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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돌아가라
출 4: 18-31
모세는 바로의 궁에서 40년 동안 성장했다. 모세는 천문과 지리와 법률과 전술을 다 배웠다. 모세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모세가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히브리 사람과 애굽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여 모래속에 묻어버렸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즉시 탄로가 나고 말았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을 믿고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해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가 나고 말았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바로가 알게 되었다. 바로는 괴씸하게 생각했다. 모세를 그냥 두었다가는 큰 일을 저지를 거이라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바로는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다.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으로 도망했다. 거기서 4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도탄에서 구원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결심은 모세 스스로 한 결심이 아니었다. 그 결심은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 애굽을 떠날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사명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미디안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한번도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애쓴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게 한 것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모세야, 모세야, 너는 네 발에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너는 애굽으로 돌아가 내 백성을 이스라엘을 구원하라. 너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광야로 내보내라’고 고해라.
모세는 자신이 없었다. 바로가 자기를 보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애굽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 일을 바로에게 고발한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에게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여 말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바로도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쳐복종시켜야만 했다. 나는 이미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겠다고 나섰다. 그 때 그는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하나님이 이 일을 하려고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자. 그는 드디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그 때 모세가 일어선 걸음을 걸어가게 하느냐 주저앉게 하느냐 하는 것이 모세의 가족들의 협조 여하에 달려 있었다. 만약 그 때 모세의 가족들이 한사코 반대했더라면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을 이루지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모세의 가족들이 어떻게 협력했던가를 살려보고자 한다.
모세는 먼저 장인 이드로를 찾아갔다. “아버님, 그 동안 너무도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저는 이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이 생존해 있는지 가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내 형제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드로는 모세의 말을 듣고 가라고 허락했다.
결혼한지 40년이 되는 사위와 딸과 손자들이 어디로 살려 가든지 장인이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모세와 이드로의 경우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 처음 도착했을 때 모세는 올데 갈데 없는 방랑자였다.
모세는 살인자요 배신자요 지명수배를 당하고 있는 죄수였다, 그런 것 상관하지 않고 이드로는 딸을 주어 사위로 삼고 숨겨주고 키워주었다.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애굽으로 돌아간다고 했을 때 얼마든지 만류할 수 있었음에도 이드로는 모세를 평안히 가라고 했다.
부모된 사람에게 자식 사랑하는 마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결혼을 하면 자식들의 마음은 부모를 떠나는 수는 있어도 부모의 마음은 자식을 떠나는 법이 없다.
이드로의 경우 모세를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고 하지만 모세를 애굽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딸과 사위를 한꺼번에 잃어버릴 우려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드로는 쾌히 승락했다.
이드로는 모세를 이해했다. 이드로는 모세가 그의 가슴에 사무친 뜻을 이루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남자로 태어나서 자기 민족을 도탄에서 구원하기 위한 뜻을 펴보겠다고 한다면 딸을 잃고 손자들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지원하고 후원해 주겠다는 것이 이드로의 심정이었다.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을 행해 길을 떠났다.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숙소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 했다. 그 때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들의 양피(할례)를 베어 모세 앞에 던지며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라’고 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를 살려주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읽을 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음을 발견한다. 첫째로 여호와께서 어떠한 모양으로 모세를 죽이려 했는지 알 수가 없다. 열병이 났는지 복통이 났는지 몸이 굳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둘째로 십보라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죽이려는 이유가 모세의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우리는 이 사건을 놓고 약간의 추측을 아니해 볼 수가 없다. 우선 모세 자신은 할례를 받았을까? 받지 못했을까? 그 어머니 요게벳의 믿음을 보아 모세는 할례를 받았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모세는 자신이 언약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 구원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모세가 아들을 낳았을 때 할례를 행하려고 했을 것이다. 할례를 모르는 아내는 무슨 망칙한 일을 하려고 하느냐고 반대했을 것이다. 모세는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내 아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할례를 받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끊어짐을 당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십보라는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반대했으리라고 본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려고 함에 있어서 자기 자식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은 모세,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식까지도 언약의 자손으로 인치지 않은 모세를 들어 쓸 수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했다.
