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14-15)
히브리서 전반부인 1장 1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시고
완성시키신 예수님께서 구약에 나오는 여러 신분들에 대한 우월성을 지니고 계심을
증거한다.
히브리서 1장 1절에서 4장 13절까지는 특히 예수님의 신분과 구원자로서의
우월성을 증거한다. 구체적으로 당시 유대출신 성도들이 능력의 존재로 섬기기까지
했던 천사들 보다 우월함을 증거한다. 또한 하느님의 율법을 수여받았으며, 가장
탁월한 민족의 영도자로 여김을 받았던 모세보다 더 뛰어난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0장 18절까지는, 예수님의 대사제로서의 지위와
사명과 일의 우월성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 가운데서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7장 28절은 예수님께서 레위계통 사제들보다 더 뛰어나신 대사제되심을 밝힌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16절은 이러한 새로운 주제를 시작하는 서론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대사제임을 밝힘과 동시에, 본 서간의 수신자들에게 성도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사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권면하는 부분이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우리에게는 ~ 계십니다'로 번역된 '에콘테스'(echontes)는
'가지다'(have),'취하다'(take)등을 뜻하는 동사 '에코'(echo)의 현재 분사 1인칭
복수이며, 문장 서두에 나와 특별히 강조되고 있다.
우리가 대사제 예수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대사제되신 예수님이 우리 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우리가 그분의 완전한 제사로 하느님께
나아 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3장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지칭한 바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전체에서 예수님의 사제직을 비중있게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에 영원한 효력을 나타낸 완전한 제사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속죄를 위해 제사드릴 필요가 없음을 히브리서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강조가 불가피했던 것은 히브리서의 일차 독자인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적 제사, 즉 율법 중심의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서 저자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대사제'라는 단어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위대한'에 해당하는 '메간'(megan)의 원형 '메가스'(megas)는
지위 및 품위과 관련하여 인격적인 존재에 대해서 쓰일 때에 '높은', '위대한', '큰'등을
뜻한다.
저자는 본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사제직이 구약의 레위 계통의 대사제보다 훨씬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쓴 것이다. '대사제'로 번역된 '아르키에레아'
(archierea)의 원형 '아르케이류스'(archiereus)는 '첫째', '시작',
'우두머리' 를 뜻하는 '아르케'(arche)와 '사제'를 뜻하는 '히에류스'(hierues)의
합성어로서 '대사제'(우두머리 제사장)라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 Herodotus가 이집트의 주요한 사제를 나타낼 때, 그 사제는 왕 다음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유대 철학자 Philo는 유대 사회의 대사제란 백성을
대표하며, 속죄시에는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또한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들이 히브리서 저자에게 대사제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대사제는 자신의 직무를 온전히 수행하려고 하면,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하게
아는 자여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전하고, 하느님의 임재하심을
인간에게 보이며,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자이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이 역할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위대한 대사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저자는 본서에서 밝히고 있다.
이 위대한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층의 사제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점이
히브리서 4장 14절에서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그분이 '하늘 위로 올라가신'(승천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디엘렐뤼토타 투스 우라누스'(eielelythota tus uranus)를 직역하면, '하늘들을
통과하여 지나간'(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들을 지나가신, 즉 통과하신 위대한 대사제이시다. 저자가 '하늘'
(uranus)을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은, 하늘이 3층 혹은 7층으로 되어 있고, 그 하늘들의
정상에 하느님의 옥좌가 있다는 유대 사상과 관련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믿는 하늘들의 정상에
올라가신 것이다(마르16,19; 사도1,10).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행했던 일이요, 동시에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확실히
구별되는 놀라운 일이다.
두번째로 레위 계통의 사제들과 구별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곧 하느님과 동일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말한다(요한14,9.10). 특히 본서의 저자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지 않고
역사적 인물인 예수님의 이름만을 기록함으로써, 그분이 우리를 위한 대사제의
직무를 수행하실 수 있는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임과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던 하느님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다(요한1,14).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으로서(요한1,3), 그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본문에서 '고백하는 신앙'으로 번역된 '호몰로기아스'(homollogias)의 원형
'호몰로기아'(homollogia)는 '신앙 고백'을 뜻한다. 이것은 내적으로는 마음에
품어지고, 외적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되는 신앙, 즉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 신앙을 말한다(로마10,9.10).
'우리가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로 번역된 '크라토멘'(kratomen)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굳게 붙들다'를 뜻하는 '크라테오'(krateo)의 현재 가정법이며
권유를 나타낸다.
이 동사 '크라테오'(krateo)는 '힘', '권능' 등을 의미하는 '크라토스'(kratos)에서
유래했으며, '강하다', '힘을 소유하다', '승리하다' 라는 의미외에도 우위를 점함으로써
붙잡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서, 꽉 잡는 것, 간직하는 것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고 고수했는데, 이러한
습관을 잘 아는 저자가 히브리 그리스도인(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승으로 신앙 고백을 하도록 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여기서 '연약함'으로 번역된 '아스테네이아이스'(astheneiais)의 원형 '아스테네이아'
(astheneia)는 '약함'(weak), '허약한'(infirm), '연약한'(feeble)을 의미하는
형용사 '아스테네스'(asthenes)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신체와 영혼과 심령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의학 및 종교적 용어이다(루카13,12; 요한11,4).
본문에서는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목마름 등을 느낀다든지 또 다른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느끼는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도
경험하셨음을 나타낸다.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이중 부정문('우 ~메'; u ~ me)을 사용해서 저자는 예수님께 대해 동정심이 많은
분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동정하지'로 번역된 '쉼파테사이'(sympathesai)의 원형 '쉼파테오'
(sympatheo)는 '같은', '동일한'을 뜻하는 전치사 '쉰'(syn)과 '겪다', '고난을
당하다'를 뜻하는 동사 '파스코'(pascho)에서 유래한 합성어로서, '다른 이와 동일한
느낌을 받다' '공감하다', '동정하다' 라는 뜻이다.
이 동사의 어원이 나타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가지셨으며,
우리에 대해 동료 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우리와 동일한 감정을 지니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일하게 느끼셨음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감정을 공유하신
분이라고 증거한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한 완전한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해주는
내용이다. '유혹을 받으신'으로 번역된 '페페이라스메논'(pepeirasmenon)는 어떤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하다', 혹은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하다' 는 뜻을 가진 '페이라조'
(peiraz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저자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유혹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도 유혹을 당하셨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유혹은 그분으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불순종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철저히 계산된 술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성도로서 우리가 당하는 것은 대부분 유혹(temptation)의 경향을 띠고 있어서
(야고1,14), 아담처럼 단지 인간의 연약한 의지와 감정으로서 이에 대응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모든 유혹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탁함으로써
사탄의 세력에 대응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유혹을 이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죄는 짓지 않으신'
예수님의 무죄성과 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경험적인 구절이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가셔서 세례를 받고자 하셨을 떄, 세례자 요한이 말린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을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마태3,11-14).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기 때문에 죄인들만 그 대상이 되었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과의 완전한 일치를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도록 요청하셨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격렬한 유혹들은 내적 욕망에서 비롯되지 않고, 단지 밖에서
온 것들일 뿐이다. 이 점이 인간이 당하는 유혹(야고1,14)과 다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어떤 경험을 하셨다 해도, 그것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는 것과 달리 단지 밖에서 즉 사탄에게서 오는 것일 뿐이므로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받으면 촉발되는 잠재적인 본성도, 반드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죄의 습성도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