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꽃이 피었다 / 허영숙
살구꽃이 폈다
그 간극에 나도 짧게 피어
묵향 가득한 산방에서 나를 쓴다
그동안 꽃이 졌다
벼루를 재촉하는 동안
다 졌다
잠깐이다
그래 꽃은 잠깐이다
뿔 / 허영숙
서늘하고 단단한 골질은 좀처럼 순해질 줄 모른다
밤을 뒤척이는 동안
용서와 모락이 서로 교행한다
뒤끝은 왜,
어둠에 무뎠다가 빛에 새로워지나
돌출은 서로 버티는 세계의 무기
너를 찌르거나
스스로 나를 찌르거나
몸의 더운 기운이 좋은 기별로 왔다면
동백처럼 한 모가지 단숨에 꺾어줄 줄도 알았겠지
늦더라도
목련처럼 천천히 덜어낼 줄도 알았겠지
상처를 수락하기 어려워 세운 뿔
내 핏자국만 비린내 나는 후회를 새로 얽고 있지만,
그을음도 남기지 않고
터진 실밥처럼 줄줄이 풀려 사라지는 노을을
천천히 오래 바라보다 보면
멀리 나가 있던 젖은 마음이 마침 돌아와 뿔을 적신다
피를 팔아서라도 지키고 싶던
단단한 뿔은 투명해지다 사라진다
아직도 진물이 흐르는
달만 한 옹이를 하늘에 울컥 낳아놓고
커피를 내리며 / 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
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 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
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 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를 품어
하늘의 높이를 재려는 얄팍한 깊이로
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아주 사소함까지도
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은 온도 차이로 성에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
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
눈물 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
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배경들이 있다면
걸러내서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 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