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계리610 관수정
관수정이라는 호를 갖는 송흠이 중종 34년에 건립했다.
건물 구조는 1고주 5량가로 정면 3칸, 측면 1칸에 전퇴인 골기와의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를 돌렸다.
송흠은 연산군 때 퇴직하여 후진교육에 전심했고 중종반정 후에는 복직하여
내외의 여러 요직을 지냈다.
담양부사, 전주부사, 광주·나주목사, 전라도관찰사 등 이 지방에서 외직을 하면서
101세를 산 노모를 봉양하였다.
효행으로 상을 받았고,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신평송씨 세장비 & 지지당 송흠 선생 신도비.
신평송씨 세장비.
지지당 송흠 선생 신도비.
정자 앞에는 담장의 한쪽을 할애하여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신평 송씨 세장비(新平 宋氏 世葬碑)"와, "지지당 송흠 신도비명(知止堂宋欽神道碑銘)"이 있어,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한 사람의 무덤 남동쪽의 큰 길가에
세운 묘소 안내 석비(石碑)로 거기에는 행적 등이 적혀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던 윤증(尹拯,1629-1711)이 쓰고,
시장(諡狀: 시호를 내려주라고 청하는 글)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제학 박태상(朴泰尙,1636-1696)이 지었다.
관수정(觀水亭)
관수정(觀水亭) 안내문.
관수정(觀水亭)으로 들어가는 사주문(四柱門)
사주문(四柱門) = 건물에서 기둥이 4개인 문.
담장이 토담이나 토석담이 아닌 적벽돌의 담장으로 둘렀다.
관수정(觀水亭)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전퇴인 골기와의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를 돌렸으며,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깔고 왼쪽 1칸은 온돌방을 두었는데 방의 3면은 들어 올릴 수 있는
열개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개방적인 면이 보이고,
좌우 옆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리고 뒷면은 벽으로 처리하였다.
관수정(觀水亭) 현판.
관수정(觀水亭)이라 함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에 의한 것이다.
정자의 내부에는 당시대 친우인
홍언필, 전안국, 성세창, 신광헌, 김인후, 임억령 등의 제영(題詠)이 다수 있다.
사도의 등불, 관수정기, 지지당 가훈.
吏道의 등불 (청백리 지지당 송흠)
관수정기(觀水亭記)(전남문화재 제100호)
지지당 가훈(87세 작) 87세 때 지은 지지당 가훈.
관수정(觀水亭)
은행나무.
관수정 앞마당을 지키는 은행나무가 겨울이라서 나목이 되었다.
관수정 앞마당에 배롱나무(백일홍)
관수정(觀水亭) 안쪽에는 재사(齋舍) 또는 관리사로 보이는 요산재(樂山齋)가 있고
요산재 뒷편으로 장성 입향조인 송귀(宋龜)의 재사(齋舍)인 분소재가 있다.
요산재(樂山齋)
관수정(觀水亭) 안쪽에는 재사(齋舍) 또는 관리사로 보이는 요산재(樂山齋)
요산재(樂山齋) 현판.
분소재(粉簫齋)
신평송씨 장성 입향조 '병조참판공위귀(兵曹參判公謂龜)"의 재사(齋舍), 분소재(粉簫齋)
분소재 이건기(粉簫齋 移建記)
분소재(粉簫齋)
장성 입향조인 송귀의 재사(齋舍)인 분소재.
분소재(粉簫齋) 현판.
관수정 기영정 중수기.
위선사업공명록(爲先事業功銘錄)
헌성록(獻誠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