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상한 목소리
정아는 수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그
를 끌어안았다.
[정아씨.]
수인이 정아의 비밀한 곳을 모두 쓰다듬으며 신음을 토하듯 말
했다.
[응.]
정아도 신음을 토하듯 응답하고는 그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수
인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정아의 옷을 난폭하게 벗기려 들었
다. 너무 급히 서둘러서 그런지 좀체 벗겨지지 않았다.
[잠깐만 내가 할께.]
그녀는 수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수인
의 한 손이 그녀의 아랫도리를 헤집고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잠깐만.]
그녀가 다시 엉켜 있는 수인의 손을 떨쳐내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급하게 서둘던 조금 전과는 달리 침착하게 옷을 벗기
시작했다. 웃옷을 벗고 헝클어진 채 허리에 매달려 있는 브래
지어를 풀어내자 그녀의 가슴 윤곽이 선명히 드러났다. 창문에
비추는 달빛이 역광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실루엣으로 보이게
했다. 가장자리에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가슴 실루엣은 어느
화가의 판화처럼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비쳤다. 그녀는 앉은 채
이번에는 슬립과 팬티를 벗었다. 볼륨이 적당한 히프의 실루엣
도 고운 곡선을 이루었다. 누워서 옷 벗는 여인의 모습을 창문
에 스며드는 달빛과 함께 감상하고 있던 수인의 마음은 조금
전과는 달라졌다.
정아를 향해 불꽃처럼 타오르던 정념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
고 깨끗하고 순수한 꽃 한 송이를 감상하는 것 같은 심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육감적인 육체를 깔고 타오르는 욕정
을 한껏 발산해야겠다는 욕망은 갑자기 눈 녹듯 사라졌다.
[정아씬 정말 아름다워요.]
정아가 완전한 나신이 된 채 수인의 곁에 누우려고 했다.
[가만.]
수인은 나신의 정아를 받아드릴 태도는 취하지 않고 그녀의 동
작을 멈추게 했다.
[저기, 방문 앞에 가서 서 보아요.]
수인이 엉뚱한 주문을 했다. 정아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머
뭇거렸다.
[좀 일어서 보라구요. 조각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요.]
[뭐라구요? 조각? 호호호.]
정아는 그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는
일어서서 창문 앞에 섰다. 가느다란 목에서 흘러내린 곡선이
끝이 쳐진 어깨를 지나 볼륨 넘치는 가슴, 그리고 급하게 빠진
허리로 이어졌다. 실루엣 선은 갑자기 우렁차게 쏟아지는 폭포
를 연상하게 하는 펑퍼짐한 히프로 이어졌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자 긴 머리카락이 달빛을 털어내며 하늘거렸다.
[아름다워.]
수인은 누운 채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인씨 여기 와봐요. 아름다운 건 창 밖이에요.]
정아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달빛을 받아들이며 말했다. 수
인이 천천히 일어나 그녀 곁으로 갔다. 함께 창 밖을 내다보았
다.
하얀 달빛이 온 천지를 덮고 있었다. 푸른색이 무성하던 활엽
수들도 흰색으로 보였다. 멀리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들녘, 그
리고 그 너머의 얕은 산들도 모두 낮에 보던 색깔이 아니었다.
정아는 나신으로 곁에 서 있는 수인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
리고 부드러운 입술로 그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수
인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숨결이
다시 가빠졌다. 그녀의 손이 수인의 아랫도리를 더듬었다. 흥
분으로 손가락이 떨렸다.
[수인씨.]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그녀는 마침내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수인을 안고 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은 열어둔
창문으로 넘치듯이 들어오는 달빛을 받으며 마침내 완전한
이심일체를 이루었다.
[정아씨.]
[응.]
달빛은 두 번씩이나 아래 위 자세가 바뀐 두 사람의 등에서
부셔져 나갔다.
이튿날 아침 마당 평상 위에 아침 밥상이 차려졌다. 안정아
가 새벽부터 일어나 분주하게 부엌과 마당을 드나들며 손님
밥상을 차렸다.
[와아! 멋있는데.]
동네 앞 개울에 나가 세수를 하고 들어온 박진환이 평상 위
의 밥상을 보고 감탄했다. 풋고추와 된장, 호박잎 쌈이 그
의 구미를 돋우었다.