십보라는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을 반대는 했지만 늘 그 일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지금 남편에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한 대업을 성취하고자 출발하는 마당에 남편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자 이것은 틀림없이 남편이 주장한 할례를 행하지 않은 연고라고 판단했다.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자 남편이 생명의 위협에서 살아난 것을 보아 십보라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육체적으로는 화합했으나 정신적으로는 화합하지 못한 부부가 신앙적으로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여자가 남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결혼을 하면 그 둘 사이에 아름다운 자녀를 낳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사이에 정신적 결합이 없으면 동물과 다름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남편은 아내의 믿음을 보고 아내는 남편의 믿음을 보고 신앙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그 부부는 이상적인 부부라고 할 수가 있다.
자식을 낳은 후 아기에게 유아 세례를 받게 하자고 할 때 반대한 아버지나 어머니는 없었는지? 자식을 주일학교에 보내어 믿음으로 양육하자는데 반대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었는지?
자녀를 믿음으로 키우자는데 뜻을 같이 하는 부부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된 부부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에 복을 주신다. 이러한 가정의 자녀에게 큰 일을 맡긴다. 신앙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 부부가 무엇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어려운 일이 생긴다. 먼저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
모세는 십보라를 믿을 수 있고 십보라는 모세가 하는 일을 밀어주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는 일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모세는 형 아론의 협력을 어떻게 얻었는가를 살펴보자.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라 바로에게도 고할 수가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말할 자신이 없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너에게는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너는 아론을 만나라. 너는 네가 할 말을 아론에게 일러라. 아론이 너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말을 할 것이다.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라고 하셨다.
한편 하나님은 아론에게 나타나 너는 광야로 가서 모세를 만나라고 말씀하셨다. 40년 동안 잊어버렸던 동생을 만나라는 것이다. 단순한 혈육의 정만 생각한다면 앞 뒤 가릴 것 없이 가 만나면 될 것이다.
모세의 경우는 달랐다. 어머니와 누이가 생명을 걸고 키운 동생이었다. 그 동생이 애굽 사람을 죽이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을 때 온 가족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 동생이 불연 듯 나타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고 한다. 만나야 할까? 만나지 말아야 할까?
아론은 하나님의 산 호렙산으로 가서 모세를 만났다. 모세가 지내온 이야기를 들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로 한 결심도 들었다. 그리고 돌아가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을 모았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말씀을 전했다. 그리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했다.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고 하고 뱀을 잡아 지팡이가 되게 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세운 지도자라는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시고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감찰하시고 그들을 애굽의 사슬에서 풀어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확신했다. 백성들은 머리를 숙여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다.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지도자였다. 아론이 모세에 대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모세는 반역자도 될 수 있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도 될 수가 있었다. 아론은 모세의 진심을 백성들과 장로들에게 말하여 인정을 받게 했다. 그래서 모세는 하루아침에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종합해 보자.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1) 장인 이드로의 허락을 받았다. (2) 아내 십보라와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3) 형 아론의 협력을 얻었다. 이 중에 한 사람이라도 모세의 가는 길을 방해했더라면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애굽으로 돌아갔다 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받은 명령을 이행할 수 있게 한 것은 그의 아내와 형제와 그의 가족이었다. 모세는 세상에 날 때부터 부모가 뜻을 세우고 나은 아들이었다. 성장과 교육도 가족들의 치밀한 계획과 모험 속에 이루어졌다. 살인을 했을 때에도 가족이 보호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 온 가족이 일어나 도왔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한 것은 모세 한 사람의 한 것이 아니다. 모세의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와 누이와 형과 장인의 공동 사역이었다.
예수님도 한 때는 가족들로부터 오해를 받았다. 협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족들로부터 전적인 협력과 협조를 얻었을 때 인류 구원의 성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오순절 성령충만을 받을 때 기도하는 다락방에 있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유다는 성경을 기록했다.
