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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1812년 서곡
러시아 작곡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관현악 작품. 정작 작곡가는 아무런 애정도 없이 작곡하고 스스로 혹평을 가한 표제음악의 걸작.
차이콥스키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완공 기념식을 위해 이 곡을 작곡한다.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알렉산드르 1세가 1812년 모스크바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만들기 시작한 성당으로 1881년즘에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1881년으로 예정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완공식에서 1812년 승전을 기념하는 장대한 행사를 열 예정이었고. 이 완공식을 기념할 음악을 차이콥스키에게 부탁한다. 차이콥스키는 꽤 빠듯한 일정의 부탁이었지만 의뢰를 받아들이고 1880년 10월 중순~11월 초순에 걸쳐 약 6주 만에 곡을 완성했다.
하지만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은 예상과 달리 1881년에도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게다가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1812년 서곡은 가까스로 러시아 원정 승리 70주년이 되던 1882년에 초연 기회를 잡는데, 연도 상으로는 작품의 창작 의도에 가장 걸맞는 해였지만 예산 문제와 혼란한 사회상 등의 이유로 모스크바 산업예술 박람회의 특별 공연에서 비교적 평범하게 초연되었다. 청중들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한 수준이었고, 차이콥스키 자신도 이 곡을 '소음만 가득한 졸작' 이라고 한없이 깎아내렸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이런저런 공연에서 계속 연주되었고, 1891년에는 차이콥스키가 미국 방문 일정 중 뉴욕의 카네기 홀 개장 축하 공연에서 직접 지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지금도 뭔가 큰 스케일의 공연을 한다고 하면, 이 곡을 맨 마지막 곡으로 채택해 연주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목이 붙은 표제음악이고, 실제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음악을 진행시키기 때문에 서사시 풍으로 진행된다. 기존의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 형식 등 고전 양식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지만, 음악에서 주가 되는 것은 러시아와 프랑스 양군의 전투와 러시아의 승리라는 도식이 되고 있다. 크게 3부로 나뉜다.
제1부
처음에는 Largo로 비올라 두 대와 첼로 네 대가 주가 되어 러시아 정교회의 성가인 '신이여, 백성들을 보호하소서(O Lord, Save Thy People/Спаси, Господи, люди Твоя)'를 인트로로 연주한다. 이는 러시아의 구원을 기원하는 기도이다.
이 서주의 테마가 끝나면 오보에의 독주로 제1주제가 하강선율로 시작되고, 첼로와 더블베이스가 단호하고 무뚝뚝하게 응답한다. 이 주제는 정교회 성가에서 취재한 것으로서, 나폴레옹 대군의 불법 침입을 알게된 러시아 국민의 신에 대한 기도와 분노를 묘사하고 있다. 주저하지 않고 저음으로 뚝 떨어지는 현악기와 바순이 동원령을 선언한다.
제2부
Andante
군대 북의 울림과 더불어 우군이 도착한다. 팀파니의 여린 트레몰로,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끔음(오르간 포인트), 거기에 스네어드럼의 리듬을 타고 오보에와 클라리넷과 호른이 러시아군을 상징하는 군악대풍의 제2주제를 연주한다. 이 주제는 사열을 정돈한 군대의 행진이다. 승리를 바라는 민중의 기도를 나타낸다.
Allegro giusto
이어서 템포는 빨라지고 e♭ 단조로 바뀐다. 제1바이올린의 선율이 흐르고 이후 클라리넷이 선율을 다시 연주한다. 그 이후 작게 종지가 되고 금관악기들의 선율에 나머지 악기들은 16분음표들로 빠르게 순차 상하행 가락이 여러 악기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나온다. 그 후 다시 플룻, 오보에, 제1,2 바이올린이 앞서 나온 선율을 연주하다가 이 주제가 잠잠해질 즈음 제3주제로 프랑스군을 상징하는 주제가 금관악기들에 실려 나오는데, 다름아닌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 다. 다만 거의 호른만 연주한 러시아군 주제와 달리, 이 프랑스군 주제는 모든 금관악기가 전부 가세해서 연주하기 때문에 전쟁 초기의 적군의 우세를 상징한다. 우군은 분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락은 일변하여 F♯ 장조로 바뀌고, 아름다운 민요조의 제4주제가 제1, 제2 바이올린과 비올라로 조용히 노래된다. 이 주제는 노브고로드 지방의 민요(At the Gate, Gate/У ворот, ворот)에서 취재한 것이다.
조는 또 e♭ 단조로 바뀌고, 춤곡풍의 제5주제가 p로 들려온다. 이것은 프랑스군에 대항하는 모스크바 시민을 묘사한 것이라고도 한다.
가락은 다시 C장조로 바뀌고, 마침내 대난전이 펼쳐진다. 눈보라가 몰아 쳐서 마침내 프랑스군을 곤경에 빠뜨린다. 프랑스의 <라 마르세예즈> 가락이 점차 사라지고 러시아 민요 선율이 두드러지며 승리를 예견한다.
