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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6
#기독론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은, 성육신때에서야 비로소 인성이 생성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계셔오셨던 하늘의 영광의 인성이 성육신때에 땅의 비천한 인성으로 한없이 낮아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70126
#삭개오
만약에 삭개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단순한 호기심만 가지고 있었다면, 예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자신의 재산을 다른 이에게 나눠줄 정도로 크게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크게 기뻐하며 자신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겠다고 한 것을 통해서, 분명히 삭개오는 그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원해 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왜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라고 원했을까? 이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 공허하고 괴로우며 비참함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삶 속에서는 그 어떤 참된 위안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에게 참된 위안을 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삭개오의 삶은 왜 그렇게 비참할 수 밖에 없었을까? 그는 세리장으로서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었을텐데, 왜 그런 괴로운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까?
성경에는 삭개오를 '키가 작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왜 삭개오에 대해 소개할 때 굳이 그의 신체적 특징이 표현되었을까? 이는 아마도 그의 작은 키는 일반적인 수준에서 남들보다 조금 작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체적 결함의 표현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삭개오의 작은 키는 신체적 결함 또는 장애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작은 키가 태생부터의 신체적 결함이었다면, 그는 분명히 자신의 부모로부터도 제대로 양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것이다. 이는 장님거지 바디매오의 부모가 그에 대해 모른체 한 것에서 당시 장애아를 가진 부모의 행태에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은 키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과 천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삭개오는 자신을 멸시하고 천대한 자신의 부모와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 끊임없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키워왔을지도 모른다.
삭개오의 동족에 대한 이러한 증오와 복수심은, 아마도 출세를 위한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속한 유대 사회에서는 출세의 길이 막혔을 것이므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로마의 세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로마의 정권을 등에 없은 세리이므로,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대해서 그 권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권력의 힘, 게다가 그동안 자신을 멸시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권력에 아무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잠시 동안 희열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세리였으나 작은 키라는 신체적 결함이 있었으므로, 다른 세리들보다 더 악착 같이 성과를 이루어야 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동족들을 상대로 더 혹독하게 로마에 바칠 세금을 거둬왔을 것이고, 이러한 실적들을 인정 받아서 '세리장'이라는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삭개오가 그렇게 힘들게 얻은 사회적 지위와 재력은 그에게 참된 위안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난쟁이 주제에..',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세리 자식..' 아마도 그는 끊임없이 이런 시선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참된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 도저히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분이 행하신 기적들과 가르침들을 전해 들으면서, 오직 그분만이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알게 되고, 그분을 만나 보기를 계속해서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예수께서 자신의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게 되고, 오직 먼발치에서라도 그분을 보기 위해 세리장이라는 지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체면을 내려놓고 힘겹게 나무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게 예수께서 오셔서 자신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신다. 삭개오는 드디어 참된 위안을 얻게 되고, 그 기쁨이 너무나 커서 자신의 재산을 나누겠다고 공언한다.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나누겠다고 한 것은, 자신을 멸시했던 동족들에 대한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평생동안 가졌던 동족에 대한 증오를 내려놓고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180126
#가인 #아벨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과연 개인적인 시기와 갈등 때문인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마도 1백여 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가인과 아벨만 낳았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을 비롯하여 수십 또는 수백명의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자녀들의 자녀들을 포함하면 매우 많은 가족 집단이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어느 우스개와 같이, 당시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의 집단도 두 부류로 나뉘어 있지 않았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가인파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아벨파로 나뉘어 있지 않았을까?
인간이 범죄한 이후로, 어느 시대에나 어느 장소에나, 항상 선을 행하는 의인은 적고 악을 행하는 악인은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인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벨파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8:2 또는 9:1 정도로 가정하자.
어찌 됐건 아담과 하와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할 기회가 생기게 되었고,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을 따르는 무리들을 대표해서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좋을지 의논을 하였을 것 같다. 그리고 가인과 아벨은 무리들을 대표해서 그 논의한대로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아마도 가인파는 아벨파보다 그 수가 우월했으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서도 어쩌면 근거없는 우월감과 자신감에 차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숫적으로 매우 열세였던 아벨파는, 자신들이 믿을 것이라고는 부모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 뿐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외적으로는 매우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웬걸,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버리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그 받으신 것이 어떤 형태로 드러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 아벨의 제물을 태워버리신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로 인해 아벨과 그를 따르는 자녀들은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을 것이고, 반면에 가인은 많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께 무시를 당한 것이 매우 수치스러웠을 것이고 가인을 따르는 자녀들은 매우 분노하였을 것이다.
