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선정(善政)의 길과 진정한 행복을 찾다
몇 번을 봐도 마음을 울리는 영화가 있다.
내게는 ‘천공의 성 라퓨타’가 그랬다.
언뜻보면 유치할 수 있는 애니매이션 영화임에도 지브리의 작품들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12년 된 팬으로서 감히 예상컨대 그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만의 오랜 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고 또 위로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자연친화적 삶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에서 자연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다.
미야자키의 영화에서 땅과 자연은 주인공이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켜내야 하는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영화 속 군대는 자연생태학적인 낙원을 위협한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방해하며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지브리 영화의 스토리들은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그중에서도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며 동양 문화권이 바라보는 자연관과 함께
선한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스토리 라인-
광산촌 슬랙 계곡에서 기계 견습공으로 밝게 살고 있던 고아 소년 파즈는 어느날 빛이 나는 목걸이를 한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한 소녀(시타)를 구해준다. 소녀는 집안 대대로 전해져 오던 목걸이(비행석)로 인해 정부의 군대(무스카 일행)와 해적(도라 일당)들에게 쫓기고 있던 신세. 시타가 이들로부터 무사히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던 중 파즈는 비행석과 하늘에 떠 있는 성 "라퓨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라퓨타의 존재를 믿고 있던 파즈는 시타와 함께 라퓨타를 찾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파즈와 시타는 그들을 쫓던 군대에게 잡히고,
시타는 정부 비밀 조사관인 무스카에게 파즈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협력을 약속한다. 군대에서 풀려난 파즈는 시타를 구하기 위해 도라 일당(해적)에 들어가고, 그들과 함께 시타를 구해온다. 그러나 시타로 인해 봉인이 풀려 라퓨타의 위치를 가리키게 된 목걸이(비행석)를 무스카에게 빼앗기고 만다.
군대와 무스카는 거대한 비행선 골리앗을 타고 라퓨타를 찾아 나서고, 그 뒤를 쫓아 파즈와 시타도 도라 일당과 함께 라퓨타를 찾아 나선다. 갑자기 닥친 악천후와 골리앗의 공격으로 도라 일당과 헤어진 파즈와 시타는 우연히 라퓨타에 도착, 라퓨타의 아름다운 정원에 감탄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도라 일당을 생포한 군대와 무스카 일행도 라퓨타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라퓨타에 도착한 군대는 온갖 파괴행위와 보물을 모으는 데만 급급해 하고, 그 틈을 이용해 무스카는 시타를 잡아 라퓨타 내부로 사라진다. 파즈는 잡혀 있던 도라 일당을 구해주고, 시타를 구하기 위해 무스카를 뒤쫓는다. 시타와 함께 라퓨타 내부의 거대한 비행석이 있는 중추에 다다른 무스카는 시타에게 자신 또한 라퓨타 왕가의 일족이였음을 밝힌다. 그 옛날 지상으로 내려 온 라퓨타 왕가는 시타와 무스카의 일족, 이렇게 두 갈래로 나눠졌던 것. 무스카는 과거 라퓨타의 힘을 부활시킴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한다. 무스카의 수중에 넘어간 라퓨타로 인해 끔찍한 살상이 자행되자 시타는 파즈와 함께 할머니로부터 배운 파멸의 주문을 외운다.
파멸의 주문으로 라퓨타의 일부가 붕괴되고, 비행석의 변화로 라퓨타는 끝없이 떠오르고, 나무 뿌리 덕에 목숨을 건진 파즈와 시타는
라퓨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다. 도라 일당과의 극적인 만남 뒤, 그들은 땅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약속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선정(善政)의 길-
<천공의 성 라퓨타>의 결말 부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라퓨타가 멸망한 이유를 알 것 같아요.
곤도아 계곡의 노래에도 나와 있어요.
땅에 뿌리내려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앗과 함께 겨울을 넘고
새들과 봄을 노래하자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고
불쌍한 로봇을 무수히 지배해도
땅을 버리고 살 수는 없어요
라퓨타 왕실의 마지막 공주 '시타'가 또 다른 왕실의 일족 '무스카'에게 외친 이 대사에서
나는 정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치(政治)를 사전에 검색해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라고 나와있다.
