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간의 뜻
정간(正間)은 건축용어이다. 옛날부터 목수들이 건물의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로 써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말이 10여 차례 나오는데, 건축물의 가운데를 가리키는 말로만 쓰이지 다른 뜻으로는 쓰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건물의 왼쪽칸(左間)과 오른쪽칸(右間)이 있고 그 가운데는 정간(正間)이라고 하는 식이다. 또는 동간(東間)과 서간(西間)의 중간을 정간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제수를 배열할 때 정간에다 무엇을 놓고 좌간에 무엇을 놓고 우간에 무엇을 놓고 하는 식으로 쓴다.
정간은 건축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2.정간에 대한 억지해석
인간을 신과 대비해서, 신이 특별하고 인간은 평범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을 평간(平間)이라고 하고, 신을 정간이라고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평간이라는 말 자체가 없을뿐더러 신을 정간이라고 표현하는 사례도 없다. 정간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놓고 그것을 인간과 신의 관계로 억지 해석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에 무과를 볼 때 시험관들이 앉았던 자리였고, 거기에 대고 인사를 하던 관례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무과는 중앙에서 전관을 파견하여 그들이 감독하고 지방 수령의 지휘로 실시했다. 관아에서 하는 행사에 굳이 전관에 대고 인사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그것이 관례로 정착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 그렇다면 일제시대에는 왜 정간이 없었느냐 하는 것이다. 정간은 해방이 되고도 한 참 뒤에 생긴 현상이다.
선생안이 있던 자리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산 사람이 매일 같이 죽은 자들에게 절하는 경우는 우리 사회에는 없다. 그건 절이나 서낭당에서나 볼 수 있는 종교현상이다. 또 선생안을 꺼내는 것은 그 정의 창립기념일 때 제사지내는 경우이다. 그건 활터의 제삿날이지, 지금 광범위하게 실시되는 정간배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3.정간의 유래
정간은 건축물의 중앙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퇴임한 원로 구사들이 활을 쏘지 못하면서도 활터에 나와서 소일을 했다. 그들이 앉던 자리가 정 건물의 중앙이고 그것이 옛 건축용어로 정간이다. 강경 덕유정을 보면 덕유양로회관이라고 써서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다 보니 신사들이 정에 올라오면 의례히 그곳에 가서 인사를 했다. 그때는 '정간'이라는 현판은 없었다.
세월이 흐르자 원로 구사들이 죽고 그 자리가 비었다. 그래도 나이 먹은 사람들은 인사하는 관행을 계속했고,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 인사하는 것에 대해 의아해했다.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의문에 답을 해준 것이 '정간'이라는 현판을 걸고 그것을 신성시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정간이라는 현판이 정에 내걸렸다. 1970년대에 전라도에서 생긴 일이다.
이 정간은 1970~80년대 들어 급속히 퍼졌다. 전라도에서 시행된 활쏘기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정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흉내낸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버릇없는 젊은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경건심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다.
한 마디로, 정간은 구사들이 신사들 군기 잡으려고 만든 것이다.
4.구사들의 혼동과 정간의 실체
정간에 대해서 물으면 많은 구사들이 해방 전부터 있었다고 열변을 토한다. 해방 전에 집궁한 분들은 대부분 정간이 없었다고 답하는 반면, 해방 직후에 집궁한 분들이 정간은 해방 전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방 전부터 정간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분들에게 그러면 그 당시에 전주 천양정에도 정간이 있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1986년까지 전주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었다고 말을 해주면 그제서야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기억을 다시 더듬는다. 이것은 정간이 구사들의 위기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궁도협회 공식규범인 '한국의 궁도'라는 책은 광주 활량 임종남의 편집으로 1986년에 찍어냈다. 거기에 전주 천양정에는 정간이 없다고 나온다. 정간에 대한 대한궁도협회의 공식 공증인 것이다. 그러니까 정간이 전국에 두루 퍼진 것은 기껏해야 10∼15년 상간의 일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정간에 관해서 고증해준 분들은 다음과 같다. 해방 전후에 집궁한 분들이다.
