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각사(大覺寺) 대각회 사적비(大覺會 寺跡碑)
대각사 (大覺寺)의 경내 한편에는 법당신축을 기념하기 위한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아래는 사적비의 전문이다.
대각사는 서울시 종로구 봉익동 2번지와 3번지에 연하여 위치하고 있는 절이다. 19세(1882)에 출가, 22세(1885)에 대각의 문을 열고 선·교·율에 정통하여 근세 한국불교계에 가장 큰 위업을 남진 백용성 대종사께서 48세 되던 일천구백십일년 사월팔일(1911. 4. 8) 봉익동 2번지에 대각사를 창건하였다.
스님의 속성은 수원 백씨이며 이름은 상규 법명은 진종이고 법호가 용성이다. 갑자 일천팔백육십사년 오월팔일(1864. 5. 8) 전라도 남원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대각사 창건 8년후인 56세 때 기미년 삼월일일(1919. 3. 1) 독립선언서에 서명 그로 인해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3년의 옥고를 치르고 58세(1921) 봄 동 감옥에서 출옥하였다.
그 후 불교의 현대화 기치를 들고 조선 세조대왕 이후 처음으로 핵심경전 번역과 반포를 위해 대각사에 삼장역회를 설립하고 이곳에서 귀원정종·심조만유론 등을 저술 발간했고 이어 신역대장경·화엄경·금강경·수능엄경·금비라동자위덕경·선문촬요·관정복마경·각정심관음정사총지경·대승기신론·금강삼매경·범망경·대방광원각경·유자영감대명왕경·천수경·지장보살본원경·팔양경 등을 번역 출간하고 아울러 대각교 의식·수심정로·각해일륜·청공원일·팔상록·수심론·석가사·임종결·오도는 각·오도의 진리 등을 저술 간행하였다.
59세(1922)부터는 만주 연길 명월재 등에 칠십정보의 대지를 구입 대각사 소속 포교당을 건립했고 이어 경남 함양 백전 백운산에 화과원을 설립 선·농일치 사상을 제창하였다. 대종사 61세 사월이십팔일(1924. 4. 28) 대각사에서 불경을 보던 중 입 왼쪽에서 치사리 일과가 나왔는데 현재 경남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 서편 사리탑에 모셔져 있다. 동년 불일지를 창간했고 4년 뒤 대각일요학교 설립 삼장역회 기관지인 무아지를 간행하였다. 그 이듬해 대각사에 참선하는 모임의 선회를 개설하여 역경포교등 중생교화에 힘쓰시다 일 천구백 사십 년 이월이십사일(1940. 2. 24) 대열반에 드시니 세수가 77세요, 법랍이 59세다.
일천구백삼십년(1930) 말 대종사 67세 때 대각성전 26평 요사채 25평을 신축하였고 일천구백육십오년(1965) 회암주지 때 이층 영각 상하 이십평을 지었다. 조국광복후(1945. 12. 12) 상해 임시정부 주석이던 김구 선생과 임원들의 귀국봉영회를 이곳 에서 개최하였고 일천구백육십이이년(1962) 정부에서는 대종사께 대한민국건국 공로훈장 복장(제5호)을 추서하였다.
역대 주지로는 창건주지 백용성 대종사, 2대 회암 일천구백사십년부터 오십삼년까지(1941~1953), 3대 소천 오십삼년부터 오십사년까지(1953~1954), 4대 동암 오십사년부터 오십오년까지(1954~1955), 5대 회암 오십오년부터 칠십사년까지(1955~1974), 6대 효경 철십사년부터 팔십팔년(1974~1988) 현재까지의 4임기를 역임하는 동안 신도불자들의 정성으로 기존법당 26평에서 45평으로 증축했고 요사채 25평에서 70평으로 증축 기존대지 182평에서 116평을 매입 총 298평으로 확장했다. 일천구백팔십오년 시월부터(1985. 10.) 일천구백팔십육년 십일월까지(1986. 11.) 대각사 도량내 기존건물을 철거, 지하 1층 지상 3층 총건평 400평으로 신축하고 범종각 이층 10평을 신축 대각의 종 일천관 주조와 일주문 15평을 신축하였다.
창건시 모셨던 석불상은 중생사로 이안하고 새로 삼존 금동불상과 상?중단 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대종사 58세 되던 일천구백이십일년(1921)에 봉익동 2번지에 대각교회를 창립한 정신을 기리고 대각사상을 현창키 위해 일천구백육십구년 구월십일일(1969. 9. 11) 재단법인 대각회를 봉익동 3번지에 설립하였다.
