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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묵상글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믿는 대로.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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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믿는 대로
부활 4주 수요일-20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달리 얘기하면 이 세상에 오신 이분은 어떤 분이실까?
구원하려고 오신 분일까 아니면 심판하고 벌하려고 오신 분이실까?
이에 대해 당신은 절대로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다르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보면 다르게 믿는 존재가 나옵니다.
다름이 아닌 더러운 영들입니다.
더러운 영들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오시자 이렇게 외치지요.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런데 사람한테는 그렇게 되지 않지만 하느님께는 믿는 대로 됩니다.
사람한테는 믿는 대로 안 되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는 믿는 대로 되기에 주님께서는 내내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그런데 이는 이런 말도 되는 거지요.
주님을 구원자로 믿음이 너를 살렸다!
주님을 심판자로 믿음이 너를 심판했다!
그러므로 빛으로 오셨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빛으로 나를 구원하러 오셨다고 믿으면 우리가
어둠 속에 머물지 않고 빛 가운데로 나올 텐데
빛으로 나를 단죄하러 오셨다고 믿으면
단죄하는 빛을 피하여 어둠 속에 머무르겠지요.
그러니까 이렇습니다.
죄의 어둠을 감추고 숨으려는 사람에게는 빛이 단죄가 되겠지만
죄의 어둠을 드러내고 벗어나려는 사람에게는 빛이 용서가 됩니다.
옷이 더러움을 탔습니다.
정말로 아끼는 옷이 그리되면 어떻게든 원상 복구하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별로 아끼지 않으면 그냥 처박아두거나 버려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죄도 그렇습니다.
나와 나의 인생을 정말로 사랑하면 죄를 씻으려고 할 것이며,
깨끗이 씻어지도록 자기 죄를 하느님 사랑 앞에 내놓을 것입니다.
다윗이 히쏩의 채로 내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라고 한 것처럼.
그러나 자기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죄는 덮어버리고 하느님이 아니라 어둠과 동거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책감으로 하느님 앞에서 숨은 것처럼.
원래는 죄를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어둠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죄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썼는데도 거듭 죄를 지어 자기를 포기하게 되면
그때 죄를 덮으려고 어둠을 사랑하거나 사랑까지 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어둠을 편하게 생각하고 어둠과 동거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죄지은 나를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하느님 사랑의 내가 되지 않으면
나는 나를 얼마든지 포기하고 어둠과 동거할 것이며
빛도 하느님의 용서가 아니라 단죄로 오해케 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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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
필립보의 이 질문은 우리도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체험을 한다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것이라고, 혹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이 질문이 하느님을 아는 것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가르침 다음에,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라고 말씀하시자,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고 필립보는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하느님을 보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8)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곧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은 사람은 아버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 1,3)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뵙고 하느님을 뵐 수 있게 됩니다.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하느님을 보는 것의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런데 거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둘째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들어주겠다.”(요한 14,14)고 하시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오늘 <복음>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으로 ‘계명을 지키는 일’, 곧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힘을 입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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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마음 한 몸으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짐작하여 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오래도록 함께 지낸다 해도 마음의 문을 열어 서로를 내보이지 않는 이상 상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내보여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상대를 알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읽을 수 있는 관계 형성을 잘해야 합니다. 