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1
12월16일 [대림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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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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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u-Q0Wt6pQM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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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한적한 어촌에 사는 제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필수품이 성능 좋은 손전등, 랜턴입니다.
해가 떨어지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오기에 필요하기도 하지만, 해루질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충전식 랜턴이 대세입니다.
지난여름 게가 한창 잡히던 계절, 나름 강력한 랜턴을 들고 물이 완전히 빠져나간 밤바다로 나갔습니다. 여기저기 불빛들이 보이다 보면 마음이 급해져 거의 뛰다시피 해안가로 달려갑니다.
최근 장만한 나름 강력한 랜턴으로 여기저기 바닥을 훑고 있었는데, 저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랜턴의 광채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최신 상품이었습니다. 엄청난 밝기의 최첨단 led 랜턴이었는데, 얼마나 불빛이 강하던지 마치 군용 서치라이트 같았습니다. 그가 랜턴으로 바닥을 비추자 물속이 대낮처럼 밝아졌습니다.
그가 끌고 다니던 수확물 통 안은 이미 큼지막한 게들로 가득했습니다. 장비빨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 괜찮은 랜턴이라고 어깨가 으쓱했던 저였는데, 그의 랜턴 앞에 즉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의 랜턴이 발산하는 강렬한 빛 앞에 제 랜턴의 불빛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었습니다.
오랜 압제와 고통의 세월을 감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강력한 카리스마와 포스 탁월한 언변을 지닌 예언자가 등장했으니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존재 자체로 세상 앞에 드러낸 빛은 강렬했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발산하는 빛으로 인해 다들 서둘러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세례자 요한은 빛이 아니었습니다.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큰 빛이 나타남을 알리는 서광에 불과했습니다. 빛의 도구요 증언자 세례자 요한에 이어 마침내 참 빛이 등장하셨는데, 이번 성탄에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방박사들은 탄생하실 구세주의 별빛을 쫓아가기 위해 늘 밤길을 걸었습니다.별빛이 보이지 않는 낮시간에는 동굴이나 바위틈에 머물렀습니다. 어둠이 깔리면 또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우리 역시 구세주의 별빛을 잘 쫓아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집중이 필요합니다. 멈춤과 나섬 사이의 강약조절도 필요합니다. 여러 빛 가운데 어느 것이 참 빛인지를 파악하고 그 별빛에 시선을 고정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뿐만아니라 오늘 우리가 비록 어둠 속에 앉아있다 할지라도, 오늘 비록 내 삶이 멈춰있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뵐 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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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47ySJdbHjy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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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속한 사람과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는 일로 명확히 구분된다>
예수님께서 오늘 당신이 하늘에서 오신 분임을 증언하는 것은 요한뿐만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늘은 특별히 당신이 하시는 일이 당신을 증언한다고 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당연히 하늘의 사람과 땅의 사람은 하는 일이 다릅니다. 완전히 땅에 붙어있는 것들을 생각해볼까요? 식물들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 식물들은 오로지 자신이 살려고만 합니다. 자기가 살려고 땅의 영양분을 빨아 먹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벼를 키우려고 심어도 피와 같은 것들이 날아와 자랍니다. 밭에는 잡초들이 자랍니다. 땅에 속한 것들의 일은 ‘생존’뿐입니다.
동물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리 생활하기는 하지만 그 목적 역시 생존입니다. 물론 관계 안에서 오는 소속감이나 행복은 어느 정도 식물이나 미생물, 모기와 같은 존재와는 차이가 납니다. 동물들은 그래서 약간은 땅에서 하늘로 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높이 하늘로 오를 수 있는 존재는 인간입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하늘에 사시는 창조자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부모입니다. 부모에게 자녀는 모기와 같습니다. 부모를 통해 자기 생존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그런 자녀를 위해 자기 살과 피를 내어주며 자녀들을 살립니다. 부모는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자는 하늘이고 하늘에 속합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하늘에 속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늘에서 오셨다고 말씀하실 때 이렇게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루카 7,22-23)
예수님은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내주셔서 인간을 회복시키시고 살리십니다. 완전한 양식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부모이고 그래서 하늘에 속하십니다. 저도 스물다섯 살까지는 제가 살려고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당에 다녀도 나의 생존을 위해 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교에 들어오면서는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잘 안되었습니다. 내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필요했던 것이 ‘믿음’이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지체 장애인 아빠가 택시 운전대를 잡는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로 온전히 걷지 못하는 아빠가 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는 아내와 같이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장애 때문에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이 부부는 나라에서 나오는 보조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놀이터에서 아이들에게 말할 때, “우리 아빠는 매일 집에서 논다”라고 말하는 것을 아내를 통해 듣게 됩니다. 이에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빠가 양 발을 쓸 수 없어도 다른 집처럼 일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빠도 아이들을 위해 일을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그는 양 발 없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택시 운전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운전면허 시험을 보았습니다. 일곱 번이나 낙제하였지만, 여덟 번째는 성공합니다. 그리고 택시 운전을 하다 보니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는 그 성격대로 아이들도 좋아하고 아내도 좋아하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이분의 마음 안에는 ‘아빠라면 그래야 한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빠임을 잊는다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창조자라는 믿음만이 나를 하늘에 속하게 합니다.
