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베드로 성당의 건립은 부족한 건립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면죄부를 파는 바람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1517년에 종교개
혁을 일으키게 하는 명분을 주게 되었고 그 결과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가톨릭과 개신교로 갈라지는 과정에서 종
교전쟁이 일어나서 유럽전체가 그 전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유럽은 피폐해지고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죽는 빌미가 된 것이 베드로
성당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지만 현재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그런 역사적 의의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눈을 황홀하게 하는 것들에만 관심이 있을 뿐...
베드로 성당의 쿠폴라에서 본 베드로 광장(구글)....베드로를 상징하는 열쇠 모양을 하고 있다고...
베드로 성당을 둘러 보고 문을 나오게 되면 베드로 광장으로 직접 내려갈 수는 없고 성당에서 나오면 오른쪽으로 나가서 광장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올라갈 때는 성당의 왼쪽으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성당의 오른쪽으로 내려오는데 아마도 혼잡을
방지하게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어느새 광장에 해 그림자가 길어졌다.
바티칸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들....
스위스 용병이 바티칸을 지키게 된 것은 산악지대의 가난한 나라가 살아남기 위해서 용병을 할 수 밖에 없었을 때 목숨을 걸지 않
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스위스 루체른 출신의 용병들이 주로 바티칸 용병으로 갔다고 하는데 , 바티칸과는 별도로 루체른에는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다한 용병들을 기리기 위한 빈사의 사자상이 있다.
예로부터 스위스 용병은 유럽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는데 평범한 용병들과는 달리 어느 나라로 파견되든 한 번 고용된 이상 계약이
끝나는 순간까지 무조건 그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으로 신용이 드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은 서로 전쟁 시기가 올 때마다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곤 했는데 이 스위스 용병단이 서로 적대관계로 만난 적
도 있고 심지어 아들과 아버지가 적대관계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스위스 용병의 충성심이 높은 이유는 스위스 경제와 자기의 가족의 생계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스위스는 농사짓거나 목축을 하기에는 너무 땅이 거칠었기에 경제의 대부분이 용병 고용에서 나왔는데 고용주에게 신뢰를
잃을 경우 더 이상 용병업을 하기 힘들어 지게 되고, 그럼 그들의 가족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바티칸의 스위스 근위대의 경우 교황 식스토 4세가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맺어 스위스 근위병 영입의 길을 열었다가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스위스 정부에 근위병 200명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어 3년 뒤인 1506년 1월 22일 첫 근위병 150명이 로마
에 들어왔다. 이 날이 교황청 근위대 창설 기념일이다. 율리오 2세는 그들에게 '교회 자유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소위 사코 디 로마 전투가 벌어졌는데, 당시 교황령은 수많은 동맹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지원군은 오지 않거나, 오다 깨지거나, 도망쳤고, 스위스 근위대 500명과 오합지졸 시민군
4500여명만이 로마의 성벽을 지키고 있었다. 이에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
고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켜야 한다면서 교황의 권고를 거부했다. 5월 6일, 성벽이 뚫리고 근위대는 189명만
남았지만 이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신성로마제국 용병대에 맞서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 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지
막 전투를 치렀다. 교황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워 근위병 189명 중 147명
이 전사했다. 이에 감복한 교황청은 이들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어 교황 바오로 3세 이후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하도
록 못을 박았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인터넷)
베드로 성당의 광장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은 천국문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로 성당에서 볼 때 오른쪽에는 오른쪽에 위치하고 그
반대편에는 칼과 책을 들고 있는 사도 바울이 서 있다.
천국문 열쇠를 들고 있는 베드로...“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
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태복음16장 19절) 이 말의 의미는 지상에서 어떻게 사는가에 따라 천국을
갈 수도 있고 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살인도 하고 인생을 개차반으로 살은 김태촌 같은 깡패도 예수를 믿기만 천국간다는 소리는 틀렸지 않은가...
천국문 열쇠를 든 베드로를 보면 믿기만 하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기독교인으로서 아무 생각이 없다면 그는 돌
맹이 신자임이 틀림이 없다.
베드로의 반대편에 있는 사도 바울..왼쪽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예수의 말씀 서간집이고 오른쪽의 칼은 순교를 의미한다고...