압도적인 우세를 가진 가인파가 열세를 가진 아벨파에게 수치스럽게 진 것이다. 그렇다면 악인을 대표하는 가인과 그 무리들이 취할 행동은 무엇이겠는가. 아벨과 그를 따르는 아벨파를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성경에는 가인이 어느날 아벨을 쳐죽였다고만 나왔지만, 그것은 아마도 가인파가 아벨파를 집단 살해한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로 인해 그나마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기는 소수의 자녀들이 거의 멸절되다시피 하지는 않았을까?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심판을 내리신 것은, 가인 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가인파들 전부에게 내리신 심판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가인은 결국 가인파를 이끌고 떠나게 되는 것 같다. 가인이 하나님께 목숨을 부지할 표를 받은 것은, 악인의 무리가 늘 그렇듯이 가인파 중에서 자신들이 쫓겨나는 원인을 가인에게 돌려서 그를 죽이려는 자들이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한 증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벨의 죽음과 가인의 추방은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었을 것이다. 수백여명의 자신의 직계 후손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부류는 거의 멸절을 당하다시피 하고, 그나마 비록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그래도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한 부류는 추방을 당하게 되었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한가닥 소망을 아담과 하와에게 주셔서 아담이 130세 될 때에 새로운 아들 ‘셋’을 주신다. 셋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을 그렇게 이어가시는 것이다.
#20220126
#룻기 #Ruth 1:1-22
제 1 장
엘리멜렉과 그 가족의 모압 이주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기에서 추정할 수 있는 시대의 정황으로는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점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 그리스도를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음으로 해서 가뭄의 재앙을 받았으리라는 것과 모압이 융성하고 있었다는 것과 이후에 나오는 보아스가 여호수아 시대의 유다 지파의 족장 살몬의 아들이라는 것에 비추어 봤을 때 사사 옷니엘 사후에 모압 왕 에글론의 지배를 받던 시기가 가장 유력해보인다.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가 모압에서 다시 유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과 나오미 자신의 증언으로 미루어볼 때 엘리멜렉 집안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부유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멜렉은 이스라엘 지파들 중 으뜸인 유다 지파에 남들보다 유력한 지위와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가뭄과 흉년이 들자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적국 모압으로 이주해서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 이주는 자기들과 비슷한 재력이 있는 이웃들에게는 그렇게 해도 되겠다는 나쁜 선례를 심어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가진 자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는 모습에 큰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었을 것이다.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이주하자마자 자기의 두 아들에게 각각 모압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했는데 이는 이방 족속과 통혼을 비롯한 그 어떤 교류도 하지 말라는 여호와 그리스도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었다. 엘리멜렉은 재력가였기 때문에 모압에서도 자기와 비슷한 정도의 유력한 집안에서 두 며느리를 맞아 사돈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따라서 엘리멜렉의 두 아들과 결혼한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은 그저 평민 집안의 아가씨가 아니라 귀족 집안의 아가씨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엘리멜렉의 두 아들의 나이를 30세 전후로 본다면 오르바와 룻은 20대 중반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10년을 거주했으므로 두 아들이 죽은 후 오르바와 룻은 대략 30대 중반의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유다 땅에서 동족들과 함께 잠잠히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흉년의 재앙을 감당하려 하지 않고 편안한 삶을 위해 모압으로 이주해서 두 며느리들까지 얻었지만 결국 엘리멜렉을 비롯하여 그의 두 아들마저도 모압 땅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징벌을 당하게 된다. 나오미로서는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되어 아무런 의지할데가 없었기 때문에 차라리 죽느니만도 못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오다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시고 흉년을 그치게 하셔서 양식을 주셨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그리스도께 자기들의 죄악을 통회하며 자복하고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는 왼손잡이 에훗이 모압 왕 에글론을 암살하고 모압과 싸워 이긴 후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시기로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하나님의 동산처럼 보였던 소돔과 고모라로 이주했다가 패가망신 한것처럼 나오미도 언약의 땅을 버리고 이방 족속의 땅으로 이주했다가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고 재산도 잃어버린 초라한 신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오미는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올 기회가 있었으면서도 나오지 않았던 롯과는 달리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긍휼을 베푸셨다는 이야기를 듣자 염치 불구하고 그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을 요량으로 돌아가고자 결심하게 된다.
