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42
12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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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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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BxoQeuGm-w (김일현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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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의 표현, 족보!>
살아생전 제 선친께서 마치 보물단지 모시듯 애지중지하시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족보책이었습니다. 총 두 권이었는데, 엄청 두꺼웠습니다. 족보는 언제나 황금빛 보자기에 고이 싸여 장롱 속 제일 안전한 곳에 보관하셨습니다.
연이은 사업의 실패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다닐 때 마다 선친께서는 다른 것은 다 처분하셨지만, 족보만큼은 제일 먼저 챙기셨습니다.
명절 때마다 제사가 끝난 다음 선친께서는 저희를 앉혀놓은 다음, 족보를 꺼내 드시고 일장훈시를 하셨습니다. 우리 남원 양씨가 얼마나 대단한 성씨인지, 우리 가문에서 얼마나 많은 위인들을 배출했는지, 그러니 가문에 먹칠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된다는...
하루는 선친께서 하도 강조하셔서 족보 첫 장부터 쭉 넘겨본 적이 있습니다. 족보 안에는 시조가 되는 분부터 시작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조상들의 이름이 빼곡이 적혀 있었습니다. 과거 시험에 합격해 높은 공직에 오른 사람들은 따로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족보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존중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 사가 역시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예수님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상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그저 낯설고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들만 쭉 나열되어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자신의 복음서 제일 첫머리에 소개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의도로 그랬을까,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의 족보상에 등장하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은 곧 이스라엘의 산 역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 축복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흥망성쇠, 기쁨과 희망, 고통과 상처의 흔적이 곧 예수님의 족보인 것입니다.
물론 족보 안에는 감추고 싶은 이스라엘의 흑역사, 오점을 남긴 이름들도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기 위해 우리 인간 세상 안으로 온전히 들어오신 것입니다. 완벽하게 인간 세상 속으로 육화강생하신 것입니다.
그냥 편하게 고상하게 계셔도 아무 문제 없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굳이 사람이 되셔서, 때로 구질구질하고, 때로 상처투성이, 오물투성이인 인간 세상 안으로 완벽히 진입하셨다는 표현이 예수님의 족보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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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성의 세 단계>
저는 사제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단 한 번도 후회하거나 그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늦게 결심해서 들어온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학교 동기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만약 형이 하느님께 가면 하느님은 잘 살았다고 칭찬해 줄 거야. 그러나 누구와 함께 왔느냐고 물으면 뭐라 할 거야? 동료들이 옆에서 쓰러져가고 있는데 혼자만 왔느냐고 하면 뭐라 대답할거야? 쓰러지는 친구들과 함께 쓰러지며 같이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쓰러지는 사람과 함께 쓰러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고민하는 친구와 함께 고민해 줄 수는 있지만 함께 쓰러지는 것이 사랑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내가 굳건히 서 있어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일으켜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병든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병을 더 잘 알기 위해 자신도 병이 드는 의사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해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혼자만 잘 산다.’는 말을 여러 번 듣다 보니 스스로도 내 자신이 좀 냉혈인간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고 혼자만 열심히 살려고 하는 가슴이 차가운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신학교 3학년 마치고 유학 나올 때 여러 친구들이 눈물을 흘려주었지만 저는 눈시울을 적신 적이 없습니다. 함께 부둥켜안고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슬픈 영화 볼 때는 많이 울면서도 정작 눈물이 나와야 할 때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가슴으로 지나치게 머리만 쓰며 산다는 느낌을 항상 받습니다. 그러나 다시 감정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가슴이 뜨거운 것인지 착각할 수도 있는데 가슴으로 사는 것이 겉보기에는 감정적으로 사는 것과 비슷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은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영성도 이 구조를 따릅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사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감정은 호수의 표면처럼 변화무쌍합니다. 좋았다가 슬펐다가를 반복합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은 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물의 표면과는 다르게 영혼의 단계에 이른 이들은 육체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이성으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성은 육체의 감정을 조정하여 평정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평화는 아닙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이 단계가 바로 하느님의 영을 따라서 사는 단계입니다. 성인들이 이 단계에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도 다시 감정의 기복이 심해집니다.