제3부
프랑스군이 마지막 힘을 다해보지만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대포가 첫 포성을 터트리면서 프랑스군은 완전히 격퇴되고 빠른 음형의 현악기들이 묘사하는 '부란(러시아의 거센 눈보라)' 에 막혀 잘게 쪼개지면서 <라 마르세예즈> 가락은 완전히 사라진다.
눈보라가 가시고 나면 템포는 다시 Largo가 되고, 첫머리에 소박하게 연주되었던 제1주제인 정교회 성가가 금관악기들의 주도로 장엄하게 재연되고, 승리를 축하하는 성당의 종소리도 같이 울려퍼진다.
이것이 장대하게 부풀어 오르면 템포는 Allegro vivace가 되고, 러시아군 주제가 전합주로 더욱 각 파트에서는 ffff의 제2주제가 나타나고, 당시 러시아 국가였던 '신이여 차르를 보호하소서(Боже, Царя храни)' 의 초반부 선율과 함께 모든 성당의 종이 일제히 울리며 장엄하게 마무리 된다.
악기 편성은 약간 변형된 2관편성인데, 다음과 같다.
피콜로/플루트 2/오보에 2/코랑글레/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코넷 2/트럼펫 2/트롬본 3/튜바/팀파니/베이스드럼/스네어드럼/심벌즈/탬버린/트라이앵글/현 5부(바이올린 I&II-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그리고 후반부에는 위에 쓴 것처럼 대포와 종, 별도의 금관악기 연주자들이 더해진다.
윗 항목의 악기 편성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이 곡은 일반적인 악기들 외에 대포소리와 종소리가 정식으로 포함된 곡으로도 유명하다. 야외 연주를 염두에 둔 것이라 이러한 발상이 가능했는데, 정작 초연 때는 실내에서 얌전히 공연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공연에서는 이 효과를 생략하거나 축소해서 연주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아무리 공포탄을 쓴다고 해도 콘서트홀 안에 대포를 방열하고 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종소리도 교회 등지에서 연주하지 않는 이상 재현하기 어렵기 때문. 그래서 실내 연주 때 대포 소리는 베이스드럼을 단단한 북채로 힘껏 두드리는 것과 해머를 이용하는 것으로, 종소리는 튜블러 벨을 난타하는 것으로 때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녹음 기술의 발달 덕에 콘서트홀은 아니더라도 음반에서 이 효과를 구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 언털 도라티가 1958년에 미국 음반사인 '머큐리' 에서 취입한 녹음이 최초로 기록되고 있다. 우선 미니애폴리스 교향악단의 관현악 연주 만으로 녹음을 마친 뒤, 거기에 남북전쟁 당시 쓰였던 대포의 격발음과 교회 종소리를 별도 녹음한 것과 더빙해 레코드로 완성시켰다.
이렇게 나온 음반은 녹음 기술의 발전을 상징하는 아이콘처럼 여겨졌고, 소위 '오디오파일' 에 속하는 매니아들에게 더없이 좋은 수집품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물론 그 뒤로도 이 녹음보다 훨씬 생생한 대포소리와 종소리를 담은 음반들이 계속 나왔고, 몇몇 음반들에는 '스피커 파손 주의' 라는 경고문까지 적혀있을 정도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에리히 쿤젤이 신시내티 교향악단을 지휘해 텔락에 취입한 음반인데 버지니아 연대가 보유한 18세기 청동대포와 100m높이에 달린 커티스 메모리얼 홀의 종을 디지털로 녹음했다. 커버에는 "경고! 디지털 대포 소리. 스피커 파손 주의!"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실제로 웬만한 LP 플레이어로는 대포소리가 재생되지 못하고 트래킹에 실패해 바늘이 튀기 십상이었다. 어찌 재생했더라고 스피커에서 스파크가 튀며 폭발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의 한 음악잡지에서는 이 음반을 소개하며 다이내믹 레인지를 기록한 표도 수록했는데 거의 흑백에 가까운 극단적인 그래프와 엄청난 저음부 음량을 볼 수 있었다. 이 음반의 인기에 힘입어 이 곡을 재녹음했는데 더 좋은 음질과 더 충격적인 대포소리, 키로프 합창단을 동원해 합창단 노래도 같이 수록했다.
좀 특이한 컨셉의 후속 음반들로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유진 오르먼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안토니오 파파노,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가 지휘한 것들인데, 첫머리의 성가 시작 부분을 기악 연주가 아닌 합창단의 노래로 대체했다(스토코프스키와 파파노, 페도세예프는 이 성가가 재현되는 후반부에서도 합창단이 같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특히 카라얀의 경우 적백내전 때 서방으로 망명한 코사크 기병 출신 남성들로 구성된 돈 코사크 합창단을 기용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오르먼디의 녹음에는 첫부분이 오르간도 같이 편성되어있다.