‘해발 1000미터 정상까지 아들 업고 등산하는 아빠’라는 비디오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빠는 “힘들다. 그런데 해야 한다. 아들 대신 뛰는 거니까!”라고 말하며 아들을 업고 매일 1,000미터가 넘는 산을 오릅니다. 게다가 휠체어를 밀며 마라톤을 하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마라톤을 완주하고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웁니다. 자기를 위한 아빠의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빠의 피로 자녀의 자아가 죽고 자녀도 아빠처럼 남을 살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다른 게 없습니다. 땅에 속한 존재였다가 하늘에 속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일, 곧 생명을 회복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일은 내가 창조자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도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믿어야 창조자가 되고 자녀를 살리는 부모가 됩니다. 이 때문에 왜 내가 죽었고 그리스도가 되었음을 믿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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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있었던 사건들 중에 인류의 지성과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건들을 선별하여 그 사실을 알려주고, 저자의 해석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중에 ‘드레퓌스’ 사건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드레퓌스는 현역 육군 대위였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조국을 배반하고 군사기밀을 독일에 팔아넘겼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본인은 무죄를 주장하였지만 군사법정은 드레퓌스에게 유죄를 선고하였고, 악마의 섬이라는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군국주의자, 극단적인 애국주의자, 그에 동조하는 언론, 민족주의자들은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였습니다. 증거는 조작되었고,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이권과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라면 한 사람의 젊은 장교는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나는 것을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드레퓌스에게는 그의 무죄를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의 무죄를 믿는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드레퓌스가 무고하게 감옥에 갇혔다는 것을 알았던 군인이 있었습니다. 그 군인은 상부에 드레퓌스의 무죄를 보고하였지만 국방부는 사건은 은폐하려고 하였습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보고했던 군인은 오히려 직책을 상실하고 아프리카로 전출되었습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명을 지녔던 언론사가 있었습니다. 양심을 따라서 진실을 지키려는 지성인이 있었습니다. 당대의 지성인이었던 ‘에밀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서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거짓과 진실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권위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군국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으로 드레퓌스의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드레퓌스는 무죄를 선고받았고, 군인으로 복권되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대사에도 또 다른 드레퓌스 사건이 있었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부가 있었습니다. 그 정권의 입맛에 맞도록 기사를 쓰는 언론이 있었습니다.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서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던 사법부가 있었습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고문과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조직이 있었습니다. 나와 나의 가정과 상관이 없다면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실과 정의를 밝히려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진실한 보도를 하려는 그래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려는 언론도 있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신념을 가졌던 깨어있는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거리를 가득 메웠던 시민들이 있었고, 그들을 응원했던 넥타이 부대도 있었습니다. 이들의 증언에 동참하는 버스기사와 택시기사들의 경적응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명동성당에서 고인을 기억하는 미사가 있었고, 진실을 증언하는 사제가 있었습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한 들불이 타올랐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직선제 민주주의를 되찾았습니다.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도 밝혀졌습니다. 거짓과 불의에 맞섰던 깨어있는 시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진실을 알리려는 언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양심과 정의를 지키려는 지성인과 종교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우리가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 주님의 뜻을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맞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뜻을 드러낸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낸다면 ‘임마누엘’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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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33-36: 나를 증거하는 이가 따로 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의 증언을 말씀하시는데, 하느님께서 요한의 증언에 함께 하시고, 하느님께 충실한 자로서 그리스도에 관해 증언했다면(1,31-34), 그 증언도 진리를 위한 증언이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18,37) 오신 분이라고 빌라도에게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이 진리이시며, 요한은 예수님을 증언하였으므로 진리에 대한 증언자이다. 요한이 증언하였으나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증언이다. 요한의 증언이 필요한 것은 유다인들이 구원받도록 하는 데 있다. 즉 그의 증언이 사람들을 위해서 가치가 있다. 그가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1,17) 여기서 예수께서는 요한을 등불로 표상한다. 빛은 예수님 자신을 표상하는 말이다(1,7-8 참조). 즉 세례자 요한은 항상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요한의 증언보다 더 중대한 증언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업적들, 곧 계시 사건들이다. 이 일들을 아버지로부터 받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이루신다(17,19 참조). 이 일들이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증언한다(8,28-29; 9,30-33; 10,25.33.37-38; 12,37; 15,24 참조). 이 일들은 예수께서 이미 이루신 일들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지상에서 이루셔야 할 모든 것을 말한다(9,4 참조). 이 모든 일을 증언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 일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완성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모두 바치신 분이시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아버지의 뜻,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시다.