한 가족이 믿음으로 하나가 되면 하나님의 일꾼을 키워낼 수가 있다. 가족이 도와주고 이끌어 주면 사람을 죽인 살인자도 새 사람으로 만들 수가 있다. 한 가족이 마음과 뜻을 같이 하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수가 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뜻을 같이 함으로 유다인을 죽음에서 구원했다. 느혜미야와 하나니가 마음을 같이 함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다시 쌓았다.
우리 같은 집안에 무슨 인물이 나랴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집에 아무는 버린 자식이라는 생각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가족보다 미더운 사람은 없다. 부부가 마음을 합하면 못할 일이 없다. 부모가 기도하면 안 될 일이 없다. 자식을 앞세우면 그보다 더 든든한 것은 없다.
다윗을 보라. 바울을 보라. 베드로를 보라. 모세를 보라. 가족의 마음보다 뜨거운 용광로는 없다. 어머니 마음보다 따뜻한 보금자리는 없다. 형과 누이의 충고보다 진실한 충고는 다시없다. 사회에서 버림받고 친구에게 배신당한 아들을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누이가 품어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물을 키워낼 수가 있다.
저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콘코드에 왔다고 생각한다. 저는 저의 가족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려고 한다. 제가 하나님께로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일꾼을 키워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제가 해야할 일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양육하여 전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교회는 제자 훈련을 시작했다. 이렇게 훈련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가르치고 봉사를 하고 전도를 하게 하려고 한다. 혹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무엇을 가르칠가 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나는 여러분들이 능히 전도하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열 두 제자들은 처음 전도하러 보내실 때 제자들은 경험도 없고 부족한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가 전도하는 가운데 제자다운 제자들이 되었다. 아직 우리가 가르칠 사람을 하나님은 보내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준비된 교사가 있을 때 배울 사람들을 보내주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예수님의 모친이요 형제요 누이들이다.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모세와 같은 인물을 키워내자. 우리 모두가 아므람과 요게벳과 아론과 미리암이 되자. (끝)
모세와 예수
출 4: 18-31
본문 4장 18절에 "모세가 장인 이드로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가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 안에는 비장한 이별이 담겨 있습니다. 사십년 동안 보지 못하던 형제 아론과 미리암, 또 자기를 키워준 부모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 애굽에 가서 보아야 되겠으니 나를 보내 달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사십년 동안 모세가 부모 형제들을 얼마나 보고싶어 했을까요? 그러나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사십년 만에 애굽에 가야 되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서 안갈 수 없는 상황에서 가게 됩니다. 애굽에 가려니까 장인 이드로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장인 앞에 "나로 가게 하소서"라는 비장한 말씀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 한마디에는 내가 지금 애굽에 가는 것을 장인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과 그냥 단순히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목숨을 걸고라도 가게 해달라는 간청을 포함합니다.
떠나는 일이 있어야
20절에 "모세가 그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모세가 처자를 거느리고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그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정들었던 미디안 생활의 사십년을 청산하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의 부름 때문입니다.
우리가 헌신한다는 것은 크리스천 삶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헌신한다는 의미를 잘 분석해 보면 하나님을 위해서 떠남이 있어야 됩니다. 내가 좋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헌신이 안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떠남이 있어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미디안을 떠나는 모세의 이 비장한 이별이 없이는 바로왕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모세의 사명은 바로왕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모세의 사명은 바로왕이 있는 애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미디안을 떠나는 사건이 먼저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위해서는 떠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하나님의 본체를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지위, 그분의 능력, 그분의 모든 것을 가진 하나님이셨는데 그 하나님의 본체를 떠나서 이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떠나서 이 땅에 왔다는 것이 메시야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영광을 떠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의 이드로를 떠나지 않고는 바로에게 갈 수 없는 비정한 이별이 요구됩니다. 마귀는 이런 기대를 무너뜨립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라."