비록, 어두운 밤일지라도 마치 남의 이목이 집중된 장소에서 하듯 눈속임이 없는, ‘동상이몽’이 아니라 ‘이심전심’의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뵙게 하여 달라고 청하는 필립보에게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고동락하셨지만, 아직도 믿지 못하는 필립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함께 있었다고 해도 마음의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가정 안에서도 고부간, 부부간에, 부자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함께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마음’으로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15,11-32)에서 보면 작은아들이 방종한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로움 덕분에 작은아들은 모든 권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를 타이르자, 그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하며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그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큰아들이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고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훌륭한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가, 불평을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읽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는 한 번도 종으로 여긴 적이 없으나 스스로 종처럼 지냈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만 아버지를 섬겼으니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 되지 못하였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얻기 위해 계산된 가운데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으니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동생에 대한 사랑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하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합니다.’하고 말하면서도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2-13). 고 약속해 주셨음에도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늘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그분의 뜻에 일치하여 청해야 하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청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나 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 주시고 일시적인 유익이 아니라 영원한 유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방인은 물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할 소명이 있으니 우리는 분명 큰일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은 고사하고 그분의 일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복음 사업을 주도하시는 성령께 의탁하면서 ‘부족한 저의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당신을 안다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합니다. “누가 가족끼리 좀 더 가까워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이 가족들 사이에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 줄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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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5대째 천주교를 믿는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관념이 아니었고, 교리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은 생활이었고,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밥을 푸시면서 성호경을 그으셨습니다. 이름은 세례명을 불렀습니다. 생일에는 본당에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기일에는 가족이 모여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길게 줄을 서서 부활, 성탄 판공을 보았습니다. 교무금, 헌금은 꼭 챙겼습니다. 아침, 저녁기도를 바쳤습니다. 삼종기도를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피정, 교육은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본당 신축헌금을 냈고, 형편이 어려우면 노력봉사를 하였습니다. 9일기도, 54일 기도를 하셨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디 여행을 가면 제일먼저 주변에 있는 성당을 찾아보았습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에도 참례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물려받았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존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신앙을 교리에서 배우기 전에, 교회에서 배우기 전에 먼저 집에서 배웠습니다. 신학교의 가르침은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의 연장이었고, 집에서 하는 신앙생활이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확인이었습니다.
80년대부터 신자의 수가 급격하게 늘었습니다. 매 10년마다 100만 명씩 신자가 늘었습니다.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배우는 신자의 수보다는 성당에서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늘어나는 신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전을 신축해야 했고, 본당은 분가해야 했습니다. 1년을 배워야 하는 교리는 6개월로 단축해서 배우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영성의 깊이를 채우는 것보다 친교와 활동을 넓히는 것에 치중했습니다. 주일미사의 참례 수가 80%가 넘었는데 신자가 늘어나면서 주일미사 참례 수가 점점 낮아졌습니다. 20%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고, 팬데믹으로 그마저도 힘들어졌습니다. 도시생활과 핵가족으로 가정에서 신앙이 전수되기도 어려워졌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으로 덕을 쌓아 영원한 생명을 얻기보다는 재물, 권력, 명예로 현세해서 성공하는 삶을 먼저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기 보다는 대학만 갈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면 잠시 성당에 가지 않아도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성직자와 신자는 늘어났지만 성직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성직자도 늘어났습니다. 냉담자도 늘어났습니다. 뿌리가 깊지 않는 나무가 바람에 쉽게 넘어지듯이, 샘이 깊지 않으면 가뭄에 곧 말라버리듯이 교회에 활력이 떨어지고, 젊은이들이 떠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미 전한 복음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들여 그 안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게 된 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다만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포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있습니까? 환난도, 칼도, 죽음도, 세상의 권신도, 천신도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전해 준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초대교회의 신앙 선조들에게 전해 진 복음입니다. 