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밥
엄재국
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옥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꽃이고, 이 꽃보다 더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없다. 모든 생명체의 근본 목표는 꽃을 피우는 것이고, 따라서 모든 생명체는 이 꽃을 피우기 위해 그토록 사납고 처절한 생존투쟁을 버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꽃, 사슴꽃, 풀꽃, 벚꽃, 서리꽃, 눈꽃, 아기꽃, 소년꽃, 청년꽃, 어른꽃, 노인꽃, 엄마꽃, 아빠꽃 등, 모든 생명체는 꽃이며, 이 꽃의 일생을 살다가 가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것이고, 돈을 쓰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어느 누구와 싸우고 우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도 꽃을 피우는 것이다.
선도 없고 악도 없다. 도덕도 없고 부도덕도 없다. 산다는 것은 꽃을 피우는 것이고, 이 종족의 명령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개인은 없고 종만이 있는 것이다. 대추나무와 감나무가 사지가 찢어지도록 열매를 맺는 것도 종족의 명령이고, 사과나무와 배나무가 사지가 찢어지도록 열매를 맺는 것도 종족의 명령이다. 매미와 개구리가 온 산천이 떠나가도록 자기 짝을 찾는 것도 종족의 명령이고, 오징어와 연어가 그토록 수많은 알들을 산란하고 죽어가는 것도 종족의 명령이다. 꽃은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종족의 명령이고, 이 종족의 명령은 종의번영과 발전을 위해 더욱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 사기를 치는 것, 살인을 하고 방화를 하는 것, 술을 마시고 싸우는 것도 다 허용되는 것이고, 잠자리와 나비들이 혼인비행을 하고, 소나무의 정액(송화가루)이 온산천을 뒤덮거나 발정난 암소들이 그토록 사납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도 다 허용되는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불륜도, 돈주앙과 카사노바의 엽색행각도, 심지어는 제우스의 변태성욕과 아프로디테의 연애사건도 다 허용되는 것이다. 선과 악을 따지고 도덕과 부도덕을 따지며 타인들을 비난하거나 찬양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더욱더 좋은 자리와 그 위치에서 꽃을 피우기 한 생존투쟁일 뿐인 것이다. 이 세상의 삶은 온힘을 다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성적 욕망은 개인의 욕망의 탈을 쓰고 나타났을 뿐,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들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마저도 더욱더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피우라는 종족의 명령일 뿐이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얼굴도 꽃이고, 아궁이의 마른나무도 꽃이다. 부지깽이가 벌겋게 타는 것도 꽃이고, 밥물이 넘치는 것도 꽃이다. 작약, 홍매와, 복사꽃, 이팝꽃, 안개꽃----. 이 모든 꽃들은 엄재국 시인의 표현대로 [꽃밥]인 것이다.
엄재국 시인의 얼굴도 꽃이고, 그의 시도 [꽃밥]이다.
[꽃밥], [꽃밥], [꽃밥]----. 이 [꽃밥]은 한국현대시의 경사이며, 엄재국 시인은 이 [꽃밥]으로 영원불멸의 월계관을 쓰게 된 것이다.
모든 꽃들은 종족의 꽃이지, 사적인 개인의 꽃이 아니다.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자기 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토록 서럽게 울고 목숨까지 버리는 것도 종족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그의 영혼과 육체는 물론, 그의 이성과 양심까지도 종의 부림을 받는다.
개인은 없고 종만이 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자 종족의 명령인 것이다.
꽃을 피워서 밥을 짓다니 마법처럼 보입니다. 할머니의 부지깽이가 아궁이 드나들 때마다 마른 가지들이 꽃을 활활 피워내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나무들의 마지막 꽃이 불꽃인 줄도 새삼 알겠습니다. 오월의 이팝나무 꽃이 밥물이 넘쳐서 피운 걸 알겠습니다. 세상에 안개가 자욱한 것은 돋보이게 할 어떤 꽃을 준비한 까닭일까요. (시인 반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