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진해우체국
종 목 사적 제291호
지 정 일 1981.09.25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통신동 1
시 대 일제강점기
1912년 준공된 1층 목조건물로서, 우편환저금, 전기통신 업무를 취급하던 청사였다.
건물 양식은 러시아풍의 근대건축인데, 이는 이 지역에 일찌기 러시아 공사관이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이라고 한다. 정면 현관에는 배흘림 기둥의 투스칸 오더(Tuscan order)의 원기둥을 세웠다.
내부는 사무를 보는 영업장과 객장 사이에 높은 카운터를 두어 공간 구축을 하고 있다. 본래 내부 바닥은 목조마루였으나 지금은 마루를 들어내고 시멘트로 개조하였으며, 지붕은 동판으로 마감하였다.
2.성흥사 대웅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2호
지 정 일 1976.12.20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대장동 5
시 대 조선시대
성흥사는 신라 흥덕왕 8년(833)에 무염국사가 세운 절이다. 흥덕왕 초년에 무염국사가 웅동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기념으로 왕이 무염에게 재물과 전답을 시주하여 구천동에 터를 골라 이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세울 당시에는 500여 명이 머물렀던 대사찰이었으나, 세운지 276년만에 화재를 입어 대장리로 옮겨 지었다. 조선 현종 9년(1668)에 또 다시 화재를 입어 구천동으로 옮겼다가 정조 13년(1789)에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성흥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이고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지만,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대단히 기울어져 팔작지붕의 느낌을 준다.
전반적인 건축의 양식은 조선 후기의 양식적 특징을 보이며 기록과는 달리 대웅전은 근래에 고쳐지면서 원형에서 많은 변화가 있 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고 이승만대통령 별장 및 정자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5호
지 정 일 1990.01.16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현동 71
시 대 일제강점기
진해의 해군통제부 내에 있는 건물로 어떤 용도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일제시대에 일본군 통신대가 사용하였다고 한다. 해방 이후 해군에서 건물을 인수하여 수리한 후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1979년에 수리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별장은 집무실 겸 응접실·침실·경호실과 기타 부속실로 구성된 ㄱ자형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이곳은 한식의 구조와 양식의 외관을 갖춘 곳으로 한식과 양식을 절충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육각형의 작은 정자가 있는데 나무로 짜여져 있으며, 지붕은 갈대로 덮었다.
육각정은 1949년에 이승만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이 태평양 동맹결성을 위한 예비회담 개최를 필리핀 대통령에게 제의한 곳으로 의의가 있다.
4.정암사 아미타후불탱 및 초본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4호
지 정 일 2005.10.13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경화동 3가 920번지
시 대 일제강점기
이 불화는 진해 정암사 주지실에 보관되어 있는 아미타극락회상도이다. 화면의 중앙에 아미타여래가 결가부좌하였고, 좌우로 유희좌를 취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앉아 있으며, 아미타여래의 두광 좌우로 아난과 가섭, 그리고 2위의 나한상이 서 있다. 그리고 화면의 상단 좌우측에 6위의 보살이 3위씩 구름을 타고 내영하고 있다.
중앙의 아미타여래는 왼손은 1지와 3지를 맞대어 복부 앞에 놓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편 채 오른쪽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아 변형된 항마촉지인을 취하였고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고 두광의 윗부분에서 방광이 포물선을 그리며 좌우로 뻗어가고 있다. 어깨가 넓고 무릎 너비가 알맞아 신체가 균형적이고, 육신색은 백색을 바르고 그 위에 주색을 약간 발라 표현하였으며, 육신선은 먹선 위에 옅은 주색선을 그어 나타내었다.
머리는 짙은 먹으로 채색하였는데, 육계가 삼각형으로 볼록 솟아 올랐으며 주색과 황색을 번갈아 바림하여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표현하였다. 얼굴은 너비 대 길이의 비율이 1대 1이며, 둥근 편이다.
