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倦怠)-[1937년 2월 5일 조선일보]
- 이 상
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 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峰山).
곡선(曲線)은 왜 저리도 굴곡(屈曲)이 없이 단조(單調)로운고?
서(西)를 보아도 벌판, 남(南)을 보아도 벌판, 북(北)을 보아도 벌판,
아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농가(農家)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左右)로 한 십여호(十餘戶)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壁)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나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또 같다.
어제 보는 답싸리 나무 오늘도 보는 김(金)서방 내일도 보아야할 신둥이 검둥이
해는 백도(百度)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꼬랑지에도 내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끄거워서 견질 수가 없는 염서(炎署) 계속이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할 일이 없다.
그러나 무작정(無酌定) 널따란 백지(白紙)같은 「오늘」이라는 것이 내 앞에 펼쳐져 있으면서 무슨 기사(記事)라도 좋으니 강요(强要)한다.
나는 무엇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연구해야된다.
그럼 - 나는 최(崔)서방네 집 사람채 마루로 장기(將棋)나 두려갈까 그것좋아.
최(崔)서방은 들에 나갔다. 최성네 사랑에는 아무도 없나보다. 최서방의 조카가 낮잠을 잔다.
아하 ~ 내가 아침을 먹은 것은 열시나 지난 후니까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낮잠 잘 시간잉 틀림없다.
나는 최서방의 족하(足下)를 깨워가지고 장기(將棋)를 한판 벌리기로 한다.
최서방의 족하와 열 번 두면 열 번 내가 이긴다.
최ㅣ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둔다는 것 그것부터가 권태(倦怠)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낫지 -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 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이거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번쯤 져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한 체 하다가 슬그머니 위험(危險)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 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전이다.
으레이 질 것이니까 골치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思想)이다.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대로 장기를 갖다놓고는 그저 얼른 얼른 끝을 내어 저줄 만큼 저주면 이 상승(常勝)장군은 이 압도적(壓倒的)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풀에 가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이리라.
나는 부득이(不得已) 또 이긴다. 인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 밖에 없다.
일부러 저준다는 것 조차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왜 최서방의 조카처럼 아주 영 방심(放心) 상태가 되어버릴 수가 없나?
이 질식(窒息)같은 권태 속에서도 사소(些少)한 승부(勝負)에 구속을 받나?
아주 바보가 되는 수도 없나.
대게 남아 있는 이 치사스러운 이간 이욕(利慾)이 다시 없이 밉다.
나는 이 마지막 것을 면(免)해야 한다.
권태를 인식하는 정신마저 버리고 완전히 허탈(虛脫)해 버려야 한다.
나는 개울 가로 간다.
가물로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다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내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무슨 제목(題目)으로 나는 사색(思索)해야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아무것도 생각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限量)없이 넓은 초록색(草綠色) 벌판, 지평(地坪)성,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졸(稚拙)한 곡예(曲藝)의 역(域)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 본다.
지구(地久) 표면적(表面的)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恐怖)의 초록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순(單純)무미(無味)한 채색(彩色)이다. 도회(都會)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漂着)하였을 때 이 신선(新鮮)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되어서 이 일망(一望)무제(無際)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沒趣味)와 신경(神經)의 조잡(粗雜)성으로 말미암은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겨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작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 종일 푸른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白痴)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체로 있다.
이윽고 밤이 오면 또 거대한 구렝이처럼 빛을 잃어버리고 소리도 없이 잔다.
이 무슨 거대한 겸손(謙遜)이냐?
이윽고 겨울이 오면 초록(草綠)은 실색(失色)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루(襤樓)를 갈기갈기 찢은 것과 다름없는 추악(醜惡)한 색채(色彩)로 변하는 것이다. 한겨울을 두고 이 황막(荒漠)하고 추악(醜惡)한 벌판을 바라보고 지내면서 그대도 자살(自殺)민절(悶絶)치 않는 농민들은 불쌍하기도 하려니와 거대한 천치(天痴)다.
그들의 일생이 또한 이 벌판처럼 단순한 권태 일색(一色)으로 도포(塗布)된 것이다.
일할 때 초록 벌판처럼 더워서 숨이 칵 칵 박히게 싱거울 것이오 일하지 않을 때는 겨울 황원(荒原)처럼 거칠게 구지레하게 싱거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흥분(興奮)이 없다.
벌판에 벼락이 덜어져도 그것은 뇌성(雷聲) 끝에 가끔 있는 다반사(茶飯事)에 지나지 않는다. 촌동(村童)이 벌레에게 물려가도 그것은 맹수(猛獸)가 사는 산촌에 가끔 있는 신벌(神罰)에 지나지 않는다 . 실로 전신주(電信柱)하나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무엇을 대상을 흥분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