박진환, 민은수, 안수인, 박봉순이 평상 위에 둘러앉았다.
[정아씨도 빨리 와요.]
박진환이 먼저 숟가락을 들고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곧 안
정아도 함께 둘러앉았다.
[어느새 이렇게 잘 차렸어요? 어젯밤엔 고단했을 텐데
새벽 잠도 못 주무시고.]
박진환이 안수인과 정아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심술궂은 웃
음을 흘렸다.
[아이 박 선생님도.]
정아의 얼굴이 갑자기 빨개졌다.
[두 사람 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예요.]
박봉순이 웃으며 말했다. 개한테 물린 상처는 이제 딱지가
앉은 곳도 많았다.
[결혼이라구요.]
갑자기 안정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안수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아씨는 남편이 있는 몸입니다. 그뿐 아니에요. 법이 가
로막고 있어요.]
박봉순은 아침 밥상을 앞에 두고 적당하지 못한 화제를 꺼
냈다고 후회했다. 그러나 이야기 나온 김에 좀 해두자는 듯
안수인이 말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장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소위
동성동본 결혼 불허라는 민법 809조 1항입니다. 뭐 사랑에
는 국경이 없다구요? 그건 남의 사정 모르는 사람들의 헛소
리랍니다.]
[동성동본도 용인하는 경우가 과거에 있지 않았어요.]
박봉순이 안수인을 동정 어린 눈으로 보면서 말했다.
[지난 정초에 정부의 어느 책임 있는 장관이 동성동본 폐지
를 주장한 일이 있지요. 유림 등의 반대가 거셀지도 모르지
만 공청회 등을 열어 개정하는 방향으로 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어느 세월에 됩니까?]
[금혼은 10촌 이내로 제한하도록 고친다는 것이 여당의 방
침이라고 한 것을 신문에서 본 것 같은데.]
부지런히 숟가락질을 하고 있던 민은수가 거들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 나라는 그런 것을 법으로 만들어놓
고 난리야? 우생학적 어쩌구 하면서 말이야.]
박진환이 큰 소리로 떠들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나라도 고려 때까지는 동성동본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고려 말에는 근친혼이 사회문제로 대두
되자 조선조에 들면서 이것을 금지하게 되었지요.]
안수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선조의 숭유(崇儒)사상과 맞아떨어진 셈이지.]
박진환이 거들었다.
[법률로 나타난 것은 1958년 12월 현행 민법의 개정 때였
죠. 원래 동성동본의 금혼제도는 중국 주나라 때 부족간의
세력다툼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해요.]
[아니 세력다툼을 하자면 오히려 권장해서 인구를 늘여야
할 텐데.]
박진환이 안정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주나라의 각 부족들은 1백 리 내의
혼인금지라는 제도를 만들어 신부를 구하기 위해 1백 리 밖
의 부족을 항복시키는 수단으로 택했지요. 약탈혼의 일종이
라고 할까.]
[그럼 중국에는 지금도 동성동본.]
민은수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안수인이 대답을 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80여 년 전에 8촌 이내만 금혼한다는 것
으로 바꾸었지요.]
안정아는 그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앉
아 있었다.
[그러면 현재 우리 나라에 그 법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
은 얼마나 되나요.]
민은수가 다시 정아를 보고 물었다.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지난 78년과 88년 두
차례에 걸쳐 한시적으로 동성동본의 혼인신고를 받아준 적
이 있습니다. 그때 신고한 사람이 78년에는 5천 명, 88년에
는 1만5천여 명이었습니다.]
[민법을 고치기 위한 무슨 추진 단체 같은 것은 없나요.]
박봉순이 물었다.
[91년에 동성동본 금혼 피해자 모임이 생겼어요. 하지만
법이 쉽게 바뀌겠습니까? 당하는 사람의 고통을 그렇게 자
기 일처럼 느끼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안정아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녀지만 얼굴에는 수수하고 순박한 한국적 여인상
의 이미지가 강력했다.
[결혼을 못 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자살한 남녀
가 수두룩하답니다. 어떻게 수모 아닌 수모를 참고 산다 하
더라도 그 2세들은 미혼모의 아들딸이 되고 말지요.]