좁은 이마에는 중앙에 백호를 백색으로 둥글게 표현하였다. 두 눈 사이의 간격이 넓은 편인데, 눈의 표현은 상검선을 짙게 긋고 하검선은 나타내지 않았으며, 백안을 백색으로 바르고 눈머리와 눈 꼬리를 담묵으로 바림하였다.
눈동자는 갈색을 바르고 짙은 먹으로 윤곽처리를 하였고 동공을 농묵으로 점찍었다. 코는 담묵으로 그어 표현하고, 콧구멍을 농묵으로 나타내었고, 주색의 입술은 입술봉우리가 높고 상하 입술의 경계는 채색하지 않아 육신색이 드러난다. 눈썹과 콧수염·턱수염은 녹색으로 채색하고 반달형의 눈썹의 경우 눈썹의 모양 따라 가운데를 먹선으로 그었다. 굵은 목에는 삼도를 나타내었는데, 목과 가슴의 경계선에 균일한 간격으로 거의 수평에 가깝게 표현하였다.
착의법은 변형통견식으로 주색의 법의가 양 어깨를 두르고 있고, 편평한 가슴 위로 수평의 승각기를 입고 주색의 끈으로 매듭지었으며, 하반신에는 녹색의 군의를 입었다. 법의는 백색의 연화원문을 가득 시문하였고, 가장자리는 연화당초문이 시문된 황색의 띠 장식이 둘러지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를 덮고 복부를 돌아 왼쪽 어깨 위로 걸쳤는데 그 옷자락이 무릎까지 덮고 있다.
녹색의 군의는 연화좌를 덮고 길게 흘러내리는데 가장자리를 백색의 매화당 초문을 시문한 띠 장식을 둘렀다. 본존의 손발은 긴 편이고, 손톱은 매우 길고 날카롭게 표현하였는데, 손톱은 백색으로 바림하여 나타내었다.
본존이 앉아 있는 연화좌는 군청색 바탕에 백색선으로 여러 겹의 연꽃잎을 겹치게 표현하였다. 두광은 녹색 바탕에 안쪽에서부터 백색·주색·군청의 원형 띠가 둘러지고 신광은 담색 바탕에 두광과 같은 색깔의 원형 띠를 둘렀다.
본존의 좌우에는 백의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한쪽 다리는 결가부좌하여 연화좌 위에 얹고 다른 다리는 아래로 늘어뜨려 연꽃을 밟고 있는 유희좌를 취하여 본존을 향해 마주 앉아 있다.
관음과 대세지보살의 육신색과 육신선의 표현 기법은 본존인 아미타여래와 거의 유사하다. 백의관음보살은 화불이 있는 주색의 보관을 쓰고, 보관 위에 백색의 베일을 길게 늘어뜨려 그 끝자락이 연화좌까지 이르고, 손에는 여의두를 받쳐 들고 있다. 백색의 베일은 몰골기법을 사용하여 의습선을 피하고 백색을 발라 나타내었다.
또한 녹색 편삼의 가장자리에는 주색바탕에 백색으로 화문을 장식하였는데 돋을 기법을 사용하여 꽃문양이 도드라져 보이며, 옅은 군청의 바지는 주름선을 따라 명암을 살렸다.
관음보살은 화려한 수식이 달린 보관·귀걸이, 목걸이, 팔찌, 군의의 무릎 부위를 묶고 있는 끈 등의 장신구로 화려한 인상을 주며, 여의두와 화불의 광배 그리고 군의의 무릎을 묶는 끈 장식 등에 금박을 붙여 그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대세지보살은 머리에 정병이 있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발이 어깨 위에 흘러내리고 있으며 손에는 백색의 연꽃가지를 받쳐 들고 있다. 착의법은 변형 통견식으로 녹색 편삼에 주색의 대의를 착용하였으며, 분홍(주+백+백)의 군의를 입었다. 보관의 정병, 승각기를 묶은 매듭의 수식, 군의의 무릎부위를 묶은 끈 장식은 금박으로 처리하였다.
