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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묵상글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믿음의 여정 -은총, 선택, 배움, 훈련->.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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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은총, 선택, 배움, 훈련-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떻게 사느냐?” 묻는다면 ‘믿음으로 산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어제는 참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5월 성모성월의 첫날이었습니다. 수도원을 찾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입니다. 계속되는 부활시기 파스카의 계절이자 신록의 계절, 신록의 기쁨 가득한 5월입니다. 믿음의 색깔은, 파스카 예수님의 색깔은 아마도 이런 신록의 색깔일 것입니다. “믿음으로”라는 성가 480장도 생각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생명 다하리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한 넋을 다하리 믿음으로.”
노년 품위의 우선 순위도 ‘믿은, 건강, 돈’이 되겠습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선택,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파스카의 믿음입니다. 사실 믿음의 여정에도 우리는 기도처럼, 사랑처럼 늘 초보자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오늘 믿음을 강론 주제로 택한 것은 복음의 다음 말마디입니다. 완고한 불신과 무지의 유다인들에 대한 다음 예수님의 말마디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믿음은 주님의 양인가 아닌가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 끊임없이 반복된 초대송 후렴이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8)는 성구였습니다.
새삼 믿음의 은총, 믿음의 선택, 믿음의 배움, 믿음의 훈련임을 또 믿음의 개방임을 깨닫습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입니다. 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보고 배울 스승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물론 기도도, 사랑도, 희망도, 겸손도 도대체 보고 배우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스승들입니다. 제 집무실 게시판에는 2021년 7월 20일 써붙인 말마디가 여전히 붙어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큰 스승은 여기 수도 공동체입니다.”
살아가면서 나이들수록 수도공동체에 대한 감사는 더욱 커집니다. 제 부족함을 보완해 주는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이요 형제들로부터 참 많은 것을 배웁니다. 날마다 끝없이 배웁니다. 겸손도 희망도 사랑도, 섬김도 배우고 특히 믿음을 배웁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학교, 믿음의 학교가 수도공동체입니다.
성서의 사람들, 교회의 성인들은 말그대로 믿음의 대가, 믿음의 달인, 믿음의 전사들입니다. 이들의 희망과 기쁨, 사랑과 지혜, 찬미와 감사, 평화와 자유도 그대로 믿음의 표현들입니다. 제가 늘 경탄하는 바는 저보다 13세 연상의 88세 고령의, 그러나 정신은 영원한 청년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벌써 41차 해외 사목 방문으로 4.28-30일 까지 항가리를 방문하여 6회나 긴 강론을 하셨고, 귀국중 비행기내에서 인터뷰 내용에 감탄했습니다. 어쩌면 노령의 나이에도 이렇게 기억력이 좋고 말씀도 잘하시고 총명하신가 하고 말입니다. 이또한 믿음의 표현이겠습니다. 교황님의 무엇이 그렇게 항가리 국민들을 열광케하는지 물음에 대한 항가리 주재 교황대사의 답변입니다.
“두가지이다. 그의 기쁨, 그의 열정이다. 그들은 기쁨에 넘친 사람을, 늘 미소띤 사람을 본다. 복음의 기쁨이다. 그들은 정확하게 교황님의 이런 면모를 본다. 중부 유럽에 속하는 항가리는 겨울날이 길고 구름낀 회색빛 어둔 날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신자든 아니든 교황님의 빛나는 기쁨과 미소는 이들에게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황님의 성실성이다. 교황님은 말씀의 사람이요 참 성실하게 말씀하신다. 이래서 항가리 사람들은 교황님께 깊이 감동하고 그분을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의 보증 수표같은 교황님입니다. 희망과 사랑처럼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렇게 보고 배울 분이 있다는 것은 참 행복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바로 교황님의 기쁨과 열정, 성실성 모두가 믿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교황님뿐 아니라 오늘 기념하는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의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분은 성 바실리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더불어 동방의 4대 교부가 되는 분입니다.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는 아리우스 이단과 치열히 대결하면서 교회를 수호한 교회의 사람, 믿음의 전사였습니다. 5차례나 유배기간중 숱한 죽을 고비도 넘겼고 그런 와중에도 귀한 집필활동도 계속하셨으며 수도승들의 교과서라 일컫는 사막 수도승의 아버지 “성 안토니오의 생애”도 쓴 분입니다. 그러면서 78세까지 장수하셨으니 새삼 인명은 재천임을, 목숨은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 말씀중, 참으로 주님의 양들중의 양들같은 존재가 안토니오 성인이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우리 또한 이런 착하고 지혜로운 믿음의 양들이 되는 것 또한 은총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우리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믿음의 성인들, 교회의 사람들이 바로 이 복음 말씀의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중 예루살렘 교회에서 안티오키아 교회에 파견되는 혜성같은 존재, 바르나바 역시 믿음의 용사임을 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르나바는 하느님의 은총이 내린 것을 보고 기뻐하며, 모두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실하라고 격려하였다. 사실 바르나바는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되었다.’