[민법 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민은수가 안수인을 보고 물었다.
[혈통을 중시하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을 지켜야 한다느
니, 우생학적 견지에서 어떻다느니, 사회질서를 문란시키고
가족제도를 허물어뜨린다느니 어쩌니 하는 것이 이유랍니
다. 그러나 타당성은 거의 없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러나
.]
안수인은 밥 숟가락을 놓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
를 시작했다. 그는 이 법은 위헌이라고 했다. 그것은 부계
혈통만을 중시하여 남녀평등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했다. 개
인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다.
또한 우생학적 운운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다. 그것은
근친일 때의 문제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유전학에서는 남녀
가 같은 조상의 유전자를 공통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을 때
기형아 출산, 사산 등의 확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문제의 공통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비율은 3촌
간에는 8분의 1이고 4촌 간에는 16분의 1, 10대 손끼리는
10만분의 1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물며 수십 대를 내려온 남녀야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안수인의 설명을 들은 일행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
거운 분위기가 아침상 주변에 내려앉았다.
[자, 우리 그 일은 잠시 접어두고 오늘같이 화창한 날 무엇
을 할 것인지 의논이나 하지.]
민은수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새 제안을 했다.
[은수와 정아씨는 나무그늘 아래서 낮잠이나 푹 자고 싶을
걸 어젯밤 같은 천재일우의 기회에 그냥 두 사람이 껴
안고 잠만 잤겠어.]
박진환이 노골적으로 놀리기 시작했다. 원래 성질이 활달하
고 낙천적인 그는 주책이 없을 정도로 아무 말이나 마구 하
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바깥주인 없는 집에서 법석을 떨며 보냈
다. 이틀 뒤 돌아온 안정아의 남편 최병길은 처음엔 별로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나 사흘째 되는 날 태도가 완전
히 달라졌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그는 조
용히 아내 안정아를 동네 앞 냇가의 정자로 불러냈다.
[여기 좀 앉아요. 내 묻는 말에 똑똑히 대답해야 돼.]
그는 평소의 온화한 얼굴과는 달리 심각한 표정이었다. 안
정아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정자 바닥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
았다. 이 정자는 안수인과 함께 몇 번인가 정사를 가졌던
곳이다. 남편 몰래 한 짓이라 가슴이 약간 떨렸다. 남편 최
병길이 그것을 알고 이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으리라고는
물론 그녀도 생각지 않았다.
최병길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무겁고 답답한 분위기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 분
위기 속에서 안정아가 먼저 무엇이라고 입을 열 수는 없었
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난 최병길이 먼 산을 바라보며 드
디어 입을 열었다.
[당신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어야 해요. 아니 그전에 내 말
부터 해야겠어. 난 당신을 사랑해. 우리 사이는 어떤 장애
물도 끼어들 수 없어. 어떤 경우도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전제를 포기해서는 안 돼.]
그리고 그는 슬쩍 눈을 돌려 안정아의 표정을 보았다. 정아
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운 것처럼 보였다.
[당신 안 박사를.]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다시 정아를 돌아다보았다. 정아는 깜
짝 놀라 눈을 크게 떴으나 곧 올 것이 왔다는 체념의 표정
으로 변했다.
[당신이 안수인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어. 몇 달 동안 그
사실을 알면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몰라. 당신도 괴로웠겠
지.]
안정아는 가슴에 바위를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안수인
과 자기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니 그러면 왜 그는 아
내의 외도를 보면서 고민만 했단 말인가.
[왜 이제야 그 말을 하느냐고 하겠지. 나도 수십 번이나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 그러나 나는 두려웠어. 당신이 내
곁을 떠날까봐 두려웠다고 하는 것이 옳을 거야.]
그는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불을 켜대
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
[당신 진짜로 안수인을 사랑하는 거야.]
정아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내의 탈선
을 알면서 혼자 수습하고 다시 남편 곁으로 오기를 기다리
면서 혼자 고민하고 있었던 남자라면 얼른 생각하면 착하디
착한 남자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
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정아의 머리를 스쳤
다. 세상의 어떤 남자가 아내의 부정을 지켜보면서 참고 지
낸단 말인가?