초대 임원으로 이사장에 동헌, 이사에 고암, 자운, 동암, 소천, 성철, 회암, 보경, 도원, 광덕, 정진, 석응, 도문, 수길, 형하, 감사에 능가, 혜총, 김성철, 제2대 임원으로 이사장에 광덕, 이사에 자운, 고암, 동현, 회암, 도문, 석웅, 보경, 효경, 보광, 감사에 지관, 제3대 임원으로 선효, 4, 5대 이사장에 자운, 회암스님의 입적으로 4대 지관 동헌스님 자리를 5대 도업 적응스님의 뒤를 흥교가 이었고 강사에 여환, 보광. 사무국장에는 대각회 설립지부터 현재까지 이태석씨가 맡고 있다. 용성대종사께서 선?농일치사상을 제창하면서 실천도량으로 개설했던 많은 농지들이 일제의 압력으로 신탁되어 모두 유실되었고 화과원만이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에서 망실되었던 것을 선효 화상이 임야 사십일만오백 오십(410,550)평, 발 사천일백사십칠(4,147)평 등의 전답을 찾아 대각회에 환원시켰다. 또 농막 관리소 건물 등을 화과원으로 등기하고 전기불사 등을 하였다.
대각사를 거쳐 간 문중 고승대덕으로는 동산, 회암, 고암, 동현, 소천, 자운, 동암, 덕산, 정산, 능가, 광덕, 홍철 운문 스님 등이 있다.
동산 스님은 한국불교 정화 이후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셨고 고암 스님도 조계종 종정을 3대를 연임하셨다. 대각회를 설립한 창립 초대 이사장으로 동헌 스님이 일천구백육십년(1960)부터 십오년 간 대각회를 이끌었고 이어 회암 스님이 2대 주지로 부임 6.25의 참화를 딛고 입적할 때까지 대각사를 수호했으며 자운 스님은 조계종 총무원장 등 종단 요직을 거쳐 일천구백칠십육년(1976)부터 팔십칠년(1987)까지 12년간 대각회 이사장을 지내면서 대각사 발전의 기틀을 다지셨다.
능가 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일년(1961)부터 16년 동안 세계 불교지도자대회와 해외포교에 주력 하였고 광덕 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이년(1962)부터 팔십사년(1984)까지 대각사에서 용성 스님의 뒤를 이어 현대불교포교의 횃불을 들고 불광법회와 불광출판·불광사를 창립 문서포교의 일환으로 많은 저술을 하여 정화이후 한국불교포교의 새장을 열었으며, 홍철 법주는 일천구백오십구년(1959)에 룸비니 창립 중·고·대학생 포교의 선봉으로 룸비니를 독립하여 이끌고, 운문 스님은 일천구백육십이년(1962) 어린이 법회를 설립하여 어린이 불자양성에 주력하다 운문사를 창건 시무 중이며, 도문 스님은 용성 대종사의 많은 저술을 대각회 출판부 발행으로 복간하여 반포에 힘쓰며, 그 밖의 자운 스님 편역경전과 많은 분들의 역저를 대각회 출판부 이름으로 간행하고 있다.
또 대각회 소속사원으로 등기된 분원으로 서울에 금강사·성덕사·기원사·보명선원·육화사·불광사·본원정사·향림선원·불광반야원·법안정사, 경기도에 문수암·영원선원·개원사·정토사가 있고, 충남에 연실사·법정사·효광선원·법성선원·학림선원, 경북에 보광사, 대구에 대자비원·백련포교원, 부산에 감로사·구룡사·대법사·금수선원·장천사·대각선원·경덕염불원, 경남에 청송사·화과원·여래원·반야선원·제월선원, 전북에 자혜선원, 전남에 선응선원, 제주도에 양진선원·남국선원·보문선원이 있다.
본부의 기본재산으론 대각회 부지 130평, 대각사 부지 195평, 대각성전회관 400평, 일주문 15평, 범종각 이층 10평이 있다. 대각성전 건물은 세월이 흘러 신도수가 늘어나도 위로 몇 층을 더 올려 지을 수 있도록 기초와 골격을 튼튼히 하였고 돌담장과 정원공사, 법당내의 닫집, 탁자, 영단, 각 건물 단청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롭게 단장된 것이다.
대각도량 자비광명 누리의 어둠 밝힐 제
대종사 가르침을 큰 거울로 걸어서
대각하늘 오가는 구름 마음 비워 헤리라.
불기 이천오백삼십이년 사월 초파일(2532. 4. 8)
(단기 사천삼백이십일년(4321)
(서기 일천구백팔십팔년(1988)
효경 글을 짓고 고평석 글씨 쓰며
주인철 도안하고
이송재 조각하다.
출처 : 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