예수님도 라자로의 죽음을 보면서 또 예루살렘을 보면서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또 어떤 때는 유다인들을 심하게 질책하시고, 어떤 때는 성전을 뒤집어엎으며 분노를 폭발하고 폭력까지도 쓰십니다. 이 감정의 변화는 육체의 감정이 아니라 마음의 감정입니다.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룩한 분노이고 거룩한 질책이고 거룩한 눈물입니다. 그러나 육체에서 나오는 감정은 모두 이기심에서 나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의 심장은 썩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하트 모양으로 유리 상자 안에 넣어져 있는데 자세히 보면 한 부분이 불에 그슬린 자국이 있습니다. 바로 천사의 불화살로 맞은 자리입니다.
천사가 사랑의 불화살로 데레사 성녀를 찌른 이후에 그 심장은 항상 사랑에 불탔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불타는 심장을 가지면 원수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예수님의 족보를 총망라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자신과 같은 유다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고집으로 메시아를 믿지 않으려 했고 마태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인 메시아임을 증명하려 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길게 나열한 예수님의 족보를 읽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신의 고집쟁이 민족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마태오의 따듯한 가슴과 눈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정적인 사도들을 이성적으로 만들고 또 영적으로 만들기 위해 교육을 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심장을 갖는 날까지 (물론 그 이후까지도) 끊임없이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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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부터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가 아닌,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깨어 있음’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회개’를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니 ‘기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오셨음을 오늘부터 전례는 말씀을 통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렇습니다. 나침판은 언제나 같은 방향을 알려주듯이, 예언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로 오실 것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명했던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품어 주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들 역시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예언자는 위선과 가식을 버려야 합니다. 예언자는 허위와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위선과 가식을 가지고 있다면, 허위와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불의와 거짓에 맞서야 합니다. 예언자는 탐욕과 욕망에 맞서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을 일삼는다면, 탐욕과 욕망에 젖어있다면 거짓 예언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해야 합니다. 예언자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예언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우리는 동정 성모님의 ‘순명’을 배워야 합니다. 순명의 반대말은 불순명일 수도 있지만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사람은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원죄는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교만은 죄를 잉태하였지만, 동정 성모님의 순명은 구세주를 잉태하였습니다. 법대로 살았던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순명’의 삶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넷째 왕의 전설’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원래 4명이었다고 합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굶주린 이들에게 가져간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져간 보물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헐벗은 이들에게 입을 것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4번째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보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4번째 동방박사는 시간이 흘러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4번째 동방박사는 어쩌면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와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4번째 동방박사도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이미 와 계신 구세주를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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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도록 한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으로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며, 육에 따라 인간의 가계에 속한 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셨다. 마태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인간이 되셨음을 밝히고 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탄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서 훌륭한 선조였다. 주님께서는 할례로 유대 민족의 선조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6절)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다윗은 손이 뛰어난 또는 사랑받는 의미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이셨다. 다윗은 전투에서 뛰어났고 힘이 넘쳤으며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행동으로, 자비로, 온화함으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마리아는 요셉과의 육체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낳으셨지만, 요셉을 마리아와 혼인과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신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동정녀로서 아기를 낳는다는 이유로 마리아와의 혼인 관계를 파기하지 않았다. 또한,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이다. 아들을 입양했어도, 자신의 아내가 낳은 아들은 아니라도 당연히 그 아이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14대라는 말을 3번 하는데 여기에도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씩 나눈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족보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역사를 자세히 이끌어 가시며, 그 역사의 절정에, 즉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 가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 족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는 대림시기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 족보에 나타나는 의미에서와 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삶으로 많은 은총 속에 사는 때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겪는 때도 있다. 