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2명이 '100명 머리' 먼저 베려고…참혹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폐허와 희망 ④ 천인침과 남경학살
전쟁은 정치의 한 부분이기에 군은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최고 권력이 된 일본 군부는 일관된 사령탑도 없이 여기저기 전선을 확대시켰다. 연일 승전고는 울려 퍼졌지만 상황은 자꾸 불리해지는 이상한 전국(戰局)이 계속되었다.
1938년에 개봉한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가 ‘천인침(千人針)’이다. 흰 보자기에 1000명의 여성이 붉은 실로 한 바늘씩 ‘武運長久(무운장구)’ 따위의 글귀를 떠서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내는 것이 천인침의 스토리다. 특별히 호랑이해인 ‘인년(寅年)생’ 여성은 자신의 나이만큼 수를 놓을 수 있었다. 일본의 고사성어, “호랑이는 천리를 가고, 천리를 돌아온다”는 말에서 유래한 풍습으로 병사들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일종의 부적이다. 오전(五錢) 혹은 십전(十錢)짜리 동전을 꿰매기도 했는데 사전(四錢)이 사선(死線)과 같은 ‘시센’으로 발음되고, 구전(九錢)이 고전(苦戰)과 같은 ‘구센’으로 발음되기에 사선과 고전을 넘어서 무사히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남경 점령 후 일본군을 시찰하는 마쓰이 이와누 상해파견군 사령관. 패전 후 전범재판에서 남경학살의 주범으로 인정돼 사형을 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길 가는 여성에게 한 수를 요청하는 것은 눈에 익은 거리 풍경이었는데 식구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여인들의 마음을 탓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이 인류평화라는 대의와는 정반대의 정복전쟁에 나섰다는 점이 문제였다.
통일된 지휘부가 없는 일본군의 특성은 중일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기야마 하지메(衫山元) 육군대신은 마쓰이 이와누(松井石根) 상해파견군 사령관에게 도쿄역에서 “남경(南京)까지 진격하라”고 격려했지만 정식 명령서가 전달된 것은 아니었다. 스기야마가 일왕 히로히토에게 ‘사변은 두 달이면 끝난다’고 상주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중일전쟁을 만주사변의 재판(再版)으로 착각했을 뿐이었다.
참모본부에서 “남경을 점령하면 국민정부에서 항전을 단념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林三郞, 『太平洋戰爭陸戰槪史』)한 것처럼 일본군은 남경을 점령하면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항복할 것으로 오판했다.
이런 예상이 빗나가자 남경학살의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장개석의 국민정부가 항전에 나서면서 일본군은 곳곳에서 고전했다. 일본군은 1937년 7월 29일 일본 본토 및 만주에서 온 증원군과 합세해 북경(北京)과 천진(天津)을 점령했지만 그때뿐이었다. 8월 13일에는 상해에서 일본 해군육전대와 중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일본 본토의 대부대가 증파됐지만 상해를 점령하지 못했다. 일본 제국의회는 7월 말의 제71 특별의회와 9월 초의 제72 임시의회를 열어 부랴부랴 25억 엔이 넘는 전비 지출을 승인했다. 이런 특별예산은 매년 편성되면서 일본 경제를 압박했다.
남경에서 일본군이 중국인을 산 채로 매장하고 있다.
-참모본부 ‘남경 점령 땐 장개석 항복’ 오판
일본군에 대해 전 국민적 분노가 일면서 동아시아 역사를 바꾸는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박차가 가해졌다. 국민정부의 토벌로 존폐의 위기에 몰려있던 중국공산당과 홍군(紅軍)의 구세주는 다름 아닌 일본군이었다. ‘중국 내부의 공산당을 먼저 섬멸한 후 외부의 적과 싸우겠다’는 장개석의 ‘선내양외(先內攘外)’ 정책은 서안사변으로 위기를 맞다가 중일전쟁으로 완전히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1936년 12월의 서안사변의 결과로 이듬해 2월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상을 했지만 국공합작에 목을 맨 모택동과 달리 장개석은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7년 7월 7일의 노구교사건과 일본군의 북경·천진 점령, 상해 공격은 장개석의 선내양외 정책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7월 15일 국공합작 선언을 발표하고 이후 속개된 회담에서 ①내전을 정지하고 국력을 모아 외세와 싸우자 ②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인정하고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라 ③각당(各黨)·각파·각계·각군(各軍) 대표회의를 소집해서 공동 구국에 나서자 ④대일항전 체제를 신속히 완성하자 ⑤인민생활을 개선하자는 5개 사항을 요구했다.
명분을 가진 쪽에 힘이 실리는 동아시아 정치의 특성상 중국공산당의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을 수 없었고, 1937년 9월 22일 정식으로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됐다. 주요 내용은 ‘공농정부(工農政府:소비에트 정부)는 중화민국 특구정부(特區政府)로 개칭하고, 홍군(紅軍)은 국민혁명군으로 개칭해 남경 국민정부와 군사위원회의 지시를 받고, 중국공산당은 지주들의 토지몰수 정책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국민정부의 토벌로 존폐의 기로까지 몰렸던 중국공산당은 기사회생했다.