모세야, 네가 애굽에 가서 내가 준 이 지팡이로 이적을 행해라.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팍케 되고 네 말을 안들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네가 미디안을 떠나 왔는데 너를 환영해주는 게 아니라 실망시키는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며 바로가 네 말을 안들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이 메시야를 영접치 않고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았고 자기 민족이 예수님을 거부했으며 빌라도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길은 모세가 애굽으로 가는 길과 방불한 것이고 그것이 또 하나의 메시야적 사역으로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대로
모세는 이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미디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가고 있는 모세의 출발은 참 위대합니다. 우리는 애굽으로 가고 있는 모세의 이 모습을 자신들의 자화상으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명하신 사명을 향하여 가고 있는 인생이 되어야 됩니다. 모세가 바로왕 앞으로 가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에게 기대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사명수행의 길입니다. 가다가 모세가 큰 낭패를 당하지만 지금 모세가 애굽으로 가고 있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개념 속에 제일 불쌍한 사람을 묘사할 때 길 잃은 양과 같다고 묘사합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 목자를 잃어버린 양의 모습을 유대적 개념으로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참 위험합니다. 가출한 아이들에게 한달 동안 무사히 지냈다고 '너 가출 성공이다' 그렇게 말해 줍니까? 한달 동안 어떻게 지내도 여전히 불안할 것입니다. 집을 떠나서 방황하고 있는 그 아이들은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할지 위태롭습니다. 길을 잃은 양은 그런 모습입니다. 여전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야 안심을 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도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는 길에서 살아야 되고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그 헌신의 목적을 향해서 가야 합니다. 가다가 넘어져도 그렇게 가야 됩니다.
광주로 가야 될 사람이 부산행 열차를 탔다면 그 사람은 고생 좀 해야 됩니다. 부산에 가서 광주를 가려면 고생을 많이 해야 됩니다. 버스를 타든 택시를 타든 고생을 해가면서 광주까지 가야 됩니다. 방향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주 가야될 사람이 호남선 열차를 탔다면 술이 취해서 화장실에 가서 거꾸러져 자든지 무엇을 하든지 잠시 후에 광주에는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등석을 타도 경부선 열차를 타고 마음놓고 있으면 낭패입니다.
여러분, 졸더라도 교회에 와서 조십시오. 그게 믿음입니다. 행선지가 맞아야 됩니다. 지금 모세는 애굽으로 감으로서 하나님의 의도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 방향에서 바르게 가는 자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의도하는 방향대로 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집착할 것을 집착해야지 하나님이 떠나라고 할 때 떠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온 예수와 미디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바로의 모습과 방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다 행합니다. 홍해를 가릅니다. 반석에서 물을 냅니다. 아말렉 전투에서 지팡이를 잡고 기도함으로서 이깁니다. 모세의 손에 잡힌 이 지팡이는 본래 모세의 것이지만 오늘부터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빈손으로 가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바로 앞에 가야 됩니다. 그런데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이 지팡이는 오늘날 우리의 손발입니다. 여러분이 타는 승용차도 오늘의 지팡이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나 직장에서 사용하는 컴퓨터가 여러분의 지팡입니다. 여러분의 책이 여러분의 지팡이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도구가 하나님 앞에 사용되어야 할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예수 믿고 산다고 당장 무슨 일이 생깁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준 지팡이를 활용을 해야 됩니다. 고급 술집 앞에 얼마나 고급 승용차들이 많습니까? 그런데 그런 승용차들이 예배 드리러 와서 예배당 주차장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면서 타고 오는 승용차가 고급 차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고급 차를 사용하면 더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술집 출입하며 음란과 방탕으로 좋은 차 타는 사람들은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왕 앞에 갈 때는 지팡이를 들고 가야 됩니다. 이 지팡이에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우신 자는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하나님이 용서치 않습니다. 모세가 그런 권위를 가지고 바로 앞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때 아무렇게나 사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해주신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이 가진 그 하늘과 땅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셔서 만민에게 가라. 세례를 주라. 가르쳐 지키게 하라. 제자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영적 권위가 지팡이에 담겨있는 뜻입니다.
