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장 구속사 강해
이삭의 계보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창 25:19)는 계보의 시작은 역사의 초점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에게로 옮겨졌음을 의미하고 있다. 창세기에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대 변환점이 있을 때마다 독자들의 관심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계보(תדלות : 한글 성경은 대략, 후예, 계보, 사적 등으로 번역됨)를 기록하고 있는데,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역사의 특성을 함축적으로 표시하고 이후부터 새로운 성격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나타내 주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 25장 12절에서 이스마엘의 계보를, 그리고 19절부터 이삭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서로 다른 의미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의 역사가 달리 시작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1. 이삭과 이스마엘 계보의 분리
여기에서 성경은 굳이 이스마엘의 계보와 이삭의 계보를 분리시켜 서로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해 나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특히 성경은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창 25:12)라고 함으로서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라의 여종에게서 출생했음을 강조하면서 아브라함의 계보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마엘의 역사가 더 이상 아브라함과 관련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반면 이삭에 대해선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명백하게 표하고 있는 동시에 이삭의 역사가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가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이러한 기록의 방법을 통해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계보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는 반면에 이삭은 아브라함의 후계자로서 아브라함의 뒤를 이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서 독자들의 시선을 이삭에게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은 자기의 혼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리브가가 잉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중요시 여기고 리브가의 수태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이다(창 25:21). 리브가에게는 수태할 능력이 없어 이삭은 아들을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삭이 단순히 아들을 얻어 가계를 잇기 위할 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다른 방법으로도 아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이삭이 생산해야 할 아들은 인륜지정에 근거한 아비와 자식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사명을 수행해야 할 동반자여야 한다. 이삭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아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삭은 동역자인 리브가를 통하여 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이처럼 이삭의 간구가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삭의 간구에 응답하시어 리브가에게 잉태할 수 있는 복을 주셨던 것이다(창 25:21)
하나님은 이삭의 간구에 정당성을 인정하시고 응답해 주셨다. 그것은 이삭의 간구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영과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표시이기도 하다. 이삭은 60세가 되어서 마침내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의 개성이 어찌나 특이하고 서로 대립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서로 다투는 이질성을 보이고 있었다(창 25:22). 하나님께서 건설하고자 하는 새 나라를 세워나가야 하는 이삭과 리브가에게 있어서 자녀들은 동질의 사상을 가지고 함께 그 사역을 이루어 가는 동역자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리브가의 태 속에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다.
이에 이삭은 심히 염려되어 하나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묻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삭의 물음에 대하여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 25:23)고 대답해 주셨다.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했으나 이 두 아들들은 각기 다른 민족을 형성하게 되어 그 두 민족은 태에서부터 분리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삭에게서 나온 두 국민들은 서로의 세력을 겨누게 될 것이며, 형의 민족은 동생의 민족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때가 찬 후 에서와 야곱이 출생했다.
2.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다툼에 담긴 의미
에서는 사냥을 좋아하여 주로 들에서 생활을 한 반면 동생 야곱은 집안에서 어머니를 돕는 일을 즐겨 했다. 그 결과 자연히 에서는 들사람이 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며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반면에 야곱은 주로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자연히 야곱의 성격은 가정적이고 온화하게 되었다. 이러한 주위 환경은 후에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에서는 주로 밖에서 시간을 보내며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는 과정에서 자신의 힘과 지혜를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사냥을 주로 하는 에서는 남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했다. 무슨 일이든지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에서는 점점 자신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에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에서에게 있어선 힘의 철학에 근거한 인생관이 전부였고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오직 자기 자신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반면에 야곱은 대부분의 시간을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성장했다. 야곱은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자기의 인생을 경영함에 있어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가 얼마나 중요하며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익히 알게 되었다. 더욱이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야곱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살아가는 아버지 이삭의 역사적인 사명 의식에 대하여 긴밀하게 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15세 가량 될 때까지 아브라함과 함께 살았음을 보아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주위 여건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과 그 언약을 성취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게 했을 것이다.
특히 아브라함의 유업을 잇는 일에 있어서 이스마엘과 이삭이 다툰 성격은 단순히 유산 상속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인가?” 하는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이미 알고 있는 야곱으로서는, 형 에서가 가지고 있는 장자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에서가 장자권을 경시하게 된 것은 그의 관심의 대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이 세상에서 누리는 평안 때문이었다. 특히 에서가 속한 사냥의 세계에서는 힘있는 자만이 평안을 누릴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힘없는 자는 언제나 남이 잡아놓은 사냥감을 얻기 위해 아첨해야 하는 비굴한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반면에 힘있는 자는 언제든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에서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장자의 명분보다는 실제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의 원천이었다. 때문에 에서는 팥죽을 먹고 힘을 얻어 다시 사냥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선 아무런 효력이 없는 장자권을 포기해 버리고 야곱에게 양도하기로 한 것이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얻고자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자신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 의식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야곱에게 있어서 인생의 본분으로 여기고 새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전적으로 참여할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자 했고 그 일에 참여하기 위해 장자권이 필수적임을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야곱을 지극히 사랑하셨다. 야곱이 에서의 장자권을 살 수 있도록 그러한 기회를 허락해 주신 것이다. 이 일은 단순히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발생한 장자권 싸움이 아니라, “누가 과연 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업으로 받을 것인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