테너 가수로 유명한 플라시도 도밍고도 차이콥스키 사망 100주년 기념으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해 EMI에 취입한 음반에서 영국 왕실 근위대의 포병대 협조로 별도 녹음한 포성을 더빙했고, 종의 경우 런던의 종 공장에서 주조한 진짜 교회 종을 빌려와 관현악단 뒷편에 설치하고 같이 쳤다. 거기에 후반부 성가 재연 때는 관현악의 금관 스펙 그대로 브라스를 증편한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굵직한 저음을 얻기 위해 콘트라베이스 주자 10명을 추가 기용하고 녹음 장소인 올 세인츠 교회의 파이프오르간까지 동원하는 빠방한 물량 공세로 화제가 되었다.
러시아에서도 199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사망 100주년 기념 콘서트의 마지막 곡으로 연주되었는데, 이 때도 종과 대포가 원래 편성 그대로 연주(?)되었다. 미국의 애틀랜타 교향악단은 실내에서 이 효과를 구현하기 위해 미리 녹음한 대포 소리를 대형 스피커로 보내주면서 무대 앞에 폭죽까지 설치해 펑펑 터뜨리며 연주했는데, 폭죽의 화염 때문에 콘서트홀 내부의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오히려 개그콘서트급 연주가 되고 말았다.
야외 연주에서는 이런 제약이 좀 덜한 편인데 안드리스 넬손스가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발트뷔네 콘서트에서 연주한 영상을 보면 종소리는 튜블러 벨로 내고 있지만 대포소리는 무대 앞에 설치된 폭죽과 공포탄을 발사해 소리를 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 일본에서도 가끔 이 곡의 연주 때 대포와 종소리를 그대로 살려서 공연하는데, 실내 공연은 아니고 육상자위대의 화력전 훈련장 등지에서 대규모 취주악단용으로 편곡한 버전이 공포탄 사격과 함께 연주되는 진풍경을 연출한다고 한다.
한편,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소련에서는 이 곡의 연주가 금지되고 말았다. 이유는 후반부에 '인민의 적' 이었던 차르를 찬양하는 구체제 국가가 인용되었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고 마냥 금지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문제가 된 차르 찬가 대신 다른 선율로 땜빵하는 방법이었다. 비사리온 셰발린이라는 작곡가가 소련 정부의 지시로 이 작업을 떠맡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애국심을 상징하던 미하일 글린카의 오페라 '이반 수사닌(Ivan Susanin/Иван Сусанин)' 에 나오는 합창 '영광(Славься)' 의 멜로디를 가지고 짜깁기 작업을 했다.
좀 웃긴 것은, 해당 오페라도 원제가 '차르에게 바친 목숨(A Life for the Tsar/Жизнь за царя)' 이었을 만큼 반체제적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가사만 수정되어 평범한 애국주의 찬가로 바뀌었기 때문에, 체제 선전용으로 그럭저럭 쉽게 쓸 수 있었다.아무리 대표적인 적성 국가라도 제정 러시아 출신의 유명한 작곡가의 노래를 바꾸는데, 아무래도 고민 좀 했겠지
여담으로, 소련은 이 곡 뿐 아니라 슬라브 행진곡, 대관식 축전 행진곡과 같은 차이콥스키의 여타 차르 찬가 인용 작품들도 글린카의 노래 선율로 땜빵하거나 아예 그 부분을 삭제했고, 수정된 곡들은 소련 정부에서 공인한 '신 차이콥스키 대전집' 의 악보로 묶여 출판되었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이 작업에 대해 정치적인 목적의 삽질이라며 맹렬히 비판했고, 소련 정부의 신전집은 결국 해외에서 거의 통용되지 않은 채 내수용 악보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고 아예 연주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1995년 승리의 날 5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분열 후 군악대 공연에서 1812년 서곡의 소련 버젼이 처음으로 연주된다. 연주된 부분은 1812년 서곡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4분 정도이다. 이후 1996년, 1997년에도 1995년과 동일한 곡으로 승리의 날 기념 열병식 군악대 공연에 1812년 서곡 소련 버전이 연주되었다. 하지만 1997년을 마지막으로, 이듬해부터 군악대 공연이 군악대 분열로 교체되었다. 이렇게 공식 행사에서 1812년 서곡의 소련 버전의 연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1812년 서곡의 소련 버전을 공식 석상에서 퇴출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러시아에서는 신전집 악보를 퇴출시키고 차르 찬가가 그대로 들어간 원래 악보를 사용해 공연하고 있다. 음악적인 문제 뿐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문제로도 부침이 심했던 까닭에, 지금도 음악사회학 등 관련 학문에서 자주 떡밥으로 인용되고 있는 사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