두번째는 이 지팡이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활용하라고 하는 사명의 상징입니다. 이 지팡이 가지고 허튼 짓을 하면 안됩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가지고 바로 쓸 때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므리바 물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다가 그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징벌을 당합니다. 우리가 가진 지팡이는 주님의 영광과 사명을 위해서 헌신하고 써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개의 대야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대야를 가지고 제자들의 발을 씻는데 사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대야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대야에 물을 떠놓고 손을 씻으면서 나는 예수를 너희들 앞에 넘겨주는데 대해서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똑같은 대야인데 기능이 정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대야는 섬김의 대야인데 빌라도의 대야는 자기 책임을 전가하는 부끄러운 대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대야냐 빌라도의 대야냐 이 두 가지 길에서 인생을 삽니다. 중간 대야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야로 살 것이냐 빌라도의 대야를 남기고 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입니다. 모세는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될 메시야적 사명을 띤 하나님의 종입니다. 모세는 이제 예수님이 쓰셨던 그 대야 사명과 같이 자기 백성을 섬기러 가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게 모세에게 주어져 있는 피할 수 없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대야를 애용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대야를 가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능력보다 먼저 성결을
그리고 이 사건에 이해하기 어려운 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24절에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서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모세가 어떤 사람인데 하나님이 이 때에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쓸려고 팔십년을 기다렸다가 바로왕 앞에 보내는데 광야 길에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다니 이게 무슨 사건이냐는 것입니다. 왜 죽이려 했느냐 하면 모세가 그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네가 내 계명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아이들에게 할례 행하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잊어버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 아래에 있는 모세를 기어코 할례의 언약 아래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세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기어코 라도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서 네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철저하게 증명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십보라가 아이의 양피를 베어서 할례를 행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살려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볼 때 참 이해가 어려울 만큼 하나님이 고집스럽다 싶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십니다.
출애굽기 20장부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일관되게 요구하시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 요구는 바로 너희는 성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3장 5절에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 하나님이 제일먼저 요구한 게 하나님의 능력을 방해하는 불결함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를 쓰실 때 결정적으로 모세가 하나님 앞에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할례문제였습니다. 이 할례를 행함으로 모세의 가족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영적인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그 언약을 하나님이 스스로 모세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거룩의 종교이며 능력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거룩이 곧 능력입니다. 거리낌이 없어야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할 때에도 거리낌이 없어야 용기가 나고 자신감이 생기는 것처럼 짐이 없어야 능력이 일어납니다. 짐에 눌려 있으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기계 안에는 찌꺼기가 없어야 기계가 잘 돌아갑니다. 우리 삶의 활력으로 찌꺼기가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능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거룩함이 곧 능력이라 하는 개념이 됩니다.
삶으로 회개를
IMF를 당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사업하던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려움을 당해서 사업체도 다 넘어가고 빚만 가득 지고는 변두리의 시골집을 하나 얻었습니다. 타던 승용차도 다 처분하고 아토스 중고차를 하나 샀는데 제가 그 교회 제직 세미나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분의 차에 날 태워서 식사를 하러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그 장로님이 이런 차를 탈 사람이 아닌데 물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분이 어려움 당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강의하러 가서 식사하다가 그 분을 통해서 먼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한 마디는 "목사님, 내가 진 빚을 다 갚기 전에는 큰 차를 안탈 것입니다. 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그 사람들의 짐을 벗겨주기 전에는 큰 차를 안탈 것입니다. 목사님을 이 작은 차로 모셔서 대단히 죄송합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가만히 볼 때 그 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회개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회개는 입으로만 하면 안됩니다. 행동으로 회개해야 됩니다. 삭개오가 행동으로 회개했습니다. 빚진 사람이 엎드려서 입으로만 회개한다고 해서 회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자기 때문에 남이 고통 당하는 그 아픔을 안고 이 짐을 벗겨주기 전에는 큰 차를 못 산다고 하는 그 사람의 이야기가 회개기도와 같은 고백이었습니다. 성결해야 됩니다. 거리낌이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를 써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쓸 수 없는 거리낌이 있는 이 모세에게 성결하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회복의 절기
이것이 어떤 면에서 성탄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성탄절은 회복의 사건입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심으로 모든 것이 회복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 예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골짜기가 메워지며 높은 산이 낮아지며 광야에 꽃이 피며 샘이 흐르며" 메시야가 와서 그렇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마음이 상하지 맙시다. 상한 게 회복되어야 하는 성탄절이어야 하는데 잘못 보내서 상처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성탄절에 일어나는데 이것은 바로 된 것이 아닙니다. 성탄절은 회복을 받는 절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지는 절기입니다.