정말 호감이 가는 멋지고 아름다운 성령과 믿음의 사람 바르나바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주님께 인도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의 선교임을 깨닫습니다. 결론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몫이 됩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이분들의 열정과 노력,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보고 배워야 합니다. 보고 배우라 선물로 주어진 성인들이요 교회의 어른들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믿음의 스승들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북돋아 주시고, 끊임없이 보고 배울 열정도 선물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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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하는 이의 소리
부활 4주 화요일-2013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오늘 유다인들은 안달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이미 말씀하셨고
당신이 하신 일이 당신의 정체를 증언하는데도
유다인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믿지 않기 때문이고,
믿지 못함은 그들이 주님의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에 비춰볼 때 유다인들이 믿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함은
그들과 예수님 사이에 인격적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격적 신뢰 관계?
예, 목자와 양의 인격적 신뢰 관계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인격적 관계이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인격적 관계이어야만 믿을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인격적 관계가 아닌 이해관계일 경우
정말 순수하게 예수님을 알고픈 게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고 싶은 거고,
잇속으로 예수님을 견주어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빼먹을 것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이렇게 잇속에 따라 알려고 해서는
어떤 사람의 전모를 알 수 없고 진면목은 더욱 알 수 없으며,
예수님은 더더욱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해관계는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고,
그런 바라봄은 전체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의 어떤 것만을 노려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리고 바라는 것이 없을 때 보려고도 하지 않고
마치 필요 없다고 버리듯 아예 존재를 버려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인격적인 관계는 양과 목자의 관계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즉시 알아듣고 주님을 따릅니다.
사랑과 믿음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워싱턴 디시에 인접한 메릴랜드에서 살았는데
한 달에 한 번 뉴욕에 가서 강의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가려면 필라델피아라는 곳을 지나야 하기에
그날도 필라델피아에서 새로운 사람을 태우고 출발하였는데
저 앞에서 한국말 하는 소리가 뒤에 있는 제제까지 들리는 거였습니다.
옆에서 하는 미국말은 들리지 않고
저 멀리에서 하는 한국말이 들리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오랫동안 듣지 못한 한국말,
먹고 싶은 한국 음식과 마찬가지로 듣고 싶었던 한국말이 들리니
옆에서 하는 수없는 말들을 가운데서도 한국말이 들리는 거였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소리를 즉시 알아들을 수 있고
사랑하는 이의 소리가 귀에 꽂히는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목소리를 즉시 알아채고
주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주님을 즉시 알아보는 것은
그러므로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놀랄 일이 아닙니다.
인격적 사랑은 우리의 귀와 눈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보게 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님을 믿게 하고 따르게 합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주님의 알아 뵙고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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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오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유다인들과의 논쟁을 들려줍니다. 이날 벌어진 논쟁의 주제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성전 안의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신 예수님을 “둘러싸고”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직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주시오?”(요한 10,24) 라고 도전적인 태도로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요한 10,25)
그러나 그들은 믿기를 원하지 안했으며, 예수님의 양들이 되기를 원하지 않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
여기에서, 양의 특성을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네 개의 동사를 통해 표현되고 있습니다.
“듣다”라는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곧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듣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인 내면적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그리고 “알다”라는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를 넘어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 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듣고 순명하는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wnslaR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
그렇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 갈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8)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제 지친 발을 씻어주고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이마의 땀을 훔치며 머리에 손을 얹으십니다.
눈에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다독거리십니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당신 손은 오늘도 제 가슴 위에 있습니다.
저는 잃을 수 없는 당신 사랑의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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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담기는 것은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라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담는 그릇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담는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앎의 또 다른 시작입니다.
유다인들은 눈앞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메시아 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 ‘메시아다, 구세주다’라는 생각이 그릇된 ‘메시아 상’을 만들고 결국은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는 것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도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설명이 분명할수록 그들의 고집은 더욱 굳어질 따름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길을 가고, 유다인들은 유다인들의 길을 갈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농사를 짓는데도 ‘농사법’을 끊임없이 개선하지 않으면 더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기 방법을 고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를 통해서 다시 방법을 얻게 될 것입니다. 품종개량도 하고 거름을 주는 시기도 바꿔보고....새 방법을 시행함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됩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먼저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상대의 것을 내 안에 담아주지 않는 한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목숨을 내놓은 순명에서 온 것입니다. 억지로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22,42).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5,8).
내 뜻을 이루려다 보면 무리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리고 거짓 포장과 술수가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속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하나가 된 주님을 본받아 내 뜻을 접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가슴에 모셔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듯이 하십시오! 또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는 듯이 기다리십시오”(성 이냐시오). 사도들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9).
