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품을 정리했다. 엄마의 체취가 가득 남은 옷에서부터 손때 가득한 소지품까지…. 주인 잃은 물건들은 온기 없이 슬픔만을 머금고 있었다. 엄마가 평생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창고 방을 열었다. 평소 엄마가 애지중지하던 패션잡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 권이 넘는 패션잡지들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새긴 채 방 한편에 켜켜이 쌓여있었다. 엄마의 흔적을 좇아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잡지를 집어 들었다. 종이를 펼치자 알록달록한 활자와 화려한 색감의 사진들이 튀어나왔다. 순간 엄마의 삶이 눈앞에 그려지듯 펼쳐졌다. 지난날, 엄마에게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취미가 하나 있었다. 바로 패션잡지를 보는 일이었다. 평소 절약 정신이 몸에 배어 반찬거리 하나 허투루 사는 적이 없었던 엄마지만, 읍내로 나 갈 때면 꼭 서점에 들러 패션잡지를 한 권씩 사오곤 했다. 잡지를 고이 받아 들고 들어오는 엄마의 얼굴엔 늘 옅은 미소가 스며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도시 여자들이나 읽는 패션잡지를 시골 아줌마가 본다며 짓궂게 놀려댔었다. 아버지의 말대로 엄마는 패션잡지와는 도통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헤어, 메이크업, 명품, 유명인의 화보, 신상 뷰티 제품 등 잡지 속의 화려하고 트렌디한 분위기와 달리 엄마는 아주 소박하고 수수했다. 일 년에 두어 번 읍내 미용실을 찾아 곱슬곱슬하게 머리를 볶는 게 고작이었고, 색조 화장은커녕 로션도 제대로 바르지 않아 얼굴은 늘 푸석거렸다. 중요한 날 차려입는 옷이라고 해 봤자 무채색 투피스와 블라우스 몇 벌이 전부였다. 명품브랜드 같은 건 애초에 가져본 적도, 가져보려고도 한 적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패션잡지를 보며 어떤 아이템들이 새로 나왔는지, 다음 시즌엔 어떤 패션이나 메이크업이 유행할지 눈여겨보았다. 실제로 세련된 옷을 사 입거나 유행하는 메이크업 기법을 따라 하는 것도 아닌데, 엄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늘 패션잡지를 곁에 두고 지냈다. 아버지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물론이고,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두루 읽어온 나조차도 엄마가 왜 패션잡지를 보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신호가 나온 날에는 비장함이 감도는 표정으로 보물찾기라도 하듯 잡지 속을 샅샅이 살펴보았고, 다 읽을 때쯤이면 못내 아쉬워하며 첫 장부터 다시 펴서 읽었다. 엄마의 패션잡지 사랑은 내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됐다. 취업 후 내가 첫 월급을 받아 엄마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내복을 사 드리는 대신, 패션잡지 정기구독을 신청해 드린 일이다. 이제는 매번 읍내로 나가지 않아도 잡지가 때맞춰 딱딱 집으로 배달돼 온다는 사실에 엄마는 무척 기뻐했다. 매달 집으로 잡지가 도착하는 날에는 내게 전화를 걸어 선물이 도착했다고 들뜬 목소리로 전하곤 했다. 엄마가 패션잡지에 처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부터였다. 언젠가 대학병원에서 가슴을 여는 큰 수술을 받고, 만성심부전증까지 앓으면서 엄마의 몸은 급격히 생기를 잃었다. 투석기에 의지한 몸은 삐쩍 말라갔고, 머리카락은 숭덩숭덩 빠져나갔으며, 낯빛과 피부색은 거무튀튀해졌다. 화려한 옷과 화장으로 예쁘게 치장한 패션잡지 속 모델들을 보면서 과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신이 갖지 못한 생기와 건강미를 발산하는 패션잡지 속 모델들을 보면서 엄마는 동경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지 않았을까. 그 무렵 화장만으로는 결코 가려지지 않을 어둠의 기운이 엄마의 온몸에 강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엄마가 몸 안에 자리 잡은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수시로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에 실려 가는 날이 잦아졌다. 집 근처에 있는 시장도 걸어가지 못할 만큼 건 강이 악화된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엄마가 웬일로 봄나들이를 가자고 제안했다. 꽃구경도 하고 김밥도 싸 먹자는 말에 가족들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동의했다. 