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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샘레터 72]『용담유사龍潭諭詞』와 도올의 「동학 선언문」
서울에 사는, 고향이 임실 오수인 후배 3명이 보름 전쯤에 우리집을 방문했다. 어르신도 계시니 무엇을 살까 물어와 노골적으로 “빈손으로 오면 좋겠으나, 영 찜찜하면 내가 좋아하는 책(『도올주역강해』나 도올 김용옥이 ‘현재의 우리말’로 번역한 『용담유사龍潭諭詞』)중 한 권만 사달라”고 말했다. 그런데 6만원에 달하는 두 권을 다 사왔다. 이렇게 황감할 일이 있나? 고마운 일이다. 엄청 두꺼운 주역강해는 엄두내지 못하고 있으나,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선생이 지은 ‘하느님의 노래’ 용담유사 383쪽을 다 읽었다. 정독, 탐독, 완독한 것인데, 이렇게 재밌고 유익한 책은 처음 봤다고 하면 지인들이 모두 웃을 것이다. ‘니가 안좋아하는 책이 어디 고, 니가 맛없는 것이 어디 있냐?’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진짜로 아주 유별한 책이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을 지은 후, 한자漢字가 아닌 한국어로 용담가, 안심가, 교훈가, 도수사, 권학가, 몽듕노소문답가, 도덕가, 흥비가 등 여덟 개의 노래를 쓴 것이다. 우리 한국어인데도 번역을 하지 않으면 몇 줄도 이해할 수가 없는 글을, 조선의 철학자 도올이 마침내 ‘현재의 우리말’로 구절구절 번역을 한 것이다. 동학(현재의 천도교의 전신)의 양대 성경이랄 수 있지만, 꼭 읽어보시라고 추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권말에 실린 동학혁명국기념일 3주년을 맞아 쓴 도올의 '동학선언문'만큼은 종교나 어떤 사상을 떠나 이번 기회에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간곡하여, 200자 원고지 38장 분량의 글을 눈을 비벼가며 자판을 두들겼다. 그 성의와 충정을 봐서라도 음미까지는 아니어도 대강이라도 읽어봐줬으면 좋겠고, 고맙겠다. 할 말은 구비구비, 서리서리 많고도 많건만, 지레 겁먹을 수도 있겠기에 줄인다. 아래의 글은 작년 5월 11일 도올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직접 만년필로 휘갈긴 명문名文이라고 생각한다. 자못 의미심장하다. 영문으로 저자가 번역한 글도 부기해놓았는데, Our spring will soon come, Spring is just around the corner라는 마지막 구절이 뇌리에 오래 남는다. 혜량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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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선언문
-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3주년을 맞이하여 -
동학은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평화를 향한 민중의 갈망입니다. 정읍의 황토현, 강원도 홍천의 자작고개, 공주의 우금치, 장흥의 석대뜰 등등으로 상징되는 1894년 갑오년 전국의 전장戰場에서 최소한 30만 이상의 흰옷을 입은 조선의 민중들이 쓰러졌습니다. 그들 앞에는 초라한 관군과 합세한 왜놈들의 대거 병력이 기관총을 앞세우고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흰옷을 입은 민중들이 그 앞을 죽창 하나 든 몸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이들을 바라본 토벌대장 이규태는 『진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서로 앞을 다투어 수만 명의 농민군들이 산등성이로 올라왔다. 도대체 저들은 무슨 의리義理와 무슨 담략膽略을 지녔기에 저리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그때 저들의 정황과 자취를 기록하려 하니, 생각만 해도 뼛골이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들은 과연 죽음을 향해 돌진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삶을 쟁취하기 위해서 죽음의 모든 권세를 짓밟고 생명의 땅으로, 다시개벽의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당시 서울에 와있었던 영국의 왕립지리학회Roya Geographical Society 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는 동학혁명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동학군은 너무도 확고하고 이성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보다는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은 외국인인 내가 봐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을 주장했다. 그 모든 것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었다(Korea and Her Neighbors 제13장).”
