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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주면 술 먹고, 고기 주면 고기 먹는다.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 도법 스님 즉문즉답 (2)
제주 4·3사태 때 아버지 돌아가시고 유복자
인생 별 것 없어…별 사람 없고, 별 길 없다
-죽음에 임할 때 어떨 것 같은가.
=그 때 가봐야 알겠다. 현재 제 생각은 인연이 되서 가면 가는 거다.
실제 상황에서 그렇게 편하고 자유로울지는 모르겠다.
-순례 다니며 교회나 성당에서 받은 인상은.
=(순례 도중) 교회나 성당을 더 많이 가고. 강론과 설교도 했다.
종교가 다르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 진실한지 성실한지에 따라 만남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종교가 같다고 해서 허심탄회한 만남과 협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종교가 같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말 진정성을 갖고 삶을 다루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만나고 소통하게 된다.
예수님 십자가는 비폭력, 불복종 행동 웅변
-실상사(지리산 남원)에 오래 사는 이유가 있는가.
=이유 없다. 인연이 그래서 그렇다. 지금이라도 더 좋은 데서 오라고 하면 가는데,
더 좋은 데서 오라고 할 데가 없다.
-성당에 있는 ‘예수 14처’ 그림에 담긴 의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당에 가면 예수님이 사형언도를 받고 맞으면서 끌려가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의 그런 과정을 보면서 앎이 참되면 행동은 저절로 나온다고 보았다.
예수님에겐 사랑의 길만이 참되고, 어떤 것도 참이 아니었다.
죽을 줄 알면서도 갔다.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을 얘기하는데,
행동이 안 나오는 것은 앎이 참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앎에 대한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비폭력 불복종 행동이 어떤 것인지,
압축적이고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전보다 더 나아졌는데 이렇게 늘 결핍감을 느끼는데.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에 시달린다.
제도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또 주체적인 자기 철학과 신념이 확립되어야 한다.
주체적으로 개성 있는 삶을 사는 게 바람직하고 참된 것이다.
그것이 빈곤감을 넘어서는 길이다.
-마을이 희망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살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살면 된다.
그 마을이 갖고 있는 세계관과 철학, 그것과 같이 하면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다.
얻어먹는 주제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나
-불교에서 채식은 지켜야할 덕목인가.
=나는 개인적으로 가리지 않는다. 술 주면 술 먹고, 고기 주면 고기 먹는다.
부처님은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단골집을 가는 것도 아니고
예약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얻어먹는 주제에 감놔라 배놔라,
파와 마늘은 넣지 말라고 할 수 있는가?
아무 것이나 주는 음식을 기쁘고 고맙게 잘 자셨던 게 부처님의 생활이었다.
이렇게 사는 게 탁발이다. 이런 전통이 계승되는 데가 미얀마와 스리랑카, 태국이다.
그런데 중국 대만 한국이 육식을 금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불교에서도 이 문제를 종단적인 논의와 합의를 통해 정리할 필요가 있다.
뭘 먹을 것인가를 크게 시비하지 않지만
식욕, 식탐에 빠지지 말라는 게 음식을 대하는 불교인의 태도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슨 음식이냐를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기를 안 먹는 게 좋겠다거나 가리는 음식이 있다.
고기를 직접 잡아먹거나 주문해서 잡아먹어서는 안된다.
그 고기가 나를 위해서 잡았다는 의심이 들면 먹지 않고,
우연하게 주어졌다면 고맙게 먹는다. 그게 기본적이다.
코끼리 고기를 먹지 마라, 사자 고기를 먹지 마라는 것도 불경에 설명이 있는데,
썩 명쾌한 느낌은 들지 않아서 기억이 잘 안 난다.
식욕과 식탐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그 때 그 때 주어진 음식을 잘 먹는 것,
그것이 수행자와 불교인들의 실생활 태도이지 않겠는가.
-스님에게 국가란 의미가 있는가, 필요악인가.
=잘 생각 안 해봤다. 생명평화 철학으로 볼 때
지역 현장과 그 지역 주체를 존중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만 존재해 있다면 국가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다.
국가가 있어도 그 지역 존재를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가.
=물론이다.
슬픔은 수만 가지인데 기쁜 것은 뭔지 모르겠다.
-스님의 삶에서 가장 기쁜 것 세 가지, 가장 슬픈 것 세 가지는.
=내 인생의 슬픔은 수만 가지다. 그런데 기쁜 것은 뭐지요. 모르겠다.
그렇다고 늘 기분 나쁜 것은 아니다. 특별하게 이런게 기쁘다고하는 그런 건 없다.