따라서 항상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맞이하러 나아가는 삶이 되도록 이 시기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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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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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는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셉은 예수님을 낳았다.” 대신에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15절까지 줄곧 사용한 능동태 문장이 아니라 수동태 문장이 사용된 이유는 단순히 다윗 가문의 계보를 나열하는 문학적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16절의 수동태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의 탄생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태 1,18.20 참조). 또한 이러한 문학적 형식의 파괴는 예수님의 족보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1,18-25)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줍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윗 가문 출신이시지만 성령의 힘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먼저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바라봄’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 둘째 부분을 시작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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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마태오 복음 맨 처음에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유다 혈통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계신 분임을 당대 유다인들에게 알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혈통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만일 어떤 사람에게 타민족의 피가 섞였다면 그는 유다인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상실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14대씩 3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1부는 영광의 시기로서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부터 이스라엘을 대국으로 만든 다윗 왕까지입니다. 2부는 다윗 이후부터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간 시기인데, 비극과 수치의 시기라 하겠습니다. 3부는 바빌론 포로 시기 이후부터 예수님까지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해방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족보에는 의외의 인물들, 곧 명예스럽지 못한 여인인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가 등장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장벽을 헐어 버린다는 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유다인과 이방인의 담이 무너지는 것이고,
둘째는 남녀 차별이 없어지는 것이고, 셋째는 선인과 죄인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인이건 악인이건, 유다인이건 이방인이건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회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차별과 편견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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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헌철 펠릭스 신부님]
<임마누엘>
오늘 우리는 마태오 복음이 전해주는 예수님의 족보를 복음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복음이란 원래 그리스말로 소식을 전하는 우편 배달원에게 주는 사례금을 뜻했습니다. 좋은 소식이면 사례금도 더 두둑했겠지요.
그러나 뒤에 가서 전령이 가져온 기쁜 소식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마음 조리며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전령이 가져다주는 승전보는 그야말로 큰 기쁨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전해지는 복음 또한 그러한 기다림 속에서 주어지는 큰 기쁨의 소식으로 자리잡아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기, 대림시기에 복음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마태오 복음은 첫번째 복음서는 아니지만 신약성서 맨 앞에 배치되어 있는 이유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되리라고 구약성서가 예고한 약속의 전언을 선포하는 데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설명할 때 이사야 예언서 7장 14절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끊임없이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예수님의 마지막 커다란 약속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말로써 복음을 마무리 합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조들의 이름이 나열된 족보. 별 의미없이 듣다보면 왜 복음서 맨 앞에 선조들의 이름만 나열해 놓았을까? 읽기도 힘들고 의미도 모르겠고 하는 생각도 가져볼 만 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족보의 가치를 잊고 살아가지만 옛 어른들은 족보를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족보는 단지 조상들의 이름만을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있게 한 뿌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며, 그 뿌리를 통해 나 혼자만이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면면히 이어오는 역사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이 존재함을 깨닫게 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신앙인의 뿌리이며, 역사안에서 이어져 오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밝혀주고,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치있는 ‘복음’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의 족보를 열거한 목적은 그분의 계보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기는데 있다기보다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고백하고 증언하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증언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다 민족의 시조(始祖)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 또한 오직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살아가신 분입니다.
다윗은 역대 이스라엘 왕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분으로 공동번역 사무엘 하권 23장 1절에서는 다윗을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자요, 이스라엘 수호자가 귀여워하시는 자, 가장 높으신 분이 세우신 영웅”이라 칭송합니다.
예수님 또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려고 기름을 부어 세상에 보내신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은 아브라함 보다 더 큰 믿음을 지니신 분으로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는 분이며 다윗왕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분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족보가 다윗왕을 거쳐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오듯 하느님께서 유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안에 언제나 함께 하셨으며,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이제 구세주 예수님의 성탄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심은 끊임없이 인간들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기쁜 소식이 다시 한번 전해지는 것입니다.