사랑의 궁극적 의미는 평화이지만, 사랑은 평화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에 국한될 때, 그것은 편협한 집착으로 퇴락하기 마련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한 사랑은 고린도에 있던 작은 크리스찬공동체 내부의 성원들끼리의 화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고,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 자랑치 아니하며, 교만치 아니하며, 거칠지 아니하다 하였지만 사랑은 그러한 감정의 부드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는 데서 출발합니다. 자아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태허太虛의 무한한 포용에 자기를 던지는 순간 사랑은 달성됩니다. 이러한 사랑을 나는 평화라고 부릅니다. 진리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평화를 상실하면 불인不仁하게 됩니다. 평화가 없으면 진·선·미라는 모든 문명의 가치가 잔인하고, 경직되고, 몰인정하게 되고 맙니다.
예수는 바울과는 달리, 종말대망공동체 내부의 사람들끼리의 사랑을 외치지 않았으며, 살아 움직이는 갈릴리 평원의 인간 모두를 향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만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즉각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도는 하느님을 무화시키는 것입니다. 존재자로서의 하느님이라는 실체가 시공의 변화 속으로 사라질 때만이 하느님 사랑은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놈들의 총구 앞으로 나아간 조선의 민중은 무아의 해탈을 성취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 그 실체를 무아의 평화 속에 묻어버렸습니다.
동학은 19세기 중엽, 경주 용담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난 최수운이라는 한 청년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된 사회운동이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한 종교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조선으로부터 내려오는 광활한 조선대륙의 삶의 총체가 응축된 정신문화가 일시에 폭발하여 만들어낸 새로운 혼백의 결정태였습니다. 고구려의 핏줄을 타고 흘러내린 유구한 유불선의 전통이 융합된 토양 위에서, 합리적 정신을 우주의 신비와 결합시킨 신유학의 심성론의 원칙들을 철저히 고수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해탈하는 자유자재로운 정신의 열정이었습니다. 그 열정이 서세동점의 대세를 타고 들어온 서학西學과 맞닥뜨리면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우환 속에서 자각自覺과 자주自主를 외칠 수 밖에 없었던 새로운 각성의 떨림, 그 포효였습니다.
그것은 조선왕조 오백년을 통하여 신흥 지배세력이 민중을 억누르기 위하여 내세운 사대事大와 계층적 엄분嚴分, 그리고 귀족정치화 되어간 왕정의 모든 폐해로부터 그 본질을 전복하려는 민중혁명의 강력한 테제였습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러한 테제를 일깨운 것은 서학, 즉 천주학이었습니다. 천주학은 서양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가장 적절한 명분이었으며, 보편성을 위장한 영혼의 파멸이었습니다. 수운은 이 천주, 즉 하느님과의 대결을 선포했습니다.
천주학은 천주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운은 이러한 평등사상을 통하여 자신의 우수한 유학선배들이 서학에 매료된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학의 경전을 탐독한 수운은 그러한 평등관의 배면에 변함없이 초월적 독재자 천주天主가 엄존한다는 사실을 간파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가장 본질적인 사실은 인간을 억누르는 권위주의적 이념들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념들의 총체, 그 근원, 그 이념 중의 이념이 곧 “야훼” 혹은 “데우쓰”라는 이름으로 만유에 군림하는 천주라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수운은 선포합니다. “인간의 평등은 오로지 인간이 하느님과 평등할 때 달성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수운의 포효에 대해 세계의 크리스찬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기독교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겸손을 가르친다.”