시편을 보면 “제가 앉거나 서거나 당신께서는 아시고 제 생각을 멀리서도 알아채십니다. 제가 길을 가도 누워있어도 당신께서는 헤아리시고 당신께는 저의 모든 길이 익숙합니다”(139,2-3).라고 적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는 분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경외함은 지식의 근원이다.”(잠언1,7)라는 말씀대로 우리가 아는 바가 주님을 섬기는 것에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9,10)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선물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것은 영원히 남아서 결코,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은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아드님 예수님이 하나됨은 삶과 행동의 일치를 통해 증거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구원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지니셨지만 하느님이십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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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은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다
인도의 캘커타에서 빈민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던 데레사 수녀는 거리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제대로 먹지 않아 깡마른 소년은 너무나도 더럽고 초라했기에 소년을 자신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소년에게 깨끗한 옷을 갈아입히고 따뜻한 방에서 재웠지만, 또다시 소년은 도망을 쳤고, 한 수녀가 소년을 몰래 따라가 보았다. 소년이 커다란 나무 밑에 이르렀고 나무 밑에는 한 여인이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듯한 음식 찌꺼기를 질그릇에 담아 끓이고 있었다. 소년은 그 옆에서 기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녀가 다가가 소년에게 “왜 ‘어린이집’을 도망쳤니?” 묻자 소년은 “여기에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죠. 여기가 내 집이에요.” 어머니가 있는 곳이 집이고,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기 때문에 쓰레기통에서 주워온 것일지라도 소년에게는 맛있는 성찬이 아니었을까? (100℃선물 중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엄마!’하고 소리치며 문을 열었을 때 엄마의 대답이 들리길 원했다. 따뜻하게 맞아주는 음성을 듣지 못했을 때 서운함을 지닌 채 풀이 죽어 밖으로 나갔다. 나를 알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듯이 지금도 여전히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가정은 단순히 신의를 지키며 함께 머무는 공간을 넘어 부부간 사랑의 결속과 자녀의 출산과 교육으로 이어지는 가정학교이다. 서로서로 더 좋은 엄마, 아빠, 자녀로 만들고 다듬어 준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웃으며 함께 느끼는 손길은 사랑하는 마음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그런데 각자가 핸드폰만 바라보고 서로의 얼굴을 외면한 채 대화도 문자로 하고 있으니 사랑이 생겨날 리가 없다.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보아주고, 손을 잡아주는 가운데 가슴이 공명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지금은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가정은 모든 사랑의 출발점이다. 가정 안에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가정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고 서로에게 속해 있음을 알게 된다. 한 가족이 아량을 베풀고 서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넘쳐흘러 도움이 필요한 이웃 사람에게까지 자연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결혼에서 당사자는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넉넉할 때나 어려울 때나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서약한다. 때로는 감정에 흔들릴 때가 있지만 사랑은 변덕스러워서는 안 된다. 참된 사랑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으며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랑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가 더 중요하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런 의미에서 상대의 원하는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이 참사랑이다.
한 초등학생이 쓴 “아빠는 왜”가 보도된 적 있다. “냉장고는 먹을 것을 주고, 강아지는 놀아 주는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철없는 아이는 아빠가 없으면 먹을 것을 주는 냉장고는 물론 놀아 주는 강아지도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에게 아빠는 투명 인간이다. 함께 놀아 주고 밥을 먹는 시간을 내주지 못한 탓이라 생각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가족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이들로 가득 찬다면 사회도 그만큼 밝아질 것이다. “집을 지을 때 기초부터 쌓아 올려 지붕을 얹듯이” 가정 안에서 사랑을 쌓아 올려야 한다.
가정은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공동체이며 가정을 지키는 일용할 양식은 사랑이다. 가족에게 내어 주는 사랑을 실천할 방법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지? 아무리 바쁘더라도 밥상머리에 함께 모일 수 있어야 한다. 먹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대화하는 소통이며 나눔이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가족 사랑의 척도이다.
계절의 여왕이라 일컫는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꽃들이 만발하고 하늘이 청명한 계절의 아름다움만큼 이웃과 가정 안에 사랑의 꽃이 활짝 피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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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시고 하고, 세상의 가치를 초월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합니다. ‘저도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올 정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30년 전에 아버지는 54살에 돌아가셨는데 성주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2년 후에 딸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아버지의 기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성 금요일에 아들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는데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성 주간에 그것도 성 금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갔으니 예수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작년에 형제님과 가족들을 만났습니다. 부부는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있었던 죄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는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 금요일에 하느님의 품으로 떠난 형제님도 예수님께서 낙원으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였고, 제자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또한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만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해 준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평화롭고, 서로 아껴 주며,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고난 중에도 절망하지 않았고, 세상의 가치에 연연해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존중의 말이었고, 칭찬의 말이었고, 닮고 싶은 이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삶으로 보여준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늘 새롭게 묵상하고 있는지,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이웃을 위해서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있는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전히 ‘그리스도인’을 사랑과 존경을 가득 담아서 부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3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병자들을 고쳐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병자입니까? 하느님을 믿었으면서도 세상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들이 병자입니다. 육신은 건강해도 우리는 모두 조금씩 영적으로 병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째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는 보면서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하느님과 함께하면 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바로 그런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둘째는 마귀들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고 길에 서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 중에도 마귀의 유혹 때문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귀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돈 마귀 때문에 성당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만의 마귀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가족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교만함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커다란 마귀의 유혹입니다.