맺는 말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을 흔히 세속화라는 말로 쓰는데 세속화라는 말은 나쁜 개념이 아닙니다. 세속주의는 나쁘지만 세속화는 나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세속화가 안될 수 없습니다. 세상 것을 먹고 살아야 되는 게 세속화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이 땅의 음식을 먹고 크셨고 자라셨고 일하셨고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사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세속화입니다.
그러나 세속화는 나쁜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이 인카네이션(성화)이라는 것입니다. 소금이 배추잎 속에 들어가서 녹아져야 세속화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녹아져 버려야 됩니다. 예수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와서 사람이 되신 게 예수의 세속화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녹아지는 인카네이션의 모습으로 성탄의 정신을 실행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출 4: 20
지팡이는 길을 걸을 때 짚고 다니는 막대기입니다. 여행할 때는 의지가 됩니다. 때로는 자기를 보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싹을 틔우는 생명의 지팡이였습니다. 로마 집정관의 지팡이는 노예가 지팡이에 손을 대는 것으로 자유인이 되게 하는 권세의 지팡이였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목자의 지팡이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갖고 다니던 지팡이였습니다. 양떼를 이끌고 호렙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으시니 “지팡이니이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됩니다. 모세가 뱀을 피하니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출4:2-4).
그때부터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4:20)
하나님의 지팡이는 믿음의 상징입니다. 지팡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뜻은 “의지하다” “신뢰하다”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길을 내라
진퇴유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궁지에 몰려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여 오도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했지만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병거와 군대가 뒤를 쫓고 있었는데,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으니 진퇴유곡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뒤돌아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너무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우리를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며 종으로 사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출14:13)
가만히 있기란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달려가기 보다 가만히 있기가 천배나 어렵습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믿음이 요구됩니다. 조용히 기다림으로 얻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14:16)
“모세가 바다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 마른 땅이 된지라”(21절)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휘봉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를 만났을 때, 불행을 만났을 때, 파국에 직면했을 때, 지도자를 찾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하나님이 홍해 바다에 길을 내셨습니다(신2:1).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길 없는 인생에게 하나님이 내신 길이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가만히 있으라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와 행동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지팡이를 내밀어 길을 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되리라고 믿고, 그 믿은 대로 길을 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물을 내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고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목이 말라 아우성입니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를 원망하고 대들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셉산에 있는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하나님은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신8: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습니다(시78:15).
우리는 때로 기대하지 않았던데서 복을 받습니다. 냉혹한 사람에게 동정을 받고, 인색한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얻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옵니다.
영혼의 갈증을 풀어줄 물은 세상의 부나 쾌락이나 인간의 철학에서 얻지 못합니다.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는 믿는 자에게 주실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무료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가난한자나 부자나,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구별이 없습니다.
반석에서 나온 물은 풍족했습니다. 물이 강같이 흘렀습니다. 그리스도의 긍휼은 풍족합니다. 모든 사람이 값없이 돈 없이 마실 수 있습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순수했습니다. 독이 없습니다. 그 물은 달았고 시원했습니다. 수정같이 맑았습니다. 그 물을 마시는 자마다 순결한 성도가 되게 했습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은 지속적으로 공급되었습니다. 에덴 동산 가운데서 솟아나는 물처럼 쉬지 않고 솟아나옵니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솟아나는 물이 생명강을 이루고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고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달마다 열매가 맺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반석이십니다. 군병들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듯이 예수님을 찔러야 합니다. 그 분 안에 있는 생명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의 능력을 빨아 들여야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은혜와 진리를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승리하라.