나는 기쁜 것에 별 관심이 없다. 편안하고 홀가분하면 됐지. 그 정도면 되지 않는가.
기쁨과 행복에 대해 너무 환상들을 가지고 있어. 그게 더 불행하다.
인생이란 게 별 것 없다. 세상에 별 사람도 없고, 별 길도 없다.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나는 특별하게 얘기할 만한 게 없는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공동체보다는 협동조합이 최선이라는 요지의 말씀을 했는데,
마을공동체를 성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가능하지 않게 하면 가능하지 않고, 가능하게 하면 가능하다.
내 세상을 내가 만드는 것 아니냐.
이 형편없는 중생이 거룩한 부처도 되는데, 뭘 못 하겠느냐.
그런 조건을 만들면 된다. 뭘 갖고 이루는 게 아니다. 삶에서 버려야할 게 많다.
비움을 통해서 버림을 통해서 낮춤을 통해서 나눔을 통해서만
우리의 꿈과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오로지 먼저 소유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
더 많이 쓰려고만 하는 한 우리의 꿈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다.
삶은 홀가분해지고, 더불어 사는 삶이 실현되도록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좌우 대립에 희생됐지만 마음속의 철조망 걷어내
-고통을 재생산하는 것은 무엇인가.
=더 많이 갖겠다, 이기적으로 하겠다고 하면 고통스러워진다.
싸워서 이기겠다는 삶의 가치는 가도 가도 또다시 그런 고통을 재생산할 뿐이다.
그 고통이 기쁨으로 승화되지 않는다.
반대로 생명의 법칙과 질서에 맞게 자기를 낮추고 비우고 나누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면,
거기에도 고통이 따르지만 미소로 승화된, 그런 것을 잘 보여주었던 게
예수의 삶이고, 부처의 삶이다.
-왜 유복자가 되었나.
=어려서 어머니가 사람들이 ‘아버지 왜 죽었느냐’고 물으면
‘병나서 죽었다’고 대답하라고 했는데 최근에서야 알았다.
아버지는 제주도 4.3사태 때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좌우 대립에서 희생됐지만
나는 순례하면서 늘 우리 마음속의 철조망을 걷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저절로 걷히지는 않는다. 주체적으로 노력을 해야 한다.
같은 인간으로서, 동족으로서 본래의 인간성을 회복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그 구체적 실행의 하나가 좌우대립 희생자 합동위령제였다.
그 때까지 위령제는 좌익과 우익이 늘 따로따로 했다.
좌익은 슬프다는 표현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억울하다고도 못했다.
우익은 위령탑도 있었다. 그러나 좌익이든 우익이든 한 식구다.
외세와 이념의 바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바람은 걷어치우고 한민족으로 함께 만나 노력해보자고 했고,
일단 돌아가신 분들이라도 함께 해보자는 의미에서 지리산에서 합동위령제를 지낸 것이다.
그런 철조망들을 녹이고 거둬내보자며 생명평화운동의 하나로서 진행된 것이다.
내 삶의 주체는 부처님도 하느님도 아닌 자기 자신
-스님은 먼저 삶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불교 사상에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에 잘 안되고 있다고 했는데,
대안은? 또 스님이 아니었다면 직업으로 어떤 직업을 택했을까?
또 하나. ‘인생살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요’라는 말씀이 마음에 든다.
=실제 인생살이 별것 아니요. 중이 안됐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농부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게 제일 좋은 것 같다. 불교가 자기 사상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게 중요하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에 대한 사실적 파악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실제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라고 설명했는데,
모든 게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돼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너 없인 나 못 산다. 그런데 우리는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인식으로 삶을 대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같겠는가, 다르겠는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이 차이다. 연기적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너 없인 나 못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 산소, 부모 없이 태어날 수 없다.
내 노력만으로 사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전도몽상(뒤바뀐 생각)이라고 얘기한다. 전부 지 잘난 맛에 빠져 있다.
내 노력으로 사는 것은 없다. 여러분들의 삶이 누구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느냐.
태양에 의지해서, 노력에 의지해서, 부모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부분적이다.
내가 연기적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 그게 불교 사상 정체성 확립의 핵심이다.
본래부처론, 본래면목론, 존재의 실상론. 연기론적 세계관으로 파악되고,
설명되는 불교 사상이 제대로 정립되면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삶을 살아가게 돼 있다.
다른 하나는 삶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내 삶의 주체는 내 자신이다.
부처님인가, 하느님인가. 내 삶의 주체는 내 자신이다.