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기까지 바치신 사랑이다. 이 사랑으로 세상은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인지 나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우리는 한없는 기쁨을 체험하고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삶으로 하느님을 증언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언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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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3-36)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이 말씀을 ‘사도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믿는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증명한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뜻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전부와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모두 가리킵니다. 사도들 경우를 생각하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시작될 때 큰 도움을 준 일이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본 것은 그 신앙이 발전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습니다. 사도들의 신앙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체험한 뒤에 완성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2.36)
이 말은, “여러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분은 부활하셨다. 우리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메시아시라고 분명히 믿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오순절 설교 전체를 보면, 그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1-8)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이고, 동시에 종착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그는 다른 사람의 증언을 듣고서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믿게 된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례자 요한을 알고 있었고,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증언을 했는지도 알고 있었지만(사도 19,1-4), 그 자신이 예수님의 신앙인이 된 것은 요한의 증언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사도들의 삶과 죽음을 보고서 그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가? 왜 우리는 아직도 요한의 증언을 듣고 있는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옳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확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요한 10,41-42)
이 말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요한의 증언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한 요한의 말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이 말도, 하느님께서 요한을 통해서 미리 ‘확인’해 주셨음을 나중에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라는 말씀은, “그가 이미 나에 대해서 증언했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았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요한의 증언이 없었어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은 진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증언’이라는 말을 넓은 뜻으로 해석해서, 어떤 연구나 공부를 통해서 얻은 인간적인 지식과 이론으로 생각한다면, 이 말씀은,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삶이다.”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과 신앙생활은 ‘학문 연구’가 아니라 ‘삶’입니다.
신앙은 ‘삶 속에서’의 부활 체험으로 시작되고, 깊어지고, 완성됩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만났으면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또는 누군가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했으니까 예수님은 메시아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나의 메시아로 믿는다.”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은, ‘바로 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것부터 믿어야 신앙이 올바른 방향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나를 위해서, 나를 찾아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지금 나에게(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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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1-9 참조). 이 때문에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고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적대감은 커져만 갑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들이 벌인 논쟁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변론(5,19-47 참조)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5장 31절에서 율법에 근거한 합법적 증언 원칙을 말씀하시면서(신명 17,6; 19,15 참조) 유다인들 앞에서 당신의 신원, 곧 당신께서 누구이신지 분명히 증명하고자 하십니다. 요한 복음 5장 31-47절에서 총 네 가지 증거가 제시되는데,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두 가지를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첫 번째 증인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 앞에서 증언한 내용을 떠오르게 하십니다(요한 1,19-27 참조). 세례자 요한은 오실 분에 대하여 증언하도록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1,6)이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증언은 진리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으로 예수님 당신의 ‘일들’을 말씀하십니다. 이 ‘일들’은 이미 행하신 것만 아니라 앞으로 행하셔야 하는 것들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일들’은 아버지에게서 권한을 받으시어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하시는 가운데(1,17. 18 참조) 이루어졌기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이임을 증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가르친 내용은 우리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예수님의 여러 행적은 우리가 그분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는 어떻게, 어디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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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이 진정한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이를 위해 당신을 증언할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을 들지요.
먼저 요한은 빛을 내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이 어둠을 밝히는 역할을 하듯이 요한도 어둠을 밝혀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이끌었지요.
또한, 등불은 뜨거운 열을 발산합니다. 요한도 뜨거운 열정으로 하늘 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아울러 등불은 자신을 태워 어둠을 밝히다가 마침내 꺼지고 맙니다. 요한 역시 그러했지요.