바울은 처음에 예수를 반대하여 예수의 제자들이 전도하는 박해하기 위해서 길을 가다가 다맥섹(다마스쿠스)예서 죽은 예수를 만
나서 눈이 멀게 되고 눈이 다시 보이게 되자 이름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고 회개하여 예수의 말씀을 전도하는 전도의 길로 나서
게 된다. 바울은 교육을 받은 소위 엘리트로 바울이 기독교에 끼친 공로는 열두 제자들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며 바울을 빼고는
기독교를 논할 수가 없다고 한다. 신약성서 중에 편지의 글인 00서로 시작되는 많은 부분이 사도바울의 글로 신약성서 27권 중
에 절반인 13권이 사도바울의 서신 내용일 정도이다. 그는 전도활동을 하다가 67~68 사이에 로마에서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
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을 하였으나 열 두제자들과는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하며 신도들에게 글을 쓸 때는 항상 앞에 사도
(使徒)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도 이런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전에는 없었는데 최근에 만들어진 것인지 배에 탄 사람들이 보인다. 난민선이라고 한다. 로마교황청은 난민들이 보트나
배를 타고 탈출을 하다가 받아 주는 나라가 없어서 바다에 익사하는 현실을 보면서 각국이 난민을 받아 들일 것을 강력히 권고 하
면서 난민선을 베드로 광장에 설치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2019.9.29일 105차 난민의 날을 맞아 광장에 설치된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가 만든 “뜻밖의 천사들
(Angels Unwares,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천사)
140명의 난민이 배에 탄 모습을 형상화 한 작품으로 실제 사람 크기로 만들어진 이 “뜻밖의 천사들” 조각상은 다양한 문화적, 인
종적 배경과 다양한 역사적 시대의 이주민과 난민 그룹을 묘사했다. 조각상의 인물들은 도망, 위험, 불확실한 미래의 드라마를 드
러낸 얼굴을 하고 있으며, 서로 어깨를 맞대고 촘촘히 뗏목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이 다양한 사람들의 무리 속 중앙에는, 마치 그
들 사이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존재를 암시하는 것처럼, 천사의 날개가 눈에 띄게 나타나 있다.
고통과 두려움 불안 등의 감정들이 한사람 한사람에게 나타나 있다.
베드로 광장은 알렉산드로 7세 재위 시(1665~1667)에 베르니니가 1667년까지 12년의 공사 기간 동안 완성한 것이다. 이 광장은
우선 완만하게 경사가 지도록 했는데 그 이유는 성당 앞에서 거행되는 여러 종교 의식을 잘 보이게 함과 미켈란젤로의 돔을 나타
내기 위해서였다. 전체적으로 팔을 벌려 모든 신도를 감싸 안는 모양을 지니고 있다.
가장 넓은 곳의 크기는 240×340m이고 양 좌우에 15m 높이의 기둥이 총 284개가 들어서 있다. 그 위에는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만
든 높이 3.2m 크기의 성인상이 140개가 있다. 또한 가운데에는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네로 전차 경기장에
있던 것으로 1585년에 도메니코 폰타나가 이곳으로 옮겨왔다. 이 오벨리스크는 전형적인 해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직도 광장
바닥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다. 분수가 두 개 있는데 광장 입구에서 성당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분수는 마데르
노에 의해 1613년에 제작되었고 왼쪽의 분수는 베르니니에 의해 1675년에 제작되었다. 이 광장을 만든 베르니니는 미켈란젤로가
만든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모형을 가져왔다.
바티칸 대성당에서 천사의 성으로 바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은 1950년에 만들어졌다. 바로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3이다. 그리고 광장을 돔에서 바라보면 광장 바닥에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줄이 나 있는데 이유는 광장에 모인 사
람들을 계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매우 치밀하게 만들었다.(인터넷에서)
베드로 성당에서 본 광장...가운데 40mdml 오벨리스크는 해시계의 역할도 하고 있다고한다.
본래 이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가지고 온 것으로 네로 황제의 경기장에 있던 것이었는데 베드로가 네로 황제의 경기장에서 처
형을 당했기 때문에 순교하는 것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목격자로서의 오벨리스크를 이곳에다 세우면서 오벨리스크 위에 십자가를
올려 놓았다고 한다.
좌우의 분수와 오벨리스크...오벨리스크 위에 십자가가 보인다.
회랑위의 성인들과 아직도 줄을 서서 들어가고 있는 관광객들
광장에도 줄을 서 있다.
일찍 나온 사람들은 오른쪽 회랑에서 기다리고... 회랑 뒤에는 기념품들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이곳에서 기념품들을 판다.
베드로 성당을 보는 것을 끝으로 로마관광은 끝나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다.
3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로마를 하루에 구경을 하면서 로마를 구경하고 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로마에게 미안한 일이다.
로마의 역사는 유럽의 역사와 마찬가지이고 로마의 문화는 유럽의 문화라고 할 정도로 로마는 유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유럽
이 세계 문화를 지배해 왔으니 지금도 이 세계는 로마라는 나라의 영향권에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역사학자나 인류문화학자도 아닌 일반 보통 사람들이 깊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로마는 정말 대단한 곳이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가야 할 곳이다.
내일은 베네티아로 가기 전에 피렌체를 들러서 가게 되고 피렌체를 가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토스카나 지바을 지나게 된다.
로마관광을 끝내고 피우지로 가기 전에 유명한 피자집을 들러서 저녁을 먹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