7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10 나오미에게 이르되 아니니이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나이다 하는지라
11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 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 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비록 나오미의 가족이 여호와 그리스도의 언약에 반하는 행보를 했어도 나오미의 여성으로서의 인품만큼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고결함과 탁월함을 보여준다. 하와의 죄악으로 인해 여자들은 태생적으로 시어미가 며느리를 시기하고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는 고부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는데다가 지금 나오미는 재산도 남편도 아들들도 없는 빈털터리 홀몸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두 며느리들은 시어미인 나오미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오르바와 룻이 비록 모압 족속 여인들이었어도 얼마나 시어미인 나오미의 인품에 감격하며 젖어들었었는지를 증거해주는 것이다. 시어미의 위치에 있는 여자들은 며느리들에게 억지로 섬김을 받으려 해서는 안되고 나오미처럼 자발적인 공경을 받을 수 있는 인품을 갖춰야 한다. 한편 나오미와 함께 하려는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의 여성으로서의 인품 또한 매우 귀한 것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 아무리 시어미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험난한 생활을 같이 하겠다고 결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르바와 룻은 에서의 헷 족속 아내들처럼 시부모의 속을 썩이는 며느리들이 아니라 시모가 빈털터리가 되어도 떠나지 않고 섬기겠다고 할 정도의 덕목을 가진 여인들이었다. 두 며느리 중 오르바가 결국 나오미를 떠났다고 해서 그녀를 악인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고 편하게 제 3자의 전능자의 입장에서 내린 오만한 판단일 뿐이다. 시부모를 모시는 신자 여성이 시부모를 제대로 공경하지 않는다면 오르바와 룻에게서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아무런 소망이 없는 빈털터리 시모 나오미와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모압 며느리 룻의 고백은 지극히 숭고하고 고결해서 감히 가타부타 이러쿵저러쿵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나오미는 자신의 행실로써 모압 며느리에게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그리스도를 보였고 룻은 나오미를 통해서 경험한 여호와 그리스도를 평생토록 생명바쳐 섬겨야 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였다. 룻이 나오미를 따를 수 있기 위해서 여호와 그리스도께서는 우상숭배가 난무하는 모압 땅에서 룻을 어려서부터 고결하게 성별하셨다. 교회를 다니건 안다니건간에 남들보다 탁월하고 고결한 인품을 가진 사람은 그에 합당한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반면에 자기는 신앙이 있다고 해서 남들보다 하찮은 인품을 합리화 하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비록 이전에는 하찮은 인품을 가지고 있었어도 신앙생활 하는 기간만큼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이 수반되어야 한다. 룻의 고백에서 나오미를 지칭하는 어머니를 예수님으로 바꾸기만 하면 바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된다.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욥의 친구 중 한 명은 여호와 그리스도를 믿으면 시작은 미약하여도 나중은 창대하리라고 했지만 나오미의 가족은 창대하게 고향을 떠났다가 미약하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천한 모습으로 돌아온 나오미를 보고서 사람들이 웅성웅성 한 것은 그만큼 나오미의 가족이 고향에서 얼마나 유력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사람들의 관심과 소동은 그야말로 가정이 풍비박산 나버린 나오미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수치스러운 심적 고통을 안겨줬을 것이다. 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징벌하셨다는 나오미의 한탄은 자신의 가정의 불찰에 대한 회한과 여호와 그리스도께 대한 인간적인 원망이 뒤섞여 있는 것 같다.
#20210126
#민수기 #Numbers 31:19-24
19 너희는 이레 동안 진영 밖에 주둔하라 누구든지 살인자나 죽임을 당한 사체를 만진 자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몸을 깨끗하게 하고 너희의 포로도 깨끗하게 할 것이며
20 모든 의복과 가죽으로 만든 모든 것과 염소털로 만든 모든 것과 나무로 만든 모든 것을 다 깨끗하게 할지니라
21 제사장 엘르아살이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율법이니라
22 금, 은, 동, 철과 주석과 납 등의
23 불에 견딜 만한 모든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다만 정결하게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하게 할 것이며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24 너희는 일곱째 날에 옷을 빨아서 깨끗하게 한 후에 진영에 들어올지니라