수운은 다시 말합니다. “겸손해야 할 주체는 우리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사람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야훼는 민족신이고, 전쟁신이며, 질투하는 하느님이고, 호오가 확실한 하느님이며, 인간집단을 도륙하는 데 하등의 가채글 느끼지 않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정의를 결하면 그것은 하찮은 우상에 불과합니다. 민족에 대한 호오가 있는 하나님은 특정한 문명권 밖으로 수출되어서는 아니 되는 하느님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하느님을 거부했습니다. 야훼는 하느님의 자격이 없는 우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예루살렘성전을 뒤엎었습니다. 즉 다윗왕의 보디가드 노릇을 하는 야훼를 축출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다윗왕권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예수를 다윗의 후계자로 만들고, 그를 메시아로 조작했습니다. 수운은 이러한 조작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서양의 사람들은 천주의 뜻을 빙자하여 좋은 일을 베푸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천하를 공취共取하려 한다.”
수운은 초월적인 인격체로서의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해후로부터 1년간 자기검증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은 인격성을 초월하는 존재Sein 그 자체이어야 한다. 어찌 하늘 꼭대기에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할꼬?” 인격성이 거부된다는 것은 인간세의 호오好惡에 좌우되지 않는 정의로운 공평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수운은 그러한 하느님의 특성을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표현했습니다. 노자가 말하는 “도법자연道法自然”과 같은 뜻이지요.
니체는 하느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수운은 하느님을 살려내려 했습니다. 모든 시스템의 감금으로부터 하느님을 탈옥시켰습니다. 모든 관념과 언어의 폭력과 제도의 권위와 예식적 허위로부터 하느님을 탈출시켰습니다. 이러한 탈출을 이미 조선사람들은 링컨이 게디스버그연설문을 읽고 있을 바로 그 시점에 성공시켰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하느님을 확보함으로써 새로운 개벽세상을 열었습니다. 조선의 민중은 극렬한 탄압 속에서도 이 수운의 혁명사상을 조선 팔도 전체의 레지스탕스운동으로 구현해 나갔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을 바라보는 시각 중에서 가장 불행한 학계의 왜곡 중의 하나가 북접이니 남접이니 하는 편당의식을 가지고 혁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동학혁명을 흐르는 정신은 단 하나, 수운이 “시천주侍天主”로부터 시작하여 해월의 “향아설위向我設位”에 이르는 인본의 플레타르키아pletharchia 사상입니다. 전라도에서 궐기한 사람들을 정치적·사회적 맥락의 항거로서만 분석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전라도에는 전라도 나름대로의 특별한 역사환경이 있었지만, 동학은 이미 전국민의 신념체계로서 보편화되어 있었고, 그 보편적 조직을 관장한 사람은 제2대 선생님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었습니다.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하느님을 때리는 것이다. 하느님은 매 맞기를 싫어하신단다.”
“베는 누가 짜고 있느냐?” “제 며느리가 짜고 있습니다.” “아니다! 하느님께서 짜고 계시니라.”
“일체의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라. 손님이 오거든 하느님이 오셨다 하라.”
“타인의 시비를 말하지 말라. 이는 천주를 시비함이라.”
“네가 먹는 밥 한 숟가락 그것이 곧 하느님이니라. 온 생명의 근원이니라.”
“제삿상은 청수 한 그릇으로 족하니라. 청수 한 그릇이야말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수없는 해월의 설법은 너무도 쉽게 민중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녹두 전봉준 장군은 해월에 의하여 고부접주로 임명된 사람입니다. 전봉준은 죽기 전 공초에서, 접주를 임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해월 법헌 한 사람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동학이라는 게 무슨 주의主義가 있느나?”라는 질문에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로 본을 삼고, 보국안민하자는 것뿐이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너는 동학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동학은 나의 마음을 지킬 수 있게 하고, 하느님을 공경케 하는 도道이므로, 심히 좋아하나이다.”
전봉준은 동학사상읭 신봉자로서 전주 삼례교조신원운동(1892년 11월)에서 이미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전봉준은 해월의 사상을 신뢰하고 따랐습니다. 거사를 바라보는 방법론의 차이에 근거하여 남접·북접의 대립을 운운하는 것은 어리석은 소치입니다. 남접·북접의 분별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해월의 전체를 통철하는 신중함이 없었더라면 동학의 명맥은 깊게 단절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봉준의 구국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정확한 카이로스에 조선왕조의 뿌리를 근절시키는 대업을 성취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을 선포했습니다. 그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입니다.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임”입니다. 이것은 외래사상을 수용한 결과가 아닙니다. 동학의 정신이 개화한 것입니다.
