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이 동해안을 타고 뻗어내려 오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서남으로 방향을 튼다.
그 백두대간의 북쪽 한강 유역과 남쪽 낙동강 유역을 잇는 고개로, 풍기와 단양을 잇는 죽령(689m), 문경과 충주를 잇는 새재(조령, 632m), 이화령(548m), 계립령(520m)이 있다.
계립령과 죽령은 삼국이 각축하던 시대에 개척된 길이다. 새재는 이제 옛길이 되어버렸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장 늦게 개통된 ‘새 길’이었다.
이화령은 새재 옆으로 일제강점기 때 닦은 ‘신작로’다. 다른 고개들도 그렇지만 특히 새재는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서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에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야 다음날 낮에 넘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 험준함 때문에 나는 새도 쉬어간다는 뜻에서 이름이 ‘새재’[鳥嶺]가 되었다고도 하고, ‘새로 난 고개’의 뜻으로 ‘새재’로 부른다고도 한다.
조령산과 주흘산의 깎아지른 골짜기 ‘새’로 난 길이라 ‘샛재’인데 발음하기 좋게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새재길에는 임란을 겪은 뒤인 1594년, 충주 수문장 신충원의 건의에 따라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하였다.
고개 정상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는 지금의 제2관인 조곡관(鳥谷關)이다.
이어 숙종 때에 이르러 고개 정상 가까이에 제3관인 조령관(鳥嶺關)과, 문경에서 새재를 넘는 초입에 제1관인 주흘관(主屹關)을 두고 성을 쌓았다.
그 뒤로 이 새재길은 과거보러 가는 뭇 영남 선비들, 서울로 향하는 영남의 각종 물산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특히 영남의 선비들은, 남쪽의 추풍령으로 가면 과거에 추풍낙엽으로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주르륵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새재길을 가장 애용했다고 한다.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공무로 출장 온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공익시설이다ᆞ
새재 안에는 동화원과 신혜원(고사리마을)과 조령원 등 세 곳에 원터를 두었는데 높이 2.9 미터를 돌담으로 성벽을 쌓은 600평 규모이다
조령산과 더불어 문경새재를 이루는 주흘산은,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늠름하고 웅장한 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흘산 정상에 서면 확 트인 전망이 시원하다. 주흘산은 여러 산행 코스가 있으나 제1관문→여궁폭포→혜국사→샘터→정상→계곡합류지점→ 제2관문→제1관문으로 되돌아오는 코스가 대표적인 코스이다.
산행 거리는 약 13㎞로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영남의 첫관문 ᆢ문경새재에서 모처럼 한시름 쉬어가는 뜻깊은 감사한 시간이었다
무등여성L.C 산행이사 주옥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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