left me, thinking: ‘The ascetic Gotama now lives luxuriously; he has given up his striving and reverted to luxury.’
33. “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극도로 야윈 몸을 가지고는 그런 행복을 얻기는 쉽지 않다. 가령 내가 덩어리진 음식, 쌀밥과 죽을 좀 먹으면 어떨까?’ 그래서 나는 덩어리진 음식, 쌀밥과 죽을 좀 먹었다. 그때에 다섯 비구들이 나를 시중들고 있었는데, 그들은 ‘고행자 고따마가 높은 경지를 달성하면, 우리에게 알려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쌀밥과 죽을 먹다, 그 다섯 비구들은 나를 혐오하며 떠나가 버렸다. ‘고행자 고따마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정진을 포기하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되돌아갔다.’라고 생각하면서.
34. “Now when I had eaten solid food and regained my strength, then secluded from sensual pleasures, secluded from unwholesome states, I entered and dwelled in the first jhāna, which is accompanied by thought and examination, with rapture and happiness born of seclusion. But such pleasant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19
34. “그렇게 내가 덩어리진 음식을 먹고 내 강건함을 되찾고 나서, 감각적 즐거움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들을 떨쳐버린 뒤, 나는 첫 번째 선정[초선(初禪)]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일으킨 생각[심(尋)]과 지속적인 고찰[사(伺)]이 일어났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희(喜)]과 행복[낙(樂)]이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즐거운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주19)
NOTE 19. This sentence answers the first of the two questions posed by Saccaka in §11. This passage shows a change in the Bodhisatta’s evaluation of pleasure. When pleasure arises from seclusion and detachment, it is no longer something to be feared and banished by the practice of austerities but becomes an adjunct of the higher stages along the path to enlightenment.
(주 19) 이 문장은 §11에서 사짜까가 제기한 두 가지 질문 중 첫 번째 것에 대한 대답이다. 이 단락은 즐거움의 평가에 대한 보살의 변화를 보여준다. 즐거움이 떨쳐버림과 초연함에서 일어날 때, 그것은 더 이상 두려워하고 고행에 의해 추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서 부가물이 되는 것이다.
35. “With the subsiding of thought and examination, I entered and dwelled in the second jhāna, which has internal confidence and unification of mind, is without thought and examination, and has rapture and happiness born of concentration. But such pleasant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35. “일으킨 생각[심(尋)]과 지속적인 고찰[사(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나는 두 번째 선정[제2선(第二禪)]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내면의 확신과 마음의 통일이 있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고, 집중[삼매(三昧)]에서 생긴 희열[희(喜)]과 행복[낙(樂)]이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즐거운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36. “With the fading away as well of rapture, I dwelled equanimous, and mindful and clearly comprehending, I experienced happiness with the body; I entered and dwelled in the third jhāna of which the noble ones declare: ‘He is equanimous, mindful, one who dwells happily.’ But such pleasant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36. “희열[희(喜)]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평온하게 머물렀고, 알아차리고 분명하게 이해하면서[정념정지(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했다. 나는 고귀한 자들이 ‘그는 평온하고, 알아차리며, 행복하게 머문다.’라고 말하는 세 번째 선정[제3선(第三禪)]에 들어가 머물렀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즐거운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37. “With the abandoning of pleasure and pain, and with the previous passing away of joy and displeasure, I entered and dwelled in the fourth jhāna, which is neither painful nor pleasant and includes the purification of mindfulness by equanimity. But such pleasant feeling that arose in me did not invade my mind and remain.
37.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렸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불쾌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네 번째 선정[제4선(第四禪)]에 들어가 머물렀는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한 알아차림의 청정함이 있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 일어난 그런 즐거운 느낌이 내 마음을 점령하고 머무르지는 않았다.
38. “When my mind was thus concentrated, purified, bright, unblemished, rid of imperfection, malleable, wieldy, steady, and attained to imperturbability, I directed it to knowledge of the recollection of past lives. I recollected my manifold past lives, that is, one birth, two births, three births, four births, five births, ten births, twenty births, thirty births, forty births, fifty births, a hundred births, a thousand births, a hundred thousand births, many eons of world-contraction, many eons of world-expansion, many eons of world-contraction and expansion: ‘There I was so named, of such a clan, with such an appearance, such was my nutriment, such my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such my lifespan; and passing away from there, I was reborn elsewhere; and there too I was so named, of such a clan, with such an appearance, such was my nutriment, such my experience of pleasure and pain, such my lifespan; and passing away from there, I was reborn here.’ Thus with their aspects and particulars I recollected my manifold past lives.
38. “내 마음이 이렇게 집중되고, 청정해지고, 밝아지고, 오점이 없고, 불완전한 것이 없고, 유순하고, 쓰기 쉽고, 확고해지고, 동요함이 없게 되었을 때, 전생의 삶들을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향하게 하였다.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했다. 다시 말해서,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우주 수축(收縮)의 여러 겁, 우주 팽창(膨脹)의 여러 겁, 우주수축과 팽창의 여러 겁 전까지. ‘거기에서 나는 이름이 무엇이었고, 종족의 성[(종성)種姓]이 무엇이었으며, 용모는 어떠했으며, 어떤 음식을 취했고, 내가 겪은 즐거움과 괴로움은 어떤 것이었고, 수명의 종말은 어떠했고, 거기서 죽어서는 어디에 태어났으며, 거기서는 다시 이름이 무엇이었고, … 거기서 죽어서는 여기에 다시 태어났다.’ 이와 같이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숙명통(宿命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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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