이스라엘의 군사 1만 2천 명은 비록 여호와의 명을 따라 미디안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어도 시체로 인한 부정함을 저절로 면제받지는 못하였다. 그들도 여느 부정한 백성들처럼 정결예식을 반드시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사로이 부정하게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처럼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7일간 진영 밖에 주둔하면서 자기들과 포로들의 몸을 씻고 의복을 세탁하고 모든 전리품들을 불로 지지거나 물로 깨끗하게 씻는 것으로 정결예식이 인정되었다. 오늘날에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군사라 하더라도 각자가 받은 은사와 능력에 따라 섬기는 부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목사와 장로와 집사 등의 교회 직분자들과, 교회를 오래 다닌 신자들과, 직분을 받지는 않았어도 성경을 아는 지식과 지혜와 삶이 탁월해서 모범을 보이는 성도들은 군사 중에서도 정예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리스도의 정예부대는 복음사역에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가지고 앞장서기 때문에 더 크고 더 많은 무수한 마귀들의 공격을 받게 되어 부지불식간에 불법과 불의와 더러운 죄에 부정하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정예부대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들이 행한 사역에 대한 공로심과 자부심 때문에 자기들이 사역을 치르면서 받은 부정함과 더러움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더러움은 주로 우리의 영혼에 슬며시 들어오기 때문에 큰 일을 치렀다는 안도감에 자기 영혼의 더러움을 돌아보고 씻어내지 아니하고 내버려두고 방치하게 된다. 그렇게 사역을 반복하다보면 당연히 점점 더 영혼의 더러움은 커질수밖에 없게 되고, 인생의 끝자락에 가서는 비록 가시적인 복음의 성과를 많이 이루었어도 자기 영혼은 더이상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발람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군사들이 잡아온 미디안 포로는 오로지 남자와 성관계를 한 적이 없는 처녀들뿐이었으므로 그녀들은 이전에 살던 미디안이라는 음란한 나라에서 음행으로 자기들의 몸을 더럽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신부들로서 편입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 중에는 전쟁이라는 두려움과 친족과 이웃들의 죽음의 고통과 포로로 잡혀와야 하는 치욕과 불안함을 가질 수밖에는 없었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생명을 보존하고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누리는 유익들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통상적으로 적국의 포로들에게 불도장으로 지지는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목욕하듯이 물로 씻고 머리카락을 비롯한 온 몸의 체모를 삭발하는 것으로 더이상 포로가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인침을 받게 된 것이다. 아울러 여호와께서는 포로로 잡힌 미디안 처녀들에게도 자비를 배푸셔서 그녀들이 자기들의 죽은 가족들을 위해서 애도하는 기간도 지정해주셨다. 오늘날에는 당연히 군사적인 물리력을 가지고 개종시키는 일은 없다. 그리스도의 군사 된 우리가 가진 신령한 무기는 오로지 성경과 성령이며, 교회를 전초기지로 삼아 이웃 사랑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이스라엘의 군사가 아니라 마치 미디안 연합군과도 같다.
이스라엘의 군사는 단지 미디안과의 전쟁을 치른 것으로 역할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전리품 중에서 금속제품은 1차로 불에 달군 후에 2차로 정결하게 하는 물을 뿌리는 것과, 비금속제품은 물로만 깨끗하게 씻는 것까지 수행해야 했다. 전쟁을 통해서 미디안 연합군의 모든 재물을 노략했기 때문에 전리품들은 실로 어미어마 했을 것이므로, 이 모든 전리품들을 불과 물로 정결하게 하는 작업은 어찌보면 매우 지루하고 번거로운 일일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불평이나 원망없이 수행하였고 후에 이 전리품의 절반을 1만 2천 명이서 나눠갖게 되는 상급을 받게 된다. 전쟁을 치르면서 적국의 값진 물품들을 전리품으로 챙기지, 하찮고 가치가 낮은 것들을 전리품으로 챙기는 어리석은 자는 없다. 또한 어쩌다 부지불식간에 가치가 낮은 것을 귀한 것인줄 알고 전리품으로 챙겨왔어도 불로 태우고 물로 씻는 과정에서 하찮은 것들은 정체를 드러내고 소멸해버린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불이나 물을 견디는 것들만 값진 전리품으로 남게 된다. 사도는 우리가 이룬 공력들이 장차 성령의 불시험을 받게 되며 그 불을 통과한 것들만 참되고 값진 공력으로 남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성령의 불에 타버려 소멸해 버린다고 하였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성령의 맹렬한 불시험 가운데서 귀하고 값진 공력을 남겨 예수 그리스도께 칭찬을 들었으나,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적인 눈에만 귀하게 보일뿐 정작 하찮은 것들로만 공력으로 쌓음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책망만 받았다. 오늘날 교회들 9할 9푼 9리는 사데/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성령의 불시험에 사그라들 하찮은 것들로만 공력을 쌓고 있다.