화북(華北) 지역의 홍군은 홍비(紅匪)에서 ‘국민혁명군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됐고, 화중(華中) 지역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됐다. 팔로군 총사령은 주덕(朱德), 부(副)총사령은 6·25전쟁 때 인민지원군 총사령으로 유엔군과 맞섰던 팽덕회(彭德懷)였다.
장개석은 9월 23일 “중국공산당의 폭동정책 포기, 중국 소비에트 정부의 해소, 홍군의 해산은 모두 우리 국력을 동원해서 외적의 위협과 싸움으로써 국가의 존립을 보증하기 위한 기본조건”이라는 성명을 발표해 국공합작을 승인했다. 모택동은 9월 29일 ‘국공합작 성립 후의 절박한 임무’라는 문건에서 “중국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장개석씨의 담화는 너무 오래 지연되어 유감스럽기는 하지만”이라고 장개석을 겨냥해 한마디 토를 달면서도 국공합작을 반겼다.
중국인들의 열화 같은 환영 속에 제2차 국공합작이 성립됨으로써 일본은 전혀 다른 중국 정세에 직면하게 됐지만 일본 수뇌부 중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인사는 없었다. 모택동이 같은 글에서 “일본 침략자가 양당(兩黨)의 통일전선이 결렬됐을 때는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동북 4성(만주)을 탈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양당의 통일전선이 다시 결성된 오늘에 와서는 그들은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중국 영토를 탈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한 것처럼 더 이상 과거의 중국이 아니었다.
중일전쟁은 국민당의 토벌에 쫓기던 공산당을 살린 것은 물론 이후 전 중국을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모택동에게 제공해주었다. 모택동은 1937년 가을 섬북(陝北)으로 출발하는 팔로군에게 “중일전쟁은 중국공산당 발전의 가장 좋은 기회”라며 “우리의 정책은 7분(分) 발전(發展), 2분(分) 응부(應付), 1분(分) 항일”이라고 강연했다. 중공(中共)의 역량 가운데 70%로는 공산당의 자체 발전을 꾀하고, 20%는 국민당의 요구에 응해서 내주고, 10%만 항일에 쓰겠다는 뜻이었다(金俊燁, 中國共産黨史, 1961).
두 소위가 100명의 머리를 먼저 베기 경쟁을 벌였다는 동경일일신보 1937년 12월 13일 보도 내용.
-전쟁 수렁 깊어지는데 日 본토선 기고만장
일본 수뇌부의 희망과는 달리 일본은 이제 모택동의 말대로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중국 영토를 탈취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일본군은 11월에야 항주만(杭州灣)에 대병력을 상륙시켜 겨우 상해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해를 빠져나간 군사들은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으로 집결했다. 마쓰이(松井石根)가 이끄는 상해파견군과 제10군이 또다시 상부의 진격명령서도 없이 남경으로 진격하자 참모본부는 부랴부랴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이란 명칭을 새로 부과해서 남경 점령을 지시했다.
남경만 점령하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일본이 가진 전략의 전부였다. 장개석은 중국군의 자체 역량으로 남경을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1월 20일 당생지(唐生智)를 남경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는 한구(漢口)를 임시수도로 삼아 중앙기관을 이전했다. 이와 함께 중경(重慶) 천도를 선언했다. 남경을 점령하더라도 일본군은 종전은커녕 다시 한구와 중경까지 점령해야 했다.
일본군은 공군의 폭격까지 수반한 대공세 끝에 12월 7일 남경 외곽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12월 9일 남경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부터 총공격을 개시해 사흘 후인 13일 남경을 점령했다. 그 이전부터 주변 촌락에서 일본군의 살상행위가 보고됐는데, 남경 점령 후 6주간에 걸쳐 무자비한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 ‘남경학살(南京虐殺)’이었다. 성내(城內)는 주로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가 지휘하는 16사단이 학살의 주역이었다.
1939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비밀문서 제404호』가 ‘어느 중대장은 강간 후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돈을 쥐여주든지 아니면 그냥 죽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며 “군인들을 하나하나 조사하니 모두 강도살인, 강도강간 범죄자들뿐이었다”고 자인했을 정도였다.
학살 규모에 대해 중국 측은 30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본의 동맹통신사(同盟通信社)에서 1938~39년 발간된 『시사연감(時事年鑑)』 등에는 “적방(敵方:중국 측) 유기 사체(遺棄死?) 8만4000, 포로 1만500”이라고 적시하고 있어 일본 측 주장을 따르더라도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사귀환을 바라는 천인침의 장본인들은 살인귀·강간귀로 변해버렸다.
남경을 점령했지만 종전(終戰)은 요원했다. 장개석이 이끄는 중국군은 무한삼진(武漢三鎭)으로 불리는 양자강 내륙 유역의 한구(漢口)·무창(武昌)·한양(漢陽)으로 주력부대를 포진시켜 항일을 다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군이 점령한 도시들은 점(點)에 불과했다. 점과 점 사이를 잇는 선(線)을 장악하지 못했으므로 선에 의해 거꾸로 포위당한 형국이었다.
일본 본토에선 연일 승전고가 울려 퍼졌지만 정작 일본군은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기고만장하는 일본 정계와 군부 수뇌부의 착각이었다. /이덕일 2013.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