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 마태 (눅 5:27-32)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 시간에 “하나님의 선물 마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마태라는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태에 대한 기사를 볼 때 감명스러운 건 예수 믿고 세리는 물론 온 가버나움 사람들을 다 불러 큰 잔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큰 잔치라 한 것을 보면 아주 큰 잔치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 믿고 감격스러웠으면 예수님의 부름을 받자 말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따랐을 뿐 아니라 큰 잔치를 했을까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셨을까요? 그 감격의 이면에는 그동안의 그가 얼마나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한 마디로 그는 완전히 밑바닥 인생까지 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절망에 있었기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토록 감격했을까요?
1. 그는 지식의 절망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27절에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는 세리였습니다. 세리에 대한 배경을 연구해 보면 당시 로마는 아무나 세리를 시키지 않았습니다. 수학에 능숙해야 할 뿐 아니라 적어도 3개 국어인 아람어 헬라어 그리고 그 지역 용어인 히브리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세리가 되었습니다.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섞여 살거나 무역하는데 외국어 모르면 세리하겠습니까?
세리는 고학력자였습니다. 그런데 세리하겠다고 공부했을까요? 여기에 그의 학문에 대한 좌절과 실망감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고 어려운 과정을 겪으며 학위 땄더니 고작 할 것은 세리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지식이 자기를 보장해 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식 가지면 대단한 능력자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 어디에 쓸데도 없이 너무 허접하더라는 것입니다. 지식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르니까 교만하지 지식이 얼마나 허접한지 알면 교만할 수 없습니다.
17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라는 합리주의가 나타나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까지 논했지만 후에 임마누엘 칸트가 나타나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의 이성이 과연 최고 존재에 대한 탐구를 착수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함으로 철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 깨닫게 함으로 계몽주의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던 일이 있었는데 지식이 그처럼 초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창조론과 진화론을 재판하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까지 재판하여 하나님이 안 계시다 판결하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입니까? 그건 인간은 할 수 없다고 기각시켜야지 판사가 얼마나 교만하든지 하나님이 없다고 판결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마태는 참으로 정직한 사람입니다.
2. 그는 인간에 대해서도 실망했습니다.
먼저 자신의 악함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잘못되면 얼마나 잘못되고 악하면 얼마나 악한지 스스로 체험했습니다. 그는 민족의 피를 빨아 먹는 자라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매국노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가버나움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라 그 곳을 통과하는 물건들에게 세금을 받아 냈는데 문제는 로마에 상납하고 남은 것은 착복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에게도 과중한 세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욕을 먹는 직업이었습니다.
세리와 창기는 당시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딤전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돈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악함도 알았습니다. 잘못 가는 그를 올바르게 이끄는 사람 없었고 오직 비난과 증오뿐이었습니다. 인간이란 것이 이렇구나. 그는 자기와 모두에 대해 실망했니다.
3. 그는 율법에서도 실망했습니다.
27절에 “레위라 하는 세리”라 했는데, 막2:14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였습니다. “레위”라는 이름은 제사장 지파의 명칭이기 때문에 아무나 붙이는 이름이 아닙니다. 그 이름만 봐도 그의 아버지 알패오가 레위를 안고 장차 제사장이 되어 성전에서 봉사하기를 서원할 만큼 얼마나 열망했을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되려면 30세까지는 율법과 여러 학문은 물론, 치열한 경건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마태복음을 쓴 것을 보면 성경에 통달한 사람입니다. 성경 보기도 어려운 시대에 그 정도 실력이라면 보통 스승 밑에서 공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레위로서 가장 거룩해야 할 사람이었지만 당시 가장 죄인 취급 받는 세리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실망입니다. 율법을 아무리 공부해도 그 율법이 자기를 변화시키거나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세관에 앉아 사람의 피를 빨고 있어도 구원해 주지 못했습니다.
바울 이전의 사울과 같은 사람입니다. 빌3:5-6에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런 레위가 세리가 되었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깊은 실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자기를 구원해 줄줄 알았는데 도리어 넘어지게 만들고 정죄하고 저주와 심판 아래 두고 더욱 죄인 만드는 것임을 체험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율법만큼은 그럴 줄 몰랐는데 율법까지 그렇더란 말입니다. 율법에 대한 실망감, 그러나 레위가 제대로 체험한 것입니다.
롬3:19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한 것처럼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만 알려주지 율법으로는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도 복음을 알기 전 율법 아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8:24) 몸부림쳤습니다. 마태도 실망했습니다. 율법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영적인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하고 평생을 허비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걸 깨달았다는 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것도 해보았다. 저것도 해보았다. 다 해봤다. 다 헛된 것이다. 그래도 난 세상에 태어났으니 이를 어쩐담' 완전한 절망~ 이걸 깨달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깨달았다 해도 구원자 예수 앞에 나오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눅5:31-32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신 말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지옥의 문턱까지 갔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레위가 구세주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나자 죄가 사라졌습니다. 그토록 떠나지 못하던 죄인 세리의 자리를 훌쩍 떠날 수 있었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고 천국이 믿어졌습니다. 다 가짜였지만 주님은 진짜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주님을 따르고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소망을 찾는다면 속히 실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오직 예수, 오직 은혜,,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엡2:8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마태와 같이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 받아 새사람 되어 온전한 감격 속에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