르비딤에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서 서리라”(출17:9)
아말렉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시샘하였습니다. 순수한 영을 악한 영이 공격해옵니다. 아말렉은 책략이 교활합니다. 용의주도하고 증오심이 격렬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침략해오는 아말렉을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싸움에 능한 사람들을 선발하고 아말렉과 싸워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전쟁터로 나갔고 모세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기도하기 위해 산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있는 악을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라고 하셨습니다(마10:36). 자신의 죄 된 경향과 싸우지 않으면 패자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마14:33).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고 제자들에게도 깨어 기도하라 하셨습니다(마26:41).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믿음이 떨어진다는 말은 믿음이 죽는 것, 믿음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다가 회개하고 돌이킨 것은 예수님의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싸움은 장기전입니다. 죄와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홀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0-11)
이스라엘의 승리는 모세의 손에 달렸습니다. 손을 올리느냐, 내리느냐에 달렸습니다. 기도의 손을 들어 올려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붙잡는 손입니다. 사명을 위해 손을 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시기를 원하노라”(딤전2:8)
모세의 손이 피곤할 때 아론과 홀이 손을 부축했습니다. 해가 지도록 그 손이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아론은 형이고 홀은 누나 미리암의 남편입니다(출24:4).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깃발” 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17:6)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와 대대로 싸우시게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일어나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잠3:26)
다윗은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오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71:5)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는 우리가 의지할 하나님이십니다. 지팡이를 잡듯이 하나님을 붙잡으면 길 없는 곳에 길을 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예수는 반석이십니다. 그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 우리 영혼을 만족시킵니다. 영혼의 힘을 북돋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들어올려 기도할 때 하나님아 아말렉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로 길을 내고, 물을 내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내 아들 내 장자
출 4: 21-23, 마 21: 33-41
심리학자들은 정상아들은 태어날 때 두 종류의 두려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다른 공포들은 환경적으로 습득되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것은 반드시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도 두려움의 내용이 됩니다. 현재의 생활에서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데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또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아기들은 청각이 완벽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두려움도 놀라움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모세의 걱정은 유아기적 두려움입니다. 현재의 생활에서 애굽으로 떨어지는 생활에서 겁이 났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유아기 같은 모세의 응석을 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응석에 대하여 확실한 보장을 주십니다. "불쌍한 아가야, 너는 내 아들이다." 공포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의 발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내 아들, 내 장자라고 합니다. 비로소 하나님도 속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세상에 이 이상의 더 큰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은 네가 내 아들이야!"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내 백성"이라고 하더니 알고 보니 아들이었습니다. 그것도 장자, 맏아들이었습니다. 모세가 더 이상 하나님께 어떤 보증을 요구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이상의 보증은 없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이다.
하나님의 부성이 비로소 선포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란 호칭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친숙한 신약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습니다. 혈연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만민 중에서 선택한 유일하고도 특수한 관계를 일컫습니다. 애굽왕 바로는 태양신 라(Ra)의 아들이라 일컫고 신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가 라의 아들이라고 한 것에 비교가 안될 만큼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시편 2:7에는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언의 장입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내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제 이스라엘에 대하여 내 아들, 내 장자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의거한 혈족관계를 의미합니다. 창 15:5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서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주실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자손이 다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시편 89:27에서는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라고 하십니다. 이 이상의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아들일 뿐만 아니라 장자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장자와 다른 아들들과는 천양지차가 있었습니다. 장자권이란 구약적인 개념에서는 절대적인 은총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권리였습니다. 에서와 야곱의 사건에서 보십시오. 에서는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고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팔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 아래 살았습니다. 신명기 21:17에 보면 장자에게는 두 몫을 주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절반을 받았습니다. 장자의 권리가 장자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아끼고, 관심을 가지고, 구속하려고 하셨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는 성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입니다. 요한복음 1:12에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비결입니다. 로마서 8:14에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들만의 권리입니다. 아들 외에 누가 그렇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어로 'en'은 하나라는 의미이며, 'theos'란 하나님이란 단어입니다. 'entheos'란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열광하는 자(enthusiasm)란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를 의미합니다. 