자신을 다 태운 등불처럼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당신의 사명을 더 큰 증언으로 제시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증언은 추상적인 메시지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것을, 그리하여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1요한 1,5)
그런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오셨는데(요한 1,9 참조), 그 빛이 예수님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보다 더 큰 증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언하시려고 생명까지 바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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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헌철 펠릭스 신부님]
제가 서품받을 때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남천성당 제대를 향해 걸어갈 때의 떨림과 성인호칭 기도를 드리며 주님 앞에 엎드려 “제 힘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했던 일, 교구의 모든 신부님들께서 머리에 손은 얹어 안수해 주실 때 그 어떤 말보다도 “감사합니다”라는 말만을 입속에서 되뇌이던 생각이 납니다.
사제로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는 일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며, 그리스도께서 사제를 통해 일하시도록 도구로서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해 봅니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희망의 예언자 세례자 요한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며, 구세주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세례자 요한은 이 세상에 빛을 내는 등불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등불을 보고 하느님 나라를 생각했고, 회개의 삶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제 그 회개의 삶으로의 변화의 시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증언들은 무엇인가? 에 답을 구하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열쇠를 가진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지신 증언의 내용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구원으로 이끄는 등불로서의 증언을 했던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증언으로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 하십니다. 더불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이 그 증언이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간과 함께 동고동락하시며 행하셨던 일들이 무엇입니까? 지난 수요일 복음에서 우리가 들었던 말씀을 되새겨봅시다.
“눈 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예수님께 메시아이심을 물을 때 예수님께서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보고 들은 것,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병자를 낫게 하시는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언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 그 누구도 댓가없이 할 수 없는 일, 그 누구도 자신을 그토록 낮추어 다른 이들에게 내어줄 수 없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다시금 당신의 백성을 당신 품안으로 불러 모으시기 위해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일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메시아 이심을 증언한다고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을 기점으로 전례적 변화를 가집니다. 12월 15일까지의 대림 시기 전반부에서는 임박한 종말론에 대한 언급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회개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으며 오늘부터 성탄 전날 까지는 임박한 구세주의 탄생을 준비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복음의 내용도, 성찬기도문도 이제는 구세주의 탄생이 우리에게 가까이 왔음을 전해줍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구세주의 탄생, 우리가 기다리는 구세주의 탄생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오심”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불러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껴보면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말로서 구세주의 탄생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 자신들 한사람 한사람이 이 세상의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로서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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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이영춘 사도요한 신부님]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께서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증거의 표현입니다.
이에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은 권위가 있구나.”라고 말하며 탄복합니다. 권위는 ‘존재’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떤 존재든지 그 존재가 가지고 있는 권위는 다릅니다.
강아지한테서는 사람과 같은 능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 사람한테서는 하느님과 같은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존재가 다르니까요.존재가 다르니 권위도 다른 것이고 그 권위에서 나오는 증언의 내용과 힘도 다른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증언했지만 예수님은 증언된 진리를 직접 행하십니다.그 일이 바로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가장 힘이 있고 실제적인 것이겠지요.
사제로 살다 보면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만 잘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합니다. 말에 따르는 행동과 실천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연하지요.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저 인간이니까 당연하다는 생각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으니까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굳이 오시려 하는 것은 인간인 우리와 함께하시며 당신의 힘을 우리에게 주어서 우리가 그분의 은총에 힘입어 행동하고 실천하는 증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기다리고 받아들여 그분의 은총 속에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 은총에 힘입어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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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하는 것들>
요한 5,33-36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하는 것들>
믿음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희망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사랑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착함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바름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곧음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맑음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밝음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참됨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살림이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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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증언의 삶>
“길을 찾아 헤매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길을 물었습니다.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길이 어딜 가다니요? 길은 여기 있고 당신이 어디론가 가고 있지 않소?’”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하느님 나라로 가야 합니다. 하늘은 우리가 온 곳이요, 가야 할 곳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알면서도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달콤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가 나 자신에 관하여 증언하고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에 관하여 증언하신다.”(요한 8,18)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증언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하시는 일과 하느님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걷게 하며, 나병환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귀먹은 이들을 듣게 하며, 죽은 이들을 되살리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게 하였습니다.(루카 7,22)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루카9,35).하시며 아버지께서 그를 증언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께 증언 받아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도 행동이 뒤따를 때 입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있으며, 누구에게나 벅찬 감동을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살펴보십시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으십시오.”