이것이 저의 부모님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오늘은 그 복음을 우리에게 전해준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사도들은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삶의 중심이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한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복음의 빛이 이웃에게 전해 질 것이고,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가 참된 행복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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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매일 일기예보를 확인합니다. 운동으로 자전거를 타는데, 비가 오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즘 일기예보는 거의 정확합니다. 몇 시쯤 비가 온다고 하면, 정말로 그 시간에 비가 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정확한 일기예보를 우리는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고서 안심하고 오전에 나갔는데 비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결국 비를 쫄딱 맞으면서 자전거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했어도 의외의 상황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 삶은 어떨까요? ‘이렇게 될 것’이라는 예상대로 정확하게 되던가요? 너무나 자주 우리 삶은 정확하지 않은 결과로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몇 년 전, 네덜란드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안내해주시던 분이 “이 나라의 일기예보는 너무 정확합니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일기예보가 거의 “맑음, 흐림, 비”로 표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워낙 날씨가 불안정해서 맑았다가 흐렸다가 또 비까지 쏟아질 때가 자주 있어서, 경우의 수에 늘 맞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행복의 기운을 느끼는 ‘맑음’의 삶만이 나의 삶이 아닙니다. 우울한 ‘흐림’의 삶도, 또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 찬 ‘비바람’의 삶도 분명히 우리 삶입니다. 이 모든 가능성을 인정해야, 비 올 것을 대비해서 우산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 삶을 잘 준비해서 어렵고 힘들 때를 거뜬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흐르지 않는 삶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뜻에 맞게 흐르는 세상임을 인정하고 그 주님의 뜻을 찾고 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어려울 때의 준비를 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갈 곳은 하느님 나라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을 본 사람이 곧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표현은 요한 복음에서 다섯 번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께 맡기셨기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하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통해서 자기 원하는 것을 찾고 있습니다. 완전한 예수님께 대한 믿음보다 불완전한 세상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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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입힌다(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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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순례 여정
-영원한 도반인 주님과 형제들과 함께-
지칠줄 모르는 한결같은 열정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교황님의 영적 건강도 여기에서 기인합니다. 제41차 해외 사목 방문후 귀국시 비행기내에서의 인터뷰 한 대목이 긴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다음엔 마리세이유, 다음엔 몽골에 여행할 것입니다. 다음엔 다른 곳이 있을 것입니다. ‘내 일정이 계속 나를 움직이게 합니다(my schedule keeps me moving)’”
우리의 하루하루 날마다의 순례 여정중 규칙적인 일과에 따른 삶이 얼마나 한결같은 삶에, 영적 건강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하루의 일과표에 충실할 때 길을 잃지 않을 것이며 저절로 확보되는 영육의 건강입니다. 교황님이 참 강조하는 면은 역동적 삶입니다. 계속 움직여야 함을 참 많이 강조합니다.
5월의 기도지향은 교회의 활동과 단체들에 대한 선교 사명의 강조입니다. 교황님은 그들이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에 대해 성령의 충동에 따라 응답하여 교회와 조화중에 머물면서 언제나 움직임중에 있어야 한다. 조화는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활동들과 단체들은 날마다 그의 사명을, 복음화한 사명을 발견해야 하고 그들 자신의 은사를 세상이 필요로 하는 섬김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로 결론을 맺습니다.
강조되는 말마디는 ‘날마다’ ‘세상’ ‘섬김’입니다. 순례 여정중인 교회 공동체는 결코 세상과 유리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세상 한 복판에 있는 우리 순례 여정중인 요셉 수도 공동체입니다. 계절의 여왕, 5월 성모성월 답게 어제도 빛과 생명으로 충만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고, 많은 이들이 수도원을 찾았고 고백성사도 봤습니다. 새삼 세상에 필요에 응답하면서 존재 자체로 선교와 섬김의 사명을 다하는 요셉 수도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저의 수도여정중 결정적인 전환점은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일 것입니다. 삶은 여정임을 통절히 깨달았고 그 깨달음은 지금도 계속 새롭게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중 삶의 여정을 인생사계(人生四季)로 비유한 묵상입니다. 우리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즉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제 써놓은 인생사계란 글도 생각납니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좋다
인생사계(人生四季)도 그렇다
봄엔 봄처럼
여름엔 여름처럼
가을엔 가을처럼
겨울엔 겨울처럼 산다
인생사계(人生四季)도 그렇다
비교할 것 없다
부러워할 것 없다
오늘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과거와 미래는 하느님께 맡기고 인생사계 어느 때든 새롭게, 좋게, 아름답게 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새롭게, 좋게, 아름답게, 잘 살면 어제는 저절로 치유되고 내일은 내일대로 잘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해도 충분합니다.