부자관계가 하나된 관계입니다. 아무리 아들이 아니다 해도 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가 아니라 해도 하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놓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종살이하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일이 고생스럽기 때문입니까? 그들의 신분이 비천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애굽의 신을 섬기기 때문에 내어놓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죄악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참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짓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참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섬겨야 할 신을 제대로 섬기는 것은 은총입니다. 섬기지 말아야 할 신을 섬기는 내 아들을 놓아 섬겨야 할 신을 섬기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애굽의 신을 섬깁니다. 애굽의 문화에 젖어 삽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십니다. 왜냐하면 애굽의 신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섬기다는 '아바드'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일하다,' '봉사하다' 보다 더 강한 의미로 '노예가 되다', '종살이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살이하면 온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세상의 종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살이하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란 노예의지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종의 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굴복하고 세상에 기가 죽어 삽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다 변화되신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아버지는 예수님을 만나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자기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이 아버지가 왜 안타까워 합니까? 자신의 아들이 귀신들려 자주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자빠지게 만듭니다. 이 아들은 귀신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성경에는 없지만 저는 귀신에게 하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아들을 놓아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라는 명령은 지금도 하나님이 하시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세상에 물질에 붙잡혀 있습니다. 세상 문화에 붙잡혀 있습니다. 세상 유혹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 유행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세상 오락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악마를 친근하게 생각합니다. 악을 선보다 좋아합니다. 최첨단 과학시대, 정보시대인 요즘에 아이들은 점에 빠져 있습니다. 역술인들이 호황을 누립니다. 인터넷의 디지털 역술방에서는 온갖 점을 다 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운세를 보는 것은 기본입니다. 압구정동에 가면 신세대 역술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복에 넥타이를 차려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점을 치는 신세대 점쟁이들입니다. 고객이 끊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의 한 유명한 과학자가 저술한 '물로부터의 전언'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똑같은 물을 두 개의 크리스탈 컵에 넣고 한쪽 컵의 물에는 '천사'란 글씨를, 다른 컵의 물에는 '악마'란 글씨를 써서 붙였습니다. 하룻밤이 지난 후 두 컵의 물을 얼려서 현미경으로 관찰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천사'란 글씨를 붙여놓은 컵의 물 입자는 아름다운 눈꽃 같은 결정으로 바뀐 반면, '악마'라고 써 붙인 물은 매우 무섭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축구는 이겨야 하지만 붉은 악마는 져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이런데서 놓여서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셋째,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네가 내 장자를 놓아주지 않으니 내가 네 장자를 죽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이 말씀은 10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에 대한 첫 경고입니다. 실제로 이 경고는 출애굽기 12:29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오래 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떤 미국인이 실수로 차 사고로 아들을 차에 쳐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라비아인은 미국인에게 보상도 싫고 옥살이시키는 것도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미국인의 내 아들과 똑같이 자신의 차에 치어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아들을 죽이겠다는 것은 너를 죽이겠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벌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늦둥이 아들 이삭을 다시 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세상의 무엇보다 심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신 것은 하나님으로서 최고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보호 의지는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보복은 무섭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외아들을 죽였으니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네 아들을 죽이리라고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탄에게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탄을 결박하고 죽일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사탄을 잡아 1,000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 속에 던져 잠글 것이라고 합니다(계 20:1-3).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셔서 죽게 하시고 모든 아들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날에는 사탄을 무저갱에 결박하여 넣고 사탄의 아들들을 죽일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계신다"고 본 휘겔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먼저 가시고, 먼저 말씀하시고, 주도권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산상보훈의 8복을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화평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는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3:26에서도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내가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남자아이 아버지와 동물원에 갔습니다. 이 아이가 사자 굴 앞을 지나갈 때 사자가 포효하며 어슬렁거리는 사자에 놀라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이 있니?" 새파랗게 질린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사자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철장도 함께 보고 있단다." 여러분, 사자가 보입니까? 하나님은 철장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우는 사자 같이 삼길 자를 찾는 세상의 상징인 애굽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종으로 가지 말고 아들로 가십시오. 아버지가 함께 하십니다.
또 한 주간의 삶도 아버지의 자녀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