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이렇게 기도하라 2/ 마태복음 6:9-13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WKriyKKiWdw
여러분이 기도해주셔서 네팔 선교 잘 다녀왔습니다. 네팔에 가서 보니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감사가 저절로 나오더군요.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기도문의 일부를 살펴봤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초월자이시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주기도는 두 대상을 위한 기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한 기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기도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 아버지여’, ‘오늘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우리를 시험에’ 이렇게 주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기도하는 사람도 들어가기 때문에 주기도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개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신앙공동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성경의 원리는 내가 공동체이고 공동체가 나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신자는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지체는 몸에 붙어있어야 사는 것입니다. 지체와 몸은 하나입니다. 절대로 흩어질 수 없습니다. 손은 몸에 붙어 있어야 살고,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손이 몸에서 떨어지면 손은 제 기능을 못하는 것만 아니라 곧 죽게 됩니다. 반면에 몸은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큰 타격을 입습니다. 신생활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떨어지면 교회는 타격을 입지만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지체는 지체로써의 기능을 못하게 되고 결국은 영적인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신앙생활을 독립적으로 나홀로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니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나안 신자’라는 합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해서 ‘안나가’ 신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교회는 안 나갑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서 가나안 신자가 된 사람들도 있고, 교회 공동체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가나안 신자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가나안 신자가 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코로나가 끝났는데도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가나안 신자는 천국에 못가!”라고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가나안신자의 믿음은 점점 약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주님을 떠나고 사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건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의 인격을 가지고 존재하시지만 하나이십니다.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거하십니다. 완전한 하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에 우리를 포함시키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1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예수님은 완전하게 하나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완전한 하나 됨에 우리도 들어오기를 원하셔서 아버지께 기도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신앙공동체, 교회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자 이제, 주기도 가운데 우리를 위한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5.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를 하라(11절).
11절을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기도는 의식주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나의 의식주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고통당하는 형제자매의 필요를 위한 기도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생각합니다. 먼저는 주님이 ‘우리에게’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산상수훈에서 주님이 의식주에 관하여 말씀하신 부분과 상치되기 때문입니다. 마 6:31-32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주님은 의식주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그런 것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의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를 놓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공급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훈목사님이 시골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임신 8개월 된 사모님과 금식을 결정했습니다. 그날은 함박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사실은 쌀이 떨어져서 그날 저녁부터 금식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곳은 깊은 시골 교회여서 주변에 쌀가게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 굼식이었습니다. 뱃속의 아이와 사모님을 굶주리게 하는 가장의 심정은 무척 쓰라렸습니다. 혹한의 밤 11시,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문 앞에 쌀 한 말과 땔나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놓고 앉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잔에 넘치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밥상 앞에서 서로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두 분은 지금도 누가 쌀과 땔감을 놓고 갔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두 분의 필요를 아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감동시키셔서 두 분의 필요를 채우신 것입니다.
사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이 기도는 영적인 양식을 위한 기도입니다. 마 4:4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사람의 육신은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듯이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떡으로 살지만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육신의 양식을 균형 있게 잘 먹으면 건강합니다. 그래서 밥이 보약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도 균형 잡힌 식사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이 강건한 삶을 삽니다. 육신의 양식을 편식하는 사람은 건강을 잃을 수 있습니다. 오직 고기만 먹는 사람들이 있고 오직 채소만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양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는 신앙은 병든 신앙입니다.
먹지 않으면 육신이 약해집니다. 영적인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혼도 약해지고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당연한 것입니다. 병들면 생활의 질이 떨어집니다. 어떤 이가 심한 중풍병에 걸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의 마음이 즐거울 리가 없죠. 사는 게 괴롭죠. 경제적인 문제도 발생하죠.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하죠. 대소변을 누군가가 받아줘야 하니 자존감도 떨어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이 병들면 신앙생활의 질이 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고, 교회생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예배도 문제가 되고, 성도의 교제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사역에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욥 23:12입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여기서 정한 음식이라는 말은 규칙적인 음식을 말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루 세 끼를 먹었습니다. 요즘은 다이어트 때문에 하루 두 끼만 먹는 이들도 많습니다. 네팔 사람들도 하루 두 끼만 먹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루에 몇 끼 먹든지 규칙적으로 먹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 먹지 않으면 허기를 느끼고 힘들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 끼만 굶으면 난리가 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욥과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인 식사처럼 해야 합니다. 밥심으로 사는 사람은 끼니때가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밥을 찾아 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배고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복입니다.
기도 응답을 누리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잠 28:9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돌리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보실 때 가증합니다. 그런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대화로 생각해봅시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합니다. 한 사람이 상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가 말할 때 상대도 듣지 않습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이나 설교나 성령의 음성으로 말씀하시고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이 기도할 때 응답을 잘 받습니다. 일용한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영의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6.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라(12절).
12절을 읽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위한 기도 두 번째는 죄사함을 위한 기도입니다.