#20200126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25장.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다
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20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21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24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25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털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들인지 2년 동안 자녀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 기간은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후처로 맞아들여 자녀를 낳은 기간에 포함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행여나 이삭의 자녀들이 아브라함의 서자들보다 우선하지 않도록 하심과 더불어 이삭 부부에게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도록 하시려고 리브가의 태를 20년 동안 막으신 것 같다. 아울러 이삭 부부는 그 20년의 기간을 통해서 자기 부모 아브라함과 사라가 얼마나 오랜 기간을 별다른 소망 없이 괴로운 가운데 살아왔을지도 맛보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기간을 거쳐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리브기의 태를 여셔서 임신을 허락하신다. 이는 전부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 전에 불변하는 작정을 세우신 것이어도 이를 이루시기 위해서 이삭에게 자녀에 대한 소망을 불일 듯 일으켜 주셔서 간구하게 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를 위해 이미 모든 것을 변하지 않게 영원 전부터 정하셨더라도 우리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섭리하셔서 우리에게 선한 마음을 품게 하시고 간구하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셔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신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길흉화복은 우리로서는 단편적이고 표면적인 부분만 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연관된 이들의 상황과 환경을 합력하게 하셔서 선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하심은 너무나 신묘막측하여 우리의 우둔한 심령으로는 그 넓고 깊음을 가히 측량할 수 없다. 다만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들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실히 순종하는 것이 최선이다.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된 지 20년 만에 임신을 하게 되는데 자기 뱃속에서 평범하지 않은 태동이 계속 되자 하나님께 여쭙는 기도를 드린다. 리브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족속 라반의 집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이삭의 아내가 되어서야 시부 아브라함과 남편 이삭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리브가가 임신하지 못했던 20년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신앙을 다듬으시고 성숙하게 하시는 시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신자가 이 땅에서 남모를 고통과 고난의 긴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허락하신 일반은총의 방식을 이용하는 것과 더불어서 그 기간 동안 좌절하지 않고 잠잠히 자기의 신앙을 찬찬히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시고 리브가의 태중에 두 민족을 대표하는 쌍둥이가 있으며 형이 아우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아무런 사고 능력이 없는 뱃속의 태아가 어떻게 서로 다툴 수 있는 것인지는 인간의 지성으로는 밝힐 수 없는 신비이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의 쌍둥이 태아들이 서로 다투는 태동으로써 그들 각자가 이루는 민족들이 앞으로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를 상징하신다. 더 나아가서 이는 두 민족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예정까지로도 확장되는데, 이는 그 태아들이 무슨 선악을 알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큰 자를 미워하시고 작은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작은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에게 어떤 선한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 전에 그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반면에 큰 자가 하나님의 미움을 받은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버림받은 자들의 멸망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 원리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모순된다 하여 하나님을 조롱하고 비방하지만 믿음이 있는 신자들은 인간의 지성으로 이해되지는 않더라도 믿음으로써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나 불변하고 확정된 것이지 우리의 우둔한 관점에서는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명확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두 쌍둥이의 서로 다른 기로를 결과적으로 알 수 있지만 지금 여기의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일 매순간 불확실한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따라서 내 구원의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자유를 빙자하여 방종한다거나 지금 내 눈에 형제 된 자의 상태가 어떠해 보이건간에 그의 구원 또는 멸망의 여부를 섣불리 판단하는 선을 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신앙의 성숙을 보이는 이에게 함께 기뻐하고 격려하며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지속적으로 안타까움과 사랑의 권면을 하는 것이다.
뱃속의 태아들이 기이한 태동을 보이는 것은 이 외에도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임신시켜 생긴 쌍둥이 태아의 경우와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잉태된 세례 요한 등이 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쌍둥이 태아들도 뱃속에서부터 다투었으며 심지어 출산 때에도 형의 팔이 먼저 나와 나오려는 것을 동생이 끌어당겨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먼저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산파가 먼저 나온 팔에 붉은색 실을 묶어서 형과 아우를 구분하였다. 세례 요한은 엘리사벳의 뱃속에서 6개월 되던 때에 성령으로 잉태된 마리아가 방문하자 기뻐 뛰었다. 엘리사벳은 태아의 기이한 태동을 통해 마리아가 구주를 낳을 것을 알 수 있었고 기쁨으로 예언하였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께서 형보다 동생을 높이시고 앞세우시는 경우가 많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르우벤과 유다 또는 요셉, 아론과 모세, 엘리압과 다윗 등이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근거로 실 생활에서도 형보다 동생을 더 대우하는 것이 마치 성경적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부모들을 통해서도 장자를 더욱 대우하게 하셨고 율법으로도 장자에게 두 배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명령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동생을 형보다 더 앞세우신 이유는 이는 인간들이 본받을 수 없는 하나님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이며 하나님은 스스로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우리로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있는 것이라고 무작정 내 행위의 합리화를 위한 근거로 삼아서는 안되고 그 예시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계명과 규례와 명령들에 부합하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그 예시들이 계명들과 상충한다면 우리는 예시를 본받지 말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삭은 결혼 20년 후인 60세에 리브가를 통해서 쌍둥이 두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이 15세 되던 해, 즉 이삭이 75세 되던 해에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향년 175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