기다림 끝에 오는 이 기쁜 소식을 더 큰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셨듯이 추운 겨울에 우리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어떤 봉헌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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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왕의 족보, 종의 족보>
‘우리 아버지는 땅이 얼마였고, 우리 할아버지는 양반이었고…’ 하는 것이 자랑처럼 내세워지는 것을 보면, 훌륭한 핏줄의 후손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에게나 있는가 봅니다.
어쩌면 그렇게 자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한 마디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 땅을 얻지는 않았는지, 그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행여나 친일행각을 하지는 않았는지….’ 자랑할 것은 부유함이나 신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았지만 정직하였고, 떵떵거리면서 목에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산 것이 훨씬 자랑스럽습니다.
몇 년 전 프랑스에서는 조상 대대로 망나니로 살아왔던 사람들의 후손이 떳떳하게 조상들의 족보를 세상에 알려 화제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나치정권에 동조한 사람을 나무랄지언정 누구 하나 그 역사를 손가락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조상의 역사가 현재의 나를 온전히 대변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년에’를 내세우는 정치인들 중에, ‘운동권’ 아니었던 사람이 적지 않지만, ‘왕년에 그랬던 사람이 요즘은 왜 그 모양이냐’며 되려 면박을 당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다윗왕의 후손이라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종살이하던 때의 후손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아들’이 분명 ‘사람의 아들’로 오셨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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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름을 부르다>
마태오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이름을 부르다>
너를
내 안에서
살리기 위하여
내가
네 이름을
정성껏 부르니
나를
네 안에서
살리기 위하여
네가
내 이름을
정성껏 부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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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에 있는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나 봅니다. 그리고는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다말, 창녀로서 적군과 내통한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의 자식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갔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인인 체 하는 죄인에게 용서와 자비가 함께합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려 인간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내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회개한 죄인으로 기록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 4,18)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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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무슨 짓을 해도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실험실의 개는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에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전기 충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상자로 옮겨줘도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웅크린 채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개만 그럴까요?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무기력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힘들어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습니다. 즉, 인간 역시 피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부정적 상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어떤 시도나 노력도 결과를 바꿀 수 없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학습된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을 미국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이 주장했습니다. 셀리그만은 학습된 무기력 개념을 통해 지금의 무기력한 상황을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그는 전문직의 사람부터 평범한 일반 사람까지 많은 사람을 상담하면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무기력에 빠져서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살펴보면 충분히 그 시간을 피하려 하는 나의 변화가 필요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도 커다란 목표가 아닌 지금 당장 자신이 시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무기력의 굴레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보면, 계속 안 좋은 상황의 연속이었습니다. 주변 국가 중 가장 힘이 없어 강대국으로부터 점령당하고, 유배 가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끝일까요? 이스라엘은 힘없고 고통과 시련의 삶만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손길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으로 무기력의 상황에 부닥쳐질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을 보려 하고 함께했던 이스라엘의 조상 덕분에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고, 이제 드디어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원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면서 포기하고 좌절하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는 상황이란 없습니다. 내가 바뀌려고 노력하고, 또 내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때 자기에게 주어지는 삶은 주님과 함께하는 구원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무기력의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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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성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성을>
잘 아시다시피 대림 시기는 둘로 나뉩니다. 17일 이전의 대림 제1시기와 이후의 대림 제2시기입니다.
그리고 성탄절 1주일을 앞둔 17일부터는 주님께서 오실 것을 준비한 사람들을, 멀리서부터 가까운 사람까지 얘기하는데 그 첫날인 오늘은 족보상의 인물들을 열거하며 멀리서부터 준비한 사람들을 전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오늘 전례의 의미를 전합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의 태중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러니까 오늘 복음과 본기도를 엮으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의 족보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우리 인간도 그분의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족보를 보면서 든 느낌은 족보의 인물들이 대부분 추하고 더럽다는, 그래서 주님께서 족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마치 똥물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뿐 아니라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그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악취가 풀풀 나는 더러운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똥물 속으로 들어오신 거지요.