사람에게 죄사함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이 영생의 조건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요 천국 들어가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죄 사함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죄사함이 전제 되어야만 기도 응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 59:1-2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원인은 그들의 죄가 하나님과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고, 그들의 죄가 기도 응답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죄 사함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 사함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 5:8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육안으로 본다는 말이 아니라 영안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말입니다. 영안으로 하나님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실재하심을 압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때 그 얼굴에서 나오는 은혜의 빛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죄사함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몇 가지를 요구하셨습니다.
①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요일 1:9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라지게 하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한 아이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 다음에 그 죄를 어디에 갖다 둬요?”, “얘야, 어제 네가 칠판에 그림을 그렸지?”, “예.”, “그 그림이 어디에 있니?”, “지우개로 닦았어요.”, “지우개로 닦은 다음에 그림을 어디에 두었니?”, “엄마, 칠판에 그린 그림을 지우개로 닦으면 없어지잖아요.”, “그래, 우리의 죄도 하나님께서 사하시면 없어진단다.” 맞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우리 죄는 없어집니다. 사람은 때때로 죄를 짓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때때로 실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우리의 죄가 사라지게 하십니다.
②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죄 사함 받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리고는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답니다. 그 말은 “천국은 이러이러한 자가 들어간다.”, “천국은 이러이러한 자가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임금님이 1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불렀습니다. 1만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예수님 당시 보통 한 지방의 전체 예산보다도 큰 금액입니다. 그 당시 이두메와 유대 그리고 사마리아를 포함한 전체 지방의 수익이 단지 600달란트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1만 달란트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부채였습니다. 임금님은 그와 가족들과 그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했습니다. 그는 임금님에게 엎드렸습니다.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임금님은 그를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임금님의 탕감을 받고 밖으로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백 데나리온이면 약 2천만 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자기가 임금님에게 탕감 받은 금액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그런데 그는 빚진 동료가 빚을 갚지 못하자 그 동료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의 동료들이 그 사실을 임금님에게 알렸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금님은 노했습니다. 그래서 그 1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불렀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는데,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임금님은 그가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주님은 마 18:35에서 이 비유를 정리하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는 상처가 깊으면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실 용서는 그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7.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라(13절)
13절을 보겠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을 말합니다. 그리고 악에서 구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의 기도는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고 박영문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독한 술꾼이었습니다. 그는 15살 때부터 술을 마셨는데 술을 안 마시고는 하룻밤도 자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는 처가 식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처갓집 일곱 식구를 다 칼로 찔러 죽이고 휘발유로 불태워 버리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머님께 인사드리려고 찾아갔습니다. 그는 잠이 안 와서 앉아 있는데 깊은 밤중에 창문이 환하게 비치더니만 황금수레가 방안에 나타났습니다. 아름답고 건장하게 생긴 천사 둘이 올라타라고 하더랍니다. 그는 황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천국과 지옥을 봤습니다. 그는 수많은 향기가 나는 꽃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들어가 살 찬란한 집들도 봤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 잘 믿으셨던 작은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작은 아버지는 찬란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도 만났습니다. 아버지는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괴롭혔는데 지옥에서 형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구렁이에 칭칭 감겨 끊임없이 고통당하더랍니다. 그가 천국과 지옥을 돌아 본 후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술이 너무나 먹고 싶더랍니다. 그래서 술집에 들어갔더니 무시무시한 구렁이들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칭칭 감고 꿈틀거리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는 술집에서 뛰쳐나왔습니다. 그 이후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박영문 목사님의 눈을 열어서 영적인 세계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가 보니 사람들은 영적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영적전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전쟁을 하지 않고 마귀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의 대상은 마귀와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우리를 악 속에 붙들어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마 26:41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시험을 이기고 싶지만 육신은 시험을 이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시험을 이기고 악에서 나올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8.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기도를 하라(13절)
13절의 일부를 보겠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기도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많은 기도를 할 수 있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권자라는 고백입니다.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느 날, 브란덴부르크 지방의 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때마침 지리시간이었습니다. 왕은 한 아이를 보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프러시아입니다.”, “프러시아가 어디에 있지?”, “독일에 있습니다.”, “독일은 어디에 있지?”, “유럽에 있습니다.”, “그럼 유럽은 어디에 있지?”, “이 세상에 있습니다.”, “이 세상은 어디에 있지?” 그러자 아이는 잠깐 생각하고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현명한 대답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말은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합니다. 사람의 선택과 유기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개인의 생사화복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국가의 흥망성쇠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 17:26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하나님은 인류의 연대를 정하셨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몇 살을 살고 몇 살에 죽느냐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사느냐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알았습니다. 삼상 2:6-7입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한나의 이 기도는 주기도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과 같은 내용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고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해 있습니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주일 예배를 통해서 “이렇게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주기도를 나누었습니다. 주기도에서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 초월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라.
2.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라.
3.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기도하라.
4.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라.
5.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를 하라.
6.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라.
7.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8.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기도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