[대답 안 해도 좋아. 당신이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내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해. 지금이라도 당신이 그와 관
계를 끊는다면 나는 옛날처럼,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복
하게 지낼 수 있어.]
그가 슬그머니 팔을 뻗어 정아의 어깨를 쓸어안았다.
[우리.]
그때 정아의 눈앞에는 안수인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지
금이 자기의 의사를 분명히 해두어야 할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랑 나누어본 지 오래 됐지. 오늘밤엔.]
정아가 그의 팔을 걷어내며 말했다.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나도 나를 어쩔 수 없어
요.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난 수인씨의 품에서 도망칠 수 없어
요.]
안정아는 단호한 표정으로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면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최병길은 절망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측은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정아는 먼 산을 바라보며 말을 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인데 차라리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둘일 수야 없는 것이지요.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이 싫어진 것은 아니에요. 당신은 좋은 남편이었어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오.]
[나도 모르겠어요. 수인씨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
이 들어요. 이건 수인씨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내가 선택한 일
이에요.]
[그러면 그 사람과 혼인을 하겠다는 뜻인가.]
[할 수만 있다면 아니 어떤 장애라도 뚫고 할 거예요.]
[다시 한 번만 확인하겠어요. 나하고 헤어지지 맙시다.]
최병길이 다시 정아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물기가 어렸
다. 정아는 그 모양을 보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렸다.
[절 놓아주어요.]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음성은 낮았으나 그 목소리에는 절규
가 담겨 있었다.
최병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 벌떡 일
어서며 말했다.
[나도 질투할 줄 알고 복수할 줄 아는 평범한 남자야. 사랑이
증오로 변하면 어떤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지 각오는 했겠지.]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 같았다. 그는 무슨 일이 닥쳐도
호들갑을 떠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결심하면
무서운 사람이란 것을 정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무서운 결심
을 한 사람 같았다. 안정아는 그가 저지를 일이 무엇인가를 생
각해 보았다.
최병길은 그의 예언대로 가만 있지 않았다.
그 이튿날 안수인과 안정아는 경찰의 호출을 받았다. 최병길이
이혼청구 소송과 함께 간통죄로 두 사람을 고소했기 때문이었
다.
그 집의 식객인 민은수와 박봉순 그리고 박진환은 참으로 난처
한 입장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빨리 다른 곳으로 가야 해요.]
박봉순이 민은수를 보고 말했다. 그들은 어차피 거기를 떠나야
만 했다. 구란도 대책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두 사람은 빨리
남해의 대책본부로 내려와 다시 검진도 받고 원인규명 일을 도
와달라는 것이었다.
[박진환씨는 여기 남아서 친구 안수인씨의 일을 돕도록 하고
우리는 남해로 가도록 하지요.]
민은수가 제의했다.
[그게 좋겠어요. 진환이는 여기 남아서 최 선생이 소송을 취하
하도록 잘 설득을 해보아요. 그 일이 잘 안 되면 수인씨는 일단
구속이 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되니까.]
그러나 최병길을 설득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모두 알
고 있었다. 결혼을 했건 안 했건 남녀가 좋아하면 함께 잠잘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정아나 안수인의 주장이
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법은 그것을 중대한 범법행위로 규정
하고 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사랑이 있는 것이다.
민은수와 박봉순은 다시 그날 오후에 남해의 대책본부에 도착
했다. 그들은 먼저 허진 박사를 만났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오. 아니 내가 무능한 사람이란 것을 절
실히 느끼고 있어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개들이 발작을 일으
켰는지 실오라기만한 단서도 하나 발견하지 못했어요. 구란도
에 대한 역학조사는 가혹하리만큼 철저하게 진행되었는데 모
든 것이 너무나 정상적이었어요.]
허진 박사는 두 사람을 보자 낭패한 얼굴로 자탄을 하고 있었
다.
[개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은수가 물었다.
[아무 변화도 없어요.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야.]
침통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앉아 있던 허 박사가 다시 입을 열
었다.
[대책본부의 수사팀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중대한 일
이 또 하나 생긴 모양입니다. 같이 가볼까.]