지난 주 가톨릭 신문과 가톨릭 평화 신문의 1면 톱기사는 똑같이 코로나 이후 이완된 교회 공동체의 심각성에 대한 일치된 우려였습니다. 한마디로 순례 여정중의 교회 공동체를 떠난 길 잃은 영혼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 참례율이 11.8%라 하니 심각성을 이해할만 합니다. 더불어 순례 여정 교회 공동체에 다시 합류함으로 속히 방황에서 벗어나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더불어 순례 여정중인 우리에게 금과옥조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바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라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요 요약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우리 더불어 순례 여정 교회 공동체의 자랑은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기에 결코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는 것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의 인도하에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 여정인 것입니다. 다음 베네딕도 규칙도 이에 화답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새삼 천국입장은 개인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이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공동소풍을 통해서도 새롭게 확인한 진리입니다. “함께”했기에 환선굴 소풍도 가능했지 “혼자”라면 재미도 의미도 없고 엄두도 못낼 것입니다. 아마도 거기에 혼자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며 바로 천국입장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두분뿐 아니라 나머지 열분의 사도들마다 색깔이 다 다릅니다. 한명도 힘든데 이 다양한 열둘의 제자들과 함께 한 예수님의 리더십에 경탄하게 됩니다. 열두 제자들중 유다는 배신으로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했고, 장수를 누린 사도 요한을 제외한 열은 한결같이 사도로 파견되어 복음 선포 사명을 실천하던 중 순교했습니다.
분명 스승 예수님과 함께 했던 추억이, 또 언제나 함께 하는 파스카 예수님 은총이 사도들에게 지칠줄 모르는 선교 열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귀한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 가정공동체에 주시는 복음입니다. 파스카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음은 열둘의 제자들 공동체나 우리 요셉 수도 공동체나 똑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필립보의 갈망은 인간 모두의 근원적 갈망입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 살고 있는 우리 수도형제들을 향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집은 수도원에서 몇십년을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는데 아버지와 하나되어 사시는 주님을 모르느냐고 묻습니다. 더불어 순례 여정과 함께 가는 주님과 형제들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로움과 자유로움이 바로 주님과 형제들간의 깊은 우정의 정도를 반영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이신 파스카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그리움, 외로움, 기다림의 갈망도 점차 사라져갈 것입니다. 이미 주님과 일치의 충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도 우리를 격려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복음의 핵심인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굳건히 정주의 뿌리를 내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받아 들여 굳건히 서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이 복음 말씀을 굳게 지킨다면, 또 여러분이 헛되이 믿는 게 아니라면, 여러분은 이 복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니 주님과 형제들과 함께, 복음을 믿는 우리 순례 여정 중인 교회 공동체는 그대로 구원의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순례 여정중 우리 모두 지상천국의 구원의 공동체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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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0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 말씀이 제 마음에 한참으로 머물렀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이 말씀 안에서 머무르고, 이 말씀 위에 잠시 앉아 있자니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그리고 주님께서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그 사람 안에 있고 그 사람이 내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더욱이 ‘내 안에 있다.’라는 말은 꺼낼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물론 주님이 계실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이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그들 안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뜻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전해줍니다.
우리 안에 들어있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주고 삶의 의미가 되어줍니다. 만약 우리 삶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삶의 희망을 잃고 말 것입니다.
자동차를 생각해보세요. 엔진 없는 자동차는 껍데기만 자동차일 것입니다. 혹은 박물관에 전시된, 더 이상 운행할 수 없는 자동차일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신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 삶의 엔진이 되어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희생과 헌신 기쁨 등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을 하늘나라로 이끌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리안
두리안이라는 과일 아시나요?
누군가는 ‘과일의 왕’이라고 칭하고
누군가는 ‘냄새가 고약한 과일’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잘 먹습니다.
물론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지는 않지만
두리안의 맛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먹기 힘들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격하게 싫어할 수 있습니다.
피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맛을 음미하다 보면 특별한 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삶 속에 자리한 고통이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 삶 속에 자리한 아픔이 그렇지 않을까요?
힘들고, 싫고, 피하고 싶지만
음미하다 보면….
특별한 맛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대의 삶이 특별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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