또한 관음과 대세지의 원형 두광은 녹색바탕에 먹선으로 윤곽을 처리하였고, 신광은 아주 백군(백+백+군)에 백색선으로 파상문을 표현하였고 테두리는 백색과 먹선으로 마무리하였다.
본존의 두광 좌우로 아난과 가섭을 포함한 4위의 나한상이 본존을 향해 합장하고 서 있다. 육신색은 백색을 바르고 육신선을 따라 주색으로 음영을 주고 있으며, 육신선은 가는 먹선 위에 옅은 주색으로 윤곽선을 처리하였다. 백색의 머리털과 눈썹, 수염을 표현한 늙은 가섭을 제외하고, 모두 민 머리형이다. 아난과 가섭의 장삼 아래에 노출된 백색 내의와 그 외 나한상의 백색 목깃 처리는 관음보살의 베일 표현과 동일한 몰골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미타삼존상과 나한상과의 경계를 구름을 활용하여 구분 짓고 있다. 전반적으로 본 작품의 주조색은 주·녹청·군청·백색이다.
5.중완구
종 목 보물 제859호
지 정 일 1986.03.14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앵곡동 해군사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부르며 유통식 화기의 한 종류로 조선 태종 때 최해산이 만들었다고 한다. 완구는 크게 완, 격목통, 약통의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완은 발사물 즉 큰 돌이나 쇠공을 올려 놓는 곳으로 그릇 모양을 하고 있다.
약통은 화약을 넣는 곳으로 점화선을 끼우는 점화구멍을 2개 가지고 있다. 약통과 완 중간에는 격목통이 있는데 이 곳에는 화약이 폭발할 때 생기는 폭발력을 완에 전달하기 위한 나무로 만든 격목이 있다.
이 중완구는 1970년 3월 경상남도 통영군 앞바다에서 잠수부가 인양한 것이며 크기는 완은 20.5㎝, 약통은 24.7㎝, 격목통은 17.4㎝이다. 오랜 세월 바다속에 잠겨 있어 부식이 심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글을 판독하기 힘들다. 그러나 보물 제858호로 지정된 중완구와 모양과 크기가 거의 비슷해, 선조 8년(1575)에서 선조 38년(1605)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완구는 바다 속에서 인양되었고 해전에 직접 사용되었던 유일한 유물로 화기 발달사는 물론 해군전쟁사 연구의 사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6.웅천읍성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5호
지 정 일 1974.12.28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성내동
시 대 조선시대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경상남도 진해시 성내동에 있는 산성으로, 조선 세종 21년(143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곳은 1407년 일본과의 관계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항구를 열어 무역을 하던 곳인데, 일본인의 불법이주가 많아지자 이를 막고 읍면을 보호하기 위하여 읍성을 쌓았다.
문종 원년(1451)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서·북에 수로를 만들어 성 일부를 확장하였다. 중종 5년(1510)에는 삼포왜란으로 일시 함락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고시니 유끼나가가 이곳에 머물기도 했다.
현재는 성의 동벽만이 동문터와 함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동문터의 너비는 4m이다. 서벽과 남벽은 그 일부가 남아있고 북벽은 철거되었다. 성벽의 기초가 되는 부분에는 네모진 돌을 쌓았으며, 그 위에 사각형 또는 삼각형의 돌을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모양이 되게 쌓았다. 벽면은 땅과 수직으로 쌓았으며 큰 돌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웠다.
현재 남아 있는 총 길이는 500m, 동벽 북단의 남쪽 100m 쯤에 누각이 있던 자리도 남아 있다.
7.구산성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73호
지 정 일 1985.01.14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자은동
시 대 삼국시대
경상남도 진해시 자은동의 구산성은 해발 116m의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해서 테를 맨 모양으로 비스듬히 돌을 쌓은 산성이다.