봄나들이를 떠나는 당일 새벽, 엄마는 대뜸 미용실에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가면 출발 시간이 너무 늦어질 수 있어서 나들이를 다녀온 후에 가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이 미용실이 문 여는 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 찾아갔다. 엄마는 "어떻게 해드릴까요?"라고 묻는 미용실 아주머니를 향해 호주머니 안쪽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내 건네주었다. 무엇인지 궁금해서 살펴보니 스크랩한 잡지 두 장이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 "머리는 이 모델 스타일처럼 해주시고요, 화장은 그 옆 사진이랑 비슷하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엄마는 그 상황이 못내 멋쩍은지 내 쪽을 바라보며 슬며시 웃었다. 패션잡지 속 모델의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이 엄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안 어울리는 머리 스타일이야. 화장도 너무 화려하고, 꼭 이렇게 하고 싶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실망한 엄마의 표정을 본 순간, 빈약 해진 머리숱을 풍성하게 보이게 하고 거뭇해진 피부를 색조 화장으로 가리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후회가 됐다. 나는 재빠르게 "엄마가 평소에 안 하던 스타일이라 순간적으로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깐 잘 어울릴 것 같아. 엄마 가 안 해서 그렇지, 원래는 이런 화려한 스타일이 잘 맞잖아. 센스있게 잡지에서 어떻게 이런 걸 찾아냈어?"라며 말을 바꿨다. 엄마는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미용사를 향해 최대한 잡지 속 모델과 비슷하게 머리와 화장을 해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2시간 여에 걸쳐 단장을 마친 엄마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엄마의 머리는 투병하기 전처럼 윤기가 흐르고 풍성했으며, 두 볼은 선홍빛을 띈 오미자처럼 곱고 투명했다. 엄마는 미용사에게 보여주었던 잡지 두 장을 보물 다루듯 조심스럽게 다시 호주머니 안쪽에 챙겨 넣었다.
그날 다 같이 나들이를 간 우리 가족은 꽃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머리와 화장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가족이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이 되고 말았다. 엄마는 그토록 아꼈던 패션잡지 속 모델들처럼 화려하게 피어나진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사진 속에 남았다. 오랜 세월 창고 방을 지키던 잡지들을 전부 정리하고 나니 엄마의 부재가 더 사무치게 다가왔다. 엄마의 흔적을 계속 곁에 두고 싶어 엄마가 생전에 보물처럼 아끼던 패션잡지 몇 권을 집으로 가져와 책꽂이에 꽂아두었다. 엄마가 미용실에서 꺼내 보여주었던 잡지 두 장도 잘 갈무리해 두었다. 패션잡지에 시선이 갈 때마다 잡지를 읽으며 행복해하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잡지 어느 페이지쯤엔가 엄마가 살고 싶어 했던 삶의 모습이 담겨 있을 것 같아 때때로 시선이 한참 머물렀다. 지금도 나는 엄마가 그리울 때면 습관처럼 패션잡지를 펼친다. 오늘도 한참을 책상에 앉아 엄마가 읽던 패션잡지를 구경했다. 화려한 색감으로 무장한 모델들에, 풍성한 머리와 화사한 색조 화장을 하고 나들이를 떠난 엄마의 해사한 모습이 겹쳐 그리움을 더한다.
김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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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엄마가 쓰시던 물건과 옷, 갖가지
정리하며 태울 때..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모든 걸 다 아끼시고
떠나는 부모님 인생무상.
인생을 마칠 무렵에는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반갑습니다
정읍 ↑ 신사 님 !
귀중한 경험담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휴식이 필요한 주말
즐겁고 여유롭게
보내세요
~^^
좋은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동트는아침 님 !
다녀가신 고운 흔적
감사합니다 ~
푸르럼이 점점 더해가는
신록의 계절,,
평안한 주말보내시고
늘 건승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