“모든 일에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에페 5,15.20) 또한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을 다 벗어 버리고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야고 1,21)
"그리고 마침내 여러분의 빛나는 삶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십시오."(마태 5,16)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듯이 우리도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나서야 하겠습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야고 2,26)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삶을 통해 주님을 증거 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기 빕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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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 이상이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는 보도 내용을 보면서, ‘왜 나는 확진되지 않을까?’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신부로 많은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데도 확진되지 않음은 진짜로 슈퍼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늘 조심했습니다. 마스크를 반드시 썼고, 사람과의 만남도 늘 최소한으로만 했습니다. 하지만 두 달 전 어느 날, 두통이 너무 심했고 몸살 기운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목의 통증도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순간 ‘코로나 확진된 것이 아닐까?’ 싶어서 자가 진단키트로 검사해 보니, 두 줄이 선명합니다. 확진된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의 자가 격리가 시작되었습니다. 미사를 비롯한 모든 성지 업무는 함께 사는 신부에게 부탁했고, 평화방송도 한 주일 연기했습니다. 사무장에게 연락해서 지시사항을 전달한 뒤, 단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결과로는 너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바빠서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푹 쉴 수가 있었고, 그동안 밀렸던 글쓰기, 강의 준비 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몸은 아주 불편했지만, 마음은 너무나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저를 배려해주시다니….
우리 삶 안에 주님의 손길은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이기에, 일상 삶 안에서도 철저하게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을 주님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 마음으로 긍정적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배척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과 같다면서 세례자 요한에 대해 증언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을 때, 사람들은 열광하며 따랐지요. 세례자 요한 안에 구원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증언이 있음을 이야기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일과 말씀들은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셨음을 의심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미움과 단죄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려면 우리 마음부터 바꿔야 합니다. 일상의 작은 상황에서도 주님의 일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만이 희망, 기쁨, 행복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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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중매쟁이가 필요해>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당신은 사람의 증언이 필요치 않다는 주님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세례자 요한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주님을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증언이 필요치 않고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일까요?
진정 주님께는 인간의 증언이 필요치 않고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증언하거나 복음을 선포하지 않아도 될까요?
주님의 말씀은 당신을 위해서라면 요한의 증언이 필요치 않지만 우리를 위해서는 요한의 증언이 필요하고, 우리 이웃을 위해서는 우리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말씀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요한이 그리고 우리가 증언하지 않아도 당신이 하신 일들이 당신이 누구신지 증명하기에 당신을 위해 증언해달라고 아쉬운 소리 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는 주님이 하신 일들만 보고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라보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에게는 요한과 우리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물론 요한처럼 증언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겠지요.
실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 스스로 하느님을 알아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보고 하느님을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그런 영안靈眼 곧 영적인 눈이 없는 사람이 있기에 영적 증언자인 영매靈媒 곧 영적인 중매쟁이가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에게 중매쟁이가 필요하듯 스스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에겐 영적 맞선을 보게 해 줄 영적 중매쟁이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영적 중매쟁이가 필요하고, 우리가 영적 중매쟁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적 중매쟁이는 요한처럼 주님을 가리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를 가리키고 자기를 향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선행이 주님을 가리켜야 하는데 자기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주님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자기만 사랑하게 하거나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커져야 하고 자기는 작아져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면 안 됩니다.
한 마디로 세례자 요한처럼 되어야 하는데
바리사이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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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리의 증언>
- 주님의 반사체(反射體)로 살고 싶다 -
어제 오후 내내 많은 첫 눈이 내려 온누리가 하얗습니다. 이 또한 하늘이 내려 준 은총의 선물입니다. 자주 산책중 부르는 ‘파란마음, 하얀마음’이란 동요중 2절이 생각납니다. 동심(童心;어린이처럼으로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돌아가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아주 오래전 함박눈 내리는 겨울에 써놨던 ‘님의 편지’란 짧은 애송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이심전심, 하늘님 마음과 통하는 느낌에 쓴 시입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님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님의 편지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 보겠네”-2001.1.28.
‘하느님의 시詩’인 예수님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에 ‘시詩처럼 살고 싶다’란 다음 짧은 자작시의 심정은 2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합니다.
“시詩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餘白의 종이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時空안에 시처럼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담백淡白한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담백淡白의 뜻을 찾아보니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하다’로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이 그럴 것입니다. 예수님이 진리의 발광체發光體라면 우리 신자들은 진리의 빛이신 주님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反射體입니다. 이를 깊이 깨달을 때 참된 겸손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 또한 진리의 증언자가 됩니다.