성벽은 지하에 매몰된 채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내벽의 경우 높이가 5m나 되는 곳도 있으며 성 둘레는 360m이다. 성벽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 또는 점판암 계통의 돌을 정사각형으로 다듬어서 사용하였고, 중간부분은 사람머리 크기의 자연석을 그대로 차곡차곡 쌓았다. 성벽의 너비는 아랫부분이 6m, 윗부분이 5.5m로 내·외벽이 적심부를 향해 비스듬히 축조되어 있다.
동쪽에 문터가 하나 있으며, 문 밖으로는 출입을 돕기 위한 호(濠)가 둘러져 있다. 성 안에는 상·하수도와 건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터는 1983∼1984년까지 동아대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곳에서 토기조각, 기와조각, 철기조각 등의 유물이 다소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과 성의 구조로 보아 6세기 후반에 성곽이 축조되었고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웅천왜성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
지 정 일 1985.01.14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남문동 산211-1
시 대 조선시대
경상남도 진해시 남산 꼭대기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으로 뻗쳐 쌓은 산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나라 남해안에 축조한 18개의 성 가운데 하나이며, 왜장 소서행장이 진을 치고 왜군의 제2기지로 활용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부에 본성(本城)을 두고 아래에 2개의 성을 질서있게 배치하였고, 육지방면의 방비를 철저히 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긴 나성을 둘렀다. 성안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현재 남은 성벽의 길이는 700∼800m이며 높이는 3∼8m이다. 성벽은 커다란 돌을 상하로 고루 쌓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채운 형태이며 지면에서 70°가량의 경사를 이루었다.
『고적조사자료』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웅포성이라 하여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보수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9.망산도.유주암.유주비각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89호
지 정 일 1988.12.23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용원동 산 222,223,197
용원동 앞 바다에 잡목으로 뒤덮인 섬을 망산도, 이 섬의 동남쪽 70m 해상의 바위섬을 유주암이라 부르는데 모두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태후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곳이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도읍을 정한 지 7년만에 신하들이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얘기하자 ‘짐이 이땅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뜻이며, 왕비 또한 하늘이 주실 것’이라 하였다. 신하들에게 바닷가에 나가 기다릴 것을 명령하여 기다리니, 서남쪽 해상에서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배 한 척이 다가왔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태후 일행으로 이들이 처음 내린 곳이 망산도이며, 허태후 일행이 타고 온 배가 뒤집혀 유주암이 되었다고 한다.
유주암과 망산도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는 허태후의 전설을 전하고 있는 유주비각이 있다.
10.안골포 굴강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43호
지 정 일 1994.07.04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안골동 517-9,517-10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배의 수리·보수·군사 물자의 하역·특수 목적 선박 등의 정박을 목적으로 세운 중요한 군사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였다.
조선 세조 8년(1462) 이 고장의 대외 방어 기지로서 안골포 수군만호진을 설치할 때 축조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함대의 거북선이 정박한 적이 있다고도 하며, 주위에는 안골포 진성지, 안골왜성이 있어 국방상 대단히 유서가 깊은 전적지였음을 알 수 있다.
11.웅천도요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60호
지 정 일 1997.01.30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두동 147
시 대 조선시대
요지는 자기나 기와, 그릇 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웅천 가마터는 보배산 기슭의 점골에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두동요지, 금곡요지 등으로 알려져 있다. 도굴로 파괴된 가마터와 가마터 주변에서는 사발, 대접, 접시류를 비롯하여 귀얄문과 덤벙무늬 분청사기가 출토되고 있다. 이로 보아 이 가마터는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백자로 변해가는 마지막 단계인 15∼16세기에 만들어 운영되다가 임진왜란으로 폐요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2.제포성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84호
지 정 일 1997.12.31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제덕동 830,831
시 대 고려시대
제포성지는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군만호진을 처음 설치하였고, 조선 전기 성종 때는 경상도 우수군이 머물수 있는 군영을 설치했던 곳이다.