성낙인(서울 황학정), 고익환(서울 석호정), 안석흥(인천 연무정), 하상덕, 김현원(인천 무덕정), 윤준혁(부산 오륙도정), 이종수(고흥 문무정), 박경규(금산 흥관정), 이용달(평창 대관정), 김복만(울산 청학정), 이상엽(강화도 거주), 김병세(수원 연무정), 김향촌(진주 창림정), 박병연(전주 천양정), 강현승(서울 수락정)
5. 정간과 정간배례가 불필요한 이유
건축 용어 밖의 다른 용례는 없다. 국궁계만 이상한 뜻으로 쓰고 있다.
기원과 뜻이 모호하다. 현재 정간에 대고 절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미는 '초시례'와 '등정례'에 다 들어있다. 게다가 대회 때마다 '순국선열과 먼저 가신 궁도인을 위한 묵념'을 해준다. 굳이 중복해서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종교상의 믿음과 부딪힌다. 특히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숭배로 비친다. 왜정 때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神社參拜)와 다를 것이 없다. 왜정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신사참배를 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옳다고 하지 않는다. 정간도 마찬가지이다. 정간 때문에 활을 사고서도 배우기를 포기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정간배례란 국궁사 5천년 동안 없던 일이다.
국궁인들이 동의한 적이 없다. 국궁계에서 논의를 거친 적이 없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퍼진 것이다.
서울 황학정에는 지금도 정간이 없다.
정간은 국궁계 전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정간은 옛날 관리들이 활을 쏘던 전라도 일부 지역의 풍속이다. 정간은 그런 활터들만의 풍속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을 다른 활터에서 따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사두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은 예절 상 권장할 사항이지 강요사항이 아니다. 게다가 정간이라는 현판까지 걸어서 그 자리를 강조하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활터의 예절이 이미 결단났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밖에 안 된다.
국궁이 세계로 뻗어갈 경우 외국인들에게 정간은 장애물일 뿐이다.
6.우암정의 정간을 떼어야 하는 이유
정간의 근거가 없다.
미신화한 대상을 모실 필요가 없다.
정간은 전라도 일부 지역의 풍속일 뿐이다. 굳이 우리가 따라할 필요가 없다. 청주 우암정은 옛날 관리들이 활을 쏘던 곳도 아니고, 무과를 치른 곳도 아니며, 원로 구사들이 나와서 소일하던 곳도 아니고 선생안도 없다. 정간이라는 현판이 있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이다. 우암정은 충북국궁의 수사정이다. 충북궁도협회가 계속 같이 존재해왔고, 그런 까닭에 국궁사에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전국 최초로 "충북국궁사"가 나왔고, 협회 홈페이지도 처음 개설했으며, 온깍지궁사회가 이곳에서 출범했다. 국궁사에서 중요한 많은 변화가 알게 모르게 이곳에서 생겼다. 우암정은 전국 활터의 풍속을 선도하는 셈이다. 이런 정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들어앉은 정간을 그냥 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간은 반드시 떼어내야 한다.
오 천 년의 역사를 지녔고, 앞으로도 무궁하게 이어갈 국궁에 뜻도 모호하고 15년 안팎 정도밖에 안 된 정간을 계속 놔둘 수는 없다. 국궁계의 역사를 새로 쓰는 우암정에서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못한다.
우암정에서 정간을 내리면 국궁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이로써 우암정은 국궁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며 그 역사의 중심에 선다.
반성 없이 진행된 국궁계의 관행에 쐐기를 박고 새로운 흐름을 열게 된다.
첫댓글 정간 밑에 걸려있는 태극기에 경례하면(가슴에 손을 얹는) 분위기 싸늘해져요. 이건 무슨 현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