과연 우리는 이 정치를 올바르게 하고 있는 것일까.
정치학개론 수업에서 전공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다스린다는 뜻 속에는 마치 물이 흐르듯이 순리적으로 국민이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치산치수(治山治水)를 하듯이 관리하는 것이 정치(政治)다.
正(정)은 征(정)과 통하여 적을 치는 일로
무력으로 상대방(相對方)을 지배하는 뜻이었지만,
나중에 바르다(正)에 칠 복(攴)자가 붙은 政 (정)자를 썼는데,
부정(不正)한 것을 바로 잡는 일이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정치가는 먼저 자신의 몸가짐(행실)을 바로 가지면 세상을 자연스럽게 다스려진다."
영화 속의 선진 문명 라퓨타는 멸망했다.
'시타'가 말하길 라퓨타의 멸망 원인은 '땅'에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땅'이 나는 대지와 함께 '국민'이라고 생각했다.
뛰어난 과학기술로 한때는 세계에 공포의 대상이었던 라퓨타도
결국은 멸망했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철학자이자, 정치학자였던 존 로크의 사회계약론도 엿볼 수 있다.
사회계약론은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 의해 제한되고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 주장하는 사회계약론과 함께
정치에 대한 주인공 '시타'의 외침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가져도
국민를 버리고서는 그 어떤 나라도 번영할 수 없다.
-동양관으로 엿보는 진정한 행복-
'시타'의 말에 악당 '무스카'는 이렇게 답한다.
'라퓨타의 힘은 인류의 꿈이니까'
인류의 꿈,
인류는 어떤 삶을 꿈꿨을 때 진정으로 행복하고 번영할 수 있을까?
정말 그의 말대로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만들어
자연과 세상을 정복하게 된다면
인류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영화 속에서 미야자키가 제시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동양 문화권에서 자연과 인간은 하나의 통합된 일체로 인식되며, 이를 삼재(하늘, 땅, 인간)라고 한다.
이러한 철학은 자연을 위대하게 여기며, 인간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동양 문화에서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러러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며,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행복과 조화로운 삶을 이루는 길인 것이다.
라퓨타에는 이러한 동양관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가장 먼저 <하늘>에 떠있는 성<인간>은 결국 <땅>의 부재로 멸망하고 만다.
삼재가 지켜지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성의 모습이다.
거대한 나무의 뿌리가 성의 바닥을 받치고
나무의 줄기는 성의 기둥이 되어 세우고
마지막으로 나무는 성의 하늘이 되는 모습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통합된 일체로 인식되는 모습을 한눈에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시타'와 '파즈'가 처음 라퓨타에 도착했을 때
거대한 천공성에 유일하게 남은 것은 식물과 작은 동물들 그리고 로봇 뿐이었다.
무기를 목적으로 제작된 로봇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식물과 동물을 가꾸고 돌보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러한 장면들은 자연의 생명력과 재생력이 가진 무한한 힘을 보여준다.
이러한 철학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결국 천공의 성 '라퓨타'는 인류의 진정한 행복에 대한 답을 알려준 작품인 것이다.
'무스카'의 말대로
뛰어난 과학 기술로 몇 번을 부활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은 비로소 인간을 완전하게 한다.
더불어 이런 점을 깨닫게 하는 철학과 성찰 없이
인간은 결코 성장할 수 없다.
결국 인간에게 철학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첫댓글 근대과학기술문명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원자폭탄" 투하로 대동아제국주의의 종언을 맞이했던 일본의 입장에서 과학기술문명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비판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천공의 성 라퓨타는 나우시카, 원령공주와 함께 환경생태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기후 위기 등 수많은 현안문제가 생태 파괴 등 인간 중심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환경생태주의는 우리의 주요한 주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만, "인류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때 그것을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삶"이라고만 할 수 있는지도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결국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도 인간 생존을 위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고, 조화를 이루는 삶이라거나 성장한다거나 하는 것들도 결국은 인간 중심적인 한계를 넘어서지는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러한 반박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도 생각해보면 한층 더 깊은 생각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시해주신 논제에 대한 답을 더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통찰력 있는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