그런데 누가 똥물에 들어간다면 왜 들어가겠습니까? 사랑 아닌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아니라면 똥물에 들어갈 사람도 없고 이유도 없겠지요.
그리고 똥물에 보석이 있을 때 들어가겠지요. 그 보석을 건지러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을 보석같이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어 우리 인간을 건지러 이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인데, 이것은 마치 사창가에 팔린 딸을 찾으러 사창가에 들어가고, 조직 폭력배에 끌려간 아들을 찾으러 조폭들 가운데 들어가는 부모 같습니다.
부모에게 자녀는 아무리 더럽혀졌어도 소중하고,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자기가 깨끗하게 할 책임이 있듯이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도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해야 할 책임, 당신의 창조를 회복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창조의 회복이고, 그러니까 본래 보물인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 때의 그 고귀함으로 되돌리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구하러 오신 주님의 손길을 우리는 뿌리치지만 않으면 됩니다. 뿌리치지 않고 마주 잡기만 하면 우리는 구출되고 인성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신성이 회복됩니다.
오늘 본기도의 기도처럼 인성을 받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성에 참여하려는 갈망을 가지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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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하느님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영원한 순례자’이시다 -
오늘 12월17일(토)은 주님 성탄에 앞서 저녁 성무일도시, 또 복음 환호송을 통해 장엄한 후렴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예수님 탄생이 점차 가까워짐을 실감합니다.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다스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탄생 하실 지혜 자체이신 주님께 슬기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애절한 소망이 담긴 감동적 노래입니다. 저는 이미 8년전 산티아고 순례여정을 통해 이미 슬기의 길을 배웠습니다. 매일 강론을 쓴 후 4:00-4:30 까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위나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수도원 배밭을 돌아 정문에까지 걸어갔다 옵니다. 그대로 산티아고 순례 여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 살아있는 날까지 계속될 순례여정입니다.
늘 강조합니다만 다시 각자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요약하면 오후 몇시쯤,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요약하면 또 어느 계절 어느 시점時點에 있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저는 늘 말씀드리다시피 오후 4시, 초겨울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점검이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환상이 걷힌 투명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어제 모처럼 내려 쌓인 흰눈길을 걸을 때 생각난 23년전 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란 자작시가 생각났습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 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 님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 눈 내리 하얀 길
마냥 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1999.2.28.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긴 족보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완성된 족보라기 보다는 영원히 현재진행형의 족보라 생각됩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역시 예수님 족보에 편입되기 때문이며 인류가, 교회가 지속하는 동안 계속될 예수님의 살아 있는 족보입니다.
흡사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은 “영원한 순례자”처럼 생각됩니다. 족보에 나오는 하나하나 사람마다 늘 함께 하시며 지금까지 순례 여정 중의 영원한 순례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긴 족보가 굽이굽이 이어진 하느님의 발자취처럼 느껴집니다.
구원자 예수님 탄생하기 까지 얼마나 긴 인내의 기다림이 요구되었겠는지요!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부단한 사랑의 인내, 사랑의 겸손의 하느님이십니다. 족보에 나오는 면면은 얼마나 다양한지요. 약속을 신실히 지키시는 하느님의 한결같은 모습도 감동입니다. 누구하나 배제시키거나 소외시킴이 없이 잘났는 못났든 믿음 하나만 있다면 당신 구원 역사의 일꾼으로 활용하십니다.