세 번째로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소식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쁜소식은 내가 기뻐야 전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세상의 명예로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등대가 되어 험한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향한 나침판이 되어서 지친 이들에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였듯이, 우리들도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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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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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한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대답을 원하는 바리사이에게 한 말씀입니다.
성당 안에 빛이 가득 차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니까? 그것은 믿는 것과 동시에 빛을 통해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당 안에 공기가 가득 차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숨을 쉬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성당 안에 소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니까? 성당 안에서 라디오를 틀어 보십시오. 금방 믿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성당 안에는 성령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수님의 향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 말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숨 쉬고 있고 보고 있고, 예수님을 향해 귀 기울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양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양입니다. 또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양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메시아를 세상의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힘을 가진 세상의 왕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어긋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당연히 메시아로서 의심을 받을 만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보여 달라고 합니다. 당신이 메시아인지 확인시켜 달라고 합니다. 보여주면 믿겠다는 파렴치한 세상 속 거래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내가 숨 쉬는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내가 노래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고 내가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임을 우리는 믿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메시아로, 구세주로, 목자로 고백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절대로 우리를 예수님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또한 우리를 세상의 유혹과 악의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쉿! 지금은 조용!
가끔 이런 신앙적인 고민을 듣습니다.
신부님, 기도하려고 하면 주변이 너무 시끄럽습니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생각나지 않던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들이 꼭 기도 시간만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밀려옵니다.
꼭 ‘내가 먼저 말할 거야.’라며 소리치며 달려드는 아이들처럼 그렇게 제게 밀려듭니다.
어떤 때는 지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주 먼 미래의 일들이 지금 당장 계획서라도 내놓으라는 양 제게 덤벼듭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는 ‘분심’이라고 합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입니다. 또한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유혹입니다. 특히 이런 분심들은 우리가 기도하려 하면 더욱더 격하게 달려듭니다.
기도 때문에 격하게 달려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격한 분심들 속에 살았을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를요.
기도할 때, 격하게 밀려드는 혹은 격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싶을 때 말씀하세요. 밀려드는 그 생각들에게 말하세요.
쉿! 조용! 지금은 기도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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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예전에 어떤 자매님과 이야기 나눴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 자매님은 자기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렸을 때 가난으로 인해 잘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부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공장이 들어가서 돈을 벌어야 했던 이야기, 남편을 만나 아이를 낳고 이제 행복해지나 싶었는데 사고로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이야기, 사는 게 바빠서 아이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해서 매우 미안하다는 이야기….
‘와~~ 정말 힘든 삶을 사셨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힘드셨겠어요.”라면서 공감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제 아픔이 가장 크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람들 모두 나름의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만 아픔이 있고 또 불행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가지고 있는 아픔이고 불행이었어요. 그러다가 성당에 우연히 다니게 되었는데, 그 뒤에 모든 것이 달라 보였어요. 행복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행복은 널려 있더라고요.
예수님 덕분이에요. 예수님 만나면서 행복이 보였거든요. 그리고 제 삶도 예쁘게 볼 수 있었어요. 안쓰럽고 불쌍한 삶이 아닌, 나름 멋진 삶인 것 같아요.”
여러분은 자기 삶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불행만 있고 그래서 안쓰럽고 불쌍한 삶일까요? 시선을 바꾸어 자기 마음을 주님께 둔다면 다른 것이 보이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하며 자기 삶이 멋지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이 참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이 자기 삶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요한 10,24)라고 질문합니다. 메시아는 ‘기름 바른 자’라는 뜻으로, 이 메시아가 나타나면 주위의 적들을 물리치고 시온에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고 선악을 가리어 하느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부풀어 있었지요. 그런데 이 메시아는 누가 분별할까요? 사실 이 일은 랍비들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메시아가 아니라고 선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고 말합니다. 메시아로 믿고 따르려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확증을 잡아서 로마 당국에 고발하려는 심보였던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말씀을 들어도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어야 할 대상이 아닌,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시선을 바꾸지 못하니 바로 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 삶도 불행의 삶으로 만들 뿐입니다.
지금 나의 시선도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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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빠져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로버트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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