3·1만세독립운동을 주관한 것도 동학이었습니다. 33인의 대표가 공주 우금치전투의 리더 의암 손병희였고, 33인 중 15명이 동학사람들이었으며, 그중 9명이 동학혁명의 현장에서 이리본군과 피 흘리며 싸웠습니다. 상해임시정부를 이끈 백범 김구 선생도 황해도 팔봉접주였습니다. 건준을 만든 몽양 여운형 선생도 그 뿌리가 동학에 있었습니다. 몽양의 큰할아버지가 동학경전을 간행했습니다. 홍구공원에서 도시락폭탄을 터뜨려 세계를 놀라게 한 매헌 윤봉길도 충청도 동학 리더 배성선裵成善의 훈도를 받았습니다. 배성선은 그의 장인이었습니다.
동학은 젊습니다. 동학을 이끌어간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30대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수운이 대구장대에서 참형을 당한 것도 만 40에 이르기 이전이었고, 녹두장군이 서울에서 교수형을 당했을 때도 그의 나이 만40이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30대 후반에 활동을 했습니다. 그들의 물리적 나이가 어떠하든지간에 수운과 더불어 다시개벽의 노래를 부른 모든 사람들이 젊었습니다. 젊음은 비극에 물들지 않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젊음은 비극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청춘은 비극을 선명하게 인식하면서도 비극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던집니다. 그리고 자기를 잊어버리며 자기를 초월합니다. 청춘이 비극에 도전할 때마다, 비극은 청춘이 지향해야 할 이상을 노출시킵니다. 그 이상이 담지하고 있는 보편적 가치의 항구성을 직관할 때 청춘은 평화에 도달하비다. 평화는 비극의 이해이며 동시에 비극의 결실을 보존합니다. 비극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청춘은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청춘은 비극적 절망 속에서도 무아의 평화를 직관합니다.
고구려의 청춘이 동학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두 세기의 격랑 속에서도 동학은 조화로운 동귀일체同歸一體의 중용을 달성했습니다. 평등의 새로운 인식과 아름다움의 도약과 자제할 줄 아는 자유의 감각을 생성했습니다. 평화는 정적靜寂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靜은 동動의 정靜일 뿐입니다.
조화는 반복의 굴레를 넘어서는 신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젊음은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때 사랑은 개체를 넘어서는 것이며, 제한된 개체의 완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기를 극복하고 평화의 면류관을 쓸 때 문명은 활력을 획득하며, 우리 인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문명은 망아적忘我的인 초월의 열정 속으로 침잠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지만, 그 문명의 모든 사건에는 항상 젊음의 꿈과 비극의 성과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동학의 모험은 청춘의 열정과 꿈으로부터 시작하여 비극적 아름다움을 수확했습니다. 동학은 우리 민족의 격한 열정을 지니면서도 항상 평화를 지향하는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동학을 위해 생명을 바친 조선동포들의 희생을 통해, 인류는 결국 평화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인류는 우리가왜 백의민족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의 인민들에게 호소합니다. 남한과 북한의 화해는 인류평화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전쟁이나 대립을 원하지않습니다. 남과 북의 동포들이 서로를 포용하며 휴전협정을 종료하고 심오한 평화의 관계 속에서 인류의 새로운 이상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너무도 기나긴 냉전의 설상雪霜 속에서 억울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봄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동학은 성誠을 말합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성실함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은 하느님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세계의 전 인민들은 무책임한 일본의 방사능오염수 방류를 막아야 합니다. 동학이 이 시대를 향해 외치는 소리는 이러한 양심적 세계인의 항변을 통해 이어질 것입니다. 봄은 오고 있습니다.
2021년 5월 11일
조선의 철학자 도올 김용옥
김용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