참으로 하느님 믿음이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된 족보같습니다. 이런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이 하나하나의 존재이유와 존재의미를 밝힙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하나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도구라는 것, 바로 이게 한사람 한사람의 존재의미가 되며, 바로 우리도 여기에 속합니다. 바로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하느님 믿음의 끈으로 연결된 족보를 볼 때마다 저는 하나의 끈에 연결된 묵주알을 연상합니다. 묵주끈에 하나로 연결되었을 때 뚜렷한 존재의미이지 만약 떨어져 나가 이리저리 뒹구는 고립단절의 혼자의 묵주알 같은 존재라면 완전히 존재의미의 상실이며 곧 이름없는 무명의 존재가 되어 사라질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홀로 단절된 외롭고 쓸쓸하게 살다가 죽는 고독사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예수님의 족보에 하나로 연결되어있기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귀한 구원 섭리의 도구가 됩니다.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이미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야곱의 축복을 통해 예언된 대로 유다의 구원 섭리중 역할이 참 대단합니다.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웅크려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탄생하실 예수님을 통해 유다에게 준 야곱의 축복은 실현될 것입니다. 참으로 신실하신 하느님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하지만 다윗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며, 아브라함 역시 결점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들의 하느님 사랑과 믿음은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족보에 나오는 네 여인의 기구한 운명도 깊은 충격을 줍니다. 다말, 라합, 룻, 다윗의 아내이자 솔로몬의 어머니 바세바, 다 이방인들이었고 네 여인들 참 기구하고 불행한 여인들이었지만 눈밝은 하느님은 이들을 당신 구원의 도구로 활용하십니다. 사람 눈에는 불가사의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입니다.
누구도 차별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고 적재적소에 위치시켜 그 몫과 역할을 다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진실하고 한결같은 믿음과 책임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마리아를 통한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에서 족보는 절정을 이룹니다. 여기서 하느님 구원 섭리에 결정적 도움 역할을 한 분이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다.”
마침내 하느님의 소원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하느님의 무한한 기다림의 인내의 사랑이 참 놀랍습니다. 새삼 구원의 길에는 요령이나 비약이나 도약은 불가함을 봅니다. 하나하나의 과정에 충실하며 서두르지 않고 사람 눈높이에 맞춰 끝까지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려온 하느님의 사랑이 영원한 감동입니다.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일을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응답의 협조가 절대적입니다. 불림받은 이들이 각자의 제자리에서 믿음으로 응답했기에 마침내 구원자 예수님 탄생이 가능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 교회를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됨을 믿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교회 공동체내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역할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 저 달이 다할 그날까지,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디스리게 하소서.“(시편72,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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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1,1)
<인성을 지니신 하느님!>
오늘 복음(마태1,1-17)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인성이 계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는 대림시기를 보내고 있는데, 어느덧 그 시기도 성탄 밤미사까지 8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두 기다림'인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과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전례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성탄'에 초점이 맞추어집니다.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시기의 그 첫 날인 '오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이 족보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지니신 분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신 분이시고, 만들어진 어떤 신화적 존재가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탄은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는 엄청난 사건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지는 '큰 은총'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사람)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성탄을 큰 감사의 마음으로 잘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준비는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것, 그래서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평생 동정녀 태중에서 말씀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인성을 받아들이신 외아드님을 통하여 저희도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본기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육(사람)이 되어 오시는 그리스도의 성탄이 나에게 큰 기쁨이 될 수 있도록, 말과 행동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함께 참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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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RM1U8C2Z_-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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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 1)
우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는 하느님
탄생의 역사입니다.
모든 역사는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시듯
모든 역사를
우리들에게
개방하십니다.
믿음의 역사는
실수와 허점까지도
감사하게 하는
은총의 역사입니다.
새로운 역사의
창조는 어두울수록
빛을 발하는
빛의 탄생과도
같습니다.
빛은 우리
신앙의 발자취를
모두 비추어 줍니다.
충실과 불충실
부끄러움과 회개
죄와 구원을
우리 역사 안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새로운 삶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지 않습니다
기억하며 새롭게
교훈을 찾습니다.
구원과 완성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며
하느님의
뜻이십니다.
하느님의 뜻
구원의 절정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탄생입니다.
하느님의 탄생은
믿음의 탄생이기도
합니다.
거룩함과 완전함은
하느님 탄생의 역사를
받아들이듯 우리 역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조건과
신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열려져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적은
모든 시간의
구원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무엇보다도
우리 역사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내시는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저마다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시는
하느님 탄생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섭리(攝理)와
선물(膳物) 사이에
역사가 있고
탄생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느님 탄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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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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