그 시작을 나에게서 해라. 누군가한테는 평화를 애기하는데,
스스로는 삶을 평화롭게 살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주체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시작을 나에게서 해라.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라.
너에게 하지 말고 자신에게 해라. 좋은 말은 있는데, 좋은 삶은 없다.
평화란 말은 넘치는데 평화가 없는 것이다.
멋지고 평화로운 말은 넘치는데 멋지고 평화로운 삶은 없는 것이다.
삶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니, 어떤 이론도 자기에게 적용하고, 자기로부터 시작해라.
연기론적 세계관 없으면 선방에 앉아 평생 참선해도 헛된 것
-불교 선방에서 평생을 구도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사나이 대장부로서 이 보다 큰일은 없다면서 수행한다.
공밥을 먹고 사는데, 세상에 대한 빚을 어떻게 갚는가.
=빚 졌으면 빚을 갚아야 한다. 세상엔 공짜는 없다.
그렇다고 신세를 진 쪽에만 되갚으려 해서는 안된다.
어차피 누구에겐가 받았으면 어딘가로 가게 돼 있다.
꼭 여기서 받았으면 여기서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기꺼이 내주면서 살아야 한다.
본인들이 제대로 안 살았으면 신세 지는 것이다.
당연히 빚 갚을 일이 어떤 형태로든지 생긴다.
누구도 대신 갚아줄 수 없다. 본인이 갚게 된다.
다만 연기론적 세계관을 갖고 심산유곡 선방에 앉아있는 것과
그것 없이 앉아있는 것은 다르다. 앉아있는 것은 시비할 것은 없다.
어떤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인지가 중요하다.
심산유곡 은둔한 한 스님에게 한 구도자가 물었다.
수행자가 모든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인식하고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왜 스님은 자기 이익만 위해서 혼자 수행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스님은 ‘한순간도 중생의 아픔을 잊은 적이 없다’고 답했다.
어떻게 세상의 아픔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한다면, 북한 동포가 굶어죽는데도
나 혼자 편하게 먹고 놀 수 있겠는가.
연기론적 세계관으로 가면 혼자 있다고 지 편하게만 있을 수 없다.
연기론적 세계관이 없으면 뭐든 자기 문제로만 가게 된다.
오늘날 한국불교가 이 지경이다. 조용히 은둔해 사느냐. 이 자체만은 문제가 아니다.
연기론적 철학을 갖고 있으면 은둔 생활을 하더라도
세상의 아픔을 갖고 살기에 정신을 놓고 살 수 없다. 성성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없으면 자기 이익만 모색하니, 평생 참선을 하더라도 헛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그게 문제다.
성서의 진리와 불경의 법은 같은 것, 자기가 실천해야
-경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나는 것은
=저는 지식이 많지 않으니 단순하다.
성서에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불교에선 법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 이런 구절들이다.
이 두가지는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법은 진리다. 그것을 등불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실천하는가. 자기가 실천해야 한다.
진리가 뭐겠는가. 상호의존성이다. 그래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삶은 평화롭고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그 두 가지면 모든 게 해결된다.
-사회자(황대권 선생이 청중을 향해):질문 안하면 후회한다.
=인생에서 후회하는 것도 괜찮다. 어떻게 후회 안하고 살 수 있는가.
-스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비우고 나누고 싶어도 내일이 염려돼 벌기에 급급하다.
왜 이렇게 늘 불안한가. 어떻게 이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가.
=간단하다. 우리의 삶을 보자. 추위가 오면 아 추위가 싫다.
함께 하기 싫다고 한다. 여름이면 더위가 싫다며 함께 하기 싫다고 한다.
그렇다고 더위와 함께 하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아무리 싫어도 여름이면 더위와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온통 함께 일 수밖에 없다. 죽음도 함께 할 수 밖에 없다.
삶에서도 더위가 오면 더위와 함께, 추위가 오면 추위와 함께,
아침이 오면 아침과 함께, 저녁이 오면 저녁과 함께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도 왜 모르는가.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저장해 놓으면 그 사람은 말년이 행복할까.
죽음 앞에서 평화로울까.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들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환상일 뿐이다.
억만 금을 모아 놓은 사람도 죽음에 직면하면 나보다 더 불안해할 수 있다.
아픔이 없는 인생은 없다. 아픔이 없을 수 없다.
꽃잎이 떨어지지 않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에겐 아픔이다.
그러나 그런 아픔이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
우리의 삶이 만들어질 때 이런 저런 아픔이 있다.
아픔을 회피하려는 게 환상이다.
2008. 12. 10 .
조현 종교전문기자
한겨레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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