수군은 배 위에서만 방어한다는 원칙이 성종 때에 무너지면서 경상도와 전라도 등 22곳에 수군진영을 만들었는데, 이 성은 성종 16년(1485)에 쌓기 시작하여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성터는 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도록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었으며 자연석으로 기반을 마련하였다. 성문 밖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작은 성이 있으며, 성벽 주변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못을 파서 돌렸다.
13.웅천빙고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85호
지 정 일 1997.12.31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북부동 산53-1
시 대 조선시대
빙고는 겨울에 자연적으로 얼었던 얼음을 여름에 사용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냉장고 시설이다. 진해의 웅천 빙고지는 산능선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길게 마련되어 있다.
얼음실은 길이 16m, 폭 6m, 깊이 3m 정도의 규모로, 안쪽벽은 가로90㎝, 세로 30㎝ 크기 정도의 돌로 8∼9단 가량 쌓아 올렸다. 천장과 북쪽벽은 훼손이 심한 편이어서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천장만은 무지개 모양으로 쌓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14.사화랑산 봉수대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86호
지 정 일 1997.12.31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명동 산75외
시 대 조선시대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사화랑 봉수는 경상도 동래에서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 중앙봉수에 이르는 봉화선로의 중간노선을 연결하는 간봉이다. 여기서는 동쪽 가덕도 천성 연대에서 봉수를 받아 장복산 봉수와 창원의 여음포 봉수에 알렸다. 『웅천읍지』를 비롯한 지리지에 따르면 사화랑봉수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으로 100명이 있었다고 한다. 전국의 봉수제도를 폐지하던 고종 31년(1894)에 없어졌다.
15.완포현 고산성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87호
지 정 일 1997.12.31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현동 산2
시 대 고려시대
경남 진해시 현동 고산에 있는 이 산성은 고려말 우왕 10년(1384)에 만든 것이다. 완향성, 비봉산성, 현동산성으로 불렸으며 왜구의 잦은 침입을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나 완포현이 웅천현에 합쳐지면서 행정적인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한다.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산 정상에 고산 봉수대가 있으며, 절벽 위에 세운 남벽을 제외한 동·서·북에는 문터를 두었는데, 서벽은 2곳에 문터를 두었다. 안쪽 벽은 3∼5단의 계단식으로 만들었으며 동벽과 남벽 성 안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언덕을 두었다. 이곳의 성벽 모서리에는 관측과 지휘에 용이하도록 각루와 치성(성벽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 쌓은 성벽)을 쌓았다.
16.청룡대 각석
종 목 경상남도 기념물 제188호
지 정 일 1997.12.31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가주동 87-1
청룡대는 통일신라 후기의 대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세상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가기 전 낚시를 즐기던 곳이라 전하고 있다.
바위에 ‘청룡대치원서’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글씨체로 보아 최치원의 친필로 여겨진다. 최근 후손들에 의해 이를 기리는 청룡대비가 건립되었다.
당시에는 이곳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뭍(육지)으로 변하였다.
17.웅천안골왜성
종 목 문화재자료 제275호
지 정 일 1998.11.13
소 재 지 경남 진해시 안골동 산27외
시 대 조선시대
경상남도 진해시 안골동에 있는 이 성은 동망산 정상 위에 만들어졌다.
성의 둘레는 594m이며, 성벽의 높이는 4∼7m 정도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왜성으로 협반안치, 가등가명, 구귀가룡 등이 쌓아서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일본 수군의 본거지이다. 해전에서 거듭 타격을 입고 일본으로부터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의 수군을 막기 위한 최후의 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인다.
산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을 평평하게 깎은 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을 나누어서 따로 돌로 쌓고, 외곽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흙으로 쌓았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는데, 이는 바닷길을 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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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해에는 자주 갑니다만 이렇게 많은 문화 유적이 있을 줄이야...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ㅎㅎㅎ진해에 왜 자주가요?......갸우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