그들이 막 일어서려고 할 때 수사팀 요원이 두 사람을 데리러
왔다.
그들은 임시 수사팀 본부로 쓰고 있는 조그만 민가로 갔다. 보
도진의 눈을 피해서 민간인 건물에 수사팀 일부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좀 앉으시지요.]
안면이 있는 수사 책임자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이 안 될려니까 별 괴상한 일이 다 생깁니다. 구란도의 괴
사건을 자기가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놈이 다 있습니다.]
수사관이 담배 한 대를 피워 물면서 말했다. 나이 쉰 살쯤 되어
보이는 그는 몹시 피로해진 것 같았다. 형사들이 보여주는 특
이하게 날카로운 인상이라든지, 반짝이는 눈동자 같은 것은 찾
아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한 졸리운 눈에 얼굴
은 주름투성이였다. 날카로운 인상은커녕 복덕방 맘씨 좋은 할
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서울 본청에서 온 추병태 경감이라고 하지요. 살인사건
만 20여 년을 다루어왔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백여 명이 살해된
사건은 처음입니다.]
그는 목덜미를 타고 내려오는 땀을 계속 닦으면서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선생님이 그 유명한 추 경감님이시군요.]
민은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자기가 저질렀다고 하는 자가 도대체 누굽니까.]
[이걸 한번 들어보시지요.]
추 경감이 책상 위에 있는 녹음 테이프를 틀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테이프에서는 목이 쉰 듯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녹음상
태가 나쁜 것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을 잘 들으시오. 구란도에서 섬 사람들을 몽땅 죽인 것
은 내가 한 짓이오. 우선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되게 한데 대해
그 사람들의 영혼에게 사죄를 드립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
을 위해서는 작은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
이하 정부 고위층 여러분 그리고 입법 활동을 하는 국회의원,
정치인 여러분, 이 나라의 사회지도층 인사, 지식인 여러분.
내가 구란도의 개들을 시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앞
으로 어떤 곳에서든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
분들이 앞으로 요구할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전국 어디
서든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를 묻지 마십시오. 신은 인간의 의견을 물어보고 구원하
러 오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무리 애를 써도 어떻게 그
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
은 신이나 신의 허락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럼 다음에 다시 내 요구사항을 이야기하겠습니다. 푸른 셔츠
로부터.]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이거 정신병자 아닌가요.]
민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테이프는 어떻게 전달되어 왔습니까.]
박봉순이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책본부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몇 시에 전화를 할 테니 녹
음준비를 해놓으라고 한 뒤 그 시간에 이 전화가 걸려왔습니
다.]
추 경감이 설명했다.
[목소리를 변성한 것 같은데.]
민은수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송화기를 헝겊으로 싸고 말을 했기 때문에 그렇
게 들린 겁니다.]
[그럼 어디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알 수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그 자가 쓴 전화는 이동무선 전화기였습니다. 번
호까지 추적을 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남해에 휴가차 온 어느
중소기업 사장 차에 있던 전화기였습니다. 범인은 그 전화기를
훔쳐가지고 가서 전화를 했습니다. 건 장소가 어딘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자동차를 자세히 조사해 보
았지요. 하지만 범인이 그런 곳에 지문을 남겨 놓았겠습니까.]
추 경감이 새 담배를 입에 물고는 켜지지 않는 지포 라이터를
계속 철거덕거리며 말했다.
[장난친 게 아닐까요.]
박봉순이 의견을 말했다.
[장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선 계획적으로 남의 핸드폰을
훔쳐 추적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과 필터를 이용해 목소리를 숨
기려고 한 점을 볼 때 단순한 장난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
니다.]
[목소리 감정은 해보았나요.]
박봉순이 다시 물었다.
[물론입니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남자, 서울 태생, 고
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 등을 알아냈습니다. 여러분을
모신 것은 이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은 것 같지 않느냐 하는 것
입니다.]
[변성을 시켜놓았으니 알 수가 있어야죠.]
박봉순이 앞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르며 이야기했다. 팔에
감았던 붕대는 이제 풀었다.
[여기 필터를 조금 걸러낸 목소리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들
어보시겠습니까.]
추 경감이 다시 다른 테이프를 틀었다. 먼저 목소리보다는 훨
씬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