‘진리의 연인戀人’이라 명명되는 성 아우구스티노, ‘진리의 협력자’란 묘비명을 원한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언급도 생각납니다. 진리의 증언자로 일관된 진리의 반사체 삶보다 아름답고 행복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시詩’같은 삶입니다.
생명과 빛, 희망으로 가득한 시편을 매일 평생 성무일도시 노래로 바치는 가톨릭 교회 신자들은 ‘하느님의 시’처럼, 주님의 반사체로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증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예로 들면서 유익하고 적절한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물론, 예수님 삶전체가 진리를 증언합니다. ‘진리의 빛’인 주님을 반사합니다. 진리의 증언은 끝나지 않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바로 우리가 진리이신 ‘주님의 반사체’가 되어 ‘진리의 빛’으로 ‘진리의 협력자’로, ‘진리의 연인’으로 진리를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진리의 증언자로 파견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이며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이 진리의 발광체라면 우리는 주님 진리의 빛을 반사하는 주님의 반사체입니다. 반사체가 무지無知의 죄악罪惡과 병病으로 녹이 슬어있으면 반사체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늘 한결같은 수행으로, 영적 훈련으로 심신을, 영육을 깨끗이 하여 무지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반사체 역할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가 그 구체적 처방을 제시합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길이요, 주님 진리의 빛의 반사체로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대림시기 아주 적절한 가르침입니다.
“너희는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로움이 곧 드러나리라. 행복하여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고, 나에게 기도하는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하리라.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
놀랍게도 이사야의 예언은 거룩한 하느님의 산, 불암산佛巖山 기슭, 주님의 집, 기도의 집, 요셉 수도원 성전 미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지 않습니까! 참으로 한결같은 수행을 통해 주님 진리의 반사체로 시종여일始終如一 살아갈 때 주님의 축복 가득한 아름답고 행복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진리의 빛이신 주님을 모심으로 오늘도 진리의 반사체로, 진리를 증언하며 살게 된 복된 우리들입니다. 온전히 진리의 증언자로 살고 싶습니까? 다음 고백처럼 살면 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진리, 저의 빛,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의 반사체로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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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요한 5,36)
<증언자체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요한5,33-36)은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증언한 세례자 요한을 두고,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라고 하시면서, 그런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 증언이 바로 '진리자체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며,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일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증언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증언은 '말과 행동으로 세상에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드러남)이신 예수님, 곧 하느님이신 예수님 자신이 바로 '더 큰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듣고 있는 '복음'은 '증언자체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들'이며,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알려주시고,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는 '가장 완전한 증언이며 강론'입니다.
미사를 드릴 때 사제는 '강론'을 합니다. 저의 이 복음묵상글도 제가 미사를 드릴 때마다 하는 강론 내용입니다. 사제의 강론은 신자들이 복음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과 접목시켜 전하는 '또 하나의 증언'입니다. 그렇지만 가장 멋지고 훌륭한 강론은 '복음 그 자체', '예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강론을 잘 이해하려면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잠기는 '묵상(默想)'이 필요합니다.
증언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매일매일 다양한 방법과 주제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를 증언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그토록 복음 그 자체에 올인하였고, '또 하나의 그리스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의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바람과 최고의 결심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는 것이었다."(1첼라84)
우리도 그렇게 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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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p4lL60Vdk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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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요한 5, 35)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듯 빛을 내는
등불이
우리들 곁에서
타오릅니다.
진리를 증언하는 삶은
더 큰 진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진리를 찾고
진리는 사람을 향하듯
진리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요한의 증언은
진리이신 예수님을
정확하게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으로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완수하도록 맡기신
구원의 일들을
몸소 실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구원자이심
알려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구원의 진리를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수식어를
많은 설명어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는 함께 하는
영원한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잠깐의
즐거움이 아닌
우리 삶을
통째로 바꾸는
진리이십니다.
참된 등불은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자리를
비추는 등불로
살게 합니다.
진리를 부정할 순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깨어있었기에
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뜨겁게
체험합니다.
진리는 깨어있는
삶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진리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이
진리를 믿고
받아들여야
진리는 우리를
비추는
등불이 됩니다.
삶다운 삶을
잃어버린 세대에
삶의 참된 진리는
삶다운 삶을
우리들에게
선사하십니다.
진리의 빛은
요한 세례자의
삶처럼
깨어있음의 빛이며
기다림의 빛입니다.
진리와 구원은
깨어있음으로
꺼지지 않는
삶의 빛이 됩니다.
오늘도 깨어있는
기쁜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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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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